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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이청준 소설 길오매! 문학의 향기가 갯내보다 징하요~
입력 : 2015-09-02 [19:05:45] | 수정 : 2015-09-03 [10:56:27] | 게재 : 2015-09-03 (27면)
▲ 이청준 소설 '축제'가 임권택 영화로 만들어질 때 촬영 장소가 된 전남 장흥군 용산면 남포마을 앞 소등섬. 섬과 육지를 잇는 콘크리트 길은 밀물과 함께 금세 사라져 섬 구경에 나선 사람들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급히 돌아와야 했다. |
이청준 생가. |
사촌리 갯벌. |
한승원 작가의 작업실 '해산토굴'. |
전남 장흥군을 관통하는 탐진강은 영산강·섬진강과 함께 전남 3대 강으로 불리지만 사실 길지는 않다. 약 55㎞의 길이로, 영산강(115.5㎞)·섬진강(212.3㎞)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그러나 강의 실제 길이와 무관하게 강이 품은 인간의 역사는 길고, 넓다. 효(孝)이거나, 의로움이거나, 풍류이거나, 각기 다른 이유로 세운 정자 10곳 내외가 탐진강변을 따라 이어진다. 그 정자들은 전남 담양군에 못잖은 정자문화를 형성하고, 나아가 장흥이 내세운 '문림의향(文林義鄕)'의 토대가 된다.
사연은 서로 다르지만 장흥 정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낮다. 높은 언덕을 탐하지 않고 강과 함께 낮아진 곳을 택한다. 둘째로 나무와 강과 바위를 안마당에 품었으되, 그 품은 것들 안에 다시 자신을 안겨 품고 품음이 서로 엇물린다. 그래서 '밖'에선 보이지 않는 장흥 정자들은 가까이 다가서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찾는 이가 드문 정자들엔 모두 세월의 더께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오래 찾지 않은 집 냄새를 배경으로, 벌과 거미줄과 질긴 잡초들이 정자의 주인이 됐다. 강변이라 세워졌으되, 정작 강을 잃은 정자도 있다. 여름, 서늘한 그늘 찾아 떠난 정자 기행은 정적 속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시간 여행을 겸한다.
◆풍류의 정자, 동백정(冬柏亭)
시작은 탐진강 상류에 자리 잡은 동백정(장동면 만년리 707)이다. 본래 동백이 울창해 동백정이나 지금 동백정을, 혹은 동백정이 품은 것은 늙은 소나무의 그늘이다. 그 사이사이 동백 잎이 소나무 그늘을 뚫은 햇살에 반짝인다. 제각기 가지를 뻗었으되 뻗는 모양새가 절도 있는 소나무는 관직에서 물러난 노(老) 선비를, 햇살을 반사하는 동백 잎은 선비의 형형한 눈빛을 닮았다.
그 풍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동백정의 첫 주인은 조선 세조 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다. 관직 후 은거하며 다른 선비들과 시재를 겨루기 위해 정자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동백정은 청주 김씨 일가가 모이는 동정(洞亭)으로 쓰였다. 양반과 평민의 문화가 모두 스민 공간으로 진화한 셈이다.
1583년과 1895년, 1986년 세 차례 후손들이 중수하며 지금 모습에 이른 동백정의 구조는 다소 복잡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방을 두 개 두었다. 또 한 편으론 정자 위에 작은 누각을 두었으니, 동백정에서 풍경은 깨진 거울처럼 조각난다. 그 풍경의 조각들 넓이 역시 가지각색이라, 조각난 풍경들은 합종연횡하며 다양한 관계를 자아낸다. 조금만 위치를 옮겨도, 조금만 시선을 틀어도, 이내 다른 세상이다.
정자의 창문과 기둥이 자아낸 공간적 틀 외에도, 최근의 동백정은 전에 없던 시간적 틀을 구비한 것처럼 보인다. 정자를 두른 소나무 너머 강에서 이뤄지는 제방 공사는 그 시끄러운 풍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공간적 틀로 구획된 조각난 풍경이 풍류라면, 시간적 틀로 대비된 풍경은 좀 애틋하다.
◆효의 정자, 용호정(龍湖亭)
정자는 대부분 풍류를 목적으로 지어진다. 조각난 풍경을 하나로 합치며 그 감흥을 즐긴다. 해서 정자에 걸리는 편액 중 절반 이상이 감흥을 표현한 시문(詩文)이다.
그러나 용호정(부산면 용반리 530)은 다르다. 용호정은 효(孝)다. 용호정을 노래한 시가 이렇다. "한 정자를 물가 벼랑 위에 세우니/어버이 묘소에 성묘 드리고 돌아온다/…/정자 난간에 홀로 앉으니 부모 생각뿐이요/엊그제 어린 몸이 백발노인 되었네."
좀 더 정확히, 용호정의 뿌리는 2대에 걸친 효다. 1829년 정자를 지은 이는 최규문. 아버지 최영택을 기리기 위한 정자였다. 눈물 많은 효자, 최영택은 비가 올 때마다 성묘를 가지 못하고 강 너머 부친의 묘를 보며 명복을 빌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묘를 바라보며 명복을 빈 곳에 최규문이 정자를 세웠으니, 바로 용호정이다. 해서 사람들은 용호정을 두고 "아버지를 뵙기 위한 정자이자 위로하는 정자(望親之亭 慰親之亭)"라 부르기도 한다.
그 효를 향한 길은 깊어 서늘하고 적요하다. 길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길 위에선 보이지 않는 용호정은 짤막한 굽잇길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효의 정자는 반듯하되 탐진강변 정자 중 가장 간소한 편에 속한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들였다.
그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제멋대로 자란 신록의 나무들로 어둡고, 그 너머 탐진강은 넓어 막막하다. 어둡고 막막한 풍경은 그 자체로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처럼 느껴지니, 이곳 정자는 다른 정자에선 알 수 없는 향취를 지녔다.
◆의(義)의 정자, 사인정(舍人亭)
사인정(장흥읍 송암리 산 359)은 탐진강 정자 기행의 종착지다. 여기서 탐진강은 가상의 경계를 넘어 이웃도시 강진군으로 흐른다. 경계에 서서 바라보는 탐진강은 느리게 휘며 강진으로 멀어진다. 유연한 강의 흐름이 평화로워 어떤 불화도 증발해버릴 것만 같은 곳에 사인정이 있다.
실제로 사인정은 분노를 다스리려 지어졌다. 시절이 수상했던 조선 초기, 김필(1426~1479)이 지었다. 1453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그는 관직을 버렸다. 홍문관 우제학, 이조참판 등을 지낸 그다. 김필은 이듬해 장흥에 내려왔고, 탐진강이 땅을 적시는 언덕 위에 정자를 지었다.
아직 20대의 나이였으니 분노는 컸을 것이다. 그 분노를 탐진강의 유연한 힘을 빌려 잠재웠을 것이다. 향후 후학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진 것을 보면, 김필은 한때 분노에 맡겼던 제 삶을 잘 추스른 것처럼 보인다.
사인정은 장흥 정자 중 가장 도로에서 가까우나 그만큼 보존이 잘 된 곳 중 하나다. 다만 그 도로가 강과 정자 사이를 가로질러, 사인정에서 바라보는 탐진강은 멀다. 대신 거목을 휘감은 넝쿨을 비롯, 우거진 신록의 풍경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동백정과 용호정, 사인정 이외에도 장흥 정자는 많다. 장흥군 장모창 학예연구사는 부춘정(부산면 부춘리 365)과 창랑정(장흥읍 신흥리 40)을 추천했으니, 같이 찾는 것도 좋겠다. 동선은 동백정―용호정―부춘정―창랑정―사인정 순. 시간이 촉박해 한두 곳만 가봐야 한다면, 사인정과 용호정을 추천.
숨을 크게 들이쉬면 가슴팩이 뻥… 이맛에 못 떠나지라이"
"동네 성과 심 리 떨어진 핵교 댕게올 때먼, 냇가에 들어가 물장난도 침서 메기도 잡고 고동도 많이 줍고 그랬지라. 머루 달래도 많이 따 묵고, 귀신쏘 도적쏘 또 머시냐? 물에가 짚은 쏘도 많앴는디, 세월이 다 훔져 갔지라이."
최정환(67)씨가 태어난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삼치마을은 '구름과 달'을 벗삼을 만큼 깊은 산골 운월리(雲月里)에서도 후미진 마을이다. 석 '삼'(三) 자와 고개 '치'(峙)를 이름 삼은 것은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발산재, 중산재, 무지개재 셋 중 한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흥읍 출발 이후 강 따라 개울 따라 곡선과 직선을 반복하며 이어지던 아스팔트길은 유치면 대천리 암천마을에 닿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고, 좁디좁은 비포장 농로가 대신한다. 박재골 물줄기 따라 이어지는 농로는 억새가 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여치가 구슬피 울어대는 가운데 개울 건너 숲 우거진 절벽은 울긋불긋 가을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길가에서 콩과 고추를 따던 주름 가득한 할머니들 미소에 괜스레 고마워하면서 농로를 따라 20분쯤 들어서자 박재골이 속살을 드러냈다. 암반과 바윗덩이가 적당히 뒤섞인 개울에는 맑은 계곡물이 코발트빛 가을하늘을 담은 채 흘러내리고, 커다란 바윗덩이 아래 작은 소(沼)는 붉게 달아오르는 개울가 절벽을 끌어 담고 가을을 공유하고 있었다.
운월교 직전 삼거리에서 다리 건너 반듯한 아스팔트길 대신 오른쪽 흙길 따라 10분쯤 오르자 노부부가 길가에서 콩을 따다 외지인의 출현에 어색한 표정을 짓고, 밭에서는 깨를 떨어내느라 연신 팔을 휘둘러대던 할머니도 물끄러미 쳐다본다.
먼지 폴폴 날리는 흙길은 된비알(몹시 험한 비탈)에 접어들자 널찍한 콘크리트길로 바뀌더니 곧 삼치마을로 올라선다. 감나무마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호박들이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마을은 역시 이름 그대로 산에 폭 싸여 있다.
"이 산꼴짜기럴 머 땜시 오셨는가? 감이나 한나 들소. 전에는 바깥 동네 갈라먼, 고개럴 넘어사 했재만, 시방은 지갑재(중산재) 말고는 모다 숲이 우거져 갖고 못 댕기제. 그랑께 외려 더 짚은 산꼴이 되었당께."
산사면에 자리잡은 삼치 마을의 가구 수는 어림잡아 네댓 집. 삼치 마을서 태어난 최정환씨는 스물네 살 청년 나이 때 도회지로 나갔으나 몇 년 전부터 일주일에 이삼일씩 머물다 간다고 한다. 무릇 오지마을 주민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 주민들도 사연이 많다. 최정환씨는 영산포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도박 빚 피해 들어왔다가 예서 태어나게 되었고, 마을 최고령자인 박판성(83) 할아버지는 화순에서 공무원으로 정년을 맞은 뒤 요양차 형집에 왔다가 눌러 살게 되었다.
맨 위쪽 집에 사는 임종임(81) 할머니는 완도 바닷가가 고향이다. 임 할머니는 '논농사만 지어도 먹고살 수 있다'는 동네 할머니 말을 믿고 들어왔다. "쉼을 크게 들에 시어 보씨요. 좋지라? 가슴팩이 뻥 뚫릴 것이오. 바로 그거랑께라. 이 맛에 못 떠나는 거지라이."
해거름 즈음 할머니 네 분이 모여들자 동네 앞마당이 모처럼 떠들썩해졌다. 임종임 할머니가 밭에서 따온 고추를 그늘막 위에 늘어놓자 세 할머니는 "늦게 땄는데 우리 고추보다 훨씬 좋다"며 부러워했다. 김혜옥(76)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먼저 들어오고 나는 외손자들 다 키우고 10년 전 들어왔다"며 "이젠 광주 가서 살라해도 답답해 못살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 김종채(73) 할아버지와 함께 콩을 한자루 어깨에 짊어지고 막 돌아온 박숙아(65) 할머니는 "종채가 좋아서 걸어서 시집왔다"며 "시집온 지 45년 됐는데 지금도 남편이 좋다"며 활짝 웃었다.
할머니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로 꼴딱 넘어갔다.
[여행수첩]
대중교통: 장흥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천리(암천마을)행 군내버스가 하루 5회 다닌다. 40분, 2700원. 장흥교통 (061)863-0636. 암천마을에서 삼치마을까지는 비포장농로를 따라 약 3.3㎞.
유치면에서 접근하면 박재골 비포장길(2㎞)을 생략할 수 있다. 장흥에서 유치면행 버스는 하루 12회 운행하며, 유치면사무소 앞에서 보림사 경유 대천리행 버스가 하루 5회 다닌다.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하차해 아스팔트길을 따라 곧장 넘어가야 한다. 삼치마을까지 약 3.3㎞.
승용차: 무안광주고속도로 나주 나들목→나주시청→유치면→신풍신덕로→운월교 건너 삼거리에서 왼쪽 길→삼치마을(약 50㎞) 방향으로 접근하거나, 호남고속도로 문흥 나들목→나주시→이양 삼거리→곰치→봉림 삼거리→피재(도로공사중)→보림사→암천마을→삼치마을(약 70㎞) 방향으로 접근한다.
협찬:블랙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