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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9일자 일본 <산인추오신문> 기사 |
ⓒ <산인추오신문> |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 관련 자료들을 잇달아 공개하여 시선을 끌고 있다. 2월 9일자 일본 <산인추오신문>이 보도한 2건의 기사에 따르면, 이번에 시마네현 측은 2장의 다이쇼 시대 지도와 1건의 에도시대 공문서를 새로 공개했다. 2건의 기사를 통해 이번 자료 공개에 관해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다이쇼 시대(1912~1925년)의 지도 2장은 시마네현 시즈모시(市) 고리요조에 거주하는 마니와 나가미쓰*(馬庭將光, 70세, 전 고교 교사)씨가 공개한 것으로서, 하나는 '시마네현 경찰통계편람'이고 또 하나는 '오키노시마보(報)'라고 불리는 것이다.
다이쇼 13년(1924)에 발행된 '시마네현 경찰통계편람'은 관내 경찰서들의 관할구역을 각각의 색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지도에서 다케시마(竹島)는 오키노구니(隱岐國)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다이쇼 12년(1923)에 시마네현 오키노시마청(廳)이 발행한 '오키노시마보'에도 지도의 우측 중간에 다케시마가 표기되어 있다.
▲ 시마네현 경찰통계편람(왼쪽), 오키노시마보(오른쪽 위), 어촉서어청인장(오른쪽 아래) |
ⓒ <산인추오신문> |
이 2건의 지도를 사전에 조사한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 스기하라류 부좌장(副座長)은 "이 2건 모두 시마네현이나 현 내외의 도서관 등에도 보관되어 있지 않은 자료"라면서 "다이쇼 시기에 일본이 다케시마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귀중하다(大正期、日本が竹島を実効支配していたことを示すもので貴重だ)"고 말했다.
다음으로, 에도시대 문서 1건은 '어촉서어청인장(禦觸書禦請印帳)'이라는 문서로서, 에도시대에 막부의 금령을 어기고 울릉도에 도항한 이마즈야 하티에몬(今津屋八右衛門, 1798~1836년)이라는 인물에 관한 자료다.
당시 하마다번(浜田藩)에서 운송업을 하던 하티에몬은 막부의 쇄국령을 어기고 당시 '다케시마'라 불리던 울릉도로 도항했다가 막부에 의해 사형죄로 처벌받은 인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막부는 1837년 각 번에 "쇄국을 준수하라"는 포고문을 발포했다.
'어촉서어청인장'이라는 자료는 하마다시(市) 구시로죠의 이와미아다지(石見安達) 미술관이 1977년 개관 이전에 구입한 것으로서, 현재 이 박물관에서 '다케시마 사건과 하티에몬'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이 지난 30년 동안 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문서상의 '다케시마'가 독도가 아닌 울릉도를 가리킨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본 공문서에서 다케시마가 울릉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 부각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산인추오신문>은 보도했다.
일본 측이 어떤 의도로 이번에 자료를 공개했는지는 좀 더 확인해 보아야 하지만, 다케시마 명칭에 관계없이 이 자료가 일본과 독도(및 울릉도)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자료라는 점 때문에 공개를 결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위 문서상의 문장 하나와 그에 대한 일본 측의 해석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서에는 울릉도가 겐로쿠(元祿, 1688~1703년) 연간에 "조선국에 넘어가게 되었다(朝鮮国え御渡に相成候)"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출어(出漁)를 금지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산인추오신문> 측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조선국에 넘어가게 되었다'라는 기술은 1690년대에 조선인 안용복의 도일(渡日)을 발단으로 일·조 간에 일어난 울릉도 귀속처를 둘러싼 분쟁과 교섭의 끝에 에도막부가 양보하고, 발포한 동도(同島)에 대한 도해 금지령을 가리키고 있다"('朝鮮國え禦渡に相成候'との記述は、一六九〇年代に朝鮮人・安龍福の渡日を発端に、日朝間で起こった鬱陵島の帰屬先をめぐる紛爭、交渉の末、江戸幕府が譲歩し、出した同島への渡海禁止令を指している)
위 표현에 따르면, '에도막부가 조선측에게 울릉도를 양보하였다'라고 하였다.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였으므로, 이를 조선측에 양보했다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측이 어떤 의도로 위 자료를 공개하고 또 위와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지는 앞으로 좀 더 관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소개한 2가지 자료 중에서 후자(後者)와 관련하여서는 일본 측의 추후 동향을 좀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전자(前者)와 관련하여서는 명백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자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했다는 증거로서 20세기 지도 2건을 새로 제시하였지만, 그 시기는 어차피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논의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1910년 이후로 일본이 조선 전체를 '실효적으로 점유'한 이상 조선의 일부인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한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이 일본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을 맞이하여 최근 자료들을 하나씩 공개하고 있다. 시마네현측이 앞으로 어떤 자료를 또 공개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일본 인명에 사용되는 한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마정장광(馬庭將光)의 정확한 발음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기사에서는 일반적인 통례에 따라 마니와 나가미쓰라고 부르기로 한다.
2007-02-10 /김종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