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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청소년문학의 흐름과 전망
- 2007년 하반기 이후 발간된 단편집을 중심으로
1. 청소년문학의 새로운 변화
최근 청소년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우리 문학의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청소년문학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해 이제는 출판시장의 판도를 좌우할 만큼 그 위세가 대단하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사계절출판사의 ‘1318문고’ 시리즈를 필두로 첫 선을 보인 청소년문학은 해를 거듭할수록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근래에는 성인문학 못지않은 고액의 상금을 내걸고 ‘청소년문학상’을 신설하는 출판사와 기관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뛰어난 역량을 지닌 신진 및 기성 작가들이 속속 청소년문학의 장으로 유입되고 있다.
그 결과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의 틈새에서 오랫동안 암중모색하던 청소년문학은 이제 더 이상 변방이 아닌 주류 문학의 한 장르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청소년문학의 양적 질적 성장에 비해 이에 대한 비평적 담론은 미약한 편이다. 청소년문학의 본질과 기능, 가치 평가의 기준과 같은 이론적 비평은 물론 작가 및 작품의 가치에 대한 실제적 비평은 많이 부족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 분야에 종사하는 비평가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청소년문학의 경우 그 역사가 짧은 탓에 그동안 폭넓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청소년문학과 관련한 담론을 살펴보면 어떤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이해 당사자인 작가나 독자 또는 비평가의 주관적 판단에 기대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성과는 없지 않아서 원종찬, 황선열, 오세란과 같은 이들의 담론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창비어린이』 2004년 봄호에서 「청소년문학, 시작이 반이다」라는 주제로 좌담이 열린 이래로 청소년문학에 대한 여러 논의가 계속해서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서평’ 수준에 머물거나 ‘성’과 같은 한정된 주제에만 치중했을 뿐, 아쉽게도 그 이상의 담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원종찬과 황선열, 오세란은 보다 심층적으로 청소년문학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고찰하고(원종찬, 「청소년문학 어디까지 왔나」, 『푸른글터』, 2006년 상반기호), 그 문학적 본질과 개념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기도 하고( 황선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놓인 청소년문학」, 웹진 『동화읽는가족』, 2007년 겨울호), 개별 작품의 특성과 문제점을 꼼꼼하게 포착해내고 있다(오세란, 「비행을 꿈꾸다」, 『창비어린이』, 2007년 겨울호). 이러한 작업은 여타의 논의보다 한층 진일보한 것으로, 현재 우리 청소년문학의 위상을 가늠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들 담론 역시 특정 시기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논점이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어 최근 청소년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포괄적으로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원종찬은 2004년부터 2006년 상반기에 출간된 작품을, 황선열은 2007년 하반기에 출간된 세 권의 소설집을, 오세란은 2006년 하반기부터 2007년까지 출간된 장편소설만을 분석하고 있다. 또한 그 논의에 있어서도 서사와 당대성의 문제, 소재와 창작기법 등 그 폭이 협소해, 2007년 하반기 이후에 새롭게 변화한 청소년문학의 흐름을 설명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기존의 논의가 좀더 발전적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기대에서 출발하고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최근 청소년문학의 흐름을 간략하게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기획 출판된 작품집과 장편보다는 단편이 압도적으로 많다. 작가들 역시 동화작가부터 성인소설 작가까지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으며, 소재와 주제, 형식과 기법 등에서 이전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들이 다수 눈에 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최근 청소년문학의 변화를 살펴보려고 한다.1) 글의 성격상 세세한 작품 분석보다는 논제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위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생각이다.
2. 서사와 당대성 문제의 극복 가능성
청소년문학에서 가장 빈번하게 차용되는 소재와 제재는 ‘성’과 ‘자아 정체성의 혼돈’이다. 이것은 인간의 발달과정에 있어서 흔히 청소년기라 불리는 연령대의 특수한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략 13세에서 18세까지로 지칭되는 이 시기는 신체적으로는 성기능이 성숙해지면서 성적호기심 및 이성에 대한 관심이 왕성해지고, 심리사회적으로는 자신의 능력 및 존재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돈이 일어나 극심한 방황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청소년기는 인간발달의 과정에서 그 변화의 가능성이 매우 큰 까닭에 교육적 측면에서나 사회적 측면에서 그만큼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 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소재와 제재를 택해 창작된 작품들은 줄곧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대다수의 작품이 오늘날 청소년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해 소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이미 서구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성이 개방되었음에도 고답적인 성의식에 매몰되어 있거나, 수십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변한 환경에 직면해 있는 청소년의 삶을 도외시한 것은 어찌 보면 작가들의 직무유기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독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장르이다. 그런 점에서 대화에 있어 중요한 매개체인 이야기가 독자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작가는 무엇보다도 독자층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청소년소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적절한 소재와 제재를 발굴해 내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청소년기 체험에 기댄 작품이 많은 수를 차지함으로써, 그동안 시급히 극복되어야 할 당면 과제로 지적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그와 같은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아직까지 많은 작품이 기존 서사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당대성의 도입은 청소년의 말투나 행동, 습관과 풍속을 그려내려는 묘사에서부터 청소년에게 당면한 성(性), 학교, 인권 등 현대 사회에서 초점이 되는 지점을 포착하려는 소재의 확대, 그리고 이같은 소재를 서사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새로운 주제로 돌파해나가려는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2)는 오세란의 말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오늘날 청소년의 고민을 다각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역력하다.
가령, 같은 성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첫날밤 이야기」(박정애, 『호기심』, 창비)는 이전 작품과는 색다른 서사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열여섯 살인 여자 아이가 화자로 등장해 작가에게 외고조모의 첫날밤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자칫 비현실적인 옛날이야기로 전락해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 대목에 자신 및 친구들 역시 가끔씩 첫날밤에 대한 아련한 동경에 빠져들 때가 있다는 화자의 고백을 슬쩍 포개어 놓는다. 그럼으로써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의 본질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자신의 의도를 완성시켜 나가는데 그 기법이 대단히 참신하다.
이와 더불어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집 『처음 연애』(김종광, 사계절)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소설집에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청소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 열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각각의 시대마다 다른 청소년의 사랑방식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내고 있어, 우리 사회의 성 풍속도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이 소설집 말미에는 ‘1318의 사랑 역사’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작가는 시대별로 청소년의 존재가 어떻게 이해되고, 그들의 연애법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기술하고 있는데 한번쯤 음미해 볼만하다.
그런가하면 「영희가 O형을 선택한 이유」(방미진, 『라일락 피면』, 창비)는 어떤 불합리한 틀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인간을 재단하려 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그릇된 풍토를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혈액형 놀이를 주요 모티프로 중학생 또래 아이들의 지겨운 일상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에 지나치리만큼 몰두하다가도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돌변해버리는 청소년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어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보인다.
이처럼 최근에 발간된 단편집을 보면 비록 ‘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성장 서사가 주를 이루고는 있지만 기존 작품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처음 연애』를 제외한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이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당대성의 문제는 거의 극복되고 있다.3) 그리고 소설 형상화의 기본 재료인 소재 및 제재와 관련한 문제도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이들 소설집이 기획 출판된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데, 이런 노력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된다면 앞으로 더욱 수준 높은 청소년문학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문체와 개성, 그리고 서술기법
일반적으로 글을 다루는 버릇과 솜씨를 뜻하는 문체(Style)는 소설의 형상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 가운데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하지만 문체는 언어를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갖추는 서사체(敍事體), 즉 소설의 존재 방식 및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같은 이야기라 해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관심과 반응은 크게 달라진다. 그 때문에 소설에 있어서 문체는 바로 서술기법상의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문학론의 핵심적 관심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문체는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 또는 개성적인 서술기법을 창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으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의 경우 저마다 개성적인 문체를 지니고 있다. 그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이문구와 김승옥의 문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 현대 문학사를 거론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설가이다. 이문구는 1970년대에 피폐해지는 농촌의 현실을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에 담은 긴 호흡의 만연체와 요설체를, 김승옥은 1960년대에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밀도 있는 유려한 문체로 선보여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소설의 형상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체는 어휘의 선택과 문장의 구조, 비유의 쓰임과 어조와 같은 요소들에 의해 지배된다. “문체란,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개인적인 여과의 반영’이다”4)라는 말이 있다. 작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어휘와 문장의 구조, 서술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단편소설집에는 이러한 서술기법상의 문체와 개성이 뚜렷한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용포의 「십팔」, 강미의 「겨울, 블로그」, 박정애의 「정오의 희망곡」을 꼽을 수 있다.
주민등록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성인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갈 수도 없다. 어쩌 다 짭새 아저씨한테 걸려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면, ‘학교 안 다녀? 학생증 줘 봐.’ 하며 주민등록증 은 도로 건네준다. 결혼은 만 십팔 세, 실제로는 십구 세가 되어야 할 수 있다. 성인식은 만 이십 세가 되어야 치를 수 있다. 그러니까 주민등록증은 있지만 미성년자! 사진은 왜 이따위로 나왔담? 표정 좀 봐라. 가관이다. 입은 왜 벌렸니? 동사무소에 있는 즉석카메라로 찍은 거라 어쩔 수 없었 다. 꺼벙하기 짝이 없다. 포토샵이라도 하면 뭐가 어때서.(59쪽)
위 인용문은 「십팔」(『베스트프렌드』, 푸른책들)의 일부이다. 이 작품은 열여덟 살인 주인공 ‘나’를 통해 미래는 막막하고, 과거는 밋밋하고, 현재는 먹먹하기만 한 고등학생의 정신적 혼란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과 빠른 전개, 다소 냉소적이면서 해학적인 걸쭉한 입담에 있다. 작가는 이처럼 개성 있는 문체를 통해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요즘 청소년들의 내면 풍경을 실감나게 표현해낸다. 그 때문에 청소년들의 고단한 삶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경쾌한 편이다. 이런 문체적 특징은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키스 미 달링」(『호기심』, 창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안개나 는개가 짙은 날이면 길 건너 빈 논에 번쩍 치켜든 써렛발 같은 불빛들이 일제히 켜진다. 써레 몽둥이는 안개에 가려진 채 불빛들만 허공에 누워 있어 마치 거대한 뱀이 공중 부양하는 모 습 같기도 하다. 붉은 뱀의 꼬리는 멀지 않은 공항으로 이어져 있는데 비행기의 착륙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흐린 날에는 비행기 역시 온통 빛을 달고 돌진하는 수놈처럼 활주로로 내려앉는 다.(8쪽)
반면에 「겨울, 블로그」(『겨울, 블로그』, 푸른책들)는 앞서 본 「십팔」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한 장면으로 각 문장의 호흡이 대체로 길다. 또한 ‘써렛발 같은 불빛’, ‘마치 커다란 뱀이 공중 부양하는 모습’, ‘온통 빛을 달고 돌진하는 수놈처럼’과 같은 비유적 문체가 많이 쓰이고 있어, 작품을 대하는 첫 느낌이 진중하면서도 숙연하기까지 하다. 이런 분위기는 향후 펼쳐지는 동성애 장면의 발각과 어지러운 가족문제 등과 맞물려, 주인공인 여고생 혜욱의 복잡한 내면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문체와 내용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 평가할 만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무더운 여름입니다.
FM 정오의 희망곡, 애청자 여러분의 귀염둥이, 여러분의 영원한 뮤직 스토커, 한여름 소나기처 럼 시원한 인사 올립니다.
첫 사연, 홍홍님입니다. 오늘은 게시판에 사연 올려 주셨네요. 홍홍님, 뮤스가 은근히 기다린 거 아세요? 문자라도 좀 자주자주 보내 주시지. 홍홍님, 미워어어어잉.(25쪽)
또한 「정오의 희망곡」(『깨지기 쉬운 깨지지 않을』, 바람의아이들)의 경우는 위의 두 작품과는 또 다른 서술상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홍홍’이라는 여중생을 등장시켜 부모의 욕심에 희생당하는 청소년의 애환을 고발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라디오라는 대중매체를 이용해 서술하는 내레이션 기법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신선하다. 또한 요즘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대중가요의 가사를 이야기 곳곳에 삽입해 흥미를 유발함으로써 독자와의 원활한 소통을 꾀하고 있는데 그것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외에도 최근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서술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요즘 청소년의 감각적인 말투를 비롯해 핸드폰과 인터넷을 통한 문자 전송방식, 서술자 바꾸기 등의 여러 기법을 적극 활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는 작가 개인은 물론 독자의 배려 차원에서도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흐름이 지속되어 개성이 살아 숨쉬는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청소년문학 작가들의 노력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4. 독특한 캐릭터의 창조
소설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으로 문제성이 강한 인물의 행적을 통해 삶의 보편적 진실을 탐구하는 양식이다. 그 때문에 혹자는 소설을 ‘인생 표현의 인간학’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만큼 인물은 소설의 구성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 요소이자, 작품의 주제를 구현해 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게다가 사건 전개의 주체인 동시에 감동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얼마나 흥미로운 인물을 창조해 내느냐 하는 문제는 곧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그런 까닭에 작가들은 독자의 심중에 깊이 각인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아동 및 청소년문학 작품에는 오래도록 기억되고 사랑받는 인물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적 관심사나 시대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하고 어떤 해결 방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런 작중 인물의 행위나 사고가 합당한가 어떤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데 그 판단이 곧 작품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게 된다”5)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아동 및 청소년문학에 종사하는 작가들이 풀어나가야 할 또 하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최근 발표된 단편소설 가운데 독특한 캐릭터로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이경혜의 「Reading is sexy!」(『깨지기 쉬운 깨지지 않을』, 바람의아이들)에 나오는 ‘연저’와 조은이의 「헤바(HEBA)」(『라일락 피면』, 창비)에 나오는 ‘윤이’는 그동안 우리 청소년문학에 등장한 인물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비록 이들은 사건의 전개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는 입체적 인물은 아니지만, 각기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이다. 비주체적이고 현실 순응적이었던 기존의 인물들에 비해, 이들은 그와 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연저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내 입술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댔다. 아주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라 기보다는 아이들의 뽀뽀에 가까운 접촉이었지만 그 보드랍고 따스한 입술의 감촉은 내 입술에 그 대로 남았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서 멍하니 서 있는데 연저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 이런 걸 화살처럼 스쳐 간 입맞춤이라고 하지. 그냥 너한테 도장을 찍은 거야. 물론 널 혼자 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독점은 나쁜 거니까. 오죽하면 독점 방지법이 다 있겠어?”
하하,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연저는 계속 나를 당황케 한다. 주머니에서 불쑥 비둘기를 꺼내는 마술사처럼.(77쪽)
위 인용문은 작가가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Reading is sexy!」에 나오는 연저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입시라는 현실적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주인공 ‘나’(민기)가 연저를 만나 자의식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연저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갈등을 유발하고 해소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연저는 매사에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인해 오히려 주인공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가난한 단칸방에 병이 들어 몸져누워 있는 아버지를 주인공에게 태연히 인사시킬 만큼, 처음 만난 날 전철역 앞 허름한 엄마의 분식집에 주인공을 끌고 들어가 “엄마, 손님 하나 물고 왔어”라고 소리칠 만큼 당당한 연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무섭지 않아, 누나? 그렇게 사는 거.”
“전혀.”
“진짜? 조금도?”
“응.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거든. 청소를 하든 때밀이를 하든 먹고살 자신이 있어. 남는 돈이 있으면 모아서 여행 가고. 뭐가 걱정이야?”
“나중에 할머니가 돼서도?”
“넌 할아버지가 돼서 뭘 할까, 그 준비 하며 사냐?
할 말이 없었다.
“난 지금 하고 싶은 걸 할 뿐이다. 난 그냥 지구인으로 살고 싶어. 여행은 내게 사치가 아니라 삶이고 일상이고 또 학교고 그래.”(169쪽)
이점은 「헤바(HEBA)」에 나오는 윤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은 중학교 3학년인 주인공 ‘나’(성호)가 팜므 파탈적인 외사촌 누나 윤이를 통해 성과 사랑, 그리고 세상에 대해 눈을 떠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의 제목인 ‘헤바’는 ‘청춘의 여신’을 뜻하는데, 이는 어떤 관습화된 규제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윤이를 가리킨다. 주인공의 말처럼 윤이는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면서도 기가 죽기는커녕 지나치리만큼 당당하다. 그 때문에 교육적인 면에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윤이는 비록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이탈하긴 했지만,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 누구보다도 건강한 정신과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로지 학교 성적에만 집착해 전전긍긍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청소년에 비해 그 발전 가능성이 훨씬 많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장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금이의 「쌩레미에서, 희수」(『호기심』, 창비)에 나오는 ‘희수’ 역시 앞의 두 캐릭터와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인물이다. 연저와 윤이, 그리고 희수 이들은 모두 암울한 현실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고, 주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해 나간다. 이러한 이들의 성격은 과거 청소년문학에서 흔히 발견되는 패배적이고 무기력한 인물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따라서 자아 정체성의 혼란으로 곤경에 빠져있는 청소년 독자에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치를 심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5. 상징을 통한 의미의 확충과 문제점
같은 언어라 하더라도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와 문학작품에서 쓰이는 언어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흔히 ‘지시어’와 ‘함축어’로 명명되는 이와 같은 언어의 기능적 차이로 인해 문학은 그 나름의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 ‘함축’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문학적 언어는 낱말 본래의 뜻보다는, 그와 연관된 여러 가지 속성을 통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다양한 문학 장르 가운데 언어의 함축적 기능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분야가 바로 시이다. 또한 그것은 서사문학을 대표하는 장르인 소설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소설의 경우는 그 고유한 서술 형태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함축적 기능이 시에 비해 적게 쓰인다. 하지만 시와 마찬 가지로 글쓴이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작품의 표면에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한 의도 감추기의 주된 기법으로 ‘상징’적 장치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왜 이처럼 용의주도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애써 감추려는 것일까? 그것은 상징적인 서사가 보다 다층적인 의미를 생성해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호기심을 자극해 독자들로 하여금 큰 만족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형상화하는 방법은 독자의 상당한 지적 수준을 담보로 하며, 소통에 있어서 그만큼 위험 부담을 떠안게 된다. 같은 작품을 읽더라도 독자의 연령이나 지적 수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해석되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점은 동화와 소설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아직 지적으로 미성숙한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 및 청소년문학에서는 ‘상징’과 같은 고도의 수사적 장치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사용 빈도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6)
이금이의 「늑대거북의 사랑」(『베스트 프렌드』, 푸른책들)은 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작가 이금이는 최근 청소년층을 겨냥한 단편소설을 여러 지면에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데, 이들 작품 모두가 ‘상징’을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고등학생인 주인공 민재가 한때 자신이 기르던 늑대거북 ‘울프’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서 겪게 되는 심리묘사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늑대거북은 스토리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주인공 민재의 갈등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주제를 암시하는 장치로 쓰이는 등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는 이 야생성 강한 늑대거북을 등장시켜 비주체적 인물인 엄마와 민재를 대립시켜 놓는다. 이를 통해 “민재의 성적을 위해서라면 지옥행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엄마와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이상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맹세”한 민재의 삶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왜곡된 사랑인가를 일깨워준다. 불합리한 현실에서 자기식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어, 이금이 특유의 문학적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울프를 데려간다고 해서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민재는 중얼거렸다. 울프가 자신을 물려고 했을 때 서운하긴 했어도 그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게 울프식의 사랑인 것이다. 선 생님 부부가 이 산골에서 사는 게 나빠 보이지 않는 것도 자기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 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서로에 대한, 엄마의 사랑도 자신의 사랑도 어딘지 왜곡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를 위해서 참 는다고 생각하는 사랑, 그래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이 과연 옳은 사랑일까? 민재는 버섯 같은 선생님의 집이 보일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137쪽)
위 인용문은 늑대거북과 재회한 민재가 그 처리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거북의 존재는 다층적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우선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민재가 애지중지하는 애완동물로서의 의미이다. 그 다음으로는 민재와 엄마의 갈등을 유발하는 매개체로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민재의 잃어버린 본연의 모습을 뜻하는 상징으로서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늑대거북은 그 본래의 의미 외에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이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울프식의 사랑’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늑대거북의 사랑」은 상징을 이용해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 그렇다고 상징기법을 활용한 모든 작품들 다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등학생 순근이를 둘러싼 종교와 가정폭력 등의 문제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담아낸 「쉰아홉 개의 이빨」(최인석, 『라일락 피면, 창비)과 중학생인 ‘나’의 내면 풍경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너와 함께」(오수연, 『라일락 피면, 창비)는 지나치게 난해한 상징과 표현으로 말미암아 청소년 독자층과 소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작가들의 좀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
6. 보다 다양한 논의의 필요성
지금까지 최근 발간된 단편집을 중심으로 청소년문학의 경향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은 청소년문학에 관한 논의를 보다 지속적이고 발전적으로 이어가려는 데에 있다. 그런 까닭에 이전에 나온 비평 작업들을 토대로 일정 부분은 기존의 논의를 연장하려 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기존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논의들로 채우려고 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최근 청소년문학의 새로운 흐름과 변화를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 글 역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어떤 객관적 기준에 의거하지 못하고 다분히 자의적인 시각에서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구조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특성을 무시한 채 단편소설만을 대상으로 최근 청소년문학의 경향을 읽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작품 전체가 아닌 특정한 논점에 부합하는 몇몇 작품만을 상대로 논의를 전개한 탓에, 그 변화의 폭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변화의 양상에만 지나치게 몰두해서 개별 작품들의 장단점을 꼼꼼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 우리 청소년문학은 소재와 주제, 형식과 기법 등 여러 면에서 이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획출판이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최근 우리 청소년문학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변화는 매우 바람직하고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를 계기로 더욱 세련된 창작 기법들이 많이 개발되고 보다 넓은 층위의 작가군이 형성된다면, 머지않아 지금보다 훨씬 알차고 활기찬 청소년문학의 장이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작가 마가렛 피터슨 해딕스(『이 일기는 읽지 마세요, 선생님』(우리교육 2006)의 저자)는 청소년을 주제로 한 책을 즐겨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청소년은 변화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고 어른보다 한결 흥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에는 그의 작가적 관심사가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긴 하지만 수용자적인 입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변화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말은 곧 양질의 문학작품이 청소년의 성장에 있어 상당한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청소년문학의 위상은 한층 더 높아질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작가와 출판사, 독자와 비평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작가는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고, 출판사는 뛰어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독자와 비평가는 작품의 수용자로서 이들 작가 및 작품에 대한 격려와 애정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이제 막 발흥하기 시작한 우리 청소년문학의 토대를 견고히 하기 위한 담론도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와 같은 단체에서 한번쯤 이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공간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최근 큰 반향을 불러온 신여랑의 「화란이」(『어린이와문학』, 10월호)와 강미의 「지귀의 불」(『겨울, 블로그』, 푸른책들)을 둘러싼 논쟁도 좀더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단순히 청소년의 성매매와 같은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논란 이전에, 청소년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의 범주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청소년문학이 아동문학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문학의 교육적 기능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진다. 보다 풍성하고 내실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