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빗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이마를 두드린다. 일어나 창을 열고 빗소리를 맘껏 들여놓는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방 안 가득 스며드는 소리에 가슴이 열린다. 밤새 나를 뒤척이게 했던 어젯밤의 대화를 내려놓고 빗줄기를 바라본다.
2. 어린 시절,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들에 일하러 갔던 부모님이 비를 피해 일찍 집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언니 오빠들이 학교 간 동안 막내였던 나는 혼자 집을 보면서 늘 심심했다.
빗소리가 들려오면 마루 끝에 앉아, 일찍 돌아올 가족을 기다렸다.
3. 마루 끝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마당에 고이는 빗물을 보며 부모님이 언제 오실까 귀를 기울였다. 처마 끝으로 흘러내린 빗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마당에 나란히 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때론 자장가 같은 빗소리의 속삭임에 낮잠이 들기도 했다.
4. 마당 끝에서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리고 우비를 입은 부모님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비에 젖은 어깨와 바지 끝이 흙탕물에 젖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얼른 슬리퍼를 꺼내 들고 아버지께 내밀었다. 아버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무거운 장화에서 발을 빼고 슬리퍼를 신었다. 뒤따라 들어온 엄마는 마른 수건부터 들고 내 어깨부터 닦아주셨다. 빗속을 뚫고 온 두 분의 온기에 말없이 안기는 그 순간, 마당에 가득한 빗소리가 환한 노래로 다가왔다.
5. 비에 젖은 옷에서 퍼지는 흙냄새와 풀 냄새는 오래지 않아 고소한 냄새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버지의 짧은 기침 소리와 엄마가 수건으로 툭툭 털어내는 소리가 지나면 비 오는 날의 간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아버지의 간식, 볶은 쌀과 콩을 즐겨 먹었다.
6.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아버지가 광에서 쌀과 콩을 담아 나올 때 나는 늘 따라다녔다. 두꺼운 팬을 달구고 쌀을 먼저 볶고 콩도 볶았다. 톡톡, 탁탁 소리와 함께 투명한 쌀이 하얗게 익어가고 콩이 노릇노릇 갈색으로 변하며 맛있는 간식이 되는 과정을 아버지 옆에서 맘껏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막내의 특권이기도 했다.
7. 팬에서 튀던 콩의 고소한 냄새가 촉촉한 공기를 타고 집 안으로 번졌다. 빗소리와 볶는 소리가 겹치며 집 안이 포근하게 채워질 즈음에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팬 위에서 튀듯 익어가는 쌀의 소리, 아버지가 휘휘 저을 때마다 올라오는 고소한 향기는 비 오는 날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8. 식탁에 둘러앉아 볶은 콩과 쌀을 먹었다. 뜨거운 김을 피하며 쌀 한 줌을 입에 넣으면, 바삭한 소리가 먼저 들리고, 천천히 씹을수록 입안에서 쌀이 부풀어 올랐다. 고소함이 먼저 번지고, 천천히 만나는 연한 단맛까지 느끼면 몸 안이 따뜻해지고 속이 든든했다.
9. 엄마는 손바닥으로 쟁반 위에 흘린 콩 몇 알을 조심스레 모았다. 오빠는 콩만 골라내어 몰래 더 집어넣고, 언니는 양푼을 내 쪽으로 당겨주었다. 우리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 손을 움직이고 눈짓으로 나누며 비 오는 오후는 소리 없는 대화로 가득했다, 혼자가 아닌, 식구들과 함께 있는 오후의 기쁨을 말 대신 콩을 집어 먹으며 삼켰다. 한 알 한 알 입안에서 퍼지는 고소함은 내가 느꼈던 따뜻한 사랑의 맛이었을 것이다.
10. 방 안으로 들어온 빗소리에 어린 날 아버지의 볶음 간식의 냄새와 톡톡 튀는 소리, 가족과 함께라서 따뜻했던 온기가 마음에 스며든다. 그 빗소리 속에 오래전 마루 끝의 내가 앉아 있다. 젖은 발을 털고 슬리퍼를 신는 아버지의 모습, 양푼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가족의 숨결, 그 모든 장면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그저 곁에 있어서 충분했던 순간, 그 기억 덕분에 나는 오늘 서툰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다. 조금 어긋났던 관계도 말보다 따듯한 무언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11. 지난밤, 우리는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말은 길었지만, 마음은 평행선을 달렸다. 마주 앉아서 어긋난 마음은 보지 못하고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 말끝이 조금씩 가시를 세웠고, 침묵이 길어진 채로 등을 돌리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섰다.
12. 빗소리에 눈을 뜨면서 아버지가 볶아주신 쌀과 콩의 고소한 냄새와 따끈한 온기를 떠올린다. 오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피어오르던 아버지의 간식 기억에 입안이 따듯해진다. 아직 딱딱하게 남아 있는 말들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간다. 조용히 부추를 다듬는다.
13. 남편이 좋아하는 부추전을 준비하며 기름 두른 팬 위에 반죽을 올린다. 기름이 지글지글 튀는 소리가 집안에 퍼지고, 고소한 향이 빗소리와 섞인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에 남아 있던 날카로움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14. 비 오는 날 부추전 냄새에 행복하게 잠이 깼다며 남편이 너스레를 뜬다. 따뜻한 부추전 한 조각에 어제의 냉기가 조금씩 녹아든다. 아직 말로 해결하지 못했지만, 따뜻한 부추전 하나, 함께 하는 밥상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건넨다. 어린 시절 볶은 쌀과 콩처럼, 오늘도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서로를 씹어가며 알아간다.
15. 때론 말이 엇갈리고, 마음을 다치기도 하지만 비 오는 날 마루 끝에 앉아 있었던 그 어린 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다. 그 조용하고 따뜻한 순간들이 삶이 거칠어질 때마다 나를 다독인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따뜻한 기억의 힘으로 다시 이어지며.
첫댓글 비오는 날은 전이 최고죠. 막걸이 있으면 더 좋고요. ^^
비 오는 날의 맛과 멋을 아시네요^^
선생님, '방수 공사'랑 연결해서 읽으니 이해가 더 잘 되었습니다. 지금 며칠 째 폭염인데도, 문을 열면 비 오는 풍경이 펼쳐질 듯한 글이네요^^
이전 글을 떠올리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은 떠나셔도 기억속에 이렇듯 살아계시면서 , 늘 자식들을 격려해 주나 봅니다.
콩은 어려우니 쌀을 볶아 볼까, 부추전이라도 부쳐 볼까요?
문 문우님 집처럼 남편과 말이 엇갈릴 때 내미는 화해의 간식으로 ...ㅋ
그렇지요, 선생님. 힘이 필요해서 부르면 늘 기억으로 다가오는 부모님입니다.
비 오는 날, 자연이 준 느긋한 휴가를 틈타서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간식을 먹으며 가족의 푸근함을 느꼈던 그 경험을
부부간에 접목 시킨 성미 샘의 기지가 돋보입니다. 먼저 다가간 성미 샘이 남편을 이긴 겁니다.
비가 기다려지는 요즘, 이 글을 읽고 나니 비를 맞은 것처럼 시원합니다.
애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생각지도 못했는데, 제가 이겼다고 말씀해 주시니 마음에 공간이 생깁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다정스런 아버지에 사랑스런 딸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