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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 의하여 드러나고 시간에 따라 연기됨을 드러내기 위하여 `diff 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지만, 이를 `디페랑스`로 발음할 때 `차이`의 뜻만을 가지는 `diff rence` 또한 `디페랑스`로 발음되므로 `diff rance` 속에 있는 `a`는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무덤처럼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그리고 정중하게 죽어 있다. 이처럼 차연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어떤 것으로 형태로도 나타나는, 어떤 것의 현전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연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마치 존재하는 양 표상할 것이다. 차연으로 쓰여진 것이 단순이 능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이러한 차이들의 효과로 `생성`되기 때문에 유희의 움직임이다. 차연은 속이 비어 있고 단순하지 않는 개체로 차이의 기원을 다시 차이 나게 한다. 차연은 낱말도 아니며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이나 도식, 확정성의 사유에 포함되지 않는 전략적 부호, 또는 결합을 알려주는 기표일 뿐이다. 차연은 이런 점에서 一心과 통한다. 원효는 궁극적 진리의 실체, 만유실체의 진여, 寂滅이자 如來藏, 진여문과 생멸문 등을 하나로 아우른 모든 법의 실체인 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무릇 일심의 원천은 有와 無를 떠나서 홀로 깨끗하여, 三空의 바다는 眞과 俗을 융화하여 고요하고 그득하도다. 고요하고 그득하기에 둘을 하나로 융합하되 하나가 아니며 홀로 깨끗하기에 변을 여의었으나 중간도 아니다. 중간이 아니면서도 변을 떠났으니 있지 않은 法이라 無에 머물지 않으며 없지 않은 相이니 有에 머물지도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시켰기에 眞이 아닌 事가 일찍이 俗이 된 것도 아니요, 속이 아닌 이치가 일찍이 진이 된 것도 아니다. 둘을 융합시켰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속의 본성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없고 染淨의 相이 두루 갖추어지는 것이라. 변을 떠났으면서도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유무의 법이 지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是非의 뜻이 모두 포섭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실로 이치라 할 수 없는 지극한 이치요,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큰 그러함이다. 이것이 바로 이 경의 大義이니라." 일심은 有와 無, 眞과 俗, 事와 理 등을 융합하였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고, 모든 법을 포괄하여 파하지 않고 세우지 않는 것이 없는 道의 실체이자 근원이다. 원효의 말대로 대승법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밖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다. 그러나 진리가 항상 진리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이 미혹하여 이를 착각하여 일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다시 원효의 말을 빌리면 "다만 무명이 스스로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켜서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의 六道에 流轉시킨다. 미혹하여 세계를 주와 객, 본질과 현상 등 둘로 나누어 보나 세계의 실체는 이를 하나로 융합한 것이며 그렇다고 하나에 머물지도 않으므로 하나가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고요하고 그득하여 무명을 떠나 이를 수 있는 청정의 세계이기에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거나 극단에 서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절충하여 그 중간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差延이어서 우주의 시작이나 끝처럼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어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無에 머물지도, 모든 것을 긍정하는 有에 머물지도 않는다. 세계의 실체인 일심은 유와 무, 현전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이며, 차이를 통하여 양자를 드러내고 모든 것을 포섭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비어있는 곳이다. 일심은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시켰기에 궁극적 진리가 아닌 事이면서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俗하지 않은 理라고 해서 그것을 곧 궁극적 진리라고 할 수도 없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울렀기에, 현상이면서 이를 통하여 본질을 드러내고 본질이면서 현상으로 나타난다. 둘을 융합시켰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 진리와 허위, 깨달음의 세계와 미망의 세계, 부처의 삶과 중생의 삶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한 편에 기울지 않으면서도 절충한 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긍정하여 세우지 않는 것이 없는 唯識과 모든 것을 부정하여 부수지 않는 것이 없는 中觀을 종합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모든 것을 세운다. 그리하여 일심의 철학은 파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실로 이치 중에 지극한 이치요, 인간의 이성과 의식의 견지에서는 그것을 초월한 무엇이기에 그렇다고 할 수 없으면서도 (자연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고 融攝시키는 진리 중의 대진리이다. 때문에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야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차연은 다른 것을 드러내면서 자기는 비어있는, 무엇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 점에서 道, 일심과 통한다.
差延, 道, 一心은 본질도, 실체도 아니다. 사건도 존재도 아니다. 개념이나 원리는 더욱 아니다. 인간은 편의상 자기 앞의 세계를 주와 객, 事와 理 등으로 나누어 이해하나 세계의 실체는 원래 하나이다. 이런 인간의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세계의 실체는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언어기호나 인간의 생각 저 너머에 있어 언어기호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를 표현할 수도, 이에 다다를 수도 없다. 정작 이것들은 비어있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것들은 소리도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볼 수도 없으며 홀로 우뚝 서 있으며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에 두루 어디에나 번져 있어 우주가 운행하는 것에서부터 나뭇잎이 떨어지고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에도 스며있다. 태초에 어떤 원리에 따라 빅뱅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우주를 만들고 우주가 삼라만상을 만들었듯, 천지가 만들어지기 전 우주가 혼돈일 때부터 차연과 일심과 도는 있었다. 이것은 형태가 없이 無이지만, 모든 만물이 이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이들은 만물의 모체이다. 이들은 어디에나 번져 나가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고 크고도 크고 멀고도 멀어 이를 알 수도, 무엇이라 이름할 수가 없다. 엄격히 말하여 차연과 도와 일심은 언어기호로 `차연, 도, 일심`이라 부르는 순간 그것이 아니다. 진리를 펴고 중생들에게 이를 전달하려니 억지로, 이에 이르는 한 방편으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무엇이라 이름지을 수 없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는 이를 나타낼 수 없지만 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억지로 `e`자를 `a`자로 대치하거나 道나 一과 心을 끌어들여 그리 명명한 것이다. 이처럼 차연과 일심은 이성중심주의와 언어를 해체하고 이를 통하여 진리에 이르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진리, 실체, 본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면서도 정작은 자신은 비어있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름으로는 이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음도 통한다. 하지만 화쟁의 사유는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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