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현중은 내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떠오르게 한다.
칠레의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이 소설은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이다.
‘바닷가의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전해주는 이는 우체부 ‘마리오’다.
네루다의 시를 필사하고 흉내 내던 마리오는 자기만의 ‘메타포’를 찾는다.
그리고 시인이 된다.
황현중 시인은 바다가 있는 부안에서 태어나 우체부가 되고 우체국장이 되었다.
시를 읽으면서 그의 ‘네루다’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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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공부를 지독 못했다/ 시험지에 늘 날카로운 사선 가득했으니/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살갗에 칼날 스치는 것처럼 아프지만/ 딱 한 번뿐이었던 내 인생의 환희/ 오답을 정답으로/ 내 시험지를 사선 대신/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가득 채우시며/ 너는 오답이 아니야, 하시던/ 아픈 그때/ 아름다운 나의 선생님/ 나머지 공부로 저물어 가는 창 너머/ 내 가슴 파고들던 분홍분홍 목백일홍/ 어려운 이 세상/ 나는 여전히 오답으로 살기에 바쁘지만/ 오답의 눈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답 목백일홍 분홍분홍
- 「목백일홍 분홍분홍」 전문,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힘들고 고달플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위로의 기억’은 생의 디딤돌이 된다.
건설현장 노동자로, 농부로, 방황하던 그가 안정된 직장을 잡은 것은 저 기억 때문일 것이다.
‘너는 오답이 아니야.’를 들었을 때 목백일홍이 만개하던 한여름이었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답은 누군가의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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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낮은 포복으로 간다/ 손에 손잡고/ 촘촘히 껴안고 깊이 포개고/ 공사장 물웅덩이 곁으로/ 고층빌딩 그림자 밑으로//
아무도 모르게/ 비정규직 순이네 뒤안에/ 푸르게 아주 푸른 숨을 불어넣고/ 살며시 놓고 가는 한 잎,// 네 잎 클로버
- 「토끼풀」 부분
시인은 공사현장 노동자와 비정규직의 아내가 사는 가난한 집에 희망을 놓고 간다.
‘위로’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 태반이 최저시급을 받는 비정규직들이다.
같은 집배원 일을 해도 정규직을 빼면 모두 비정규직이고 그 수는 훨씬 많다.
천성이 따뜻한 시인은 연일 뉴스를 달궜던 비정규직 집배원 죽음에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네루다 같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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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이 좋을 때가 있다//
고단한 하루가/ 모두 물러나고/ 조용히/ 구석에 등을 기대며/ 두 발을 뻗으면//
이제 좀 살 것만 같은//
별을 기다리는 작은/ 꽃 한 송이 될 것만 같은
- 「구석이 좋을 때」 전문
시집의 표제인 「구석이 좋을 때」 이다.
상처받은 하루, 발을 뻗고 기댈 데가 있는 구석은 치유의 공간이다.
‘이제 좀 살 것만 같은’ 시인의 저녁이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저녁의 휴식이 쓸쓸하다.
5월의 시집이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가난한 생선장수 어머니와 농부 아버지를 그리는 시가 뭉클하다.
‘천박한 향수로 죄를 감추고 사는 얼간이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죄 없는 아버지 냄새 그리운 똥 냄새, 그랬던 거야.’(「아버지 냄새」 부분),
‘세상에 바깥이 없다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겠어/꽁꽁 언 내 손을 엄니가 어떻게/따뜻한 아랫목에 넣어주겠어’(「바깥에 대하여」 부분)
바닷바람이 부는 시인의 고향 부안을 생각한다.
세상의 다른 슬픔에게 온기를 내어주는 ‘따뜻한 슬픔’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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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해설이나 표사를 읽지 않는데 오늘 처음으로 읽었다.
놀랍게도 황정산의 해설에 표사가 시인 김명리다.
영화 <일 포스티노> 사운드 트랙
Il Postino soundtrack
https://youtu.be/95IvXVD0U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