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천재, 날개를 접은 불새에게
노혜경|시인
남정국은 1958년생, 소위 말하는 58년 개띠의 일원이다. 고교추첨제 1기로서 바로 그 윗학년 선배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문화를 지닌 세대다. 남정국은 1974년 부산고등학교 제30기 졸업예정으로 입학했다가 1학년을 마치기 전 휴학했다. 그리하여 다른 58년 개띠들보다 한 학년아래로 1975년에 진입했다. 그는 1976년 초 서울 여의도고등학교로 전학했다가 1978년 고려대 인문대로 진학, 그해 가을에 북한강에서 사망했다. 나는 1975년 1학기 초 남정국 및 몇 명의 문학도들과 시동인회를 결성하는 일에 참여했고, 부산시 고교생들의 연합문학회이던 전원문학회 활동을 잠깐 함께 했다. 서울로 전학간 그는 고려대 입학 후 이념서클이던 창현교회 학생부에 소속되면서 의식화교육을 받는 한편, 고대문우회 활동을 하고 키에르케고르 등 생철학자들의 저술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친구들과 나는 그가 남긴 시와 산문, 일기 등을 모아 유고집을 펴냈고, 그 뒤 46년이 흘러 『불을 느낀다』라는 제목의 그 시집이 정식 출판되었다. 이것이 남정국의 간단한 행장이다.
그는 두 번 돌아왔다. 한 번은 죽었다는 소식으로 한 번은 되살아났다는 소식으로. 남정국을 시인으로 등재하는 근 반세기만의 이 사업에 기억의 한 자락이 불려 나왔다. 우리는 1975년 당시 부산시를 휩쓸고 있었던 고등학생들의 문예대폭발 와중에 만났다 75년 고등학교 2학년에 막 진입한 58년개띠들은 고교 추첨 제1기라고 하는 장단점을 골고루 누리고 있었던 세대였다. 장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만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저 일류학교 이류학교라고 하는 학교 서열 차별의 마지막에서 그 차별에 몹시 저항하며 성장한 세대다. 문학을 꿈꾸던 문학청소년들도 마찬가지여서 학내 문예반 선배들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끼리의 연대가 중요했었다. 특정 학교가 아닌 세대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당시 우리의 중요한 현안이어서, 자기 학교 안의 폐쇄된 동아리가 아니라 다른 고등학교들과 연합하여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고자 애썼다.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 방송 등 각분야에서 동아리를 새로 결성하거나 또는 선배들과 차별화되는 우리만의 모임을 꾸렸다. 오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남정국이 75년 초봄에 결성한 7인 동인회인 [상]이라든가 같은 해 가을에 동래고 윤원구, 성모여고 임인애 등 7인이 결성한 원시림 동인회가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문학동인회이다. 그중에서도 상 동인회는 가장 먼저 결성한 동인회이고 성공적으로 동인지 출간을 해낸 드문 경우였다. 동인지를 내기 위해 상당히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서로의 시에 대한 나름 날카로운 합평회 등등을 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사정상 동인지 발간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초기 활동을 통해 시의 즐거움과 위의를 접함으로써 시를 생의 목적으로 하는 출발점에 섰다.
이때의 이러한 분위기가 어떻게 가능했던가를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1975년도 또는 1974년 이후의 부산 문단에 대해서 조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74년 또는 75년이라고 하면 10월 유신 폭정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이래 남과 북이 완연하게 평행우주독재를 펼치던 무렵이기도 하다. 월남전 패망과 육영수 피살 등으로 그야말로 전운이 감돌던 시절. 특히 월남 패망에 따라 난민들이 부산항으로 입항한 사건과 긴급조치 9호 발동은 서울뿐 아니라 부산도 먹구름으로 뒤덮었다. 고등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결성되고 교련수업도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뜻밖의 문예부흥 기운이 부산을 감싸고 알 수 없는 자유의 냄새가 우리를 매혹한 것을, 부마항쟁을 앞질러 예비하던 부산의 운명적 경로였다고 말하면 과도한 것이 될까.
비록 정치현실은 나날이 암울해갔지만, 부산 문단은 뜻밖의 활기를 보이며 부상하고 있었다. 박지열 이달희 유병근 김창근 박송죽 강남주 황양미 이해웅 정대현 박청륭 신진 하현식 이상호 김수경 차한수 임종성 이문걸 진경옥 등 전례없이 많은 시인들이 등단을 하고, 부산시협 기관지인 《남부의 시》가 창간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성인문단의 활기 못지 않게 우리 청소년 문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아마 평준화와 추첨제라는 두 가지 제도가 유난할 정도의 평등의식을 불러일으킨 점, 당시 한국문화에서 문학이 차지한 비중이 대단히 컸던 점, 아방가르드 전통이 강했던 부산 시단에 속속 등장한 고교 교사 시인들이 자기학교 문예반에 끼친 영향, 바로 그 전해의 KSCF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의 여파가 여전히 강했던 것 등이 복합된 것이었다고 본다. 남정국의 부산고만 하더라도 조달곤 시인이 거쳐갔으며 부산여고의 양왕용, 데레사여고의 김창근, 내가 다녔던 중앙여고에도 이몽희 시인이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문인은 아니었을지라도 고교생에게 교과서 밖의 세상에 눈뜨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혁명적이었다. 주로 전원문학회에 속했던 우리들은 몰래몰래 사상계니 씨알의 소리 같은 잡지를 읽었고, 미당이 장악했던 주류 문예반 분위기로부터 이탈해 「오적」 같은 시를 읽기도 했다. 《현대문학》보다 《문학사상》이나 《창비》 같은 잡지를 탐독한 것도 당대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우리 문청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시들은, 1974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소위 ‘오늘의 시인업(業)서’였다.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叢)서’의 총 자를 업으로 짐짓 잘못 읽어 부른 별칭으로, 미당을 말당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말장난이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첫권으로 하는 이 시리즈는 70년대 문청들에게 시의 밑그림을 그려준 시집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번 김춘수 『처용』을 비롯해, 3번 정현종 『고통의 축제』, 4번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5번 강은교 『풀잎』 이렇게 5권이 한꺼번에 나오자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특히 『거대한 뿌리』는 옆구리에 끼고다니며 외다시피 하던 시집이 되었다. 「오적」처럼 직접적이지 않으면서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기법들을 아우르는 김수영의 시는 현대시로 진입하는 대문과도 같았다. 전시 문예로부터 비롯한 아방가르드 문학의 자장 안에 있던 부산의 문청들은 기존의 현대문학파 시인들과는 결이 달라보이는 시인‘업’서의 시들을 일종의 업으로 여긴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남정국은 두드러졌다. 저 시인업서 시리즈를 우리 문학소년들의 세계에 재빨리 데리고 들어온 것도 그였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나 독일 표현주의 시인들, 랭보, 보들레르, 릴케, 휄더린 등의 이름이나마 읊조리게 해준 것도 그였다. 하지만 그의 시는 더 과감했다. 고백시적 요소와 시어의 무게감있는 사용 등이 그의 시를 습작기 소년의 시가 아닌 젊은 시인의 시로 보이게 했다. 가끔 용감한 어휘가 튀어나오면 남몰래 질투가 났던 기억도 있다.
남정국은 잊을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이다. 75년 한해 조우한 우리 문우들뿐 아니라, 전학간 여의도 고등학교에서 그를 딱 한 번 만난 이능표 시인(여의도고 문예부장)은 『불을 느낀다』 북토크에 와서 그의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뚜렷한 얼굴선, 안경 너머 깊은 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낮고 단호한 목소리, 공력이 느껴지던 글씨체… 소위 ‘한눈에 반한’ 남녀 관계가 아님에도 채 5분도 되지 않는 단 한 번의 만남이 4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처럼 생생하”다 라고. 그가 거쳐간 단체들, 창현교회 대학부나 고대 문우회 역시 그를 오래 기억하고 기일이면 추모의 글을 카페에 올리곤 했다. 사람으로서도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남정국을 잊지 못하게 한 것은 역시 시다. 어딘가 누군가의 서랍 속에 잠들어 있을지 모를 그의 다른 시들이 보지도 못한 채 그립다. 김수영과 정현종, 황동규, 강은교 등이 그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시로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 아이는 천재구나, 나는 소리없이 아우성쳤다.
장차 하고싶은 일이 무어냐 묻는 고교 친구에게 “시”라고 대답했다던 그는 소원대로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남았다. 이 시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불이 되어 타오르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