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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놈 탈출기] 류문상
#1. 영의정댁 가옥 -낮
/ 영의정댁 마당. “쾅!” 중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리며, 고관 복장을 한 영의정(60대)이 진노로 표정 일그러진 채 마당에 들어온다. 머슴 하나가 눈치 보며 영의정에게 쟁반에 찻잔을 건네는데, 영의정은 마시지도 않고 그대로 찻잔과 쟁반을 바닥에 엎어버린다. “와장창!” 마당에 떨어진 찻잔이 박살나면, 흩어져 있던 머슴들이 깜짝 놀란다.
영의정 당장 그 놈부터 잡아오너라!!!
머슴일동 (서로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 예!
머슴들, 크게 외치며 이리저리 바삐 움직인다.
/ 영의정댁 뒤뜰. 가지런히 쌓인 긴 장작대기를 몽둥이 삼아 차례로 하나씩 집어드는 머슴들, 이 상황이 꽤나 익숙한 듯 민첩하게 움직인다.
/ 영의정댁 가옥 마당. 머슴들이 각각 손에 몽둥이를 들고 이리저리를 살핀다.
잔뜩 노한 얼굴의 영의정, 날카로운 시선으로 집안 주변을 훑는다.
#2. 광 안 -낮
구석에 몸을 웅크린 두 사내, 손에 들린 접부채를 착! 펼쳐서 짜증 섞인 표정으로 부채질을 하는 호연(24)과 나란히 앉은 점백이(24), 왼뺨에 큼직한 붉은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의정(E) 어디 한 번 꼭꼭 잘 숨어 봐라, 요 놈!
잡히거든 오금이 지리게 될 터이니!
점백이 (불안) 도련님, 자수하는 게 매를 덜 맞지 않을 런지...
호연 공자님이 가라사대!
점백이 (또 시작이구만... 피곤한 얼굴 되고)
호연 (단호한) 군자는 평안하고 차분하나, 너 같은 좀팽인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했다. 허긴, 점백이 니가 공자를 알겠냐?
(접부채를 접어 점백이 이마를 툭! 치는)
점백이 (이마 어루만지며 억울한) 저 같은 천것이 공자를 어찌 압니까,
그리고 제 이름은 점백이가 아니라...
호연 어허! 주인이 점백이라면 점백이가 되는 거지!
큰 점이 있는 노비 이름으론 딱 적당하지 않느냐?
이 때, 쿵! 쿵! 거칠게 광의 문이 흔들거린다.
머슴(E) 광문이 잠겼습니다, 대감마님!
영의정(E) 옮거니! 당장 불을 지펴버리게!
오늘이야말로 이 망나니의 못된 버릇을 고쳐놓겠다!
그 소리를 들은 호연과 점백이는 마주보며 멍해진다. 곧, 동시에 벌떡 일어나 잽싸게 나가려는 두 사내. 순간, 호연은 점백이를 사정없이 밀쳐버리고 허둥거리며 문으로 향한다. 너무한다는 듯, 호연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점백이.
#3. 광 앞 -낮 (수정)
“쾅!” 광문이 거칠게 열리고, 바닥에 나자빠지는 호연과 점백이. 너덧의 머슴들이 몽둥이를 들고 호연을 둘러쌓는다. 호연이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보면, 울그락 불그락... 분노로 표정 일그러진 영의정이 있다.
영의정 너 이놈! 그간 대낮에 외상으로 술을 먹고,
숱한 아녀자들을 희롱한 것이 사실이렷다?!
호연 누명입니다, 아버님! 소자 억울합니다!
영의정 누명? 조정에까지 소문이 자자하다, 이 놈!
너 하나 땜에 우리 가문이 난봉꾼 집안이란 말을 들어야 하느냐!
호연 적적한 아낙들에게 말 몇 마디 붙여본 건 사실이나,
소인도 낮술은 금한다는 소신이 있사온데...
영의정 대동강에 처박혀도 조동아리만 떠오를 놈 같으니. 너는 영의정 의 아들로써 모범적인 행실을 해야 한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
호연 아버님을 닮아 타고난 풍채가 수려해 벌어진 사단을,
누굴 원망하겠나이까.
영의정 그래도 이놈이?! (하인들에게) 말아버려.
호연 예에?!
하인들, 우르르 호연에게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멍석으로 돌돌 말아버린다. 몇 몇 하인은 몽둥이 든 채로 거창하게 몸까지 풀고... 호연은 정신없이 멍석에 말리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밀어 말을 잇는다.
호연 잠깐만, 잠깐만요. 아버님!
바로 오늘이 과거 시험 날인 것을 아십니까!
마침 준비를 마치고 시험장에 가려던 참이었사옵니다!
영의정 (멈칫하고 놀라는) 과거를 치러보겠다?
벼슬하기는 옥황상제도 싫다하던 네 놈이 말이냐?
호연 예! 과거 치르겠습니다! 이러다가 늦습니다, 어서 보내주시라구요!
영의정 (기쁜 내색이다) 네 놈이 드디어 출사를 해보겠다고...?
그러면 멍석에서 빠져나와 달려가는 호연, 허겁지겁 점백이가 따른다.
#4. 한양 거리 -낮
불만 가득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호연과 뒤따르는 점백이. 행인들은 행여나 호연과 부딪칠까 싶어, 눈치 보며 이리저리 길을 비켜준다.
점백이 진짜 시험 보실거요? 곧 죽어도 벼슬길은 싫다더니?
호연 아니! 내가 이미 전부 가졌는데,
굳이 벼슬에 나가서 개고생 할 이유는 또 뭐야?
어디 나 하나 벼슬해서 세상이 달라지겠냐?
그 때, 호연의 눈길을 사로잡는 주막 풍경. 사람들이 모여 탁주를 사발로 들이켜는 모습에 호연은 침을 꼴까닥 삼킨다.
점백이 낮술은 안 하신담서...?
호연 탁주가 술이냐? 음료지.
점백이 (오호라... 기대에 찬 눈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데)
호연 ... (못마땅하게 점백이 보고) 넌 뭘 기대하구 있어?
저 쪽 팥죽집 가서 허기나 때우고 오너라.
점백이 (실망한다)
#5. 과거장 입구 -낮
‘임진년 소과초시’ 현수막이 걸렸다. 선비들이 모여 소란스러운 분위기. 입구에 놓인 단상에 붓과 종이가 쌓여있다. 선비들이 붓과 종이를 챙겨서 과거장으로 들어가는데, 단상에 놓인 붓을 동시에 집는 호연과 선비1, 서로를 노려보고.
선비1 내가 먼저 집었소이다.
호연 난 이 붓이 마음에 드니, 다른 걸 쓰시게.
선비1 (인상 쓰는) 쓰시게? 초면에 말이 좀 짧다?
호연 (가소로운)
선비1 내가 뉘집 자제인줄은 알고 까부는 게냐?
선비2 (급히 선비1에게 수군거린다)
저 이가 바로 영상대감 외동아들 이호연 도령일세!
선비1 (급 사색이 되고... 어색하게 웃는) 쓰시지요...
호연 어흠!
선비1 이것도 인연인데, 시험 끝나걸랑 뫼실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호연 공자님 가라사대, 나보다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하셨지...
(혀 삐죽 내밀고, 과거장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선비1은 저걸 그냥 확! 쫒아갈까 하고 성질나는데, 선비2가 말린다.
#6. 과거장 안 -낮 (수정)
열을 맞춰 가지런히 자리에 앉은 호연과 선비들. 단상에 선 시험관이 들고 있던 현제판을 들어 올리면, ‘精一執中, 建中建極’라 적힌 과제가 내려온다.
호연 (중얼) 정과 일은 어떻게 다르며,
잡으라는 집과 세우라는 건은 그 뜻이 어떻게 다른가...
모든 선비들은 문제가 어려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감한 기색인데... 호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여유롭게 술술, 종이에 답을 적어나간다. 빠른 손놀림으로 술술 과제를 푸는 호연의 모습에 선비들은 감탄하고 수군거린다.
(시간경과)
시험관 마지막 과제요~ 땅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염치를 기르게 되는데, 노비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이요, 그처럼 대대로 천한 일을 해서 되겠는가?
호연은 이번에도 자신 있는 얼굴로 붓을 빼어드는데... 답을 적으려던 호연, 갑자기 멈칫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당황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끝내 답을 못 적는 호연.
#7. 한양 거리 -낮 (수정)
깊이 생각에 잠겨 길을 걷는 호연과 따르는 점백이.
점백이 그 마지막 문제... 일부로 안 쓴 거죠?
호연 ... 일부로 안 쓴 거 아니야.
점백이 에이, 벼슬하기 싫으니깐 일부로 안 썼잖아요.
호연 노비는 몽둥이로 다스린다... 이리 쓸 작정이었지.
허나 그러기엔 문제에 함정이 있을 것 같아서.
점백이 ! (순간 호연이 오싹하다)
호연 오늘 일진도 사나웠는데, 청루각 가서 월향이 얼굴이나 봐야겠다.
점백이 청루각...이요? 오늘은 딴 데 가시죠?
거기 무지 붐빌텐데...
호연 아니, 청루각 간다니깐?
점백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시면... 제가 가서 자리를 맡아놓겠습니다!
(후다닥 달려가 버린다)
호연 (의아하게 점백이 보며) 왜 저래?
#8. 청루각 뒤편 –낮
인상 험악한 인신매매단 두목이 삐딱하게 앉아 엽전을 세어본다. 그 앞엔 기가 팍 죽어서 두목의 눈치를 보는 기생 월향(21)이 있다.
두목 장난 똥 때리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빌린 돈에 반도 안 되어?
(험악하게 월향이 노려보면)
월향 나머진 담달까지 드릴게, 응? (애써 눈웃음 쳐본다)
두목 (버럭) 월향이 네 이 요망한 년!
어디 음탕시럽게 눈웃음을 치고 있어!
월향 (발끈) 그럼 먹고 뒤질래두 없는데 어쩌라고!
두목 이 년이? 나는 쩐 앞에선 애미 애비도 없는 놈이야!
두목이 월향을 향해 벌떡 일어나 손찌검 하려고 선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점백이가 두목에게 달려들어 몸 바쳐 막아낸다.
점백이 (힘껏 두목을 움켜 안고) 왜 이러십니까, 말로 하시구랴!
월향 (놀라 점백이를 본다) 너...
두목 이거 안 치워? 하이고, 상것들끼리 아주 잘들 논다.
월향 대체 왜... 왜 아부지 노름빚을 내가 갚는데!
두목 내 말이! 그냥 느이 아부지 노비로 팔면 돼, 다 해결 돼.
근데 니가 말렸잖아? 됐고, 네 년 몸을 팔던 뭘 하던,
자정까지 돈 갖구와. 못 할 거면 아부지랑 작별인사하고.
(점백이를 툭, 밀쳐내고는 가버린다)
점백이 (걱정스럽게 월향 어깨에 손을 대려는데) 괜찮아?
월향 (차갑게 점백이 손 쳐내고) 왜 왔어, 또?
점백이 어, 그게... 지금 우리 도련님이 여기 오고 있는데...
너 울 도련님이 진상 부려서 싫다며, 그러니까 오늘 그냥 쉬라고.
월향 넌 지금 내 꼬라질 보고 쉬란 말이 나와?
점백이 나는 그냥 너 생각해서.
월향 생각만 하면 뭐? 돈이 나오니, 쌀이 나오니?
아니면, 너가 나대신 돈 구해올 수 있어?
점백이 돈? 돈은...
월향 못 하잖아, 넌 그저 머슴이니까. 난 그저 기생이고... (가버린다)
점백이 (섭섭해서, 가는 월향이 보는)
#9. 청루각 앞 -낮
호연이 도착하자, 기다리던 점백이가 맞이한다. 호연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점백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막는다.
점백이 저... 도련님.
호연 ? (돌아보면)
점백이 (주린 배 어루만지며) 오늘 한 끼도 채우질 못 했는데,
이따 안주거리라도 좀 덜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요?
호연 니가 지금 나랑 겸상 하자는 거냐?
점백이 그게 아니고... (애써 웃으며) 아까 팥죽집이 문을 닫았지 뭡니까.
씹다 남는 거리라도 챙겨주시면...
호연 그럼 눈치껏 주방에서 누룽지라도 긁어 먹으면 되지,
왜 나한테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점백이 아니, 소인은 그게 아니옵고!
호연 어라? (기분 상하고) 니가 언제부터 내 앞에서 정색했냐? 어?
야, 점백이... 간만에 푸닥거리 한 번 할래?
점백이 ... (분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월향(E) 오라버니야?
호연이 반색하며 보면, 월향이 분위기를 살피더니, 냉큼 다가와 호연의 팔짱을 낀다. 대조적으로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듯, 고개 푹 숙이고 굳어버린 점백이.
월향 뭐해, 비 오는데. 어서 안으로 들지 않고?
호연 허허, (화가 풀어지는) 이놈. 월향이 덕에 무사한 줄 알아?
호연과 월향, 함께 기생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순간, 월향은 점백이를 조금 동정하듯, 안타깝게 돌아본다. 그러나 점백이는 그런 월향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10. 청루각 방 안 -밤
술에 잔뜩 취한 듯 눈이 반쯤 풀린 채, 월향의 어깨에 기대어 흥얼거리는 호연.
월향 (불편한 표정 짓다가, 호연과 마주치면 급히 방긋 웃는)
머슴을 저리 굶기다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구...?
내가 가서 요깃거리라도 챙겨 줄까...?
호연 도망은 지 깟놈이...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딜?
하여튼 상놈들 잘 해주면 안 돼, 조져야지.
(하다가) 근데, 니가 왜 그 놈을 신경 써?
월향 (당황) 내가 뭘...
호연 좋다, 오늘 니 머리 올리게 해주면, 해달란 거 다 들어줄게?
(월향이 덥썩 안아버리는데)
월향 (당황하며 호연을 밀어내는) 오라버니 잠깐만!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뭔가 생각난다)
두목(E) 자정까지 돈 갖구와. 못 할거면 아부지랑 작별인사하고.
호연 또 또 그 소리! 대체 뭐가 문젠데!
호연 야, 솔직히 너도 내가 싫지 않잖아? 당연하게도.
월향 (진지하게 본다) 정말... 해달란 거 다 해줄 거야?
호연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거린다)
#11. 청루각 뒷마당 -밤
‘팍!’ 소쿠리에 담긴 부침과 전 따위가 바닥에 널부러진다. 월향이는 당황스럽고, 어이도 없어서 점백이를 노려본다.
점백이 (분한) 뭐냐? 이제 이거 먹고 떨어지라 이거냐?
월향 그래... 이거 먹구 떨어지라고 그런다, 왜?
점백이 정신 차려, 그 놈한테 넌 그냥 하룻밤 노리개일 뿐이야!
월향 그럼 안 되니? 그래도 너 같은 상것보다야,
양반집 첩살이가 백배는 나은 거거든?!
점백이 (슬프다) 그래서, 맘에도 없는 놈한테 안기겠다고?
월향 (좀 안쓰럽다) 그간 나 생각해준 마음은 알겠는데...
이제 어쩔 수 없어, 너도 그만 마음 접고 분수에 맞게 살어, 응?
점백이 (버럭) 나라고 상놈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월향 (움찔하다가 화낸다) 해봐, 그럼! 해보라고!
(울컥) 당장 울 아부지 빚 때문에 팔려가게 생겼는데,
니까짓게 뭘 어쩔 수 있으면 해보란 말이야! (확 돌아서 가버린다)
점백이 (모멸감으로 일그러진, 굳게 쥔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12. 몽타주 (수정)
/ 청루각 앞. 분한 얼굴로 어디론가 달려가는 점백이.
/ 청루각 주방 안. 싸늘한 표정의 점백이, 품에서 작은 약봉지를 꺼내 일각에 놓인 술병 안에 털어 넣는다.
/ 청루각 방 안. 월향이 호연에게 술 한 잔 따라주면, 흐뭇하게 단숨에 술을 비우고, 빈 잔을 내밀어 보이는 호연. 그런데 월향이 병을 흔들어보면, 비어버렸다.
/ 청루각 주방 안. 월향은 점백이가 약을 타 둔 술병을 들고 나가는데,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점백이.
#13. 청루각 방 안 -밤
완전히 바닥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어버린 호연의 모습. 월향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몰라 안절부절 호연을 흔들어보고 있는데, 점백이가 낡은 옷가지들과 검은 숯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월향 이게 무슨 일이야... (하다가) 네 짓이였어?!
점백이 (호연 옷 갈아입히며) 니 아부지, 내가 지켜줄게.
월향 (점백이 뜯어말리면) 왜 이래! 미쳤어?
점백이 (뿌리치고) 늦었어! 물은 엎질러졌다고!
월향 ... (불안하고... 복잡한 시선으로 점백이를 본다)
점백이 (월향의 손을 꼭 잡고 보며)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알았지?
한편, 약에 취해서 일어날 기색이 없는 호연...
#14. 거리 일각 -밤 (수정)
호연을 업고 헉헉거리며 거리를 달리는 점백이. 산발한 머리, 허름한 옷을 입은 호연의 모습이다.
점백이 어릴 적에 울 엄니 젖까지 뺏어 먹고...
이제는 여자까지 뺏어 가면 안 되잖아.
(울분이 터진) 또 아무리 때린 놈은 기억을 못 하는 법이래두...
네 놈만은 나를 점백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잖아!
#15. 거리 뒷골목-밤
손수레 위에 정신 잃은 거지꼴의 호연이 올려졌다. 이리저리 호연의 몸을 살펴보는 인신 매매단 두목.
점백이 (불안한 듯 주변 살피다가) 빨리 좀 하구려.
두목 몸이 성한지는 봐야 할 거 아냐?
점백이 사실... 이놈 깨어나거든 속 좀 썩을 거요. 내 솔직히 말 하겠수,
이놈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지가 양반이라고 우기는 놈이우.
두목 뭐어? 그럼 곤란하지! 제 값은 못 주겠는데.
점백이 아니, 아까 월향이가 쩐으로 준 것도 있잖수.
두목 아아아,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
(낄낄) 월향이는 좋겠네, 기둥서방을 아주 잘 둬놔서.
점백이 혹시... 이후에 달아나거나... 풀려난다거나 그럴 일은?
두목 그럴 일 없수, 딱 적당한 곳으로 가게 되니까.
점백이 적당한 곳?
두목 백상도라는 곳인데... (히죽) 들어갔다 하면 함흥차사지.
#16. 배 갑판 위 /바다 가운데 -낮 (다음 날)
새벽의 어두운 바다 한 가운데... 들썩거리는 파도에 출렁거리며 항해하는 낡은 나룻배 위. 갑판에는 아직 정신을 잃은 채 뻗은 호연이 있다.
잠시 후, 급히 몸을 일으켜 배 난관을 붙잡고 바다에 구역질하는 호연,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눈을 끔뻑거리며 괴로운 표정이다. 결국 다시 쓰러지듯 눕는 호연, 스르륵... 눈이 감기고, 정신을 잃어버린다.
#17. 영의정댁 가옥 마당 –낮
화들짝 놀라는 영의정과 굽실거리는 점백이.
영의정 떠났다니? 호연이놈이 떠났단 말이냐?
점백이 (눈치 보며) 마지막 과제를 풀지 못 하여 크게 상심하시더니...
영의정 그래도 그렇지! 일언반구도 없이 어딜 갔단 말이냐!
점백이 극구 말렸사오나, 함께 가면 공부의 의미가 없다하시어...
소인이 잠시 뒷간에 간 사이에.
영의정 허허! 당장 관아에 신고하여 찾아내어라!
점백이 예에... (몰래 안도의 한숨 쉰다)
영의정 (그러나 뭔가 미심쩍은 눈으로 점백이를 본다)
#18. 섬 나루터 -낮
최집사(40대)가 손수레에 실린 호연을 살핀다. 최집사 뒤에는 체격이 큰 파수꾼들이 팔짱끼고 섰다. 삐딱한 자세로 서서 다리를 달달 떠는 인신 매매단 두목.
두목 아, 살 거야, 말 거야?
최집사 있어봐...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며?
두목 대신 싸게 주잖어, 나 남는 것도 없어.
최집사 하긴, 우리가 지금 찬밥 뜨신밥 가릴 때가 아니지.
두목 이번엔 노비가 셋이나 토겼다믄서?
최집사 해서, 이제부턴 아예 듬직한 감시조들을 딱 붙였거든.
(하고 파수꾼들을 가리켜보인다)
두목은 아쉬운 듯 입맛 다시다가 품에서 노비문서를 꺼내 최집사에게 준다. 최집사는 호연의 손바닥을 펴 보며, 노비문서의 지장과 일치하는 지 확인한다.
#19. 행랑채 안 -낮
방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는 호연, 인상을 찌푸리며 슬그머니 눈을 떠본다. 아직 멍한지... 머리를 감싸 쥐며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호연 뭐야, 여기는... 뉘 집인지 손님 대접이 막장이로구만...
(군데군데 떼가 탄 손바닥을 둘러보면, 질색을 하고) 에잉...
점백아... 점백아!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허름한 노비 팔복이(40대 초반).
호연 뭐냐, 넌? 여긴 어디고?
팔복이 (빨리 나오라고 손짓한다)
호연 어흠... 지난밤에 내 많이 취해 정신이 없었으니...
곧 주인에게 인사를 함세, 그 전에 세숫물 좀 떠주게.
팔복이 어버버버... (어눌하게 말을 더듬고, 고개 갸웃하며 어리둥절)
호연 귀 먹은 놈이구만. 세수! (세수 시늉하며) 세숫물 떠오라고!
#20. 사랑채 앞 -낮 (수정)
거지꼴을 한 줄도 모르고, 거만하게 뒷짐 지고 거니는 호연.
호연 이 좋은 집에서 손님 대접이 이따구니... 인심 참 후하다, 후해!
(사랑채 위로 성큼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고 감탄하는)
경치 좋고! (하다가 소리치는) 여기 세숫물은 멀었느냐!
그 때, 어디선가 물벼락이 날아와서 호연을 적셔버린다. “어푸푸...” 머금은 물 뱉어내며, 난데없는 물세례에 어안이 벙벙한 호연, 흠뻑 젖은 자신을 살펴보다가 자신의 누더기 차림새를 알아차린다! 호연이 화가 잔뜩 나서 보면, 물바가지를 들고 선 최집사와 파수꾼들.
최집사 일어났거든 싸게 나와 준비할 것이지, 뭣하고 있어!
호연 (기가 막히고... 부들부들 떨린다) 너... 너 이놈...
(약이 바싹 올라 발 동동 구르는) 당장 네 놈의 주인을 불러와라! 주인을 불러와!!!
최집사 (어이없는) 이거 듣던 대로 완전 정신이 돌아버린 놈이구만?
정신 차려 미친놈아! (품에서 노비문서 꺼내 펄쳐 보이는)
내 주인 어른이, 네놈 주인이니까. 여기 지장 보이지?
호연 (뭔가 싶어 보다가...) 똘쇠가 누군데?
최집사 너.
호연 ... 나? (버럭) 이 놈! 내 이름은 똘쇠가 아니라...
최집사 이 놈?! 주인이 똘쇠라면 똘쇠가 되는 것이지!
네 놈처럼 오락가락하는 노비 이름으론 딱 적당하지 않느냐!
호연은 상황 파악 안 되는데, 파수꾼들이 그를 마당으로 끌고 가면,
빗질을 하거나, 툇마루를 닦는 등, 잡일하던 머슴들이 일제히 호연을 본다.
호연 (파수꾼들 뿌리치려 발버둥) 무엄한 놈들! 놔! 안 놔?
(다급해진) 잠깐만, 뭔가 잘못 됐어! 이거 뭔가 잘못 됐다고!
#21. 가옥 뒷마당-낮
긴 줄에 말린 인삼이 줄줄이 널린 뒷마당. 뜨거운 햇살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선 호연에게 망태기를 건네는 팔복이.
호연 그걸로 어쩌라고? 어.쩌.라.고?
팔복이 (조심스럽게 인삼을 따서 망태기에 넣어 보인다)
호연 ... (거친 손놀림으로 인삼을 뜯어버리는)
팔복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손을 젓는데)
호연 (인삼을 살펴보다가... 그대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팔복이 (헉! 먹으면 안 된다며, 두 손을 절레절레)
호연 (우적우적) 뭔가 큰 착각들을 하는 것 같어...
난 여기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 (다시 한 입 베어 물고)
팔복이 (크게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는데)
호연 아, 점백이놈은 어딜 간 게야... (갑자기 배가 아픈지, 아랫배를
살살 만지고는 인상 찌푸린) 가만, 여기 뒷간이 어딘가?
#22. 가옥 뒷간 앞 -낮
뒷마무리를 못 한 호연이 바지춤을 반만 올린 채, 뒷간에서 나온다. 호연이 “어흠!” 헛기침하면, 팔복이가 맞이한다.
호연 뒷지가 없는데? 자네가 가서 좀 가지고 오게.
팔복 (모르겠다며, 고개 갸우뚱)
호연 뒷.지! 뒷지 몰라? 아나, 양반 체면 다 구겨지게...
(밑 닦는 시늉 해보이며) 이렇게 닦는 거!
팔복 (알았다! 고개 끄덕이며 어디론가 가고)
호연 어흠! (느긋하게 뒷짐 지는데)
팔복 (어디선가 새끼줄 하나 가져와서 건넨다)
호연 (새끼줄 받아들고... 어리둥절) 뭔데, 이게?
팔복 (고개를 끄덕 끄덕)
호연 (영문을 모르겠다가... 뭔가 떠오른 듯, 심각해진다) 설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새끼줄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는데)
팔복 (두 주먹 쥐고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사용법을 알려준다)
호연 ...
#23. 섬 저자거리 -낮
저자거리를 누비며 이리저리 구경하는 사또(50대)와 단아한 자태의 부용(22), 그들을 따르는 그 외 포졸 몇 명과 여종 간난이.
사또 뭍에 있다가 섬으로 오니 네가 무료하지 않을까, 애비는 걱정이다.
부용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공기가 맑아 경치도 좋고,
사람들도 순해 뵈어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또 (끄덕) 원래 섬사람들이 마음씨가 순한 법이지...
골 아픈 사건도 뜸할터니, 애비도 이곳이 꼭 마음에 드는구나.
사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연이 퍽! 사또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사또 어이쿠! (부딪친 충격에 쓰러지고)
포졸일동 사또! (모두 놀라며 사또에게 다가가 허겁지겁 살피는데)
최집사(E) 저 놈 잡아라!
사또와 부용이 무슨 소란인가 싶어 보면, 너머로 눈물, 콧물, 땀 범벅이가 되어 달아나는 호연, 손에는 새끼줄을 굳게 쥔 채... 그의 표정은 충격과 공포로 얼룩졌다. 각각 손에 몽둥이를 들고 호연의 뒤를 급히 쫒는 최집사와 파수꾼들.
호연 이렇게 살 수 없어! 말도 안 돼! 내가 노비라니, 말도 안 된다고!
최집사 이놈아! 당장 서지 못 해!
호연 난 노비가 아니야! 이 경을 칠놈들!
(돌아서서 바싹 다가온 최집사 무리에게 새끼줄을 휘두르는)
최집사 (질색하고 피하며) 야이, 더러운 놈아.
이 때, 파수꾼들이 우르르 호연에게 달려들면, 넘어지며 엉키는 호연과 파수꾼들. 사또와 포졸들은 다가와서 호연과 파수꾼들을 에워 쌓고.
사또 이 백주대낮에 무슨 소란이냐!
일동 (하던 것을 멈추고 보는)
호연 (표정 밝아지고) 아이고, 사또! (엉킨 파수꾼 떼어내고) 놔봐!
사또... 글쎄, 이 무지한 놈들이...
최집사 별 일 아닙니다, 나으리. 새로 온 노비놈이 도망을 하여...
사또 흔한 일을 단속치 못 해 저자를 소란스럽게 해서 되겠나!
호연 나는 노비가 아니라 영의정...!
(하는데 파수꾼이 호연이 들고 있던 새끼줄로 입을 막아버리고)
사또 ? (호연 보는데)
최집사 저, 저! 저 놈이 이제는 지가 영의정이라고...
머리가 살짝 돈 놈입죠, 예...
사또 썩 데리고 물러가게! 부임 초부터 이 무슨 소란인가.
최집사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혼꾸녕을 내겠습니다, 예.
사또 ... (가려다가) 아, 행여 벌을 주다 죽이게 되거든 관아에
신고 정도는 꼭 하게나.
호연 (그 말에... 눈 뒤집히고, 기절해버린다)
호연은 파수꾼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뒷짐 진 사또가 부용 곁으로 돌아온다.
부용 어찌 사람 목숨을 그리 가벼이 논하십니까?
사또 소 한 필만 못 한 것이 노비 값인데, 무슨 가치가 있다 하느냐?
부용 저러다 정말 저 이가 죽기라도 하면...
사또 또 시작이구나! 남의 일이니, 이번엔 제발 참견 말거라.
부용 ... (안타깝게 끌려가는 호연 보다가... 급히 따라간다)
갓난 (깜짝 놀라 부용 따라가며) 아씨!
사또 저, 저! (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성정 누가 말릴꼬.
#24. 가옥 마당 -낮
새끼줄로 꽁꽁 묶인 채로, 무릎 꿇고 앉은 호연. 사방에 파수꾼들이 몽둥이 든 채, 매섭게 그를 노려보고...
최집사 (삿대질하며) 첫 날부터 늦잠질에, 주인댁 삼까지 뜯어
먹고, 도망까지? 대체 네 놈, 어디서 굴러먹던 노비놈이냐?
호연 알았으니, 이것부터 풀어보시오. 교양 있게 대화로 풀어봅시다.
최집사 시끄럽다! 정신이 번쩍 나도록, 매운 맛을 보여주마!
호연 잠깐! 큰 오해가 있소, 나는 노비가 아니라 양반이오!
영의정댁 장손이란 말이오!
최집사 ... 그래서?
호연 공자님 말씀에 상처는 잊되, 은혜는 잊지 말라하셨소.
지금이라도 날 풀어주면 내 다 잊고,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최집사 (안타까운지, 혀를 쯧쯧 차고... 파수꾼들에게 신호를 주면)
파수꾼1 (몽둥이로 호연의 등짝을 내리치는데)
호연 (닿기도 전에 펄쩍 펄쩍 뛰면서 엄살을 부린다) 아아! 사람 죽네!
아이고, 제발... 아야야야야! (몽둥이는 닿지도 않았다)
부용(E) 그 쯤 하십시오!
낮선 여인 목소리에 모두들 돌아보면, 단호한 표정의 부용이 간난을 대동한 채, 마당으로 들어온다.
호연 (부용 보면... 와, 이쁘다... 하고 감탄한다)
부용 사람을 이리 무지하게 다루는 법이 어딨습니까?
최집사 남의 가정사이올시다...
사또는 아씨의 부친이지, 아씨가 아니지 않습니까...
호연 (부용을 의식하고... 근엄한 표정 되어) 이런 무엄하안~
네 놈들이 아무리 탄압해도 대장부인 난 눈 하나 꿈쩍 않으리!
부용 ... 이 자의 비명소리가 온 동네에 퍼져 독서가 되질 않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하시지요.
호연 (쪽팔린다) ...
최집사 (망설이다가, 호통) 이놈! 맘씨 좋은 아씨 덕에 살은 줄 알아!
호연 (한숨 돌리고)
#25. 행랑채 안 -밤 (수정)
팔복이, 노구(60대), 칠복이(6세, 팔복아들)를 비롯한 예닐곱의 머슴들. 보리밥과 나물 반찬이 가득 담긴 큰 바가지 하나를 두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허겁지겁 밥과 반찬을 비벼 맨손으로 밥을 떠먹는 머슴 무리들. 구석에서 양반다리 하고 앉은 호연은 그 모습에 질색을 하는데.
팔복이 (칠복이에게 밥을 먹여주다가, 호연에게 같이 먹자고 손짓한다)
호연 (밥풀 잔뜩 묻은 손을 보면, 찡그리고) 자네들이나 많이 들게.
노구 와서 먹어 이눔아, 내일부터 힘쓰려면 먹어야지.
호연 보쇼, 난 당신들과 한솥밥을 먹을 그런 사람이 아니야.
노구 영의정 외아들이라고? 아, 증거 있으?
네 놈이 양반이라는 증거 있느냐고?
호연 ... (생각하다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여기, 여기 들은 게 증거지.
유가의 성전이라는 논어의 서장이 어찌 시작하는지, 혹시 아오?
노구 뭐? 농어?
호연 (통쾌한 웃음 짓고) 알 턱이 없지!
노비들이 논어를 알 리가 없지! 공부를 한 적이 없거든!
이거야말로 내가 양반이라는 빼도 박도 못 할 증거 아니겠나!
노구 (안타깝게 보며)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호연 이보게, 우리 주인이란 양반은 왜 코빼기도 안 뵈나?
노구 아직 못 뵀나? 강진사라고, 이 섬에선 알아주는 유지야.
호연 강진사라... 내가 강진사만 만나거든...
나 같은 사대부를 건드린 댓가를 보게 해주마... (바드득)
#26. 강진사댁 외경 –낮 (다음 날)
#27. 가옥 마당 -낮 (수정)
각각 청소 하고, 잡일하며 분주한 머슴들. 최집사가 이리저리 다니며 살피는데... 뒤늦게 일어난 듯, 태평하게 기지개를 피며 느긋하게 마당으로 나오는 호연.
최집사 아오, 저거 진짜... 야!!! 다들 일하는 거 보여, 안 보여?
너 셋 샐 동안 안 오면 진짜 죽는다? 하나! 둘!
호연 (그러던지 말던지... 시큰둥하게 하품 한다)
강진사 어흠! (요란스럽게 양팔을 폈다 접으며 헛기침 하는)
그 순간, 듬직한 풍채의 강진사(50대 초반)가 마당으로 들어선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마치 산도적 같은 외모, 코 옆엔 큼직한 점이 있고, 눈썹까지 가릴 정도로 큼직하고 알록달록한 정사관을 쓴 것이 특징이다.
강진사의 등장에 최집사, 머슴들 모두 모여 허리를 조아리는데... 홀로 당당하게 허리 펴고 서 있는 호연, 성큼 강진사 쪽으로 간다.
최집사 저, 저 놈이 기어코...!
호연 (불쑥 끼어들어 앞을 막는) 당신이 강진사요?
강진사 (깜짝 놀랐다) 우왁! 이런 지기미! 육시럴!
일동 (양반의 욕지거리에 놀라 강진사를 보면)
강진사 (주변 눈치 보며 다시 근엄한 척, 수염을 다듬으며) 어흠!
내 잠시 양반 체통을 잃고는 그만...
호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 하겠소.
나는 노비가 아닌, 영의정 이대원 대감의 자제요.
강진사 (실소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뭐래냐, 얘가?
호연 못 믿으시오? 좋소, 내가 양반이라는 증거를 뵈드리지.
내 어려서부터 재능이 영특해 사서삼경, 삼강오륜서를
통달했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외워 보이겠소.
강진사 (당황하는) 뭐라?
호연 당신도 양반이니, 최소한의 배운 바가 있을 것이오.
만약 틀린 게 있다면 지적 해보구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강진사 뭣 하는 게냐! 이 무례한 놈을 끌어내지 않고!
파수꾼들 (우르르 호연에게 달려들어 끌고 가는)
호연 잠깐만! 내가 양반이라는 증거를 보여준다 하지 않소?!
날 풀어준다면 내 아버님께 말씀드려 크게 보상하리다! 이보시오!
강진사 이 놈! 내가 절대 그걸 몰라서가 아니다,
몰라서가! 어디 상놈이 양반에게 정색을 하고 덤비는 게야!
호연 서찰이라도 한 통 쓰게 해주시구려! 이보시오!
그러나 호연은 파수꾼들에게 질질 끌려가며.
#28. 가옥 뒷마당 -낮
거칠게 호연을 끌고 오는 파수꾼들, 호연의 어깨를 눌러서 억지로 무릎 꿇린다. 최집사가 와서 주먹으로 호연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는다.
최집사 (호연의 머리 쥐어박으며) 정신 차려, 정신! 정신!
호연 (머리가 얼얼하고...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멍해진다)
최집사 (삿대질하는) 네 놈은 이제 특별관리 들어간다, 알았어?
#29. 행랑채 앞 -낮 (수정)
멍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호연. 칠복이가 손바닥 모양의 지장이 찍힌 문서를 호연에게 내민다. 호연이 뭔가 하고 받아보면, #18에서 나왔던 노비문서와 같은 양식의 문서이다.
칠복이 이거 읽어 주세요!
호연 이게 뭔데?
칠복이 우리 아부지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래요! 우리 가보에요!
집문서나 땅문서 뭐 그런 거에요!
호연 임마! 너 같은 상것이 가보가 어딨어! ... 가져가, 그냥.
칠복이 읽어 주세요!
호연 너 이게 진짜 뭔 줄 몰라? 노비문서야, 노비문서!
니네 집 대대로 머슴 된다는 증명서라고!
칠복이 (다시 문서 채어가는) 아니에요! 울 아부지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에요! (하고 가버린다)
호연 하여튼 상놈 팔자란...
#30. 행랑채 안 -낮 (수정)
호연이 들어오면, 바가지 하나 놓고 밥을 먹던 머슴들이 일제히 본다. 이미 바가지 속에 밥은 남지 않았고... 호연은 빈 바가지를 슬쩍 쳐다본다.
노구 남겨두고 싶었는데... 자넬 굶기라는 지시가 있어서.
(좀 미안한) 어차피 우리랑은 겸상 안 한다믄서?
호연 (발끈) 그렇다고 사람을 굶겨? 에라이... (하다가 뭔가 떠오른다)
/플래시백
#9 청루각 앞, 불쾌한 얼굴로 점백이를 나무라는 호연.
호연 (기가 막힌) 니가 지금 나랑 겸상 하자는 거냐?
점백이 그게 아니고...
/다시 행랑채 안
호연 (침울해져서) 됐소, 나도 생각 없소. (구석으로 가서 돌아눕는데)
팔복 (주먹밥 두 뭉치를 챙겨 호연에게 가져다 건넨다)
호연 나 먹으라고?
팔복 (끄덕)
노구 어허, 팔복이. 들키면 어쩌려고?
호연 흠! 뭐, 사람 성의가 있으니 내 특별히... (주먹밥 마구 먹어대는)
노구 (쯧쯧쯧) 자네가 오늘 큰 실수했어.
호연 (먹다가 노구 보고) ?
노구 들은 얘긴데, 주인 양반 젊었을 때 과거 낙방을 하두 많이 해서,
학문이라면 아주 치를 떤다 하더구만.
호연 허! 어쩐지. 무식이 철철 넘쳐흐르는 상이다 싶더니.
노구 (흐흐) 강진사 방에 가면 말이여, 서책이 이만큼~ 쌓였거든.
그게 다 지 똑똑해 보이려고 장식으로 쌓아둔거여.
호연 (피식 웃다가, 이내 걱정 가득한) 허면 이제 이 섬에
내 학식을 알아봐줄 양반은 없단 말인가... (하는데)
/플래시백
#24 가옥 마당 앞, 호연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는 부용의 모습.
최집사(E) 사또는 아씨의 부친이지, 아씨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행랑채 안
호연 (옮거니!) 그 낭자! 사또의 딸이라 했지!
#31. 숲 속 -낮 (수정)
여기저기서 긴 낫으로 나뭇가지들을 베어내는 머슴들. 호연도 어리숙한 솜씨로 나뭇가지들을 베어보는데, 잘 잘리지가 않는다. 신경질적으로 낫질을 해보지만, 호연에게는 익숙지 않고.
호연 에잉! 이런 무엄한 나뭇가지놈을 보았나!
호연은 성질부리며 낫 집어 던지고, 털썩 주저앉아버린다.
그 때, 호연은 저 너머로 보이는 개울가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마시며 독서에 빠진 부용을 목격한다. 잠시 이리저리 눈알 굴리며 생각하던 호연이 주변을 살펴보면, 최집사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마치 ‘허튼 짓 말라’는 표정으로 겁을 준다.
#32. 개울가 -낮 (수정)
자리를 깔고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 앞에 두고, 그림 그리는 부용.
간난은 자리 구석에서 차를 달이고 있는데,
호연(E)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 아파 죽겠네!
부용 (무슨 소린가 싶어 둘러본다)
#33. 개울가 앞 -낮
호연이 찡그린 채 배를 움켜잡고 바닥에 뒹굴거리고, 최집사는 팔짱 끼고 본다.
최집사 미친놈이 가지가지 하는구먼! 안 일어나?
호연 아이고! 뜨거운 물 좀 떠다 주시오! 그럼 낫겠소!
사람이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최집사 이 산 속에 뜨신 물이 어딨어, 임마!
간난 (불만 가득해서 다가온) 아씨가 오시란다.
호연 (벌떡 일어나 옷 훌훌 털어버린다)
최집사 (어이없다)
#34. 개울가 -낮 (수정)
너머에서 덩실덩실 부용 쪽으로 다가오는 호연, 따라가는 최집사가 보인다.
부용이 차분하게 차 한 잔 홀짝거리면, 간난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된다.
간난 아씨, 천것에게 과한 관용을 베푸는 건 아닙니까?
부용 어질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데 차 한 잔이 대수겠느냐?
말하는 사이, 호연은 단걸음에 다가온다. 최집사도 귀찮은 기색으로 따르는데,
호연이 불쑥 부용 앞으로 다가가려하면, 간난이 가로막고 붙잡는다.
간난 어딜 가까이 가려구?!
호연 잠깐 안부 좀 묻겠다는데, 왜 이래? 깐깐하게!
부용 (간난에게) 간난아, 놔두거라.
호연 (간난 뿌리치고) 못 생긴게.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가는)
어제는 감사했소, 난 누가 몸에 손대는 건 질색인 사람이라.
간난 이놈이? 그게 감사한 종놈의 말투더냐!
호연 (품에서 아카시아 꽃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부용에게 건네는)
부용 (빙긋 웃어 반긴다) 이제 보니 꾀병이었구나.
호연 향이 좋아 꺾었소, 방에 두면 상쾌할거요.
부용 (미소 머금고 향을 맡아본다)
그 순간, 호연의 시선엔 웃는 부용의 앵두 같은 입술이 크게 보인다.
호연 와, 죽인다...
부용 ? (의아해서 호연 보면)
호연 (급히 시선 돌리며) 그림이 말이오! (그림 보고) 매화로군.
부용 네가 이걸 볼 줄 아느냐?
호연 매화는 굴하지 않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해 군자와 비유되지.
근데 이건 죽을 그리는 방식이지, 매를 그리는 표현법이 아니오.
부용 (흥미로운) 어디, 계속 해보게.
호연 매는 묵의 농도를 연함과 진함으로 색의 차이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핵심이거든. 물론 나는 죽을 그리는 것도 좋아하지.
대나무의 꽃을 일컬어 죽방(竹芳)이라 하지 않소? 죽죽방방...
부용 (좀 놀라운) 어찌 그리 잘 아는가?
호연 사실 이 몸은... 듣기만 해도 놀랄 세도가의 사람이오.
아마 들으면 아씨도 나한테 관심 안 가질 수 없을 그런.
부용 (빙긋 웃으며, 믿지 않는 눈치) 사람 마음이란 신분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네. 아무리 신분이 대단해도 마음이 맞아야 통하는 법.
호연 에이! 만약 그 상대가 노비라면, 야반도주라도 하겠단 말이오?
부용 못 할 것도 없지?
간난 아씨!!!
호연 (기가 막힌) 허! 그러나 다행스럽게 야반도주까진 할 필요 없소.
난 노비가 아니라 진짜 양반이니까.
허나... 다른 이들은 아무리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는 구려...
낭자는 어떡해야 내가 양반이라 믿어줄 테요?
부용 (약간 장난스럽게) 글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 때, 호연은 부용의 앞에 펼쳐진 論語(논어)책을 보게 된다.
호연 (번뜩! 이거다 싶은) 군자 주이불비, 소인 비이부주라.
부용 (좀 놀란) 자네가 공자도 아는가?
호연 위정편, 2쪽에 여덞째 줄에 적혀있지!
군자는 두루 통하면서도 편파적이 아니하며,
소인은 편파적이면서도 통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오.
부용 (펼쳐진 책을 확인해 보고... 눈 휘둥그레져) 어찌...?
호연 편파적이며 통하지 않는 소인이 앞에 보이누만. (최집사를 보는)
최집사 (당황) 이놈이...!
부용 (좀 심각해졌다) 다른 쪽도 해보시게.
호연 (아예 눈을 감고) 양화편, 17쪽에 셋째 줄. 유상지여하, 불이로다.
부용 (급히 책을 넘겨 확인한다) 맞았네...
호연 술이편 7쪽에 여섯째 줄! 지어도 거어덕에 의어인 유어예이니!
부용 (다시 급히 책을 넘겨 확인하고는 놀라 호연을 본다) !!!
그림은 그렇다 쳐도 자네가 이걸, 이걸 어찌 다 아는가?
최집사 (당황해서 눈치를 보다가 버럭 화를 낸다) 이놈! 장난은
여기까지다! 썩 나오너라! (호연의 목덜미를 거칠게 끌고 간다)
파수꾼1 (나타나서 함께 호연을 끌고 가는)
호연 (거칠게 반항하지만) 이래도 아니더냐! 이래도 내가 노비이더냐!
(부용에게 급히) 보시오, 사또께 꼭 일러주시오!
영의정 아들이 억울하게 잡혀있다 꼭 좀 일러주시오!
최집사, 파수꾼1에게 질질 끌려가는 호연. 그리고 호연을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게 보는 부용.
#35. 관가 마당 -낮
의복을 갖추고 부용과 함께 나란히 걷는 사또.
사또 그런 일이 있었느냐?
부용 요 며칠 보니, 어투나 버릇, 학식이 양반의 그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인신매매 같은걸 당해 이리 온 것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사또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있겠느냐? 강진사는 이 섬에서 알아주는
유지라,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는데...
부용 그 자가 진짜 영의정의 아들이라면 더욱 큰일 아닙니까?
사또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만은... 오냐, 내 한 번 알아는 봐주마.
#36. 사랑채 -밤
책을 적당한 높이로 배게 삼고, 한 책으론 얼굴을 푹 덮어 깊게 잠이 든 강진사. “드르릉~ 드르릉~” 코 고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최집사(E) 어르신, 최집삽니다.
강진사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급 독서에 열중하는 척) 험! 들게나!
최집사 (들어와 앉는다)
강진사 그래, 그 천한 놈이 공자를 논한 것이 사실인가?
최집사 놈이 내뱉은 것들이 그럴 듯 하긴 하였으나...
설마 정말 놈이 양반일 리가 있겠습니까?
강진사 음... 행여나 괜히 쓸데없이 문제 만들지 말고,
자네가 예의주시해서 관리 잘 하게나.
최집사 예, (일어나는) 남은 잔업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강진사 (끄덕이고)
최집사 (돌아서서는... 고개 갸웃거리며 찝찝한 표정 된다)
#37. 행랑채 안 -밤
옹기종기 모여 지푸라기로 새끼줄을 꼬는 호연과 팔복이, 노구를 비롯한 머슴들.
호연은 자신의 새끼줄과 팔복이의 것을 비교해보고는, 꼬던 새끼줄을 구석에 집어던진다. 새로 지푸라기를 한 웅큼 쥐는 호연.
노구 (호연 뒤통수 치고) 야 이놈아, 망쳤다고 그냥 버리면 어떡해!
호연 뭐요, 또.
노구 (새끼줄을 손톱으로 뜯어보며) 이렇게 손톱으로 조금씩 긁으면
새끼줄이 풀리니까,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짜야지!
호연 (새끼줄 던지며 벌떡 일어나) 안 해! 사람 사는 게 이게...
낮에도 죽도록 일했는데, 밤까지 이 무슨 짓거리요!
(행랑채를 나가려고 한다)
노구 이눔아, 어디 가는 겨.
호연 뒷간이요! (거칠게 문 닫고 나가버린다)
팔복이는 호연을 안타깝게 보고, 노구는 푹 한숨 쉬더니, 다시 새끼줄을 꼰다.
#38. 행랑채 앞 –밤
행랑채에서 나온 호연, 그런데 파수꾼의 몽둥이만 덩그라니 놓인 채 아무도 없는 풍경을 본다. ‘아무도 없다!’ 호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핀다.
곧 호연이 슬그머니 담장을 타며 월담을 시도하는데... 그 순간, 누군가 호연의 뒷덜미를 낚아채어, 호연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호연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올려보면, 최집사와 파수꾼들이 그를 에워쌓았다.
#39. 광 안 -밤 (수정)
벗은 상체로 두 팔이 밧줄에 묶인 채, 여기저기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호연, 얼굴은 피딱지가 지고, 부어올라서 엉망인 상태다. 파수꾼들이 각각 손에 몽둥이를 쥔 채 있고, 최집사가 호연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들어 이리저리 살핀다.
최집사 니 애비가 영의정 아니라 상감이라도 상관없어.
한 번 여기 온 이상 절대 나갈 수 없으니까.
호연 알았으니... 말로, 대화로 풀어 봅시다...
최집사 (호연에게 은밀히 다가가서 속삭인다) 한 번만 더 도망치면,
이마에 노비 낙인을 지져버릴거야, 알았어? 알았냐고?
(하고 파수꾼들에게 고개 끄덕여 보이면)
파수꾼들 (일제히 몽둥이로 호연을 두들긴다)
호연 (비명 지르는)
최집사 매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 이 말도 공자가 하셨는가! 어!
그 때, 허겁지겁 광 안으로 들어와서 온 몸으로 호연을 막아주는... 팔복이.
팔복이 (덜덜 떨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듁어... 그러다 듁어...
최집사 이놈이? 요즘 덜 맞았더니 몸이 근질한가 보구나! 계속 해!
파수꾼들, 인정사정없이 호연과 팔복이를 몽둥이로 내리치고, 두들겨 맞으며 괴로움에 신음하는 호연과 팔복이.
#40. 행랑채 안 -밤 (수정)
호연과 팔복이 피곤죽이 되어 나란히 드러누웠고, 칠복이는 울먹거리며 헝겊 따위로 팔복이의 피를 닦아준다.
칠복이 맞을 께 뻔한데 왜 들어갔어! 저 아저씨 혼자 맞게 냅두지...
호연 (맥없이 발끈) 이 꼬맹이가...
칠복이 울 아부지 안 들리는 거 하두 맞어서 그런거란 말이에요!
더 맞아서 앞두 안 보이면 어떡해요!
호연 ...
#41. 몽타주
/ 산 (낮), 긴 낫으로 열심히 나뭇가지를 베어내는 호연.
/ 가옥 마당 (낮), 땔감들이 실린 지게를 앞에 두고 나란히 선 호연과 머슴들.
최집사가 지게들을 살피며 양을 검사하는데, 호연의 지게에만 장작이 모자라자 호연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그러면 겁에 질리는 듯, 호연은 울상이 된다.
/ 경작지 (낮), 뙤약볕 아래에서 괭이질 하는 호연과 머슴들.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겨워 보이는 호연이 자리에 앉아 땀을 닦아내는데, 파수꾼 하나가 다가와서 몽둥이로 호연의 등짝을 내리친다. 충격에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리는 호연.
/ 가옥 마당 (낮), 완전히 넋이 나가서 큰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는 호연.
강진사가 들어서면, 호연은 꾸벅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호연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 짓는 강진사. 고개 숙인 호연의 눈빛은 풀이 죽었다.
#42. 행랑채 앞 –낮 (얼마 후)
호연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답답한 표정으로 걸어오다가 보면, 칠복이가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天, 地, 두 글자로 온통 도배를 했다. 호연이 다가와서 글씨들을 확인해보고.
호연 꼬맹이 뭐하냐?
칠복이 아저씨가 우리 가보 노비문서라고 거짓말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직접 글 배워서 읽을 거에요.
호연 풉! (나오는 웃음 참는)
칠복이 (울컥) 귀한 거라고 했단 말이야!
호연 허이구, 어느 세월에? 너 천이랑 지, 두 자 밖에 모르지?
칠복이 (시무룩하게 끄덕인다)
호연 (칠복이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잘 봐라... 하늘 천~ 땅 지~
다음 자는...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적으려다가, 칠복이 보면)
칠복이 아저씨 진짜 양반이에요? 진짜 글 알아요?
호연 어허, 이 몸 같은 똑똑한 양반에게 배우는 게 보통 운인줄 알아?
자, 봐라. 하늘 천, 땅 지... 다음에, 검은 현, 누를 황...
호연은 칠복이의 손가락을 잡아주며 흙바닥에 글씨를 쓴다. 칠복이가 흥미진진한 표정 지어보이면, 호연은 유심히 본다.
#43. 영의정 가옥 대문 앞 –밤
대문에 붙은 전단지가 보인다. 전단지엔 붓으로 그린 호연의 얼굴이 그려있다. ‘사람을 찾습니다, 영의정의 아들 이호연’ 이란 글씨도 쓰였고, 빨간색 인감이 뭍은 도장도 찍혀있다.
복잡한 심경으로 전단지를 보고 우뚝 선 점백이가 이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관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점백이를 낚아 간다. “어? 어?” 당황하며 끌려가는 점백이.
#44. 영의정댁 가옥 마당 -밤
관군에게 끌려 마당으로 오는 점백이. 이미 월향이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울상을 짓고 있다. 종사관과 관군들을 대동한 영의정 앞에 점백이가 꿇어 앉혀진다.
영의정 이 놈! 이미 저 계집이 다 실토를 했다!
내 아들 놈을 팔아넘겼다니, 사실이렷다!
점백이 아니, 그게 아니옵고 말입니다.
영의정 당장 내일까지 내 아들놈을 무사히 데려오지 않으면,
(월향을 가리키며) 저 계집은 물론이고,
네 놈까지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다, 이노옴!
월향 빨리 이실직고 해! 뭐하구 있어!
점백이 (당황하여 월향과 영의정을 번갈아 본다) 그게, 그러니까...
#45. 거리 일각 –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디론가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점백이, 그 뒤로 종사관과 관군들이 간신히 그를 따라 달린다.
#46. 민가 앞 –밤
관복을 입은 종사관과 관군들, 그리고 점백이가 뱃사공에게 사정을 한다.
점백이 배가 못 뜬다니? 배가 못 뜬다니!
뱃사공 야밤엔 바람이 안 불어서 배가 안 나간다고요!
점백이 오늘 꼭 가야한다니까!
뱃사공 정 가고 싶으면 나룻배라도 저어서 혼자 가시구려!
점백이 (표정 굳어져서 뭔가 생각난다)
/플래시백 - 영의정댁 가옥 마당 (밤)
두려움에 질려 점백이를 보는 월향이의 표정.
/다시 민가 일각
점백이 어... 어디 가면 있수? 나룻배...
#47. 섬 나루터 -낮 (다음 날) (수정)
바닷가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나룻배를 헉헉거리며 저어가는 점백이의 모습. 그리고 부둣가엔 힘겹게 짐을 나르는 노비들. 최집사가 감시하는 중에 호연도 짐을 나른다. 그 때, 노비들이 바닷가에서 점백이를 발견하고 수군거린다. 호연도 뭔가 하고 보다가... 바로 점백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놀란다!
호연 점백이... 야, 점백이!!! (짐 내던지고 달려간다)
점백이 (호연을 보면, 크게 놀라는) 너... (하다가) 아이고오! 도련님!
점백이가 다시 기운을 내서 으쌰으쌰 노를 저어 해안가에 나룻배를 댄다. 허둥지둥 나룻배에서 내리는 점백이, 호연과 마주선다.
호연 드디어 날 찾아왔구나아, 이놈아아!
점백이 (주저앉아 호연의 바짓가랑이 잡고 통곡을 하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십쇼,
아니, 월향이 년이라도 살려주시오, 도련님!
호연 무슨 소리냐아? 죽을죄라니, 월향이라니?
점백이 (일어나 손 꼭 잡고) 당장 저와 가십시다! 당장 돌아가자구요!
호연 그래! 가자! 당장 집에 가자꾸나!
최집사 (호연의 뒷덜미를 잡고) 또 무슨 수작이냐, 가긴 어딜 가!
점백이 보쇼, 이 분은 영의정 댁 장손, 이호연 도련이시오!
최집사 ...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픽! 코웃음 치는)
이제 보니 이것들이 한 패구만! 이러면 내가 속을 것 같았냐?
점백이 (품에서 #43의 전단지를 꺼내 보인다) 여기, 영상대감의 인감이요!
이 얼굴이 누구로 보이시우?
최집사 진짜... 진짜 영의정의 자제라고...? (잽싸게 엎드려 공손하게)
아이고오! 소인이 귀한 분을 몰라 뵙고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요!
그러나 납작 엎드린 최집사는 뭔가를 생각하며, 몰래 이리저리 바닥을 더듬는다.
마침내 손에 잡히는 큼직한 짱돌 하나를 꽉 움켜쥐는 최집사.
점백이 도련님, 좀만 기다리시면 큰 배가 올 거요. 그 배를 타고 갑시다!
호연 그래... 넌 내 걱정에 노를 저어 먼저 온 게구나...
그 때, 퍽! 뒤에서 짱돌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점백이! 호연이 놀라 돌아보면, 매서운 기세로 최집사가 그의 이마를 짱돌로 후려친다. 퍽! 얻어맞고 그대로 기절해서 쓰러지는 호연.
#48. 사랑채 -낮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칠복이가 슬쩍 주변을 살피고는 빼곡이 쌓인 서책들을 하나씩 읽어본다.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칠복이의 뒷덜미를 잡아 올린다! 깜짝 놀란 칠복이가 보면, 매서운 표정의 강진사가 있다.
강진사 요즘 베개가... (아차) 아니, 서책이 하나씩 없어진다 싶더니...
네 이놈! 감히 천한 것이 글을 탐한단 말이냐!
불쑥 들어와 칠복이의 멱살을 움켜잡아 끌고 가는 강진사.
칠복이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강진사 다시는 상것들이 기어오르지 못 하게 본때를 보일 것이다!
#49. 광 안 -낮
호연과 점백이가 밧줄에 꽁꽁 묶여 나란히 앉았다. 호연은 똥 씹은 표정으로 굳어있고, 점백이는 허무해져서 중얼거린다.
점백이 그 날... 월향이가 왜 당신에게 안기려 했는지 아시우?
호연 뜬금없이 월향이라니, 뭔 소리야?
점백이 알고나 가시라는 소리요, 저승 가서 승질내지 말고.
호연 너,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아는 게 있지?
점백이 진짜로 월향이가 당신이 좋아서 안기려 한 줄 아오?
호연 너 말해봐! 그 과거보던 날, 나한테 무슨 짓했어?
점백이 그래, 내가 팔았다! 내가 월향이 빚 대신에 널 노비로 팔았다고!
월향이가 돈 때문에 맘에도 없는 네 놈한테 안기는 게 싫었거든!
좋아하는 여인조차 지켜주지 못 하는 게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호연 이놈이 이제 보니...!
점백이 그럼 내가 널 좋아하는 줄 알았냐? 툭하면 굶기고 갈구고, (울컥) 내 뺨에 상처도 어렸을 때 니 놈이 만든 게 기억이 안 나지?!
호연 (굳어진다)
점백이 그래놓고 맨날 점백이, 점백이, 점백이! 내 이름이 뭐야? 말해봐, 내 진짜 이름이 뭐냐고! (탄식하는) 이제 네 놈을 구해오지 못 했으니 월향이는 네 아비 손에 죽게 되었다, 이놈아...
호연 그래서 네놈이 속내를 감추고 고분고분 했구나!
점백이 속내를 감추고 고분했던 게 오늘뿐 인줄 아냐?
난... 하루도 니 놈이 밉지 않은 적이 없었어!
호연 이 놈!!! 난 그래도... 그래도...!
다른 양반들에 비하면... 그래도 너희를...! (말문이 막힌다)
점백이 제발! 제발 그 양반네들 착각 좀 그만하라고... 한 번 돌아봐, 자신만은 조금 나은 상전이라는 착각들 좀 그만 하라고 쫌!
그 때, 최집사가 날카로운 단도를 들고 광으로 들어온다. 최집사는 점백이의 품을 뒤져 #43에 나왔던, 호연을 찾는 전단지를 꺼내본다. 대충 구겨서 전단지를 품안에 갈무리하는 최집사.
호연 내 신분을 알고도 이런 짓을 하느냐?
최집사 그러니까 못 보내지이. 네 놈이 돌아가면 우리가 무사하겠느냐?
(하고 번뜩 단도를 치켜 올린다)
호연 (눈을 찔끔 감아버린다)
파수꾼1 (광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급히) 일 났습니다!
지금 진사 나리가 붙잡혀서는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최집사 뭐야? 무슨 소리야, 그게?
파수꾼1 빨리! 빨리 오십시오! 진사 나리가 죽게 생겼다구요!
최집사 (정신이 없다) 어서 앞장서라!
최집사와 파수꾼1이 급히 나가면, 호연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50. 섬 저자거리 일각 -낮
구경꾼들로 가득 모인 저자거리, 부용도 그 사이에 끼어있다. 팔복이가 날카로운 낫을 강진사의 목에 겨누고, 강진사는 겁에 질려서 옴싹달싹 못 한다. 팔복이 옆에는 얼굴 여기저기 멍이 든 칠복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다. 팔복이와 대치중인 포졸들와 파수꾼, 최집사와 사또까지.
사또 주인이 머슴을 매질한 게 뭐가 억울해 이 난리를 피우느냐!
부용 아직 머슴살이도 못 하는 어린애를 어찌 매질했단 말입니까?
사또 (부용 노려보는) 여기가 어디라고 또 끼어든단 말이냐!
팔복이 (원통한 표정, 부정확한 발음으로 힘겹게) 나는 양반이다!!!
(강진사 노려보고) 이 노미 노비이다!!!
사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네 놈이 양반이라니!강진사 이보게 팔복이, 말로 하세, 말로...
#51. 광 안 -낮
점백이는 묶인 밧줄을 풀어보려 낑낑거리는데... 호연은 홀로 밧줄을 풀더니 훌쩍 일어선다. 깜짝 놀라 호연을 보는 점백이.
호연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 새끼줄은 풀리게 돼있어.
점백이 (허탈하게 호연 보다가) 돌아가거든, 월향이 목숨만은 살려주오...
(체념한 듯 눈을 감아버리는데)
호연 (점백이에게 다가가서 밧줄을 풀어주며) 미안하다.
점백이 (깜짝 놀란) 뭐요?
호연 너 또한 사람이거늘 사사건건 너를 천대하고, 힘으로 누르려
하였다. 네 뺨에 상처 또한 어린 시절 내 짖궂은 장난에서
생긴 것인데, 나는 그것을 잊고 너를 점백이라 불렀다.
점백이 지금... 사과하는 겁니까? 양반이 상놈에게? 천하에 이호연이...?
호연 난... 나 정도면 좋은 양반인줄 착각하고 있었어...
점백이 ... 그럼... 내 진짜 이름이 뭔지 기억... 합니까?
호연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52. 섬 저자거리, 의복점 앞 -낮
어엿한 양반 차림새로 돌아온 호연이 의복점에서 나오면 점백이가 맞이하고.
점백이 이 위급한 와중에 꼭 그렇게 챙겨 입어야 합니까?
호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행여 놈들이 다시 쫒아올지 모르는 일!
하긴, 내 풍모가 출중한 덕에 뭘 입어도 눈에 뛴다만.
점백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호연이 좌판에 부채와 삿갓, 정사관 등 잡화를 놓은 상인1을 발견하고 다가선다.
호연 (접부채를 들어보고) 이건 얼만가?
상인1 닷 푼이오.
호연 (그러다 큼직한 정사관을 발견하고 들어보며)
허, 재밌구만. 이리 큰 정사관이 있네?
상인1 (히죽) 이 섬에서 그 정사관을 쓰는 건 한 분뿐이오.
호연 (잠시 생각에 잠긴)
/플래시백 -가옥 마당 (낮)
#27, 눈썹까지 가릴 정도로 큼직하고 알록달록한 정사관을 쓴 강진사의 모습.
/다시 섬 저자거리
호연 강진사 말인가?
상인1 예, (주변 눈치 살피더니) 그 강진사가 이마에 볼 폼 없는 큰 점이 또 있답니다. 해서, 고 것을 가리려고 이리 큰 정사관을 쓴다우.
호연 풉, 코 옆에도 점이 있는데 이마에 점이 또 있어?
(하다가) 이마에 점?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데) 하필 이마에...
상인2 (급히 상인1 앞으로 달려와서) 이보게, 저 쪽에 좋은 구경거리가
났다는데, 같이 가세나.
상인1 무슨 구경?
상인2 글쎄, 팔복이란 머슴이 강진사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는구만.
호연 (놀라서 상인2를 붙잡고)
팔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팔복이가 왜?
상인2 아, 강진사가 지 아들놈을 때려서 피죽을 만들어 놨다는 거야.
호연 칠복이 그 어린 것을 말인가?!
상인2 근데 재밌는 게, 팔복이는 강진사네가 원랜 자기 노비였담서,
사또한테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는구만.
호연 강진사가... 팔복이네 노비라고? (뭔가 깊이 생각한다)
/플래시백 –행랑채 앞 (낮)
#29, 칠복이에게 노비문서를 받아 보는 호연.
/다시 섬 저자거리
호연 (번뜩 정신이 나서, 급히 어디론가 가려는데)
점백이 (호연의 소매를 급히 잡는) 이 와중에 또 어딜 가실려구!
호연 내가 할 일이 남아있다!
점백이 좀 만 기다리시면, 도련님을 뫼시러 사람들이 올겝니다.
그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호연 그럼 넌 먼저 가서 배를 기다렸다 같이 오너라.
점백이 도련님은요!
호연 (쌩하고 달려간다)
점백이 (멍... 하다가, 반대쪽으로 가려는데, 문득 호연 쪽을 돌아본다)
#53. 행랑채 안 –낮 (수정)
미친 듯이 뭔가를 마구 뒤지는 호연, #29의 노비문서를 찾아낸다. 유심히 노비문서를 읽어 보는 호연, ‘노비 이름, 점백이’란 글씨가 뚜렷하다!
/플래시백
#27, 마당으로 들어서는 강진사, 코 옆에 붙은 큼직한 점이 돋보인다.
/다시 행랑채 안
호연 그래! 강진사가 이 점백이야! 팔복이네 노비라고!
#54. 섬 저자거리 일각 -낮 (수정)
포졸들에게 끌려가는 팔복이, 사또가 언성을 높이며.
사또 당장 하옥 시켜라! 감히 천것이 양반을 능멸하다니!
호연(E) 멈춰라, 이놈들!!!
모두 돌아보면, 노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호연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다르면 속도를 멈추지 못 해 훌렁~ 미끄러 자빠지는 호연...
호연 아나... (일어나 툭툭 옷을 턴다)
최집사 (식겁) 아니 저 놈 저거 어떻게 나왔어... 에라, 나는 모르것다. (눈치보다 슬그머니 무리 속으로 사라진다)
파수꾼1 도망노비요! 저 놈 잡아라! (호연에게 다가가는데)
호연 (접부채를 힘차게 펼치며) 어허! 무엄한 놈들이 어딜!
파수꾼들 (달려들다가 움찔하여 멈춘다)
호연 왜? 차림새가 달라지니 함부로 하기가 꺼려지는가?!
파수꾼들 (괜히 서로 눈치만 본다)
호연 애초에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소, 대관절 누가 양반이고 누가
노비라는 말인지, 이 자리에서 명백히 시비를 가려봅시다!
강진사 흥! 노비가 옷만 그럴듯하게 입으면 양반이 된다더냐?
호연 (품에서 노비문서를 꺼내 모두에게 펼쳐 보이며)
여기 나온 이 점백이란 노비가 누군지 아시겠소?
강진사 (기겁을 하며, 손으로 쩍 벌어진 입을 틀어막는) 힉!
호연이 강진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정사관을 벗겨버린다. 그러면 강진사의 이마 한 가운데, 희미하게 흔적이 남은 ‘奴(종 노)’자 낙인이 보인다!
호연 역시! 이 奴(노)자 낙인을 보시오!
흔적이 희미하다만, 예전에 지진 노비 낙인이 틀림없소!
여기 강진사는 애초에 저 팔복이네의 노비였던 게요!
사또 (노비문서와 강진사를 번갈아 보며 놀라는) 그게 무슨?
강진사 아니오! 이건... 특이하게 생긴 점일 뿐이외다!
호연 어쩐지 산도적 같이 생겨서는,
논어 한 자 모르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강진사 이 놈! 내가 어딜 봐서 도적 같이 생겼더냐!
구경꾼들 (그 말에 모두 웃음 터진다)
호연 (팔복이 가리키며) 팔복이의 선조는 자네를 머슴으로 부렸겠지!
요즘에는 흔한, 이름뿐인 가난한 양반,
자네는 팔복이네서 출가한 외주노비로 재산을 불렸을테고!
강진사 지미럴! 망상으로 소설을 쓰는구나, 이놈아!
호연 돈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팔복이네를 머슴으로 부리며 전세를
역전시켰겠지만... 팔복이네 선조가 자네의 노비 문서를
물려준 게 화근이 되었구만, 아니 그런가?
사또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강진사 사또! 저런 정신 나간 노비의 말은 믿지 마시오!
사또 (고민하는)
강진사 이런 우라질! 고민할 게 뭐 있어어! 어?!
내 성질 건드리면 임기가 쉽게 끝나진 않을 거니까!
호연 그 천박한 말투야 말로 네 놈의 근본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용 좀 더... 조사를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사또 ... 노비들을 끌고 가라.
부용 아버님!!!
호연 (끌려가며) 우린 노비가 아니오! 우린 노비가 아니오!
사또 너희가 노비로 난 것 또한 세상의 뜻이거늘,
감히 끝까지 양반 행세를 하려는 것이냐!
그리고 점백이는 수군거리는 구경꾼들 사이에서 끌려가는 호연을 빤히 지켜본다.
점백이 나 같은 천것들 때문에... 어찌 저리 무모하게...
#55. 관가 감옥 -낮 (수정)
호연과 팔복이, 칠복이가 감옥 안에 앉아 축 늘어졌는데, 곧 부용이 나타난다.
부용 도주했다 들었는데, 돌아온 이유가 뭔가?
호연 ... 어렸을 때, 친구와 놀다가 창고에 불을 낸 적이 있었지.
부용 ?
호연 친구는 구경만 했고, 불 낸 건 나였소. 친구는 심지어 날 구하느라
얼굴에 화상까지 입었지. 근데 난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소...
아무도 친구의 말을 믿지 않았고, 벌은 친구가 받았지.
그 담부터 친구는 날 도련님이라 불렀소.
부용 머슴과 친구로 지냈다는 말인가?
호연 (끄덕)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혼나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날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던게지.
부용 ...
호연 천하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쓰는 게 얼마나 억울한지,
당해보니 알겠소.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알겠소.
부용 (저고리에서 열쇠를 꺼내, 감옥 안으로 던져주고)
내가 그대의 편을 들어주겠습니다.
호연 (의미심장하게... 부용을 똑바로 본다)
(시간경과)
포졸 하나가 텅 비어버린 감옥 안을 확인하고, 놀라서 급히 달려간다.
#56. 야산 일각 -낮 (수정)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로 부축해 달아나는 호연과 팔복, 칠복이. 뒤에서는 사또와 각각 창을 든 포졸들이 무리를 지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다.
#57. 섬 나루터 –낮 (수정)
배에서 종사관과 몇 몇 관군들이 우르르 내리면, 점백이가 초조한 표정으로 급히 그들을 어디론가 이끌고 달려간다.
#58. 야산 계곡 –낮 (수정)
호연과 팔복, 칠복이 뒤로는 계곡이 버티고 있다. 사또와 포졸들이 칼과 창, 활을 겨누며 호연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호연 노비 또한... 노비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이오! 이제 답을 알겠소!
똑같이 배가 고프고, 똑같이 통증을 느끼고, 똑같이 피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란 말이오!
사또 나라에 엄연히 윗사람과 아랫것의 반상의 법도가 있거늘, 감히!
(칼을 뽑아 호연의 목에 들이댄다) 어찌 천륜을 속이는가!
호연 목숨의 무게는 양반 상놈이 같은 것이다!
사또 이 노오오옴!!! 그것은 이단이다!
분노한 사또가 칼을 번쩍 들어 휘두르자, 다급히 피하는 호연은 뒤에 강가로 풍덩! 빠져버린다. 멀리서 달려오던 점백이가 호연이 강가에 빠지는 장면을 본다.
점백이 이 죽일놈들아아!!!
점백이는 주저하지 않고 훌쩍! 호연이 빠진 강가 쪽으로 뛰어든다. “풍덩!” 뒤이어서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는 종사관과 관군들의 모습이 보이고. 사또와 포졸들은 다가오는 종사관과 관군들보며, “뭐야? 저것들은?” 수군거린다.
한 편, 호연과 점백이가 빠진 강물은 잠잠하기만 하고... 칠복이와 팔복이의 표정이 울음 섞인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강물 위로 올라오는 점백이, 호연을 건져 올렸다! 거칠게 숨을 쉬는 점백이가 의식이 없는 호연을 끙끙거리며 데리고 나온다. 다행스러워서 활짝 표정 밝아지는 칠복이와 팔복이.
(시간경과)
호연을 뭍으로 건져내는 점백이. 이미 사또와 포졸들은 관군들에게 제압당한 상태다. 사또는 이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 듯, 넋이 나가 호연을 보며 중얼거린다.
사또 정말 저이가 영의정 자제란 말인가? 저 노비가... 정말로?
점백이 도련님, 정신 좀 차려보시오. 도련님!
이제 점백이가 정신을 잃은 호연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면... 곧, 힘겹게 물을 토해내며 눈을 뜨는 호연.
호연 (힘없이 웃으며, 작고 뚜렷하게) 고맙다... 귀남아.
점백이 ! (놀라다가 표정 밝아지고, 역시 작게) 그래... 호연아.
호연 (기쁘게 점백이를 본다)
/Fade Out
#59. 섬 나루터 -낮
배에 올라타는 팔복이와 칠복이.
반면, 배 위엔 초췌한 몰골로 포승줄에 묶인 강진사, 최집사와 파수꾼들까지.
호연 (부채질하며) 니가 몸을 던져 구하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거다.
점백이 천것들 때문에 목숨을 거는 도련님을 보고,
진심을 느껴 그리 한 것뿐이오, 뭐.
호연 무슨! 네 녀석이 날 팔아먹지 않았다면 못 깨달았을 것들이다.
점백이 거... 송구합니다, 정말...
호연 공자님이 가라사대!
점백이 (또 시작이구만)
호연 편한 처소를 그리워한다면 선비로 여길 수 없다 하셨지.
덕분에 내가 많은 공부를 하고, 벼슬에 갈 준비가 된 것 같구나.
칠복이 아저씨! 빨리 타요! 배 간데요!
간난 (호연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귀인을 몰라 뵙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호연 아니, 아니. 나도 못 생겼다고 한 거 미안하다.
너도 꽤 개성 있는 얼굴이야.
간난 (개성? 고개 갸웃거리며... 찜찜한 표정 된다)
호연 (손 내밀며) 어떻게, 이 노비 놈과 야반도주라도 같이 하시겠소?
부용 (빙긋) 저는 분명 ‘마음이 맞는’ 노비라고, 하였습니다.
호연 (머쓱하게 손을 거두며, 작게 중얼) 좋으면서 튕기긴...
부용 (슬쩍 호연을 외면하여, 부끄러운 듯 피식 웃는다)
호연 하하! 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테지! 그나저나 이 섬은 참 운이
좋구만! 적절한 때에 나 같은 똑똑한 양반을 만났으니!
돌아서서 배 위로 올라가는 호연, 펼쳤던 접부채를 힘차게 접으며.
#60. 영의정 가옥 전경 –낮 (얼마 후)
#61. 영의정 가옥 마당 –낮 (수정)
툇마루에 큼직한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영의정이 먹는다. 저 편 마당 난관에서는 큰 바가지 놓고, 머슴밥을 먹는 점백이. 어디선가 나타난 호연, 불쑥 점백이의 바가지를 빼앗아간다. 순간 어이없는 점백이는 멍하게 호연을 본다.
툇마루에 올라간 호연, 밥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마구 바가지에 쓸어 담는다. 영의정은 ‘이게 뭐하나?’ 싶어 밥 먹다 말고 본다. 그러더니 호연은 수저 하나 꽂아 점백이가 있는 난관에 바싹 걸터앉는다.
점백이 뭐 합니까?
호연 (반찬과 밥을 게걸스럽게 비비며) 이걸 못 먹어본 게 한이 돼서.
점백이 그 섬에서... 말입니까?
호연 (한 수저 떠보면, 먹음직스러운 듯, 군침 삼킨다) 오...
(밥 푼 수저 건네는) 자, 맛 좀 봐봐.
점백이 ... (미심쩍게 보다가 마지못해 받아먹는다... 씹다보니 맛있다!)
호연 어디. (자기도 한 수저 먹어보고 감탄한다) 이런!
이리 못 하는 게 없으니, 이 재주 어찌할꼬!
점백이 참 잡스럽게 섞였는데, 맛있구만요.
호연 (먼 곳 보며) 어쩌면 말이다, 세상에 위 아랫사람 구분 없이,
이처럼 섞여 보면 더 좋은 세상이 될까 싶다.
이 머슴밥과 양반밥이 섞여 이리 좋은 맛을 내는 것처럼.
점백이 언제고 그런 날이 오겠지요?
호연 ...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잠시 화면 움직였다 들어오면, 그들이 앉았던 자리엔 어린 호연과 어린 점백이가 마주보고 앉아 바가지 밥을 서로 사이좋게 떠먹여 주는 모습에서.
끝
2013_MBC_드라마페스티벌5회[상놈탈출기-류문상-오현종]_131031_재인쇄용.hwp
첫댓글 잘 보겠습니다. ^^
재밌게 봤는데 대본이 떴네요!! 역시 수다쟁이님 최고 ㅎㅎ 감사히 잘 볼게요~
와 진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진짜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