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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밤도 깊고 옥도 깊고 마음 가득찬 수심도 깊다
주와 함께 동거하니 항상 기쁨이 충만하도다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 같도다.
과거 4년 동안 평안히 보호하여 주신
미래에도 그 같으실 주님이심을 확신하노라
그는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옥종면 성도들에게도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1944년 9월 25일 옥종면 성도 들에게 보낸 글에서도 말씀 안에서 자족의 삶을 사는 낙천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육체는 고난으로 단련함이 좋고 마음은 항상 기뻐함이 좋으니라.
피죽을 먹고도 웃는 자가 있고 비단 옷을 입고도 근심하는 자가 있느니라, 고로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비관자와 낙관자가 있느니라.
육고 심락(肉苦心樂)이 종교자의 실생활이니라"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성산교회(애양원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벨 목사와 오웬 목사가 파송 되었고 1904년 12월 25일 성탄에배를 드리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18일 광주에서 교회가 창립되었다.
1916년 세례교인 56명이 투표로 이종수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되었다.
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 환자가 늘어나 1924년에는 560명에 달하게 된다.
그 후 부터 광주 한센병자촌을 순천으로 옮기려는 준비를 해서 1928년 2월10일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되었다.
이후 1934년 4월 4일 예배당 재건되고 1935년 당시 애양원 원장인 윌슨 박사가 본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현상공모하여 "애양원" 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 후 애양원교회로 불렀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 제2대 담임자로 1939년 7월14일에 부임하여 목회 하였으며 1945년 9월10일 부터-10월 15일 까지 애양원 병원장을 겸임 하였다.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사건" 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신앙을 지키며 공산군에 대항하다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982년 2월28일 본원의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교회 이름을 성산교회로 바꾸어 현재 사용하고 있다.
1944년 9월 9일, 애양원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옥중 목회 서신을 보낸 일이 있다.
양춘 가절을 위하여 엄동 설한의 고생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겠지요.
고로 고생을 겁내지 말고 도리어 기뻐 기다리사이다.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숟가락의 물에도 기쁨이 있으리다.
고로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근심은 만병의 근원이나 즐거움은 백병의 양약 되리다. "
자족자는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게 된다고 한다.
손 목사에게서는 하느님의 은혜가 자족으로 나타난다.
그가 얼마나 하느님의 은혜로 충만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자족에 대한 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가 고난을 이기게 되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준 자족은 바로 하느님의 은혜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자족의 절정은 여순 사건 당시 동인, 동신의 장례식에서 고백한 아홉 가지 감사일 것이다.
①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게 하시니 감사.
②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
③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였으니 감사.
④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감사.
⑤ 예수 믿고서 와석 종신해도 복이라 했는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감사 .
⑥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
⑦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⑧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써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것을 믿으면서 감사,
⑨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손 목사는 이렇게 아홉 가지 감사를 표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두 아들의 순교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렸다.
오히려 손 목사는 자족하지 못한 육신적 근심과 걱정은 죄 중의 큰 죄임을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고난을 오히려 달게 받아야 한다고 한다.
"송죽의 명성은 북풍이 연단 시켰고 황금의 진보(眞寶)는 화련(火練)으로 인함이니, 고로 위의 뒤에 따르는 이법(理法)이니라.
넓은 바다에 파도의 쉴 날이 없겠고 큰 나무에는 바람도 많이 맞게 되리라.
행여나 내게도 고난이 많거든 이를 생각하고 기뻐하라.
고난을 꿀같이 달게 먹는 자가 되라.
지상에서 두 번 돌아오지 못하는 세고 육고의 맛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 한다더라.
우리가 안락을 도모치 말 것은 내 주님 맛보시지 않으신 세영(世榮)과 육락(肉樂)을 내 어찌 감히 생각 인들 하겠는가!"
더욱이 손 목사는 청주 구금소에서 독방에 수감되어 그것도 감식형을 받아 쇠약해진 몸이 더욱 쇠약해져서 독감에 걸려 사선을 헤맬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비인 방 혼자 지키어 고적을 느끼나
성삼위 함께 지내니 네 식구 되는 구나
갖가지 고난아 다 오려거든 오너라
괴로운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손양원 목사의 삶은 자족 그 자체였으며 그 자족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사랑으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병자들을 자기보다 더 사랑했으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맞아들임으로, 주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보다 우리를 더 사랑한 사랑이며, 자기가 없는 사랑인 것을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토플하우스 (옛 한성 신학교 건물)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출처: 글; 전라노회(고신) 양촌리장, 사진; 성지순례여행센터 이재용
손동희 권사 간증 (손양원 목사 따님)
하느님께서 아버님인 손양원목사를 향한 특별한 역사를 이루신 곳은 나환자 수용소인 애향원에서 부터입니다.
아버지가 1939년 애향원에 전도사로 부임하시면서 피고름나는 나환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섬기셨는데, 1940년 39세 되시던 해 신사참배거부로 투옥 되시면서 우리 가정의 환란은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님도 “신사참배를 하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하셨고 우리 형제들도 신사참배 거부로 등교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버님의 투옥으로 사택을 쫓겨나 부산 범태고 산꼭대기에서 어렵게 살아갔습니다.
아버님은 여수 경찰서, 광주 구치소, 광주 형무소, 경성 구금소, 청주 구금소 등으로 옮기셨는데, 아버님은 눈만 떳다하면 전도를 하므로 독방에 갇히게 되었고, 영양실조로 두눈이 멀어가고 있어서 할아버님이 매우 걱정하시면서 편지를 쓰신 기억이 납니다.
그때 큰 오빠인 동신 오빠에게 군대 영장이 나와서 온식구가 걱정하며 금식기도 중 마지막날 온 가족이 뿔쁠이 흩어져 버리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오빠가 군대에 가면 매일 신사 참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빠가 신사참배를 안하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보내졌는데 다행히 1년 만에 해방이 되어 다시 가족과 함께 살게 되고 우리는 햇수로 6년 만에 애향원으로 돌아가게 되어 너무도 행복할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순천 매산중학교 1학년때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 동인 동신 두 오빠가 순교 당하자 나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미워하며 원망했습니다.
오빠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 고작 이런 것들인가요?
어찌 이럴 수가 있나요?“
다시 살려 내라고 목이 쉬도록 하나님을 원망하며 내가 다시는 예수를 안믿겠다고 소리소리 질렀지요.
하지만 아버님의 생각은 저와 달랐습니다.
아버님은 오빠들의 원수인 강철민을 용서하시고 아들 삼겠다는 겁니다.
나는 용서하면 됬지 아들은 또 뭐냐고 그럼 그가 내 오빠가 된다는 것이냐고 그것은 절대 안된다고 우겼습니다.
아버님은 "동희야. 난 어차피 하나님의 1계명과 2게명을 지키기 위해 감옥살이를 했고 너희들 까지 고생시켰는데, 1,2계명이 하나님의 계명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용서만 가지고는 안된다.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아들 삼아야 되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아버님과 나의 세계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내가 아버님의 그 광대한 세계를 이해 할 수 없지만 한가지 우리 아버님은 이세상 누구의 말 보다도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면 끝난 겁니다.
아버님을 절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강철민 구명운동에 나덕환 목사님이 바쁘신 아버님 대신에 애를 많이 쓰셨고 결국 그를 아들 삼아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시켜 독실한 크리스챤이 되게 했습니다.
아버님은 장례식 예배에서 9가지 감사를 말씀하셨는데,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감사,
3) 삼남 삼녀 중 가장 아름 다운 장자 ,차자를 바치게된 나의 축복에 감사,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를 허락하시니 감사,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어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께 감사,
6)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7) 내 사랑하는 두 아들 총살 시킨 원수 회개 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한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두 아들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 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의 감사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께 감사했습니다.
그후 저는 이화 여중으로 전학오고 3학년 18살 때 6.25사변이 터졌습니다.
그때 모두들 피난 갈 것을 아버님께 권했지만 “나는 감옥에서 죽었을 사람이다.
이 난국에 이 불쌍한 나환자들을 버리고 나 혼자 살겠다고 어디로 도망을 가겠는가" 하시며
“주의 이름으로 죽는 다면 이 보다 더한 영광이 있겠는가”하시고 순교를 각오하고 하루 세번씩 부흥집회를 인도하시며
마지막 날 요한 계시록 2장 10절 말씀을 가지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설교를 하셨고
순교에 대해서 첫째도 순교요, 둘째도 순교요, 셋째도 순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9월 13일 평소와 같이 강단 뒤에서 기도를 하시다가 공산당이 아버님을 미국 놈 스파이. 앞잡이, 공산당을 악선전한다고 여수 감옥으로 끌고 갔는데 9월 28일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순교하셨습니다.
저는 한 때 하느님이 어데 있느냐고 반항하며 방황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는 어지러운 그 시대에는 뭐가 뭔지 잘 모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당시의 역사의 진상을 알듯이 나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에 점을 딱 찍어놓고 하나의 믿음의 표본을 만드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나마 깨달았습니다.
우리 두 오빠, 아버님, 많은 순교자들, 그들은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이땅의 수 많은 영혼들을 께워주는 하나의 믿음의 표본을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글: 명품대박 (명품인생) 2009.8.9.
손양원목사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손동희권사 저) 책 내용 일부분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비 없어서 낮에는 신문배달, 만두장사를 해서 야간학교에 다녔다.
어머니와 결혼 후에 1937년 7월14일에 나병환자 수용소인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 하였다.
그때 나병 환자 수는 1200명이 있었다.
나환자들은 가지 각색 흉측한 모습들이다.
이들은 인간들에게 소외되고 부모 형제 처자식들에게 외면 당하고 죽지못해서 찾아온 곳이다.
이들은 여기 오기 전에는 누구나 한번은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하였던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나환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가 지은 '시'에 이런글이 있다.
"오주여 이들을 사랑하되 내 처자식보다 더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몸이 저들과 같이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표현속에 아버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버지와 나환자들은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서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 됐다.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1940년 9월25일(수) 일본 형사들 둘이 들이 닥쳐 아버지를 체포하여 갔다.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였다.
신사참배라는 뜻은 하나님의 십계명 중에 제 1, 2계명을 어기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신사 참배를 놓고 우리 믿음의 성도들을 괴롭혔다.
신사 참배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갖가지 고문을 가해 가며 다스렸다.
그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 갔고 신사참배 때문에 문을 닫은 교회가 하나둘이 아니 였으며 우리 아버지가 다니던 평양신학교도 폐교를 당해서 아버지의 33회 졸업장도 우편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첫감옥에 끌려 가셨을 때 나이는 39살이 었다.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광주 구치소, 경성구금소, 청주 교도소등 만 5년동안 감옥에서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내 입으로 다 말 수 있겠는가?
특히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죄수들에게 전도를 하자 간수들이 입을 때렸다.
그래도 전도하자 독방에 가두고 감식을 하여 너무나 배가 고파서 두눈이 점점 멀어 갔으며 그 곳에 계실 때 온 편지를 보면 글씨체가 엉망이었다.
그리고 한겨울는 너무나 추워서 손발이 얼고 얼다가 또 얼고 이것이 반복 되다가 나중에 열 개 손톱과 발톱이 짓물러서 빠져 버렸다.
그때 아버지는 추위와 허기에 사경을 헤매셨으며 검사와 판사 앞에 불려 갈때도 걸을 기력이 없어서 들것에 실려서 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출소일이 되어서 형무소에 갔다.
그러나 서산에 해가 넘어갈때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는 나오시지 않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형무소 안에 들어 가셨다, 한시간 쯤에 돌아오시는 어머니는 넋이나간 분인냥 되어서 이럴 수 없다며 통곡하셨다.
아바지는 마지막으로 형무소 소장과의 면담에서,
소장이 "신사참배하면 될텐데 당신은 헛수고 했소"하자
아버지는 "헛수고는 당신이 했소.
신사참배 할 것 같으면 내가 왜 감옥 생활을 했겠소.
우상숭배하는 나라는 망하오 그래서 일본도 망할것이요" 하자, 다시 재판해서 종신형을 언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 7식구는 산산히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당시 애양원 원장은 미국 월슨박사와 원가래 선교사 부부였는데, 일본인들의 등살에미국으로 추방 되었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자 일본인 안또가 왔는데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쫓겨 나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산(범내골)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큰오빠가 군대를 가야 한다는 영장이 나왔다.
이 문제는 우리 가정에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전쟁에 참여 한다는 것 보다는 군대는 신사참배가 의무화 되었으며 거부하는 사람은 총살형이 었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흩어지기로 하였다.
할아버지는 만주로 어머니와 어린동생은 남해 깊은 산골짜기로, 그리고 나와 또 어린동생은 고아원으로, 오빠들은 나환자들이 사는 산속으로 들어 갔다.
이때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계속하여 지자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을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목사 때문이라 하여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을 전부 죽이기로 한 날짜가 8월17일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신지라 8월15일에 해방 시키신 것이다.
이렇게 해방이 되어서 아버지는 감옥에서 출소하게 되었고 그토록 그립던 우리 가족은 옛날에 살던 애양원 사택으로 되돌아와서 한가족이 오랜 만에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내평생 소원으로 학교 한번 다녀 봤으면 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학교도 다니게 되어 남부럽지 않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후 3년이 지난 1948년 10월 19일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내나이 16세 되던 때이다.
정말 뜻밖에 공산 게릴라들과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청년 학생들에 의하여 여수 순천 이란 곳에서 대폭동이 일어 났다.
이 폭동은 걷잡을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어 참혹한 양민학살의 유혈극을 몰고 왔다.
그들은 여수와 순천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꼭 1주일만에 끝을 냈다.
이 작은 도시에서 1주일간 죽은 사망자 숫자는 3500명이며 행방불명이 500명이나 되었다.
이때 내 오빠는 큰 오빠가 25세요 작은 오빠가 19세였을 때다.
난데 없이 오빠의 같은 학교 학우들인 좌익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 닥쳤다.
두 오빠를 끄집어 내어 땅바닥에 엎어 놓고는 얼굴이고 머리고 닥치는대로 짓밟았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두오빠를 끌고 사형집행장인 순천경찰서로 갔다.
순천 경찰서 뒤뜰에 사형대를 설치 해놓고 오빠를 묶었다.
그리고는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사상 뽑아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드려 우리와 같이 협력 할 수 있으면 살려준다 어떻게 할 테냐?"하고 물었다.
그러나 오빠의 대답은 "그건 할 수 없다.
왜 같은 동족이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이 나라가 복을 받지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하자
누군가 할 수 없군 하며 큰오빠의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린후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오빠는 노래를 잘하는 성악가였다.
큰오빠는 찬송을 한곡 부르고 죽겠다하며 "하늘가는 밝은 길이''''"찬송을 부르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하는 순간 날아오는 총알을 받고 쓰러 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은오빠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큰오빠 시체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대성 통곡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익 학생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입니까?
나도 내 형이 간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형님의 신앙과 같다.
이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하며 양팔을 펴들고 "자 총을 맞을 테니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쏠려면 쏘아라!"
하고 외치자 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와서 작은 오빠마저 큰 오빠 곁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강철민(가명)이라는 사람이 총을 들고 두 오빠에게 다가 가서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그후 두오빠의 시체는 애양원 나환자 촌에 운반 되었다.
이때 어머니는 두 오빠의 시체를 끌어 안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울다가 울다가 결국 기절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 졌다.
온 애향원 나환자들도 두 오빠 시체를 앞에 놓고 애향원이 더나가도록 통곡을 하였다.
그 울음 소리는 하늘 끝까지 닿았을 것이다.
두 오빠 장례식 석상에서 우리 아버지 손양원목사는 9가지 감사를 하였다.
첫째 감사는 나같은 죄인 혈통에서 순교의 아들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둘째 감사는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남과 차남을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셋째 감사는 하나의 아들이 순교함도 감사한데 두아들이 순교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넷째 다섯째 등등.......
두 오빠의 장례식이 마치고 1주일이 지났다.
여기저기서 소문이 들려 왔다.
동인이 동신이를 죽인 놈이 잡혔다고-
그놈은 오빠와 같은 학교 3학년 강철민(가명)으로 밝혀 졌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내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제로 따르려고 하셨다.
설마 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난 여기에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난 펄펄 뛰며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아버지는 항상 별난 에수를 믿습니까?" 하며 어째든 이 일만은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설득하였다.
"동희야! 날 쳐다 보아라 내 어차피 하나님의 제1-2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서 고생했고 너희들까지 고생 시켰는데 강철민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되
일단 그 학생을 잡았단 말을 듣고는 이대로 모른척 할 수 없구나.
제 1,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째서 저 명령은 순종하고
이 명령은 순종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모순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 만일 안지킬 것 같으면 과거 5년간 감옥살이 헛살았고
너희들 5년간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 시킨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하며 아버지는 나를 설득 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가 좋은 말로서 나를 설득하셔도 그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아버지와 대판 싸웠지만 결국 난 아버지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같은 것이 100명이 아버지를 설득 시킨다해도 아버지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말보다
하나님 한 분의 말씀을 더 무서워 하시는 아버지란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결국 난 아버지께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최고 악성으로 분류되어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강철민을 극적으로 구하여 냈다.
그리고 기어이 내 오빠가 되었다.
그런데 강철민을 구하는데는 그리 쉽지 안했다.
이기관 저 기관에다가 아버지의 뜻을 전했지만 진지하게 들어 주는 이가 없었다.
또한 강철민이가 워낙 악질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며칠동안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여 간신히 힘들게 구해 내었다.
그리고 아들로 삼았다.
이 일에는 그 동안 우리집 일을 내일처럼 도와 주시던 나덕환 목사님의 열심히 이루어 질 수가 있었다.
나목사님은 해방이 되어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우리들이었지만 나이 때문에 학교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요소 요소 부탁하고 설득하여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신 분이다.
이번에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라는 책을 내는데도 나덕환 목사님의 아드님이신 나재민 오빠의 증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는 강철민을 너무 사랑했고 그를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 시켜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두 오빠가 죽고 2년 뒤, 1950년 6월25일 이날에 갑자기 이북에서 공산당들이 남쪽을 향해 물밀 듯이 쳐내려 왔다.
아버지와 친구 목사님들이 피난 가자고 몰려 왔고 강철민도 달려와서 아버지의 피신을 간곡히 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이 이상 큰 영광이 어디 있나 이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겟는가?
양을 먹이던 목자가 내 양떼 신앙을 지켜야지 더구나 몸이 성치 않는 나환자들을 버리고 나 혼자 살자고 어디로 피난 가겠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면서 결국 아버지는 나환자들 때문에 피난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모아 부흥회를 열었다.
마지막 날 아버지는 설교 할때 계2:17절을 본문으로 하고
"순교를 각오하라 때가 왔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대접을 받았으니 이젠 예수이름으로 순교 할 때 다 잘살려고 노력 말고 잘 죽기를 원하라"라고 말씀 하셨다.
9월13일이었다.
이날 아버지는 새벽 집회를 마치고 교회에서 한참 기도하고 있을 때 공산당원들이 쳐들어와서 기도하고 계시던 아버지를 잡아갔다.
이들은 미국놈 스파이, 앞잡이, 그리고 공산당을 악선전한 놈 등의 이유로 죽도록 패고는 어느 과수원으로 끌고 가서 총살을 시켰다.
이때 나이 48세 였다.
그리고 이렇게 순교한 아버지는 9월28일 두 오빠의 무덤 뒤에 묻히 셨다.
지금 애향원 나환자 촌 안에 3개의 무덤은 말없이 잠들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은 그 씨가 반드시 죽어야만 그 결실의 열매가 백배 혹은 천배가 된다.
두 오빠와 아버지는 비록 죽었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뿌린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이 땅에 수많은 영혼들을 깨우치는
하느님의 뚜렷한 [믿음의 본]이 됐으니 이것이 하느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글: 성령님과 동행하기 (앨버트 홍)
손양원 목사 내외(뒤), 손동인, 손동신의 묘 (앞의 두 묘소)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묘
애양원 동쪽 끝인 동도섬에는 1950년 9월28일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모두 세개의 묘소가 있는데 앞의 두개는 1948년 10월21일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이다.
뒤의 묘소는 손양원 목사와 1977년 11월26일 소천한 정양순 사모가 합장되어 있다.
첫댓글 존경합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렇지요, 딱 맞는 표현입니다. 뭐라고 군더더기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손목사님! 참으로 사랑의 성자요, 인생의 참스승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