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속에 있는 복음' 혹은 '작은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과 주도권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와 '넘겨주다', '값을 지불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 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요 3: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 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는 '선과 악을 분별하다', '분리하다'의 의미와 '정죄하다'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요 3: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것 - 여기 사용된 '빛'의 헬라어 '포스'는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 '참 빛'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고리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는 '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창 6: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죄악 - '라아'깨뜨리다, 상하게 하다, 쓸모없게 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어기거나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위를 의미한다. 관영함 - 원어 '라바'는 '크다', '충분하다', '너무 많다'는 뜻. 이는 당시 사람들의 죄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 뿌리를 박은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타락한 이후 인류가 지니게 된 보편적 죄성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에 근거하여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 본성이 부패하고 죄에 오염되었으므로 스스로는 아무런 영적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간의 전적 타락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여기서 마음은 갖가지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좌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생각은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골똘히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계획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의도적으로 기획하는 것을 뜻하며 악하다는 것은 앞에 나온 죄악과 같은 의미를 지닌 동일 단어이다.
보시고 - '라아'-바라보다, 주목하다, 발견하다의 미완료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소위와 그 생각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를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적으로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셨음을 의미한다.
[마 9: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 여기서 '권세'란 '능력'과 '권위의 위임받은 권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행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세상에서'란 말은 미래에 도래할 신천신지나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던 하늘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바로 이 지구상에서'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은 죄와 죽음이 현존하는 곳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한다. 실로 죄를 사하는 것은 '인자'된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속죄의 영원한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다.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앞절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사죄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병자에게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는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려는 방편으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어나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적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 중풍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곧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성경에 이적이 기록된 이유는 저자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신적 목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 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고친 이적의 목적은 예수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문맥을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라고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일어나...가라 - 이 명령은 부정 과거 능동,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지체치 말고 일어난 즉시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매우 생동감 넘치는 3중의 명령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1) 그 중풍병자의 병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는 사실과 (2) 그의 죄악을 완전히 도말하셨다는 사실및 (3)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셨음을 나타낸다. 실로 그는 사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