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지어진 영남사(嶺南寺)의 소루(小樓)였는데, 절이 폐하고 1365년(고려 공민왕 14) 밀양 부사 김주(金湊)가 누각을 다시 개축하여 영남루라 칭하였다.
후에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844년 밀양 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워 오늘에 전한다.
응천강(凝川江)을 굽어보고 있는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영남루는 밀양의 귀빈(貴賓)을 머물게 했던 밀주관(密州館)의 부속건물로서, 이곳을 찾은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등 많은 명필가와 시인 묵객들의 현판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옛 선비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된 영남루, 그중 고려 말 이곳을 지나던 양촌(陽村)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고려 우왕(禑王) 15년(1388) 양촌(陽村) 선생은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도와 창왕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로 인해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이림(李琳)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길에 올랐는데, 그해 겨울 영해(寧海) 바닷가로 귀양을 떠났으나, 이듬해 봄에는 다시 흥해(興海)를 거쳐, 윤(閏) 4월에는 김해(金海)로 귀양지를 옮기게 되었다.
선생은 김해(金海)로 가는 길에 영천(永川)을 거쳐 밀양(密陽)을 경유하게 되었다.
응천강(凝川江)을 지나던 선생께서 영남루에 올라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高樓百尺控長天(고루백척공장천) 백 척 높은 누각 하늘 끝에 닿을 듯
風景森羅几案前(풍경삼라궤안전) 광활한 풍광이 서안(書案) 앞에 펼쳐졌네.
川近水聲流檻外(천근수성류함외) 내 가까워 물소리 난간밖에 들리고
雲開山翠滴簷邊(운개산취적첨변) 구름 걷히니 산의 푸른 정취 처마 끝에 드는구나.
千畦壟畝禾經雨(천휴롱무화경우) 넓은 들녘엔 벼가 비를 머금었고
十里閭閻樹帶烟(십리려염수대연) 십리 마을엔 나무가 연기에 둘렸네.
匹馬南遷過勝地(필마남천과승지) 귀양길에 필마로 명승지를 지나다
可堪登眺尖賓筵(가감등조첨빈연) 올라와 풍광 보며 손님들 자리에 끼었네.
비 그친 뒤 운무(雲霧) 걷히는 청명하고 산뜻한 풍광을 바라보며 손님들 사이에 끼어 잠시나마 귀양살이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잊으려 했던 선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당시 밀양에는 선생의 오랜 지인(知人)인 밀양군수(密陽郡守) 여공(余公)과 밀양향교 교수관(敎授官)으로 있던 동년(同年) 박공(朴公.朴文絢)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이곳을 지나는 선생을 위로하기 위해 정담이 담긴 편지와 함께 은어(銀魚)를 선물로 보내왔다.
관직에 몸담은 신분으로 귀양 가는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처지인데도 온정을 베푼 것이다.
편지와 은어를 받아 든 선생은 고마운 마음에 붓을 들었다.
마침 누상(樓上)에 걸린 스승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詩)를 보고는 이를 차운(次韻)하여 두수를 지었는데, 한 수는 여공(余公)에게, 또 한 수는 박공(朴公)에게 주어 사례를 하였다.
다음은 박공(朴公)에게 준 시(詩)인데, 당시 귀양지를 떠도는 선생의 심경과 온정을 베푼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嶺南千里白雲橫(영난천리백운횡) 영남 천리를 흰 구름처럼 떠돌며
北望時時恨不平(북망시시한불평) 한 맺힌 마음 수시로 북녘을 향하는데
忽見江魚傳尺素(홀견강어전척소) 홀연히 누군(江魚)가 편지를 전해와
開緘宛爾笑談聲(개함완이소담성) 봉함을 열어보니 반가운 친구 담소(談笑) 소리
風化樓前一路橫(풍화루전일로횡) 한길 가로 건너 풍화루(風化樓)가 있는데
先生講道佐昇平(선생강도좌승평) 선생의 가르침이 태평성세 돕는구려
誰燐海上謫來客(수린해상적래객) 누가 바닷가로 귀양 오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랴
古寺無人聞雨聲(고사무인문우성) 옛 절에 사람은 없고 빗소리만 들리는 구나
당시 영남루엔 지금과 단리 뒤에 영남사(嶺南寺)라는 폐사찰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그 폐사찰에 잠시 머물렀던 같다.
영남을 떠돌며 아무도 없는 적막한 폐사찰(廢寺刹)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만 듣고 있는 선생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눈물겹다.
싯귀 중 강어(江魚)는 "여남선현전(汝南先賢傳)에 갈원(葛元)이 물고기 배 속에 편지를 써넣어 하백(河伯)에게 보냈더니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라는 전래에서 온 말로서 편지와 함께 은어를 들고 온 사람을 지칭한 것이다.
풍화루(風化樓)는 당시 향교 정문 위에 세운 누각을 말하며, 밀양향교는 영남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북부면 용지리에 있었다.
다음은 밀양향교 전경이다. 앞에 풍화루(風化樓)가 보인다.
2014년 9월 17일 유배길의 양촌(陽村)선생 마음을 헤아리며 후손 열운(洌雲)이 작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