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운명 직전의 아버지를 찾아 가 뵙다
47, 27 - 48, 7
한 인간의 죽음의 승리! 그 파란 많았던 야곱은
한 번 편한 생활을 사는 듯 싶었으나 이제 숨을 거두게 될 것 같다.
야곱은 17년 동안 화려한 신전들, 탑들, 피라밋들과 상당히 친숙하게 되었다.
그는 요셉의 극진한 효성 속에 모든 편의를 누리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가나안 땅의 장지를 잊지 못했다.
에집트의 피라밋은 선조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의 초라한 무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요셉이 두 번째로 찾아 갔을 때는 야곱은 아주 노쇠해졌고 기력이 쇠진해졌다.
야곱은「꿈의 사닥다리」, 라헬의 죽음 등이 눈에 선했다.
이러한 희미한 몽상 속에서 빠져나와 자기 옆의 두 손자가 있는 것을
의식하였다. 야곱이 이들 두 아이들을 아들로 삼는다.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다
48, 8 - 22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할 때 첫째(므나쎄)에게 장자권을 주지 않고
둘째(에브라임)에게 장자권을 주었다. 여기서 야곱은 유다를 메시아적 약속의
통로로 (49,10) 삼고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을 민족의 명성(明星)(48,19-22 49,
22-26 역상5,1.2)으로 정하여 장자의 상속권을 부여한 것 같다.
성서는 둘째 아들에게 더 희망을 걸고 있다.
야곱은「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살아 가는 것을 지켜 보아 주신
하느님, 태어날 때 부터 이 날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신 하느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내 준 하느님의 천사가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하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천사'란 표현은「목자」,「지키는 자」,「벗」이란 말인데
하느님의 아들 즉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온갖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평화의 축복을 주신다.
야곱의 축복은 성조들은 돌아가셨지만 하느님은 살아계시어
우리를 성조들의 땅(천국)으로 데려 가시리라는 것을 일러 준다.
아들들의 미래에 대한 야곱의 예고
49, 1 - 12
요셉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방문을 하여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야곱은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예언의 빛」이 달아 오르고 있었다.
떨리고 가냘픈 목소리로 아들 하나 하나를
부를 때 엄숙한 침묵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들 하나 하나의 성격과 과거사들을
일일히 들춰 내면서 미래를 예시하였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최후 심판을 연상케 한다.
그 때 사람들의 생활 하나 하나가 들춰질 것이며
그에 따라 선고가 있게 될 것이다.
요셉이 특별한 축복을 받다
49, 13 - 27
즈불룬의 위치와 약속된 땅에서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은 정확하였다.
여호수아서 18장을 비교하라. 특히 18절의「야훼여, 나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는 이사야 26장 8, 9절의「구원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요셉의 축복은 특별하다. 즉「요셉은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샘가에 늘어진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담장 너머 뻗어 가는 가지」(49,22)라고 하면서
특별하게 축복을 해 준다.
「주렁 주렁」(풍성하다 : phorath)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여기서 요한복음 15장 8절을 회상케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것」은
「분리」(separation)를 위한「담장」(wall)이 있어야 하고
「일합」(communion)을 위한「샘」(well)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고, 야곱의 하느님의 능력적인 팔이
우리의 약한 존재를 도우시도록 구하자(시144,1)
야곱의 마지막 유언과 죽음
49, 28 - 50, 3
야곱은 막벨라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분부하였다.
막벨라는 아브라함이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장지를 위해서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밭 가운데 있는 굴 이름(23,9-20)이다.
아브라함, 사라, 리브가, 레아가 그 곳에 묻혔고, 야곱도 에집트에서 시체로
운반되어 그 곳에 묻혔다.(49,30.31. 50,13)
막벨라, 그 곳은 우리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벗들이 있는 장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 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히브11,40)
베델의「사닥다리 꿈」(28,15)에서 하느님께서「내가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결코 너를 떠나지 안겠노라」고 하셨으나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의미로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찬 생애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의 말로를 잘 장식해 주셨다.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하느님을 신뢰하라!
야곱의 장례
50, 4 - 14
「요셉은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 울며 입을 맞추었다.
요셉은 자기의 시의들을 시켜 아버지의 몸을 썩지 않게 만들었다.
이렇게 썩지 않게 만드는 데 채워야 하는 날수 사십 일이 지났다.
에집트인들은 그를 생각하고 칠십 일 동안 곡을 했다」(50,1-3)
「요셉은 아버지를 묻으로 올라 갔다. 파라오는 모든 신하와 그 궁에 있는
장로들과 에집트 전국에 널려 있는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집안과 그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도, 그들에게 딸린 아이들과 양과 소들만은 고센 땅에 남겨 둔 채,
모두 그를 따라 나섰다. 또 병거와 기병까지 그를 모셨다.
그것은 굉창한 행렬이었다」(50,7-10)
이러한 야곱의 에집트에서의 탈출은 모세 탈출의 '담보'가 되며,
야곱이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은 여호수아에 의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땅 정복의 '증거'를 일러 주는 것이다.
* 소인들은 본래 열 두 형제였읍니다...동생 하나는 없어졌습니다 (42, 13) :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요셉 형제들의 사악과 위선을 보게 된다.
요셉이 들을 때 참으로 기가 막힌 말이다. 악이, 가장 주의깊게 자제
해야 할 순간에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위험과 패망을 초래하고 만다.
「살인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거기에는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 그것을
제 아무리 은폐시키려고 하더라도 진리는 드러나야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도 진리는 강력한 것이고
또 모든 것을 압도하여 버리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방심하는 순간에 누설해서는 안 될 비밀을 말해 버리는 수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요셉은 그 가족 중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얼마 안 있다가 자기들의 죄에 다시 한 번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 자기들이 상대하고 있는 이 고급 관리는
자기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생각한 채, 과거를 감추려는 입장에서
왜「당신의 종들인 우린는 '열 한' 형제들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던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의 암시 밖에 없다.
악은 궁극적으로 우매를 자아내고 진리에 의해서 타도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모든 사건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요셉 형제들의 고백으로 사건이 폭로된 것이다.
이제 이들은 한 형제에 대한 해명을 해야 될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진리를 전적으로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감추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감추려해도
또한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발설하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참말만 하는 입술은 길이 남아나지만 거짓말하는 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잘린다」
(잠12,19) 옳은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옳은 것을 실천하는
것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스런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진리의 길은「단순성」과「자유」의 길이다.
* 요셉은 동생이 애처러운 생각이 끓어 올라 한바탕 울고 싶어서 허둥지둥
자기 방으로 가서 한참을 울었다 (43, 30) :
이 말씀은 참으로 인간적인 충동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셉이
그 동안에 겪었던 여러가지 체험들의 연륜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자기의
충성으로 얼마나 자신을 버텨왔는가 하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표현이다.
드디어 요셉의 어머니 라헬의 아들 형제인 베냐민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요셉은 과거의 모든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요셉의 감회는 인간 본성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감출 수 없는 인간적 발로이다.
그러나 이 자연적인 감정의 표현이 때로는 환경과 체면 때문에 말살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 요셉은 어찌 생각하면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만들었던
숱한 쓰라림의 체험을 겪었다.
그리고 요셉은 옛날에 아무리 유다와 관계가 긴밀했다 하더라도 지금쯤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위치만을 생각할 수 있는 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이와 같은 일의 사례가 많이 있다. 그러나 요셉은 옛날의 자기
환경과 지금의 자기 위치를 생각하지 않은 그야말로 인간다운 요셉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수난을 겪어 왔다.
그는 에집트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정말로 진실했고
베냐민의 모습을 보자 감정 표시를 해서는 안 될 그들 앞에서까지
자기의 감정이 북받쳐 오름을 간신히 억제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환경이 아무리 불우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파멸해
버리는「냉혹함」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체면이 아무리 곤란한 입장에
있어서도「망각」과「알고도 모른 체함」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하느님과의 벗 관계는 언제나 「마음의 젊고 부드러움 」을
가져다 주며「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들을 가져다 준다.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나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요셉의 충성심으로하여 키워진 것이다.
자료출처 : 베소라성서 김정원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