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5.23 03:00 | 수정 : 2015.05.24 12:06
경리단길 뒷골목에서 전국으로 진출… 브랜드가 된 이름 장진우
중2 때 쫓기듯 上京
고시원 생활하며 國樂 전공… 수입 많던 사진작가 관두고 단돈 500만원으로 식당 내
창업 3년만에 연매출 20억
지난달 강남 백화점에 분점… 대구엔 멕시코 음식점 오픈, 직원 60명 넘는 회사로 키워
住를 줄여서 食을 추구
음식은 나눠야 맛있어… 독거老人위해 무료점심 제공, 청년 창업스쿨도 만들어
비가 내리던 지난 11일 오후 8시 30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레스토랑에 20·30대 남녀 40여명이 모였다. 20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공간에 두 겹으로 포개어 선 젊은이들은 강사의 열변에 귀를 기울였다. 마이크를 잡은 이는 전직 사진작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장진우씨. 장씨가 개설한 '창업스쿨' 입학설명회였다. 25명을 선발하는데 4~5배 신청자가 몰려 설명회를 추가로 마련했다. 장씨의 결론은 명확했다. "실패는 없어요. 한 번 실패를 못 이겨서 주저앉아버린 사람들만 있는 거죠. 자, 이제 정신 무장을 하고 실패를 하러 가봅시다."
그는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 뒷골목에 식당 10곳을 잇따라 열어 아예 '장진우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지난달 3일엔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점만 입점한다는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에 분점을 열었다. 지난달 17일에는 대구 영남대 인근에 '마린타코'라는 멕시코 음식점을 시작했다. 26㎡(8평) 매장에서 개당 3000원 하는 타코를 파는데 하루 매출이 130만원이다. "반짝 인기 아니냐"며 불편해하는 눈길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도(道)마다 '장진우거리'를 하나씩 만들 기세로 뻗어나가고 있다. 최근 자신의 이름을 따 장진우회사를 세운 그를 지난 19일 경리단길에서 만났다.
- 지난 19일 ‘장진우거리’로 유명해진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13가길에서 만난 장진우씨는 “이 지점이 모든 것의 출발이었다”고 했다. 왼쪽 첫 번째 열린 문이 ‘출발점’이 된 장진우식당, 대중목욕탕 옆이 ‘마틸다’, 그 옆이 ‘그랑블루’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 ‘레옹’의 여주인공과 영화‘그랑블루’제목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 김지호 기자
경리단길은 육군중앙경리단(2012년 국군재정관리단으로 통합)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인근에 미군 부대가 있어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 많다. 장진우거리가 본격적으로 뜬 것은 2년 전부터다. '경리단길을 올라가다 왼쪽으로 살짝 꺾는 뒷골목에 장진우식당에 이어 장진우다방, 장스시 등이 있는데, 날마다 자리가 없어서 손님들이 아우성'이라는 소문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의 남자가 새로운 식당을 자꾸 여는 것도 신기한데, 손님이 몰려든다니 다들 수군댔다. "장진우가 누구야?"
키 178㎝ 푸근한 체형인 장진우는 밀짚모자에 파란 배바지 차림으로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1박2일로 대구 맛집을 둘러보고 상경한 길이라고 했다. 현재 그가 직접 경영하는 식당은 8곳이다. 컨설팅이나 인테리어 등으로 관여하는 것까지 합하면 제주도·일산· 천안 등 30곳 정도라고 했다. 장진우회사 직원은 60명이 넘는다. "아마추어 복서가 처음 링에 오른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는 갤러리아백화점 분점의 한달 매출이 9000만원. 덕분에 지난해 15억원이던 매출이 올해는 30억원을 넘을 것 같다고 했다.
"브랜드의 힘이죠."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명쾌하게 답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빠르고 시원하게 답한다. "초기에 장진우식당이 잘 안 돼서 보란듯이 장진우다방을 냈어요. 다방도 잘 안 돼서 장진우호텔을 하나 더 냈어요. 전세금 빼서 얻은 한옥집이었죠. 장진우가 하는 식당도 있고 다방도 있고 호텔도 있단 말야? 그러면서 다들 궁금해진 거예요. 어디 한번 가보자고."
한 번 실패했을 때 주저앉지 않고 계속 두드렸더니 누구나 주목하는 브랜드가 됐다는 설명이다.
"상처나 실패가 닥쳐도 다음 목표가 있다면 빨리 포기하고 전진해요. 포기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확실하게 버리는 리스크(위험)를 감수해야 전환점이 찾아오더라고요."
배신도 당해봤다. 친형처럼 지내던 지인과 공동 투자로 진행하던 장진우거리 식당 중 하나를 지인 명의로 돌려줬다가 나중에 "법적으로는 내 것이니, 너는 손을 떼라"는 통보를 받고 소송 직전까지 갔다. 그의 아이디어, 그의 돈, 그의 인테리어가 들어간 식당에서 투자금의 일부만 받고 나왔다.
- 유기농과 웰빙 열풍은 마케팅이 만들어 낸 왜곡된 식문화라고 믿는 장진우는 7가지 식용 색소를 듬뿍 넣은 무지개롤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맛과 재미를 함께 즐기자는 뜻이다. / 김지호 기자·장진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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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getElementById("artImg3").style.width = wd; document.getElementById("artImg3").style.height = ht; - 대표 메뉴 중 하나인 카레라이스. 중학교 때부터 자취하던 그의 내공이 들어 있어 인기가 많다. / 김지호 기자·장진우 제공
빨리 포기한 항목 중에는 그에게 큰돈이 되었던 사진도 있다. 그는 무용 사진과 연예인 광고 사진으로 꽤 명성을 날렸다. 중앙대 국악관현악과에 피리 전공으로 들어가 부전공으로 사진을 했다.
1986년생인 그는 고향 포항의 중학교에서 사격을 배웠다. 3개월 만에 전국체전 3등을 하고 미련 없이 그만뒀다. "이만큼밖에 안 했는데 이 정도로 인정받는다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든 게 시시해 보이는 사춘기가 닥치면서 술 마시고 싸우러 다녔다. 그 결과가 '퇴학'이었다.
이전퇴학(강제전학)을 당한 그는 중학교 2학년 겨울 서울 대치동으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8학군의 먼 친척에게 부탁했다. 거기서도 3개월 만에 쫓겨나 삼성동 코엑스 인근 고시원에서 살게 됐다. 그는 "생존의 기술을 그때부터 배웠다"며 "어린 나이에 혼자서 제대로 못 먹고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식탐이 생겼다"고 말했다. 주식은 삼각김밥, 반찬이 필요 없는 카레라이스가 특식이었다. 장진우식당의 최고 인기인 완두콩 커리는 채워지지 않는 그의 허기가 만들어낸 메뉴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어릴 때 희망대로 국악을 배우게 됐다. 포항제철에 다니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한 달 수백만원 레슨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을 하고, 장진우는 중국집과 족발집·피자집 배달을 뛰었다. 새벽에 영업하는 족발집은 건당 2000원으로 수고료가 두둑했다. 크리스마스날에는 하루에 30만원도 벌었다.
장진우는 국악예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사진에 빠졌다. 금천구 시흥동 원룸의 보증금 1000만원을 빼 방배동에 스튜디오를 냈다. 쿵더쿵 박자를 알고 무대를 아는 그를 춤꾼들이 알아봤다. 좁은 무용계에서 바로 이름이 알려지고 의뢰가 이어졌다. 국수호 안은미 전미나 차진엽 등 유명한 무용수의 사진을 찍었다. 광고사진은 건당 300만원 정도였다. 찰칵 하니 돈이 굴러왔다. 주로 먹고 마시는 데에 썼다. 대학교는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그만뒀다. 사진 일도 그 무렵 접었다. "유행만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 바닥이 재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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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통장에는 0원만 남기자
남은 돈 500만원으로 구한 거처가 경리단길 뒤쪽 회나무로 13길의 다세대주택이었다. 장진우식당은 주택 바로 옆, 동물병원으로 쓰다 버려지다시피한 3평짜리 사무실이었다. 친구를 불러 파스타며 커리며 밥을 해줬더니 배고픈 지인들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재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돈을 받다가 어느새 식당이 됐다. 사람들이 '거기 장진우가 하는 식당'으로 부르다 '장진우식당'으로 굳어졌다. 장진우식당 옆이 철물점을 고친 식당 마틸다, 그 옆 주차장이 식당 그랑블루가 됐다.
그의 식당은 간판이 없다. 테이블은 대부분 하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어야 한다. '음식은 나누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이 담겼다. "음식은 나눠야 맛있어요.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재료를 듬뿍 넣고 많이 만들면 무조건 맛있어요. 누군가를 생각하고 나누는 행복이 들어가서 그래요. 많이 해서 동네 사람과 나누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면 맛있어집니다."
그의 식당은 모두 임대로 들어가 있다. 집이나 부동산을 소유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매출 수십억 회사의 대표이지만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60만원 반지하방에 산다. "집이 아니라 낭만이 없고 취향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거 아닙니까."
주(住)를 줄여서 식(食)을 추구한다. "돈이 생기면 바로 재투자해요. 그래서 식당이 계속 늘어난 겁니다. 제 식당 중에는 12월에 오픈한 게 많아요. 12월 31일 통장에 0원만 있을 때가 제일 좋거든요."
특기는 꽃꽂이, 취미는 스피커 수집이다. 대당 150만원짜리를 100대 정도 갖고 있다. 모아서 박물관을 여는 게 꿈이다.
젊은 사장인 그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었다. 직원들에게 "좋은 사장님" 소리를 듣고 싶어서 쓴소리가 필요할 때도 대충 넘어갔다. 하지만 직원들과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손님이 감동하지 못하는 음식을 내면 좋은 사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됐다.
그는 '식당 장사는 리듬이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리듬, 요리사 칼질 리듬, 서빙하는 직원과 주방 대화 리듬, 사장과 직원의 리듬, 메뉴 구성의 리듬 등이 살아 있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어요. 맛은 있는데 잘 안 되는 식당은 리듬이 없거나 안 맞는 경우가 많죠."
이달 들어 용산구청과 공동으로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 점심 제공을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50~100인분을 준비한다. 그의 철학대로 '음식은 나눠야 맛있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발치에는 도포를 입은 자신의 사진이 담긴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사진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추며 다짐한다. '오늘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