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10여 년간 유배생활하며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처남이기도 하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속칭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호 星湖)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이배(移配, 유배지가 옮겨짐)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 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 생활이 끝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 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770년대 후반에서 1780년대 초반으로,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였다.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광주 마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설교를 듣고 1784년 서울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약전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 이듬해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부친의 강요로 척사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1787년 정미반회(丁未泮會)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 신앙을 쉽게 포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尹持忠,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더구나 1795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 실포 사건(失捕事件)을 계기로 정조가 당시 남인 관료 중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던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錦帶, 貞軒)을 충주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시킬 때 그도 충청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 되었는데,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강제로 배교시키는 등 천주교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 부인하기도 했다.
또한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疏, 스스로의 입장을 해명하는 상소문)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을 저술해 천주교를 배척(박멸)하는 방법을 상세히 논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다산 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 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 조선의 실학(實學)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그 지도 이념의 한계성이 노출되고 자기 전통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길이 모색되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문화의 한계성을 깨닫고,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달성함으로써,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강화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 운동은 학술과 종교·문학·예술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였지만, 특히 학술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기풍을 실학(實學)이라 한다. 실학 운동에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유형원·이익·정약용등이 주도한 중농적(重農的) 실학파로서 농촌 사회의 안정과 농민의 이익을 강력하게 대변하고자 하였고, 다른 하나는 유수원·박지원·박제가에 의해 주도된 중상적(重商的) 실학파로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개발을 역설하였다.
◆ 다산유물전시관
다산 유물전시관은 전시관 122평, 주차장 600평 규모로 다산 초당 남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 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 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다. 전시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관람 시간은 09:00 ∼18:00이며 동절기(11∼2월)에는 09:00 ∼17:00 이다. 연중 휴무일은 없다.
◆ 답사 코스
○ 다산 유물전시관 → 다산 초당 → 다산 유물전시관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유물전시관을 관람하고 오솔길로 걸어가 다산 초당을 관람한 후 다시 되돌아 오는 코스이다. 가족단위의 승용차 이용 관광에 적합하다.
○ 다산 유물전시관 → 다산 초당 → 백련사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하차하여 차량은 백련사로 가서 대기하고 관광객은 전시관 및 다산초당을 관람한 후 초당에서 산중턱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는 코스이다. 이 오솔길은 지난 날 초당에 거처하시던 다산 선생과 백련사에 거처하던 해장 선사가 서로 교우를 위해 오가던 길이며, 산길을 가는 동안 강진만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여 경치가 좋다. 대형버스를 이용한 단체 관광에 좋은 코스이다(약 1시간 소요). 백련사로 먼저 갈 경우에는 코스를 반대로 관광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