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던 다음 해 여름 들판에는 모내기가 한창이고 더위에 그늘을 찾아 들 즈음인 7월 초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에서 남의 집 문간방에서 태어나 어언 75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기도 하지. 왜 나에게만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언제나 밥 한 끼가 소중하고 흰 쌀밥이 그립던 어린 시절, 제일 지겹고 먹기가 힘들었던 것이 딩겨로 만든 수제비였다. 우선 입에 들어가는 순간 입안이 까칠하고 아리는 맛에 씹는 식감이 거칠고 찐득하여 씹기도 싫었으며 살기 위해서 억지로 먹기는 하였지만 아버지는 맛있다면서 잘 먹었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아버지는 맛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었다. 훗날 깨달은 것은 아버지인들 어찌 맛이 있었겠는가 마는 가장의 체면을 위해서 식구들 앞에서 맛있는 척하고 먹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마음이 짠해졌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내고 아홉 살에 남보다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아버지는 객지에서 돌아가시고 어려운 집안 형편은 더 힘들어지기만 하였다. 어려운 중에도 근근이 버티며 5학년이 되던 해 그동안 집안을 이끌고 가던 큰 형님마저 27살의 젊은 나이에 병명도 모른 채 약 한 번 쓰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돌아가시니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서 집안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도우며 땔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곤 하였다.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난 후 형님과 누님의 권유와 도움으로 다행히 복학을 하게 되었고 중학교도 가게 되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처럼 힘들고 어려운 생활은 쉽게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늘 가난과의 싸움은 게속되었다. 어려운 생활 중에 객지에 있는 누님의 도움으로 대학교 진학을 하게 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닭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가? 이럭저럭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언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36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후에는 연금을 받아서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생활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세 번의 힘든 고비를 맞았었다.
첫 고비는 폐결핵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둥둥세월을 보내고 2학년 여름 군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폐결핵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폐결핵은 좋지 못한 질병으로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다들 기피하며 약을 써도 잘 낫지를 않는 죽거나 평생 안고 사는 고질병이었다. 큰 충격과 군대도 못 가게 된 아쉬움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고 나의 미래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는 일이라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을 한주먹씩 하루에 세 번을 먹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폐결핵약은 독해서 위를 손상할 수 있으니 위를 보호하는 약까지,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고 학교 다니기도 어려운 상황에 비싼 약까지 먹어야 하니 내 처지는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다. 염려하던 대로 졸업을 하였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고 일 년을 백수로 보내다 보니 약을 사먹을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거니와 먹는 것도 지겨워서 죽으면 그만이라는 막된 생각으로 약을 끊어 버렸다. 1971년, 그때만 해도 건강 진단서 없이도 취업이 가능하여 운 좋게 시골의 학교에 취업을 하게 되어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생활할 수 있게 되니 힘에 겨운 무거운 짐 더미에 눌려있던 몸이 자유로워지는 듯 얼마나 홀가분하고 날아갈 듯 좋았는지 모른다.
자취를 하면서 제대로 해 먹을 줄을 모르니 거의 매 끼니마다 돼지고기를 사다가 김치찌개를 해 먹으며 나름대로 영양을 쌩각하며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세상 말로 운이 좋게 폐결핵이 나아서 훗날 건강검진을 하면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다.
두 번째의 고비는 2000년 3월 초,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이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을 하여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왼쪽 입술이 얼얼하면서 꼭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감각이 약간 무딘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다 하면서 그러다 괜찮겠지 하는데 한참을 지내도 나아지지를 않아서 혹시나 하고 찬물로 마사지를 해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였지만 전혀 변화가 없어 순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병원으로 가야지 하며 차를 몰고 나가다가 단지 내 약국에 들러서 이야기를 했더니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까운 중형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서 의사를 만나 이야기를 했더니 혈압을 재보고 알약 하나를 혀 밑에 넣어주며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평촌 시내에서 제일 큰 대학병원인 한림대학 병원에 도착하니 해는 서산에 기울고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각에 응급실로 가서 혈압을 재고 몇 가지 검사를 한 다음 밤 12시경에 방을 배정을 받아 입원을 하였다. 8일간 입원해 있으면서 같은 병실에 입원한 나와 같은 병으로 들어온 동갑내기는 차일피일하다가 병원에 늦게 오는 바람에 거동도 못하고 간병사가 똥오줌을 받아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손으로 차를 몰고 와서 적절한 시간에 치료를 하였고 지금까지 사지가 멀쩡하게 활동할 수 있으니 그 순간에 병원에 갈 생각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얼마나 감사하였는지 모를 정도다. 만약에 치료할 시기를 놓쳤더라면 삶이 끝나거나 반신 불구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나 자신도 괴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이 생각 나지를 않았다.
세 번째 고비는 전립선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쪽 음랑이 크게 부으면서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거동하기도 불편하여 병원에 갔더니 전림선염이라는 것이다. 한 달 동안 항생제를 곁들인 약물 치료로 낫게 되었고 지금의 의술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수롭잖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같은 병으로 죽었다 말을 들으니 아차!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수 김용림 아버지가 바로 전림선염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 나도 옛날에 태어났으면 죽을 뻔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축복인지 다시 한번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전에 아들 덕분에 큰 비용을 드려서 처음으로 온 몸의 상태를 알아보는 종합 건강검진을 하였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여기저기 조금씩 흠집이 생기고 앞으로 지켜봐야 하는 곳도 있으며 때가 되면 재검을 해봐야 하는 곳이 생겼다. 하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이 없고 먹고 배설하는데도 전혀 이상이 없으며 지금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돌을 보면 걸림돌이라 생각하고 현명한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는 명언이 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얼마나 지혜롭게 잘 활용하며 유익을 가져오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하기 나름이요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흔히 말하는 백세 시대에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얼마나 건강하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세 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니 남은 인생은 별 탈 없이 넘어가리라고 믿으며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며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통하여 활기차게, 즐겁게, 행복한 노후를 보내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