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사회에서 드러난 파시즘적 징후들
손정순(시화노동정책연구소)
12.3 내란의 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너무나도 어이없게 윤석열은 구속 취소되어 관저에 틀어박혀 있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심판 역사상 최장 숙의 기간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쓴 이 글이 민들레에 게재될 즈음에는 제발 탄핵 결정이 내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탄핵 결정이 늦어지고 있는 와중에 윤석열을 지지하는 극우보수의 준동도 심해지고 있다. 무조건적인 반중(反中) 정서에 기반한 극우 인종주의적 구호와 외침이 광장을 메웠다. 또한 국민저항권을 들먹이며 헌법재판소를 쓸어버리겠다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아스팔트를 채우고 있다. 여기에 더해 국민의힘은 이들과 손잡고 광장에서 입 맞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동춘 선생이 민들레 칼럼에서 역설하신 것처럼 극우 파시즘은 이미 한국 사회 지배세력 내에 주류로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극우 파시즘적 망동이 거침없이 광장에서 울려 퍼질까? 분명한 것은 망상에 빠진 극우보수 집단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지만 우리 사회 보수의 파시즘화는 윤석열의 12.3 내란과 이후 탄핵 국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일상생활 주변을 배회해 왔고 우리에게 스며든 결과이며 조직노동 또한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란의 밤이 아직 짙게 드리운 지난 3월 15일 새벽 4시 한화오션(구 대우조선) 사내하청 노동자가 서울 장교동 한화본사 앞 30미터 높이 CCTV 철탑에 올랐다. 그는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조선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이다. 몸 하나 누울 자리도 없는 곳에서 그는 원청인 한화오션을 대상으로 농성을 시작했다. 요구는 단 하나, 깎인 상여금을 원상복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화오션 사내하청 노동자는 대우조선 시절이던 2016년까지 550%의 상여금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2017년부터 상여금 550%가 모두 깎여 0%가 됐고, 2023년에야 50%로 일부 회복됐다. 조선사내하청지회는 2024년 임단협 교섭에서 상여금 300% 회복을 요구했지만 사내하청 업체와 원청인 한화오션은 50% 유지 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디서 봐왔던 상황 아닌가? 2022년 파업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조선사내하청지회 유최안 부지회장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며 건조 중인 선박 안에 가로세로 1m 철창을 용접해 자신을 가뒀다. 한 달여간 진행된 유최안 부지회장의 농성으로 독(dock) 작업이 정지되어 버렸다.
정규직 노동자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하퀴벌레(하청 바퀴벌레) 때문에 이번 달 급여가 깎였다”는 것이었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파업으로 독 작업이 중단되어 원청 노동자 또한 연장·휴일근로 수당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우조선 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정규직 직·반장 등 중간관리자로 구성된 ‘현장 직반장 책임자 연합회’나 일부 정규직 현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선사내하청지회에 집단 ‘린치’가 가해졌다는 점이다. 조선사내하청지회가 농성 중인 천막을 찾아와 커터칼로 찢고 부수거나 농성 물품 등을 내다 버렸고, 얼린 생수병을 파업 중인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던지기도 했다. 원청인 대우조선과 한화오션의 정규직-비정규직 갈라치기 효과였겠지만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일부 정규직 노동자의 혐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2018년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을 본격 추진하자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노조와 서울지하철공사의 청년 정규직 노동자는 격렬히 반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빗대어 ‘기회는 불평등, 과정은 불공정, 결과는 역차별’이라는 모토를 내걸고서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 정책을 반대한 것이다. 이후 인천국제공항공사 노동조합은 정규직화를 추진하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를 탈퇴하였고, 서울지하철공사 청년 정규직 노동자는 기존 노동조합을 탈퇴해 별도의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 과정에서 무기계약직 노동자를 벌레로 비하하는 ‘무기충(蟲)’이라는 표현이 난무했다. ‘도대체 무기충들이 뭘 했다고 이제 와서 몇십 대 1의 경쟁을 뚫고서 어렵게 정규직이 된 나와 동급이 되냐’는 글이 노동조합 게시판을 도배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와 동일한 지위로 정규직화가 되는 것이 아님에도 거짓 정보를 배경으로 울분과 조롱, 멸시가 난무한 것이다.
사실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 배제와 비하·혐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IMF 경제위기 여파가 남아 있던 2001년 봄, 광주캐리어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회사 정문 앞에서 농성을 하자 농성장을 때려 부순 것은 광주캐리어 정규직 노동조합·노동자였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노동조합 결성을 이유로 캐리어사가 광주공장 해외 이전을 고려하겠다는 얘기에 고용불안을 느낀 정규직 노동자가 구사대가 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캐리어 광주공장의 주인은 우리(정규직)지 사내하청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2007년 가을 필자는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정규직 대의원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주제는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 문제였다. 인터뷰 도중 대의원이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인터뷰를 중단했다. 기아차 사내하청 지회의 급작스런 파업으로 화성공장 조립라인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뛰어가면서 중얼거렸던 말, “씨○, 남의 공장에서 뭐 하는 짓이야”. 같은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였지만 기아차 노동조합의 대의원에게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여전히 남의 회사 사람이었다. 2000년대 이후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의 파업에서 가장 완강한 반대편은 원청인 현대차였고 두 번째는 현대차 사내하청 업체, 세 번째는 정규직 노동조합·노동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부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 배제와 혐오는 이제 이주 노동자 혐오와 배제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내 일자리를 뺏는 ‘외국인’ 노동자.
위에서 서술한 내용이 한국 사회 노동자가 갖는 평균적이면서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부 노동자의 편향된 인식이겠지만 이런 인식이 지난 20여 년간 작업장에서 저변을 확대해 온 것도 분명하다.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시장 만능주의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질서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각자도생의 사회를 거쳐 왔다. 자신을 보호해 왔던 노동조합과 같은 공식·비공식적 네트워크가 일거에 사라지면서 노동시장의 폭력, 즉 해고·실업이라는 위협과 불안에 직면한 정규직 노동자는 김내훈이 『급진의 20대』에서 언급한 것처럼 “혐오와 경멸, 즉 우울과 불안의 원인을 의인화된 특정 집단에서 찾게” 된 것이다. 고용상 지위가 신분이 되었고 신분제적 위계를 배경으로 배제와 차별 그리고 혐오라는 파시즘의 미시적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이를 제어·통제하지 못했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한편으로는 산별노조 건설로, 다른 한편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통해 대안사회 건설을 제시하려 노력했지만 지난 총선을 계기로 완전히 파산했다. 좌파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각자도생의 폭력적인 사회에서 노동자는 단기 이익 극대화, 즉 고용안정과 임금 극대화로 경도되었고 비정규직을 활용하겠다는 자본의 의도에 노동조합·노동자가 암묵적으로 동의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2000년 사측과 ‘완전고용보장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장에 필요한 완충장치(buffer)로 활용한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희생양으로 삼은 것에 미안함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규직 노동자 고용안정을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지금은 그 당연함이 이주 노동자에게 향하고 있다.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3D업무를 위해 수입한 노동력임에도 배제나 차별이 당연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가 배제·차별을 넘어 혐오 대상이 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한국 노동사회는 파시즘이 준동할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 노동운동 연구자인 하이만(Hyman, R)은 노동조합의 지향이자 목표가 ‘시장(market), 사회(society), 계급(class)’이라는 삼각형 안에 있음을 얘기했다. 12.3 내란 사태 이후 노동조합은 내란종식의 선두에 서 왔고 극우보수와의 투쟁에서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단일한 하나의 실체는 아니다. 외적으로는 한국 사회 노동조합이 사회와 계급을 지향한다고는 하나 내적으로는 시장에서의 이익 극대화, 즉 임금소득 극대화에 매진해 왔다.
하이만은 노동조합은 두 가지로부터 독립해야 함을 역설했다. 첫 번째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며 두 번째는 조합원의 단기적·분파적 이해로부터의 독립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이해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해도 대변해야 하지만 노동조합의 구호와 실천에는 크든 작든 괴리가 있어 왔다. 노동조합은 괴리를 좁히려 노력해 왔으나 조합원의 단기적·분파적 이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다. 윤석열 탄핵 이후에도 노동조합이 연대와 포용의 노동운동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에 파시즘을 뿌리내리게 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