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의 행복 찾는 하느님의 어린 양
남미의 최빈국이라는 증거가 거리 곳곳에서 묻어나는 안데스 산맥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알토 고원. 숨쉬기조차 노력이 필요하고 고산 증상으로 온 몸의 세포가 쪼그라드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곳이지만 하느님의 돌보심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갈 때 그분께서도 온전히 함께하신다는 것을 이들의 삶의 자세를 통해 나날이 깨우칩니다. 저는 오늘도 이들 안에서 그러한 하느님을 만납니다.
십자가 안에서 희망과 위로를
저희 지역은 산루카, 산마태오, 산후안, 밀라그로, 콘셉션 등 5개 공소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소들은 운영을 독립적으로 하지만 매년 본당의 날과 성삼일 전례, 성탄이나 성모님 축제 기간에는 5개 공소 신자가 함께 모여 전례 준비를 합니다.
본당의 날에는 주교님께서 오셔서 미사도 집전해 주십니다. 공소 사정에 따라 서로 준비해야 할 것들과 할 수 있는 것을 나눠야 하는데 늘 재정 문제와 부닥치게 됩니다. 전례도 음식 나눔도 소박할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라며 정성을 다합니다.
견진 미사가 있던 해에는 산루카공소에서 모였습니다. 견진을 받는 아이들과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 모두가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견진 증명서를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이지만 다음 주일부터 그들을 다시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견진을 신앙의 졸업장 정도로 생각하며 성당을 떠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2년 동안 견진 교리를 받은 아이들을 보며 대견함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하는 이유입니다.
사순시기 미사 강론 때 신부님께서 단식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데 “단식은 굶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면서 우리는 따로 단식을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부유한 이들은 평소에 잘 먹으니 사순시기에라도 단식하며 보속과 속죄를 하지만 우리는 삶이 고통이기 때문에 따로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성지주일, 주일학교 아이들이 마을을 행진하는 모습.
이들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전례는 사순 시기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들은 주님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그 고통을 지금 삶으로 살고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위로를 받습니다. 사순시기 동안에는 매주 금요일 밤에 모여서 십자가의 길을 합니다. 부활 시기에도 십자가를 모시고 피정을 하며 부활의 기쁨보다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다.
구유를 꾸미기로 하고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아이들이 만든 야마(낙타과의 동물), 당나귀, 양, 천사들을 모두 놓다 보니 동물농장이 따로 없습니다. 못생긴 동물들을 빼려고 하니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동물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정성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보기에 예쁜 것이 아니라 정성과 마음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전례의 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마음과 정성을 보시는 하느님의 속성을 잘 알고 있고 그런 하느님께 합당한 제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합니다. 꽃을 꽃병째 가져와서 성모상 앞에 봉헌하며 성상을 모시고 와서 제대 앞에 놓고 축복을 받고 가족 숫자만큼 초를 가져와 불을 붙이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몸에 배어 있는 이들만의 신앙의 전통과 신심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유한 마음
얼마 전 본당 신부님이 주교님과 면담을 한다기에 무슨 내용인가 했더니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조금 더 쓰게 해달라는 거였습니다. 5개의 공소와 수녀원 미사를 매일 다니려면 자동차는 필수인데 교구에서 지원해 주는 자동차는 사제 숫자보다 모자랍니다. 그래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신부님에게 반납해야 하는데 그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해 달라고 사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번 신부님은 비포장 길에서 자전거만도 못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성삼일 미사에 오시던 길에 오토바이와 함께 붕 떠서 넘어져 다리에 깁스하는 바람에 결국 5개 공소 신자들 모두 예수부활대축일 미사를 못하고 말았지요.
아이마라 원주민들의 삶은 사제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가 가난하다 보니 이들은 남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반면 삶을 수용하고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을 크게 누릴 줄 아는 이들 안에서 가난 속 풍요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즈음은 알토 전역에 가스 공급이 중단됐습니다. 집집이 수도 시설이 없어 하나뿐인 동네 수돗가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 형편이지요. 가정방문을 해보면 가구 하나 없고 식기구 하나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들의 지나온 삶이 담겨 있는 사진첩을 보니 졸업식, 생일, 성인의 날, 집에서 머리 자른 날, 닭 잡은 날, 상장받은 날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비록 내일이 불투명하다 해도 걱정하거나 불안해 하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살아갑니다.
시련을 받아들이는 아이마라 원주민
우리 본당의 양치는 소녀 ‘마리아’는 갓난아기 때 동네 쓰레기장에서 발견되어 모니카 할머니가 주워다 기른 아이입니다. 마리아는 모니카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온종일 양을 몰고 풀을 뜯기기 위해 비탈길을 헤매고 다니다가 해 질 녘이면 성당으로 찾아옵니다. 유독 눈이 맑고 미소가 예쁜 마리아는 양들이 풀을 뜯는 동안 성당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본당의 교리교사 ‘제니’는 딸만 일곱인 자매들 가운데 첫째 딸입니다. 오래 전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엄마와 여섯 동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제니 엄마는 좌판 행상, 막노동하며 일곱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가비’네 가정은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하며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 주지 않아서 학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어머니마저 시력이 좋지 않아 늘 옆에서 수발을 들면서 집안 살림을 하며 지냅니다. 가정마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답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풍요를 보고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를 봉헌하며 살아가는 아이마라 원주민들의 삶은 저에게도 전부를 걸라고 요구합니다. 한발 뒤로 물러나서 재고 따지고 의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하느님께 다 걸고 전적인 신뢰와 맡김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볼리비아 알토 선교지 이야기에 관심과 사랑과 응원을 보내주시는 한국 신자분들께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나눔으로 지구 반대편 볼리비아에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음을 말씀드리며 이곳은 이제 긴긴 겨울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가까이 안데스 산에는 눈이 녹아 치마가 짧아졌고 매일 쏟아지는 소나기로 거리가 깨끗해졌습니다. 오랫동안 건기를 겪은 후라 내리는 비가 고맙고 풍요로운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한국의 모든 가톨릭 신자분들의 가정에 늘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하길 멀리 볼리비아에서도 기도로 함께합니다.
도움 주실 분(하느님 섭리의 딸 수녀회)
시티은행 622-00044-252-01 (김효진수녀)
농 협 351-0404-1699-53 (김효진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