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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열반의 기쁨
1. 강물은 바다로
부처님께서 제자 카사파에게 말씀하셨다.“너에게 여래가 얻은 오래 사는 업을 말하겠으니 자세히 들어
라. 어떤 보리의 인이 될 만한 것인지 지성으로 들어 그 이치를 알고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어야 한다. 나도 그러한 업을 쌓아 바른 깨달음을 얻었고, 지금 그 이치를 여러 사람에게 말한다. 보살이 오래 살려거든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보살펴라. 크게 사랑하고(대자), 크게 버리는(대사), 평등한 마음을 내어 살생하지 않는 계행을 일러주고 선한 법을 가르쳐라. 모든 중생을 오계와 십선 들 에 의해 살도록 할 것이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세계에 다니면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건져라. 해탈하지 못한 이는 해탈케, 하고 헤매는 이는 건져내며, 열반을 얻지 못한 이는 열반을 얻게 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로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업을 짓는 인연으로 보살은 수명이 길고 지혜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카사파가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보살이 평등한 마음을 닦아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하면 오래 살게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생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래 살아 계시면서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백년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나려 하십니까?” “카사파, 강물은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와 같이 인간이나 천상이나 땅이나 공중에 있는 목숨의 강물은 모두 여래의 목숨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여래의목숨은무한한것이다.온갖존재중에서허공이가장영원하듯여래도모든중생가운데서가장수명이길다.” “부처님, 여래의 수명이 그렇다면 일 겁 동안만이라도 사시면서 중생을 위한 깊은 진리를 비내리듯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카사파, 너는 여래가 아주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비구 .비구니나 신통을 얻은 선인들도 오래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모든 법에 자제한 여래가 일 겁이나 백 겁을 더 못 살겠느냐.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고 바뀌지 않는 법이며, 여래의 몸은 화현한몸이고 음식으로써 유지되는 몸이 아니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보이는 것임을 알아라.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열반에 들려고 한다. 열반이란 여래의 법성이다. 여래는 영원한 법이고 바뀌지 않는 법이니, 너희들은 그런 이치를 알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그리고 정진한 뒤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널리 가르쳐야한다.“ <열 반경 장수품>
2. 멸하지 않는 법의 성품
카사파가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법의성품은 그 뜻이 무엇인지, 저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제가 알기로는 법의 성품이란 곧있었던 것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만약 있던 것이 없어진다면 몸은 어떻게 존재하며,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거기에 법의 성품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몸에 법의 성품이 있다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카사파, 너는 없어지는 것을 법의 성품이라 하지마라. 법의 성품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래의 경지는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 수 없다. 여래는 어느 곳에 머무르며, 어디로 다니며, 어디서 보며, 어디서 줄거워하느냐고 묻지마라. 여래의 법신과 여러 가지방편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승을 받들어 수행하면서 영원하다는 생각을가져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다르지도 무상하지도 않으며 바뀜도 없다. 만약 이 세 가지 법에 대해서 다르다는 생각을 낸다면 그는 청정한 삼보에 의지하지 못하며, 금지된 계행도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는 성문이나 연각의 보리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여래의 법신과 방편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하면 곧 귀의할 곳이 있을 것이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영원한 법이 있으므로 귀의할 곳이 있어 무상하지 않다. 만약 여래가 무상하다면 여래는 천상이나 인간의 귀의할 데가 아니다.” 부처님, 어둠 속에서는 나무는 있어도 그 그림자는 없습니다.” “카사파, 그렇게 말하지 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여래도 그와 같이 그 성품은 항상 존재하여 없어지거나 바뀌는 것이아니다.다만 지혜가 없는 눈으로는 보지 못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는 나무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여래를 법보나 승보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귀의할 곳이 못될 것이다.” “부처님, 저는 여래와 교법과승단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이치를 널리 말해도 믿지 있다면 그들은 오랫동안무상만을 닦아온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서리와 우박이 되겠습니다.” “착하다 .너는 바른 법을 잘 지킨 것이며 사람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오래 살 것이며, 지나간 세상일도 잘 알게 될 것이다.” <열반경 장수품>
3. 가짜 약
카사파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라한과 같은 훌룡한사람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안락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여래와 같으므로중생들의 귀의할 곳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미라 열매의 설고 익음을 알 수 없듯이 그들이 파계하거나 청청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카사파, 심오한 이 법문을 의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어떤 고을에 약장수가 있었다. 그는 히말리아에서 캐온 좋은 약을 팔면서 더러는 다른 약도 섞어 팔았다. 사람들은 히말리아에서 가져온 약만을 사려고 했으나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약장수가 다른 약을 주면서 히말리야에서 가져온 약이라 속였지만 그들은 분별하지 못하고 좋은 약인줄로만 알았다. 성문들 가운데도 이름만 빌린 사문이 있고 진실한 사문도 있다. 계행이 청정한 이도 있고 계를 깨뜨린 이도 있다. 그러나 신도들은 그들을 평등하게 공양하고 예배한다. 그것은 저 가짜 약을 히말리야의 약인줄 알고 사온 사람들처럼 신도가 육안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려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어떤 이는 계행이 청정하고 어떤 이는 계를 깨뜨리며, 아무개는 참 스님이고 아무개는 가짜 스님인 것은 천안통을 얻은 이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파계한 줄 알았다면 그에게는 보시하거나 예배하고 공양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법답지 못한 줄 알았거든 그의 요구를 거절하라. 그가 가사를 입고 있을지라도 공경하거나 예배하지 마라.” <열반경 사의품>
4. 네 가지에 의지하라
카사파가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옳은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진실하여 헛됨이 없으니 제기 금강석처럼 굳게 지키겠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구들은 네 가지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말며,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며,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다, 카사파.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곧 여래의 열반에 의지함이다. 모든 여래의 가르침이 곧 법의 성품이며, 법의 성품이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인데, 여래를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이다.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는 의지하지 말아라. 아라한과 같은 이는 세상에 나와 법을 지키는 사람이니 그런 줄 알고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래의 은밀하고 깊은 법을 잘 알아 여래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파계한 몸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여래는 무상하고 변한다고 말하면 그런 사람에는 의지하지 마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마라. 뜻은 깨달음이고 깨달았다는 뜻은 만족함이다. 만족하다는 뜻은 여래의 영원함이고, 교법이 영원하다는 것은 승가가 영원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뜻에 의지함이다. 말에 의지하지 마라는 것은, 꾸며내는 언론과 번지르르한 문장에 팔리지 말라는 뜻이며, 교활하고 아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마라. 지혜란 곧 여래다. 여래의 공덕을 잘 알지 못하는 성문들의 분별은 지식이니 거기에는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여래가 곧 법신인 줄 알면 그것은 지혜이니 의지해야 한다. 여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몸을 보고 그것이 오온에 속하고 음식물로 기르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니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마라. 소승은 불요의이고, 영원해서 변하지 않는다 하면 요의이다. 만약 여래가 음식물로 산다고 하면 불요의이고, 영원해서 변하지 않는다 하면 요의이다. 여래의 열반이 불이 꺼짐과 같다고 하면 불요의이고, 여래가 법의 성품에 든다면 요의이다. 성문승은 밭갈이가 서툴러 열매를 거두지 못함과 같으니 의지하지 말 것이고, 대승의 진리는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말한 것이므로 의지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의지하고 의지하지 말 곳을 잘 알아야 할 것 이다. 나는 육안밖에 갖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 네 가지 의지할 곳을 말한 것이지, 지혜의 눈을 가진 이를 위해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의지할 곳을 거듭 말하겠다. 법이라 함은 곧 법의 성품이고, 뜻이라 함은 영원해서 변치 않음이며, 지혜라 함은 중생들이 모두 부처의 성품을 지녔다는 것이고, 요의라 함은 모든 대승의 법문을 통달하는 것이다.” <열반경 사의품>
5. 바다의 구명대
부처님께서 카사파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출가하면 계율을 지켜 위의를 잃지않고,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항상 행동이 의젓해서 조그마한 허물도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려는 마음이금강석과 같이 단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몸에 구명대를 차고 바다를 건너가는데, 바다 속에 있던 나찰 귀신이 그에게 구명대를 달라고 했었다. 구명대를 주어 버리면 자기는 물에 빠져 죽게될 것을 생각하고‘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줄 수없다’ 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나찰은 전부를 주기 어렵거든 그 반이라도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나찰은 절반을 줄 수 없거든 삼분의 일이라도 달라고 했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를 보고 이번에는 손바닥만큼만 떼어 달라고 했다. 그래도 안 된다면 티클만큼이라도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잘라 거절했다. “네가 달라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넓은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앞길이 얼마나 먼지 도 모른다. 그런데 바늘귀만큼이라도 너에게 떼어 준다면 그 구멍에서 점점 공기가 새어 결국은 바다를건너지 못한 채 죽고 말지 않겠느냐.” 카사파, 보살이 계율을 지키는 것도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구명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이와 같이 계를 지킬 때에 온갖 번뇌의 나찰이 따라다니면서네 가지 근본계를 깨뜨리면 편안히 열반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꾄다. 이때 보살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계율을 지키다가 무간지옥에 떨어질지라도 계율을 깨뜨리고 천상에나지 않겠다.’ 보살은 이와 같이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금강석처럼 단단히 가져, 대소승의 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정한 계의 덕을 갖추게 될 것이고 성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거룩한 행이라 한다.” <열반경 성행품>
6. 생과 사의 비유
“카사파, 또 거룩한 행이 있으니 그것은 네 가지 진리 인. 고 .집. 멸. 도. 이다. 고는 괴로움이 핍박하는 것이고, 집은 애욕을 일으키는 집착이며, 멸은 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도는 대승의 행을 말한다. 괴로움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원수와 만나고, 구해도 얻지 못하고, 모든 욕망이 불붙듯 일어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괴로움은 살려고하는 데서 일어난다. 중생은 어리석음에 덮여 나는 것은 탐하고 죽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보살은 처음 나는 것을 볼 때에 이미 근심을 본다. 어떤 여인이 남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여인의 얼굴이 아름답고 값진 옷을 입었으므로 주인이 호감을 가지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나는 공덕천입니다.” “ 무슨 일을 하십니까?” “ 찾아가는 데마다 그 집에 온갖 보물을 생기게 해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그 여인을 집안에 맞아들여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려 공양하였다. 조금 후에 또 한 여인이 문앞에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찌그러진 얼굴에 떗국이 흐르고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주인은 기분이 언짢아“당신은 누구요?”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흑암천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왔소?” “나는 가는 데마다 그 집의 재산을 없애버립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칼을 들고 나오면서 “썩 물러가지 않으면 이 칼로 죽여버릴테다.” 하고 덤벼들었다. 그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고 지혜가 없소. 조금 전에 당신집에 찾아온 이는 내 언니요.나는 항상 언니와 행동을 같이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쫓아내면 결국 내 언니도 따라나가게 될 것이요.”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 공덕천에게 물었다. “밖에 어떤 여인이 와서 당신의 동생이라 하는데 사실입니까?” 공덕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를 좋아하려거든 내 동생도 함께 좋아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동생과 행동을 같이하였고 한 번도 서로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나는 좋은 일을 하고 동생은 나쁜 짓을 하며, 내가 이로운 일을 하면 동생은 손해 끼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려거든 동생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주인은 두 여인을 다 내쫓아버렸다. 두 여인이 팔을 끼고 나란히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주인은 마음이 후련했다. 두 여인은 가난한 집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 집 주인이 두 여인을 보자 반기면서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삽시다.” 하고 맞아들였다. 카사파,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병이 들면 죽게 되는 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두 가지에 다 같이 집착하지만, 보살은 함께 버리고 애착하지 않는다. 바라문의 어린 아들이 배가 고파 똥 속에 과일이 있다는 것을 보고 건져냈다. 어떤 지혜로운 이가 이것을보고 “ 너는 바라문의 지체 높은 집 아들인데 어째서 똥 속에 떨어진 더러운 과일을 건져내느냐?” 하고 물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먹으려고 주운 것이 아니라 깨끗이 씻어 도로 버리려고 그랬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지혜로운 이는 어이가 없어 이렇게 꾸짖었다. “도로 버릴 것을 무엇하러 주웠느냐?” “카사파, 보살도 같다. 생을 받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음은 지혜로운 이가 아이를 꾸짓는 일과 같고, 범부들이 생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아이가 과일을 도로 버리는 일과 같다.” <열반경 성행품>
7. 꽃밭에 숨은 독사
부처님께서 카사파에게 말씀하셨다.“카사파, 고는 죽음이다. 억센 폭우가 쏟아지면 약초와 나무와 숲이 다 꺽이고 말지만 금강석만은 깨뜨려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폭우도 모든 중생을 다 쓸어가지만 대승열반의 경지에 있는 보살만은 해치지 못한다. 저 금시조가 모든 용을 잡아먹지만 삼보에 귀의한 용은 먹지 못한다. 죽음이란 금시조도 그와 같아서 무수한 중생을 잡아가지만 공. 무상. 무원의 선정에 든 보살은 잡아갈 수 없다. 죽음이란, 험난한 길에 노자가 없는 것 같고,갈 길은 먼데 길동무가 없는 것 같고, 밤낮으로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길과 같다. 어두운 길에 등불이 없고, 들어 갈 문은 없는데 집만 있고, 아픈 데가 있어도 치료할 수가 없으며, 내 몸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런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은 참으로 큰 괴로움이다. 카사파, 집이란 애욕을 말한다. 사랑에는 선과 악이 있는데, 선한 사랑은 보살이 구하는 것이고, 악한 사랑은 중생이 구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랑은 집착이고 보살의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왕이 거동하면 신하도 따라가듯이 애욕이 가는 곳에는 항상 미혹이 따른다. 습한 땅에 잡초가 무성하듯 애욕의 습지에는 번뇌의 잡초가 무성하다. 또 애욕은 나찰의 딸과 같아 아이를 낳는 대로 잡아먹고 마침내는 자기 남편까지도 잡아먹는다. 중생들이 선업의 아이를 낳으면 낳는 대로 잡아먹고 중생까지도 잡아먹는다. 애욕은 또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사람들이 꽃을 탐해 꽃밭에서 꽃을 꺽다가 독사에 물려 죽는다. 중생들은 오욕의 꽃을 탐하다가 애욕이 뿜은 독을 받고마침내 악도에 떨어진다. 멸은 애욕의 불이 꺼짐이다. 보살은 번뇌의 불을 끄고 고요한 적멸에 들어간다. 번뇌가 다한 사람에게는 즐거움뿐이므로 어떤 괴로움도 받지 않는다. 도란 팔정도다 .빛이 있어야 물체를 볼 수 있듯이, 보살은 대중 속에서 살면서 팔정도에 의해 모든 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대승의 열반에 머물러 고집멸도의 참된 이치를 관찰해야 한다.” <열반경 성행품>
8.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살이 청정한 행을 갖추려면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고, 기뻐하고, 버리는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사무량심)을 수행해야 한다. 여래는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어떤 중생이 재산을 탐하면, 그를 위해 왕이라도 되어서 그의 요구대로 갖가지 물건을 주어 기쁘게 한 뒤 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그를 편안하게 한다. 또 어떤 중생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하면, 그의 하인이 되어 시중을 들면서 마음에 들게한 뒤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중생이 성질이 사나워 자기 고집만을 세우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몇 천 년이라도 그를 타이르고 달래어 마음을 누구러뜨린 뒤 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들인다. 선남자, 여래는 이와 같이 끝없는 세월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중생들을 권유하고 교화하여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여래는 나쁜 무리 속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음이 연꽃과 같다. 사랑하는 마음을 닦는 이는 탐욕을 끊게 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는 이는 성내는 일을 끊게 되며, 기쁜 마음을 닦는 이는 괴로움을 끊게 되고, 버리는 마음을 닦는 이는 성냄과 차별 두는 마음을 끊게 된다. 이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은 온갖 착한 일의 근본이 된다. 보살이 가난한 중생을 만나지 못하면 사랑하는 마음을 낼 인연이 없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면 중생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보시를 하면서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또 보살은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라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여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 곧 사랑(자)의 성취다. 그러나 큰 사랑(대자)은 아니다. 큰 사랑은 실로 이루기 어렵다. 끝없는 세월에 번뇌만 쌓고 선한 법을 닦지 않았으므로 하루 동안에 마음을 조복할 수 없다. 이를테면 마른 완두콩은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번뇌의 굳기도 그와 같다. 하루 동안 마음을 거두어 산란치 않으려 해도 조복하기가 어렵다. 또 집에 있는 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산에 있는 사슴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 달아난다. 성내는 마음을 버리기 어렵기는 집 지키는 개와 같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기는 산에 있는 사슴 같으므로 조복하기 어렵다. 또 성내는 마음은 돌에 새긴 글씨처럼 지우기 어렵고, 사랑하는 마음은 물위에 쓴 글씨처럼 빨리 사라진다. 성내는 마음은 달아오른 불덩이 같고, 사랑하는 마음은 번갯불과 같다. 그러므로 조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해 이롭고 즐겁지 않은 일은 없애버린다. 이것이 대자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해 이로움과 즐거움을 준다. 이것이 대비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대할 때에 마음으로부터 기뻐한다. 이것이 대희다. 보살은 모든 법을 볼 때에 평등한 마음으로 차별을 두지 않고 자기 기쁨을 남에게 준다. 이것이 대사다. 이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은 모든 선해의 근본이 된다.” <열반경 범행품>
9. 자비심이 곧 여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를 하는 것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아니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내거나 은혜 갚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보시를 할 때에는 자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받는 사람을 가려서도 안 된다. 그가 계행이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거나, 선지식이거나 선지식이 아니거나 따져서는 안 된다. 보살이 만약 보시받을 사람의 계행이나 그 결과를 따진다면 끝내 보시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보시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다를 갖출 수 없고, 보시바라밀다를 갖추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도 없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에는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해야 한다. 병든 중생을 보면 부모가 병든 자식을 대하듯 가엾이 여겨 보살펴주고, 즐거워하는 중생을 보면 병든 자식이 다 나은 것을 보듯 기뻐하고, 보시한 뒤에는 다 큰자식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듯이 해야 한다. 보살이 자비스런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할 때에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워야할 것이다.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 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중생들이 모두 큰 지혜의 음식을 얻어지이다. 바라건대 중생들이 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삼고 애욕의 음식을 찾지 말아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공한 이치를 깨달아 허공과 같이 걸림없는 몸을 얻어지이다. 바라건대 모든 중생들이 자비심을 일으켜 복밭이 되어지이다.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한량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이 모든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여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선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은 곧 자비심이며, 자비심은 곧 여래다.” <열반경 범행품>
10. 적멸의 즐거움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 “무엇이 큰 열반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나이고, 청정한 것이 큰 열반이오. 보살이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괴로운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고 진실한 가르침을 보여 준 다면 그것은 곧 큰 열반이오. 크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들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여래와 보살은 보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합니다. 또 대아가 있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대아란 무아의 경지에서 자유자재함을 말하는 것이오. 따로 구하는 일이 없으니 얻을 법도 없고,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 차 있으니 없는 것 같지만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오. 또 큰 즐거움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선악에서 벗어난 것이오.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고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안합니다.또 한결같이 청정하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온갖 청정하지 못한 것을 아주 끊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큰 즐거움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선악에서 벗어난 것이오.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고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또 한결같이 청정하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온갖 청정하지 못한 것을 아주 끊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업의 싹을 말려 버린 중생이라 할지라도 나쁜 생각을 돌이켜 바른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바른 꺠달음을 얻을 수 있소. 열반에는 머물 곳이 없소. 다만 번뇌를 끊을 뿐이오. 열반의 경지는 이와 같이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나이고 청정한 것이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애욕의 즐거움이 아니라 적멸의 즐거움이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1. 선지식
부처님께서 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이란 부처님과 보살과 대승경전을 믿는 사람이오. 그들은 중생을 교화하여 열 가지 나쁜 업을 버리고 열 가지 선한 업을 쌓게 하기 때문이오. 또 선지식은법대로 말하고 말대로 행동합니다. 스스로 살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살생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도를 닦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를 가르쳐 닦게 합니다. 자기의 즐거움은 돌보지 않고 항상 중생을 위해 즐거움을 구하며 남의 허물을 볼지라도 그의 단점을 말하지 않으며, 남을 위해 착한 일만 하는 것이 선지식이오. 허공에 걸린 달은 보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차 가듯이, 선지식도 배우는 이로 하여금 나쁜 법은 멀리하고 선한 법은 자라게 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선지식을 가까이 섬기는 사람은 본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한 지견이 없었더라도 단박 갖추게 됩니다. 진실한 선지식은 여래와 보살이오. 여래와 보살은 지혜로운 의사와 같소. 중생의 병과 그 약을 알고 병에 따라 약을 주어 낫게 하기 때문이오. 중생에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병이 있소. 탐욕의 병에 걸린 사람은 해골을 생각하게 하고, 성냄의 병에 걸린 사람은 자비한 것을 생각하게 하며, 어리석음의 병에 걸린 사람은 십이인연을 생각하게 하여 각기 그 병을 낫게 하는 것이오. 여래와 보살은 또 뱃사공과 같소. 나고 죽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중생을 건너게 해주기 때문이오. 여래와 보살은 모든 선한 법의 바탕이오. 그러므로 중생들은 여래와 보살로 인해 선한 법을 갖추게 되는 것이오. 마치 모든 약초가 히말리야에서 나오듯이, 모든 선한 법은 여래와 보살로부터 나오는 것이오. 이와 같이 여래와 보살은 선지식이오. 중생들이 선지식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의 병을 없애고 열반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2. 인연 따른 해탈
부처님께서 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번뇌를 끊는 것이 열반이 아니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오. 여래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항상 열반이오. 지혜가 걸림이 없는 것을 또한 열반이라합니다. 보살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아주 끊어 버렸으므로 해탈했다 합니다. 그리고 보살은 모든법을 막힘없이 잘 알므로 해탈의 지견을 얻었다고 하며, 혜탈의 지견을 얻었으므로 그 전에 듣지 못한것을 이제 듣고,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이르지 못한 데를 이르게 됩니다. 이 떄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해탈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품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본래 얽매인 것이 아닌데 어째서 마음이 해탈한다 하십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소. 마음은 탐욕의 번뇌에 얽히는 것도 아니고 얽히지 않는 것도 아니며, 해탈도 아니고 해탈 아님도 아니오. 있음도 없음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과거나 미래도 아니오. 모든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오. 여래와 보살은 중도를 보이오. 모든 법이 있다고도 하지 않고없다고도 하지 않소. 인연으로 생겨나므로 그 인연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오. 여래와 보살은 마음에 깨끗한 성품과 부정한 성품이 있다고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소. 그것은 꺠끗함 마음이나 부정한 마음이 머무는 데가 없기 때문이오, 인연을 따라 탐욕을 내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고, 본래 탐욕의 성품이란 없는 것이므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오. 이 마음은 탐욕과 화합하지 않고 성냄이나 어리석음과도 화합하지 않소. 마치 해와 달이 안개나 구름에 가리면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와 달이안개와 구름에 화합될 수 없는 것과 같소. 그러므로 탐욕의 번뇌가 마음을 더럽하지 못한다고 하며, 여래와 보살은 탐욕의 번뇌를 아주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했다는 것이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3. 삼매의 선행
부처님께서 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큰 열반을 닦는 것은 든든한 뿌리를 얻는 일이니 그것은 곧 게으르지 않는 불일망이오. 방일하지 않음은 도의 뿌리이고 모든 선의 근본이오. 모든 짐승의 발자국 가운데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 크고, 모든 빛 중에서는 햇빛이 제일인 것처럼 불일망은 모든 선행 중에서 첫째가는 선행이오. 또 보살은 이 몸이 바른 깨달음의 도를 얻는 그릇임을 생각하여 악마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좁은 소견을 가져서도 안되오. 모든 중생은 다 복밭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해치려는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오래 살기를 원하시오. 훔치려는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구하는 것을 얻도록 원하시오. 음란한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애정에 목말라하는 일이없기를 원하시오. 거짓말하려는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정토를 이루어 꽃이 향기롭고 온갖 소리가 아름다워지기를 원하시오. 이간질이나 남을 헐뜯는 생각을 버려 중생들이 화목하여 바른 말 하기를 원하시오. 그릇된 소견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모두 지혜가 충만하기를 원하시오..이와 같은 원력과 인연으로 부처를 이룰 때에는 그 원이 성취되어 이 세상은 청정하게 정화되고 모든 번뇌의 적을 물리치게 될 것이오. 대지는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지만 지녔다는 생각이 없듯이, 보살은 번뇌를 깨뜨리고 중생을 건진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 되오. 보살은 어떠한 형상이나 자취에 집착함이 없이 항상 삼매에 의해 교화해야 합니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4. 불 성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불성이란 무엇이며, 왜 영원하고 즐겁고 <나>이고 꺠끗하다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 물었소. 누구든지 법을 위해 물으면 그는 지혜와 복덕을 갖추게 되고, 보살이 이 두 가지를 갖추면 불성을 알게 될 것이오. 불성을 제일의공이라 하니 그것은곧 지혜요. 지혜는 공과 불공을 보고, 상과 무상을 보며, 고와 낙을 보고, 아와 무아를 봅니다. 공과 무상과 고와 무아는 생사요, 불공과 상과 낙과 아는 열반이오. 중도는 불성이고 바른 깨달음의 종자요. 중생은 무명에 덮이어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죽는 것과 같이 스스로 업을 지어 생사에 오락가락하는 것이오. 성문과 연각은 공한것만 보고 <나>인 것은 보지 못하오. 그래서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고, 제일공덕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고, 중도가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못하는 것이오. 생사의 원인은 무명과 애욕에 있고 이 두 중간에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오.이러한 생사는 중도에 의해 꺠뜨릴 수 있으므로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 하며, 불성은 영원하고 즐겁고 나이고 꺠끗한 것인데, 중생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서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반이란 곧 번뇌의 불이 꺼져 버린 것이오. 또 열반은 우리들이 거처하는 방과 같아서 번뇌의 비바람을 막는 것이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밝지 못하지만 여래의 눈으로 보면 환하게 밝소. 아는 데에는 두 길이 있소. 눈으로 보는 것은 마치 손바닥에 과일을 쥐고 보는 것과 같은데, 중생은 들어서 알기 때문에 밝게 볼수 없소. 그러나 지극한 믿음을 내면 볼 수 있을 것이오.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오. 그러나 불성은 깨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끌려가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아니하며 허공과 같소. 모든 중생에게는 다 허공과 같은 불성이 있소. 만약 이 불성이 없다면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나고 크는 것도 없을 것이오. 허공에는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중생의 불성도 그러하여 보살이라야 겨우 볼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은 여래의 경지이니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중생은 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의 그물에 걸려 생사에 괴로워하지만, 불성을 보면 생사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얻을 것이오.”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15. 보리심을 내는 일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부처님, 만약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모두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인연이 화합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끝내 못 이루는것이 아니라 늦게 얻는 것이오. 인과 연이 화합되어야 결과를 이루는 것이오. 인은 불성이고 연은 보리심을 내는 일이오. 보살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면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되오. 믿지 않고, 짓지 않고, 의심하고, 몸과 재물을 아끼고, 열반을 두려워하고, 참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걱정 근심으로 모든 일을 즐기지 못하고, 게을러 도 닦기를 힘쓰지 않고, 나쁜 벗과 친하고 교만하며, 스승의 허물을 찾고, 생사를 좋아하고, 삼보를 공경하지않는 등 이와 같은 일이 보리심을 깨뜨리는 것이오. 그러나 뜻을 바로 세워 법에 의지하고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보리심을 내게 될 것이오. 중생들이 나를 해치려 하면 ‘이 사람이 나에게 보리의 인연을 심어 주는구나. 만약 이런 이가 없으면 나는 무엇을 의지해 도를 이룰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자비심으로 대하시오. 교만한 마음을 내지 말고, 항상 법문을 듣고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시오. 들은 것이 많은 것보다 조금 들었을지라도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몸과 말과 생각의 세 가지 업을 악에 물들지 않게하고, 몸과 목숨과 재산을 아끼지 말며, 남에게 은혜을 입었거든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크게 갚으시오. 말을 항상 부드럽게 하여 나쁜 말을 하지 말고, 마음이 거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해 주며, 근심이 있는 이는 근심을 덜어주고, 굶주리는 사람에게 음식을 넉넉히 나누어주며, 병든 사람을 고쳐 추고, 전쟁이 일어나거든 중재하여 화평하게 하며, 부모와 스승을 공경하고,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비로써 대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라면 무량겁에 지옥의 고통을 대신 받더라도 뉘우치지 말고, 남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볼지라도 시기하지 말며,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과보의 인연을 모으지 말고, 현재의 쾌락에 탐착하지 마시오. 이와 같은 선행에 의해 보리심을 물리치지 않으면 부처를 보고 불성을 환히 깨칠 수 있을 것이오.” <열반경사자후보살품>
16. 칠보산의 비유
부처님께서 사자후보살에게 말씀하셨다.“중생이 보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중생에게 불성이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두 나그네가 있었소. 그들은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소. ‘어느 곳에는 칠보로된 산이 있고, 그 산에는 감로수가 철철 넘치고 있다. 그 산에 가기만 하면 많은 보석을 얻어 단박에 부자가될 수 있고 시원한 감로수를 마시면 죽지 않고 오래 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기가 어렵다.’ 이 말을 들은 두 나그네는 정신이 번쩍 나서 길을 떠났소. 길을 가던 도중 칠보산에서 많은 보석을 가지고 온다는 사람을 만났소. ‘그 곳에는 정말 칠보로 된 산이 있고 감로수가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많은 보석과 시원한 감로수를 마시고 오는 길이오. 그런데 길이 험하고 도둑이 많아가는 사람은 수없이 많은데, 그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이 말을 듣고 한 나그네는 미리 겁을 먹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말았소. 그러나 다른 한 나그네는 ‘이미 갔다가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라고 못 갈 리가 없다. 그 곳에 가기만 하면 소원대로 많은 보석을 가질 수 있고 감로수를 마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만약 가다가 도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죽음밖에 더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든지 언젠가는 한번 죽게 마련 아닌가. 다행이 뜻을 이루게 되면 부모 형제와 모든 이웃을 두루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쉬운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결심하고 길을 재촉하였소. 칠보산이 큰 열반이고 감로수는 불성이며, 도중의 도둑떼는 번뇌이고, 꾸준히 길을 간 나그네는 불퇴전의 보살이며, 되돌아온 나그네는 나약한 중생에 견줄 수 있을 것이오. 불성은 그 길과 같아 항상 있어 변하지 않소. 겁을 먹고 되돌아가는 자가 있다고 하여 그 길이 상주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소. 그와 같이 보리의 길에는 누가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물러남이 있을 뿐이오. 모든 중생은 반드시 도를 이룰 수 있고, 어떠한 죄를 범한 자라도 다 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17. 사라숲을 빛내는 사람들
사자후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어떤 비구가 이 사라숲을 빛나게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셧다. “가르침을 잘 들어 그 뜻을 밝히고, 중생을 위해 널리 말해주는 비구라면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사자후보살이 말했다. “그런 비구라면 아난다이겠습니다. 아난다는 그릇에 담긴 물을 다른 그릇에 그대로 옮기듯이,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잘 듣고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안으로 시방세계 보기를 손바닥 안에 아마라 열매 보듯이 하는 비구라면 또한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 그런 비구라면 아니룻다이겠습니다. 아니룻다는 천안으로 온 세계를 환히 보되조금도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고 고요를 즐기며 부지런히 정진하는 비구라면 또한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그런 비구라면 카사파이겠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공덕을쌓을 뿐 자기 이익 때문에 공덕을 쌓지않는 <갈등없는삼매> 에 든 비구라면 또한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그런 비구라면 수부티이겠습니다.” “신통을 잘 쌓고 지혜를 성취한 비구라면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음을 말하고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는 몸으로 걸림없이 자유로운 비구라면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이때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그것은 다만 부처님 한 분뿐입니다. 원컨대 큰 자비를 베풀어 이 숲이 빛나도록 여기 오래 머물러 주십시오.” “머문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오. 교만을 가지고는 해탈을 얻을 수 없소. 그러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소. 여래는 모든 교만을 아주 떨쳐 버렸는데 어찌 여기에만 머물러 있겠소. 또 머문다는 것은 생사가 있는 유위의 법이오. 그러나 여래는 이미 유위의 법을 끊었는데 어찌 이곳에만 머물겠소. 허공은 시방세계 어디에고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여래도 동서남북 상하 어는 곳에도 머무는 일이 없소.” 사자후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열반을 어째서 모양이 벗음이라 하십니까?” “모양에 집착한 이는 어리석음을 내고, 어리석기 때문에 애욕을 일으키며, 애욕으로 인해 얽매이고, 얽매이므로 태어나게 되오. 태어나므로 죽게되고, 죽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리석음을 내지 않고, 어리석지않으므로 애욕이 없으며, 애욕이 없으므로 얽매임이 없고, 얽매임이 없으므로 태어나지 않소. 태어나지않으면 죽는 일이 없고, 죽임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뜻에서 열반을 영원하다고 하고, 모양 없는 선정[무상정]을 대열반이라고 하는 것이오.”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제11장 보살의 길
1. 깨달음을 찬탄한 노래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마가다리나의 적멸도량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대지는 밝게 빛나고 여러 가지 보석과 꽃으로 장식되어 아름다운 향기가 넘치고 있었다. 부처님 둘레에는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싸여있고 그 위에 금.은.유리.산호.파려.자거.마노등 진귀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나뭇가지와 잎새마다 찬란한 빛을 내어 눈이 부셨다. 이와 같은 풍경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자좌에 앉아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다. 과거.현재.미래.의 진리가 모두 평등함을 깨달았으며, 그 지혜의 빛은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미묘한 깨달음의 소리는 온 세상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허공을 지나가듯 무엇에나 걸림이 없었다. 또 지혜의 빛으로 어둠을 사르고 무수한 불국토를 나타내어 여러 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 하셨다. 그때 해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과 중생을 교화하셨다. 그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과 천신들이 각각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찬탄하였다. 요업광명천왕은 이렇게 찬탄했다. “ 모든 부처님의 경지는 너무 깊어 상상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끝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게 하십니다. 모든 사물의 참된 모습은 고요하게 통일되어 있고 그 바탕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여래는 신통력으로 한 개의 터럭 속에서도 중생을 위하여 최상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여래는 진리의 깊은 뜻을 살피고 중생의 능력에 따라 불멸의 가르침을 비처럼 내리십니다. 그 때문에 많은 진리의 문이 열리고, 고요하게 통일되어 있는 평등하고 진실된 세계에 중생을 이끌어 들이십니다.” 시기대범천왕은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고 항상 고요하십니다. 시방세계를 비추더라도 그 자취가 없고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며 마치 허공에 뜬구름 같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몸은 고요한 선정의 경지이므로 어떤 중생도 생각를 한 소리로 남김없이 말씀하십니다. 여래의 미묘한 음성은 깊고 충만하여 중생들은 각자의 그릇에 따라 쌓은 보살행은 모두 부처님 둘레에 나타나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십니다. 부처님 몸은 허공과 같아 다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모양이 없으니 무엇에나 걸림이 없으십니다. ”일광천자는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여래의 지혜 광명은 끝없는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여래를 보게하십니다. 중생들의 세계는 큰 바다처럼 넓지만 여래는 그 마음을 잘 아시고 중생의 지혜 바다를 열게 하십니다. 여래는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춥니다. 여래의 법신은 무엇에도 견줄 수 없으며 최상의 지혜로써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여래께서 중생들의 갖가지 생활 속에 들어가 고행을 하는 것은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입니다.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여래는 미묘한 몸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마치 보름달과 같아 밤하늘에 밝고 은은한 빛을 비춰 줍니다. 무지해서 마음이 어두운 중생은 눈을 잃은 장님과 같습니다. 여래는 괴로워하는 중생을 위해 밝은 눈을 뜨셨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 청정한 몸을 중생 앞에 나타내십니다.” 비사문야차왕은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중생의 죄악은 깊고 무거워 부처님을 뵙고 섬길 수 없어 미혹의 세계로 흘러다니면서 갖은 괴로움을 겪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시방세계 중생 앞에 출현하시어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중생의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를 벗기고 바른 법에 편히 머물게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쌓을 때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찬탄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높고 거룩한 부처님의 이름이 시방세계에 두루 울려 퍼집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허공처럼 끝이 없고 그 법의 몸은 불가사의하십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천신과 보살이 번갈아가며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해 마쳤을 때 연화장세계는 여러 가지로 진동하셨다. <화엄경세간쟁근품>
2.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물었다. “마음의 본성은 하나인데 어째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까 ? 행복한 사람도 있으며, 이목구비가 제대로 된 사람도 있고 불구자도 있으며,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고 불구자도 있으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살펴보면 업은 마음을 모르고 마음은 업을 모릅니다. 느낌은 그 결과를 모르고 그 결과는 느낌을 모릅니다. 마음은 느낌을 모르고 느낌은 마음을 모릅니다. 인연은 연을 모르고 연은 인을 알지 못합니다.” 각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보살은 잘 물으셨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은 자성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이건 서로 알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시냇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 한 방울 한 방울은 서로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또 타오르는 불길은 잠시도 멈추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불꽃끼리는 서로 모르듯이 모든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코.혀.몸과 생각이 고통을 받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고통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존재 그 자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지만 나타난 쪽에서 보면 항상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타난 것에도 자성은 없습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눈은 청정하고 불가사의합니다. 그러므로 허망하다거나 허망하지 않다거나 진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 이름에 불과합니다.” <화엄경보살명난품>
3. 덧없이 흘러가는 존재
문수보살이 재수보살에게 물었다. “여래가 중생을 교화할 때 무슨 이유로 중생의 시간과 수명은 신체와 행위와 견해 같은 것에 수순해 집니까 ?” 재수보살은 대답했다.“지혜가 밝은 분은 항상 적멸의 행을 원합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몸을 안에서 관찰해볼 때도 대체 내 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자세히 살펴본 사람은 자아가 있는지 없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모든 부분을 샅샅이 살펴보면 어디에도 그 근본이 될 만한 곳은 없습니다. 몸의 형편을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몸의 어디에건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불의 바퀴와 같아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연으로 생기는 업은 꿈과 같아 그 결과도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 세상 일은 마음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관에 의해 판단을 내리는 것도 그 견해가 뒤바뀌기 쉽습니다. 생멸 변천하는 세계는 모두 인연으로 일어나 순간순간 소멸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존재는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텅 비어 그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집착하지 않습니다.” <화엄경보살명난품>
4. 업의 본성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물었다. “중생은 지.수.화.풍. 네 요소로 되어 그 안에는 자아의 실체가 없고, 모든 존재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중생은 고와 낙을 받기도 하고 선하고 악한 짓을 하게 됩니까? 또 어째서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습니까? ” 문수보살이 대답했다. “ 그가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이지만 그 행위의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습니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습니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습니다.” <화엄경보살명난품>
5. 분별 없는 본성
문수보살이 덕수보살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은 한 가지뿐인데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길로 법을 말씀하시고 여러 가지 소리를 내시며,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시고 끝없는 중생을 교화하십니까? 법의 성품 안에서 이와 같은 차별을 찾아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덕수보살이 대답했다. “ 보살의 질문은 뜻이 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이것을 알면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구할 것입니다. 대지의 본성은 하나인데 온갖 중생들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대지 자체는 어떤한 분별도 하지 않듯이 부처님의 법도 그렇습니다. 불의 본성은 하나인데 모든 것을 태웁니다. 그러나 불자체는 어떠한 분별도 하지 않듯이 부처님의 법도 그렇습니다. 바다에는 시냇물이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맛은 변하지 않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바람의 본성은 하나인데 모든 것을 불어버립니다.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듯이 부처님의 법도 그렇습니다. 태양은 사방을 두루 비춥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차별이 없듯이 부처님의 법도 그렇습니다.” <화엄경보살명난품>
6. 여래의 복밭
문수보살이 목수보살에게 물었다. “여래의 복밭은 하나인데 어째서 중생이 받는 과보는 다릅니까? 중생들 가운데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으며, 지혜가 많은 이도 있고 적은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래는 평등해서 가깝고 먼 차별을 두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목수보살이 대답했다. “ 대지는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지만 온갖 싹을 트게 합니다. 부처님의 복밭도 그와 같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듯이 부처님의 복밭도 그와 같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듯이 부처님의 복밭도 중생에 따라 달라집니다. 변재천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듯이 부처님의 복밭도 중생들을 기쁘게 합니다. 거울이 여러가지 그림자를 비추듯이 부처님의 복밭도 중생들을 길러줍니다. 해가 뜨면 어둠이 사라지듯 부처님의 복밭도 시방세계를 두루 비춥니다.” <화엄경보살명난품>
7. 젖은 나무는 타지 않는다
문수보살이 진수보살에게 물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결같은데 이 가르침을 듣는 중생들은 어째서 한결같이 번뇌를 끊을 수 없습니까?" 진수보살이 대답했다. “ 중생들 가운데에는 빨리 해탈하는 사람도 있지만 해탈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어리석음을 없애어 해탈하려고 한다면 굳은 결심으로 용맹 정진해야 합니다. 나무가 젖어 있으면 약한 불은 꺼지고 말 듯이 가르침을 들었어도 게으른 자는 그와 같습니다. 불을 지필 때에 태우다말다 하면 마침내는 꺼지고 말 듯이 게으른 자도 그와 같습니다. 눈을 감고서는 달빛을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듯이 게으른 자가 법을 구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화엄경 보살명난품>
8. 듣는 것맘으로는 이룰 수 없다
문수보살이 법수보살에게 물었다. “중생들 가운데 어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는 번뇌를 끊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법을 들으면서도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법수보살이 대답했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도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먹지 않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습니다. 백 가지 약을 잘 알고 있는 의사도 병에 걸려 낫지 못하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밤낮없이 남의 돈을 세어도 자기는 반푼도 차지할 수 없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장님이 그림을 그려 남들에게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은 볼수 없듯이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습니다.” <화엄경보살명난품>
9. 중생의 성질에 맞는 법
문수보살이 지수보살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지혜를 첫째로 꼽는데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육바라밀과 사무량심을 찬탄하십니까? 이러한 법으로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지 않습니까?” 지수보살이 대답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여래가 한 가지 법만으로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래는 중생의 성품을 잘 알아 거기에 알맞는 법을 설하십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는 보시를 권장하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계율 갖기를 권장하며, 화 잘내는 사람에게는 인욕을, 게으른 사람에게는 정진을, 마음이 흩어지기 쉬운 사람에게는 선정을,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지혜를 권장합니다. 그리고 인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자)을 권장하고, 남을 해치는 사람에게는 가엾이 여김(비)을,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쁨(희)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강한 사람에게는 버림(사)을 권유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평소에 꾸준히 나아간다면 마침내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화엄경 보살명난품>
10. 한 마음 한 지혜
문수보살이 현수보살에게 물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일승에 의해 생사를 초월하셨는데 모든 불국토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정이 각기 다릅니다. 즉 세계와 중생과 설법과 교화와 수명과 광명과 신통력 등 모두 한결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법을 갖추지 않으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지 않습니까?” 현수보살은 대답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길에 의해 생사를 초월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몸은 하나의 법신이고 그 마음과 지혜도 한 마음이고 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 방법에 따라 설법과 교화도 다른 것입니다. 또 모든 불국토는 평등하지만 중생이 지은 업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눈에 비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힘은 자유 자재하므로 중생의 업과 과보에 따라 각기 진실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화엄경 보살명난품>
11. 부처님의 경지는 허공과 같다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을 각기 말했습니다. 이제는 보살의 깊은 지혜로 부처님의 경지는 어떤 것이고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경지를 알 수 있는지도 말씀해 주십시오.”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래의 심오한 경지는 허공처럼 광대 무변해서 가령 모든 중생이 그 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사실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경지는 부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부처님이 무량겁을 두고 설명한다 할지라도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해탈시키고자 할 때에는 중생의 마음과 지혜에 따라 법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중생의 수준과 기질에 따라 자유자재로 중생의 세계에 들어가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항상 고요합니다. 이것이 부처님만의 경지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막힘이 없고 그 경지는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그 자성이 참으로 청정하여 생각이나 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부처님의 경지는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며 고요해서 걸릴 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평등하고 한결같이중생의 세계에서 작용합니다. 모든 중생의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 속에 있고 부처님은 한 생각에 중생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보고계십니다.” <화엄경 보살명난품>
12. 보살의 청정한 일상
지수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해야 사물에 흔들리지 않을 행동과 말과 생각의 청정한 삼업을 얻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해야 지혜를 성취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며 각오가 굳어집니까? 보살의 가장 뛰어난 지혜, 헤아릴 수 없고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그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 보살은 어떻게 해야 방편의 힘과 선정의 힘을 갖출 수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해야 서로 관계된 연기의 법을 알고 공삼매나 무상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해야 육바라밀과 사무량심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보살은 어떻게 해야 여러 천신과 용왕과 범천이 수호하고 공경하게 됩니까? 보살은어떻게 해야 중생들의 집이 되고 구원의 손길이 되며 등불이 되고 길잡이가 됩니까? 보살은 어떻게 해야 모든 중생 가운데서 비길데 없이 뛰어나게 됩니까? 문수보살은 지수보살에게 대답했다.” 문수보살의질문은 정말 훌룡합니다. 중생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잘 물으셨습니다. 보살이 사물에 흔들리지 않을 행동과 말과 생각의 청정한 삼업을 성취한다면 그는 온갖 뛰어난 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부처님의 바른 법에 의심이 없고, 부처님이 나타내신 법을 스스로 나타내며, 중생을버리지 않고 분명하게 모든 존재의 실상에 도달할 것입니다. 나쁜 일은 하지 않고 두루 선한 일을 하여모든 것에 자유자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청정한 삼업을 성취하여 뛰어난 덕을 얻으려면 어떻게해야겠습니까.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보살이 집에 있을 때는 집안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했을지라도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있는 것이니 아무 것도 집착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를 섬길때는 미워함이 없이 아끼고 애욕의 탐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욕에 마주치면 탐욕과 미혹을 버리고 덕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음악이나 무용을 즐길 때는 바른 법의 기쁨을 얻어 모든 것은환상과 같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부정한 애욕을 떠나 청정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진리의 높은 곳에 오른다 생각하고 모든 것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남에게 보시할 때는 모든 집착을 버리고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모임에 참석할 때는 깨달음을 이루어 여러 부처님의 모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재난을 당할 때는 제 정신을 차리고 꺽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살이 신심을 내어 집을 버리고 출가할 때는 모든 세상일도 함께 버리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 안에 있을 때는 모든 대중이 화합하여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출가할 때는 불퇴전의 경지를 목표로 하고 마음에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세속의 옷을 벗어 버릴때는 오리지 바른 법을 구하고 쌓아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머리를 깍을 때는 번뇌도 함께 깍아 적멸의 세계에 이르어야 합니다. 법복을 입을 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번뇌를 떠나 진리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출가했으면 부처님처림 사사로운 일에서 떠나 모든 사람을 지도해야 합니다. 스스로 부처님 법에 귀의했을 때는 경전의 깊은 뜻을 배우고 큰 바다 같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스스로 승단에 귀의했을 때는대중을 통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몸을 바르게 하고 앉을 때 어디에고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좌선하는 자세를 취할 때는 도의 마음을 굳게 가져 부동의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삼매에 들었을 때는 철저히 하여 선정의 궁극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모든 존재를 관찰할 때는 진정한 모습을 보고 장애나 틈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옷을 입을 때는 모든 공덕을 입는다 생각하고 항상 참회해야 합니다. 옷깃을 여미고 허리띠를 맬 때에도 도의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양치질할 때는 마음에 진리를 얻어 저절로 깨끗하게 되도록 원해야 합니다. 대소변을 볼 때에는 온갖 부정한 것을 버리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도 버려야 합니다. 길을 갈 때에는 청정한 법계를 딛고 마음속의 번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길을 올라갈 때는 그 이상 없는 도에 올라 삼계를 초월해야 합니다. 길을 내려갈 때는 부처님 법의 깊은 데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험한 길에서 인생의 나쁜 길을 버리고 삿된 소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똑바른 길을 보면 마음을 바로 가져 거짓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큰 나무를 보면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분노와 원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높은 산을 보면 최고의 깨달음을 목표로 부처님 법의 정상에 오르고자 해야 합니다. 나무 가시를 보면 삼독의 가시를 빼내어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무성한 나무를 보면 진리의 그늘을 만들어 선정 삼매에 들어가야 합니다. 잘 익은 과일을 보면 불도의 큰 행을 일으켜 으뜸가는 과보를 성취시켜야 합니다. 흐르는 물을 보면 바른 법의 흐름을 타고 부처님 지혜의 큰 바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샘물을 볼 때는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진리의 물을 마시고 으뜸가는 덕을 쌓아야 합니다. 산골짝을 흐르는 물을 보면 먼지와 때를 씻어버리고 청정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다리를 보면 부처님 법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림 없이 건너게 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사람을 보면 청정한 법을 찾아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 스스로 즐깁니다. 근심하는 사람을 보면 미혹을 벗어나는 마음을 냅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모든 고뇌를 없애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건겅한 사람을 보면 금강석과 같은 단단한 진리의 몸을 이루고자 합니다. 병든 사람을 보면 몸의 공적함을 알아 모든 고통을 벗어나고자 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사람을 보면 항상 부처님과 보살의 은덕을 생각합니다. 출가한 사문을 보면 부처님의 법을 얻어 모든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행자를 보면 마음과 몸을 굳게 가다듬어 불도에 정진해야 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그 힘으로 불도에 기울여야 합니다. 음식을 얻을 수 없을 때는 모든 악행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절제를 지켜 욕심을 적게 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친 음식을 대할 때는 모든 것이 허공처럼 모양이 없다는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음식을 삼킬 때는 선정의 기쁨으로 음식을 삼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부처님을 뵙고 공양할 때는 지혜의 눈을 얻어 여래의 실상을 보고자 해야 합니다. 여래의 실상을 보고 섬길 때는 남김없이 시방세계를 보고 부처님처럼 되고자 해야 합니다. 밤에 잠들 때는 모든 활동을 그치고 마음의 갈등을 쉬어야 합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는 모든 일에 마음을 쓰며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행동과 말과 생각을 청정히 하고 뛰어난 공덕을 얻을 것입니다.” <화엄경 쟁행품>
13. 보살의 열 가지 행
공덕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번뇌를 물리치는 삼매에 드니, 시방세계에 계신 무수한 부처님들이 공덕림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착하다, 그대가 번뇌를 물리치는 삼매에 들었구나, 이것은 시방세계의 여래들이 그대에게 가피하려는 것이다. 여래가 예전부터 세운 서원의 힘과 위신력과 모든 보살의 선행의 힘이 그대로 하여금 이 삼매에 들어 법을 설하게 하려는 것이다. 보살이 열 가지 행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의 지혜를 늘리기 위해서이고, 법계에 깊이 들게 하려는 것이며, 중생계를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이고, 들어가는 데에 걸림이 없게 하려는 것이며, 하는 일에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또 한량없는 방편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고, 온갖 지혜의 성질을 거두어 지니려는 것이며, 온갖 법을 가지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대는 여래의 위신력을 받아 이 법을 설하라.” 이때 모든 여래는 공덕림보살에게 걸림없는 지혜, 끊이지 않는 지혜, 스승 없는 지혜, 어리석지 않는 지혜, 다르지 않는 지혜, 허물이 없는 지혜, 한량없는 지혜, 이길 이 없는 지혜, 게으름 없는 지혜, 빼앗기지 않는 지혜를 주었다. 이 삼매의 힘은 그와 같은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방세계의 여래가 각기 오른손으로 공덕림보살의 이마를 쓰다듬자 그는 삼매에서 나와 모든 보살에게 법을 설했다.“ 여러 불자들, 보살의 행은 넓고 커서 법계처럼 헤아릴 수 없고 허공계처럼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의 행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보살에게는 삼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 가지 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행, 이롭게 하는 행, 어기지 않는 행, 잘 나타나는 행, 집착 없는 행, 얻기 어려운 행 법을 잘 아는 행, 진실한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14. 즐거운 행
“여러 불자들, 보살의 즐거운 행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물건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에게 널리 베풉니다. 베풀고 나서 뉘우치거나 아까워하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이롭게 할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쌓으신 행을 배우고 생각하고 좋아하며 몸소 실천하고 남에게 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난한이웃이와서 빌면 보살은 곧 보시하여 그를 즐겁고 만족하게 합니다. 한량없이 많은 중생이 와서 구걸하더라도 보살은 조금도 싫어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고 더욱 자비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중생들은 내 복밭이고 선지식이다. 찾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몸소 와서 나를 바른 법에 들게 한다 .나는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 모든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않으리라.’ 또 이렇게 발원합니다.‘ 내 보시를 받은 중생들은 모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 평등한 지혜를 가지며 바른 법을 갖추어 널리 선행을 하다가 열반에 들어지이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마음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최상의 깨달음을 얻지 않으리라.’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나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 베푸는 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법계와 중생계의 끝이 없고 틈이 없는 법과 공하고 형상없고 자체가 없고 처소가 없고 의지가 없고 지음이 없는 법을 생각할 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제 몸도 보지 않고, 보시하는 물건도 보지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고, 복밭도 보지 않고, 업도 과보도 그 결과도 보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배우신 것을 나도 모두 배우고, 밝은 지혜를 얻어 모든 법을 알고, 중생들을 위해 삼세가 평등하고 고요하며 무너지지 않는 법의 본성을 말해주어, 그들이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즐거운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15. 이롭게 하는 행
“ 여러 불자들, 보살의 이롭게 하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계율을 청정하게 가지므로 어떠한 감각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중생들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말합니다. 권세나 문벌이나 부귀 같은것에 조금도 집착함이 없이, 청정한 계율을 굳게 가지려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얽힘과 속박과 탐욕과 시끄러움을 버리고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평등한 정법을 얻으리라.’ 보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계율을 가질 때 마군의 무리들이 아름다운 천상의 미녀들을 데리고 와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할지라도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욕은 도를 방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빠지면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 보살은 한 순간이라도 탐욕을 내지 않고 그 청정한 마음이 부처님과 같습니다. 보살은 탐욕으로 인해한 중생이라도 해롭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차라리 자기 목숨을 버릴지언정 중생을 해롭게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생은 오랜 세월 동안 오욕을 생각하고 오욕을 탐하고 거기에 집착하여 물들고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른다. 내가 이제 이 마군과 천상의 미녀와 모든 중생들을 청정한 계율에 머물게 하리라. 이것이 내가 할 일이고 모든 부처님께서도 그와 같이 행하셨다. 모든 것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 잠깐 생겼다가 없어져 견고하지 못하다. 그것은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환상과 같고 어리석은 중생을 미혹케 한다. 이와 같이 알면 모든 것을 깨달아 생사와 열반을 통달하게될 것이다. 여래의 보리를 얻어 아직 제도받지 못한 중생을 제도하고, 청정하지 못한 중생을 청정케 하며, 열반에 들지 못한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할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이롭게 하는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16. 어기지 않는 행
“여러 불자들, 보살의 어기지 않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항상 참고 견디고 법을 쌓아 겸손하고 공경하여 남을 해치지 않으며,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명예와 이익도 구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중생에게 법을 설해 나쁜 짓을 못하게 하리라.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교만. 질투. 아첨하는 마음을 끊어 부드럽게 화평하여 참고 견디는데에 항상 머물게 하리라.’ 보살이 이와 같이 참고 견디는 법을 성취하면, 설사 무수한 중생이 입을 모아 헐뜯고 비방하고 흉기로 위협할지라도 그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한 고통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고요하지 못하고, 스스로 집착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남의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보살은 또 다음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끝없는 옛적부터 생사에 헤매면서 갖은 고통을 받았다. 그럴수록 정신을 가다듬어 청정해지고 바른 법에 편히 머물러 중생들에게 이런 법을 얻게 하리라. 사실 이 몸은 공한 것이므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도 그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이 공한 것임을 내가 알고 남에게 널리 말하리라.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할지라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며, 중생들이 물러나지 않고 여래의 도에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어기지 않는 행입니다. ” <화엄경 십행품>
17. 굽히지 않는 행
“ 여러 불자들, 보살의 굽히지 않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온갖 정진을 수행합니다. 모든 번뇌를 끊기 위해 정진하고, 나쁜 버릇을 없애기 위해 정진합니다. 모든 중생의 생사와 번뇌와 희망과 마음의 상태를 알기 위해 정진합니다. 여래의 진실한 법을 알기 위해 정진하고 청정하고 평등한 법을 알기 위해 정진하며, 여래의 끝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알기 위해 정진합니다. 보살이 이와 같은 정진을 완성할 때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당신은 무수한 세월의 낱낱 중생들을 위해 무량겁을 두고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겠습니까? 또 수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을 뵈온 인연으로 한없이 많은 중생들이 여러 가지 즐거움을 누리어도 당신은 그때까지 지옥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다가 그들이 모두 열반에 든 뒤에 라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겠습니까?’ 보살은 ‘어떠한 지옥의 고통이라도 중생을 위해서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물을 것입니다. ‘ 이를테면 당신이 한 개의 터럭으로 무수히 많은 큰 바닷물을 찍어내어 다하게 하고, 무수한 세계를 부수어 티끌을 만듭니다. 그 물방울과 그 티끌을 낱낱이 세어 그 수효만큼 오랜 세월을 두고 지옥의 고통을 받을지라도 그 마음이 변치 않겠습니까?‘ 보살은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을지라도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어 더욱 기뻐하고 스스로 감사하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저 중생들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보살이 이렇게 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열반을 얻게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굽히지 않는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18.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
“여러 불자들, 보살의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바른 법을 들어왔습니다. 보살은 바른 법을 들으면서 아직 거기에서 물러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수행을 쌓을 때 한 번이라도 중생의 삼매를 흐트러놓거나 바른 법과 지혜를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남에게 비방을 듣거나 칭찬을 받을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정도 흔들리지 않고 보살행과 보리심과 염불 삼매와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보살은 선정 속에서 모든 음성의 모양을 듣고 그 본성을 압니다. 남에게서 어떠한 소리를 들을지라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이 없습니다. 보살은 행동과 말과 생각이 항상 고요하므로 도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선정 속에서 자비심을 기릅니다. 생각생각마다 한량없는 삼매를 얻어 마침내는 일체지를 갖추게 됩니다. 보살이 악담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모든 중생들을 청정한 생각에 머물게 하여 지혜에서 물러나지 않고 열반을 성취케하리라.’ 이것이 보살의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19. 잘 나타내는 행
“ 여러 불자들, 보살의 잘 나타내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행동과 말과 생각이 청정하여 얻을 것없는 데에 머물어 얻을 수 없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보입니다. 삼업이 모두 없는 것인 줄 알므로 얽매임이 없으며, 온갖 나타내 보이는 것에 본성도 없고 의지함도 없습니다. 망상 분별을 떠나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갔고, 가장 뛰어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갔으며, 이것이 보살의 교묘한 방편으로 나타내는 행입니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중생이 무성으로 성품을 삼았고, 모든 법이 적멸로 성품을 삼았으며, 모든 불국토가 무상으로 모양을 삼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다만 말 뿐인데 모든 말이 여러 법 가운데 의지한 곳이 없고, 모든 법이 말 가운데 의지한 곳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법의 깊은 뜻을 알며, 세간이 고요하고 세간법과 출세간 법이 다르지도 섞이지도 않고 또 차별이 없음을 압니다. 보살은 삼세의 평등한 법에 머물러 보리심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며, 큰 자비심을 길러 모든 중생의 덕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누가 완성시켜 줄 것인가. 내가 중생의 번뇌를 없애지 않으면 누가 없애줄 것인가. 내가 중생을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깨우쳐 줄 것인가. 내가 중생을 청정케 하지 않으면 누가 청정케 해 줄 것인가. 그것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생의 덕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만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나는 먼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무량겁을 두고 보살행을 쌓아 중생의 덕을 완성시키리라. 보살이 이러한 행에머물러 있을 때 천신과 사문과 바라문들이 이 보살을 보고 공경하여 공양하거나, 잠깐이라도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잘 나타내는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20. 집착 없는 행
" 여러 불자들, 보살의 집착 없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한 생각 중에 무수한 불국토를 생각하고 한없이 많은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예배하고 공양합니다. 보살은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나 설법을 듣더라도 집착이 없으며, 시방세계와 부처님과 보살과 모인 대중에게도 집착이 없습니다. 설법을 듣고는 기뻐하고 원과 힘이 커서 보살행을 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함이 없습니다. 보살은 부정한 세계를 보고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것을 부처님의 법과 같이 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것은 청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며, 어둠도 밝음도 아니고, 진실도 거짓도 아니며, 편안함도 험난함도 아니고, 바른길도 그릇된 길도 아닙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여도 중생에게 집착을 하지 않고, 삼매에 들어가 머물러도 집착함이 없습니다. 무수한 부처님 국토에 나아가 들어가고 보고 그 안에서 살면서도 부처님 국토에 집착이 없으며, 버리고 갈 때에도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보살은 중생들이 온갖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대 비심을 일으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시방세계의 낱낱 중생을 위해 그들과 함께 무량겁을 지내면서 그들의 덕을 충만시키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들을 버려두고 모른 체하지 않을 것이다.’ 보살은 잠깐 동안 이라도 <나> 라는 생각과 내 것이란 생각을 내지 않으며, 몸에 집착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생각과 소원과 삼매와 고요한 선정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교화하여 그 덕을 성취시키는 데에도 집착하지 않고, 법계에 들어가는 데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다음과 같이 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세계는 환상과 같고 부처님은 그림자 같으며, 보살행은 꿈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은 메아리와 같다고 봅니다. 보살은 모든 것이 무아라고 생각하고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그 일에 물들지 않습니다. 세상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또한 세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집착 없는 행입니다. “ <화엄경 십행품>
21. 얻기 어려운 행
“ 여러 불자들, 보살의 얻기 어려운 행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항상 여래의 수승한 법을 좋아하고, 오로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잠시도 보살의 큰 원을 버리지 않으며, 무량겁을 두고 보살도를 닦아 왔습니다. 보살은 이 얻기 어려운 행에 머물러 생각생각마다 끝없는 생사의 고통을 돌이켜 보살의 큰 원을 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이 보살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거나 그 원을 들을 수 있으면, 그는 불퇴전의 자리에 올라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할 것입니다. 보살은 한 중생을 무시하고 많은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많은 중생을 무시하고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아닌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깊은 법계를 알아 모양이 없는데 에머무르고 모든 불국토에 다니면서도 그 불국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보살이 쌓은 공덕은 끝이 없으며 중생을 교화하여 구제하는 일도 끝이 없습니다. 보살은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것도 아니고 도달하지 못한것도 아닙니다. 세간법도 아니고 출세간법도 아니며 범부도 아닙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어려운 마음을 성취하여 항상 보살행을 쌓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영원히 나쁜 길을 떠나 삼세 부처님의 법에 편안히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생들은 은혜를 모르고 원수처럼 해치며 삿된 소견에 집착하여 미혹해 있다. 어리석어서 탐욕과 애착과 온갖 번뇌에 사로잡혀 헤매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은혜를 알고 지혜롭고 또 선지식이 세상에 가득하면 나는 결코 보살행을 닦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위해 보살행을 닦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보살의 얻기 어려운 행입니다.” <화엄경 십행품>
22. 법을 잘 말하는 행
“ 여러 불자들, 보살의 법을 잘 말하는 행이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해 맑은 법의 못이 되어 바른 법을 지키고 여래의 씨가 끊이지 않게 합니다. 보살은 중생의 요구에 따라 또는 그 능력에 맞도록 법을 설하고 말 한 마디 한마디에 무궁무진한 뜻이 들어 있어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가령 여러 가지 업보로 된 무수한 중생들이 한곳에 모여있어 그들의 말이 각기 다르고 묻는 내용이 다를지라도, 보살은 한 생각에 모두 알아듣고 하나의 진리로 그들의 의심을 풀어 주고 눈을 뜨게 합니다. 이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터럭 끝에 순간마다 무수한 중생이 와서 모이고, 이와 같이 매 순간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모일지라도 중생은 다 할 수가 없다. 그 중생의 말은 서로 다르고 묻는 내용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중생의 문제를 다 들어주고 마음에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한 마디 말로써 의심의 그물을 끊어 그들을 기쁘게 해 주리라.’ 보살의 설법은 진실하며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깊은 지혜가 들어있고, 그 지혜의 빛은 모든 세계를 비추어 중생의 공덕을 완성시킵니다. 보살은 법을 잘 말하는 행에 머물러 스스로 청정하고 집착이 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합니다. 여러 불자들, 이런 보살에게는 열 가지 몸이 있습니다. 첫째, 그지없는 법계에 들어가는 몸이니 그것은 모든 세상을 초월해 있습니다. 둘째, 미래의 몸이니 그것은 어떠한 국토에도 날 수 있습니다. 셋째, 태어나지 않는 몸이니 그것은 일찍이 없었던 진리를 얻었습니다. 넷째, 멸하지도 않는 몸이니 모든 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무지를 떠난 몸이니 그것은 중생의 요구에 따라 교화합니다. 여섯째, 변하지 않는 몸이니 그것은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일곱째, 무너지지 않는 몸이니 법계의 본성은 깨뜨리지 않습니다. 여덟째, 한 모양의 몸이니 과거 현재 미래는 나타내 보일 수 없습니다. 아홉째, 모양이 없는 몸이니 그것은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몸을 성취하고 모든 중생의 집이 됩니다. 왜냐하면 선한 능력을 길러 주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구원의 손길이 됩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의지할 곳이 됩니다. 중생을 편안한 세계에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길잡이가 됩니다. 중생에게 바른 길에 이르는 문을 열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스승이 됩니다 .중생을 진실한 법에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등불이 됩니다. 중생에게 그들이 지은 업보를 환히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밝은 지혜가 됩니다. 중생에게 심오한 진리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빛이 됩니다. 중생에게 여래의 걸림 없는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법을 잘 말하는 행입니다. 보살이 이 행에 머무르면 모든 중생을 위해 맑은 법의 못이 됩니다. 보살은 깊고 미묘한 법의 근원을 다 알고 있습니다.” <화엄경 십행품>
23. 진실한 행
“여러 불자들, 보살의 진실한 행이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설법합니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삼세 부처님의 본성에 들어가 삼세 부처님과 똑같은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끝없는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내가 구제하리라. 그들을 구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성불하겠다는 것은 내 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에게 최상의 깨달음과 열반을 얻게 한 뒤에 성불하겠다. 중생이 나에게 보리심 을 내어 스스로 보리심을 내어 끝없는 중생들에게 온갖 지혜를 얻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으므로 최상의 지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요구에 맞도록교화하고, 본래의 서원에 따라 중생의 요구를 만족시켜 두루 청정케 합니다. 보살은 생각마다 시방세계에 다니고 생각마다 무수한 불국토에 이르며, 보살은 또 여래의 걸림 없는 신통력을 나타내어 그 마음은 법계나 허공계와 같고, 그 몸은 한량이 없어 중생의 요구대로 두루 나타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과 몸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습니다. 보살 자신 속에서도 모든 중생과 모든 법과 모든 부처님이 두루 나타납니다. 보살은 중생의 여러 가지 생각과 욕망과 업보를 알고 그 근거에 맞도록 몸을 나타내어 중생의 고뇌를 덜어 줍니다. 보살은 대비심에 머물러 심오한 법을 수행하며 적멸의 세계에 드나듭니다. 여래의 능력을 얻고 서로 의지하고 관계된 법계에 걸림없이 들어가고 여래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생사의 소용돌이를 건너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중생을 위해 항상 보살행을 쌓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진실한 행입니다. 이때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시방세계가 크게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내렸다.눈부신 광명이 끝없는 세계를 비추고 천상의 음악이 은은히 울렸다. 시방세계의 무수한 보살들이 모여와 저마다 공덕림보살을 찬탄했다.” <화엄경 십행품>
24. 보살의 회향
금강당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고 밝은 지혜 삼매에서 나와 보살들에게 법을 설쳤다.“ 여러 불자들. 보살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서원이 법계에 충만하여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합니다. 보살은 이 원을세워 과거 현재 미래 부처님의 회향을 배웁니다. 보살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을 수행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선근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선근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이롭게하며, 지옥. 아귀. 축생의 한량없는 고통에서 길이길이 떠나게 하여지이다.’ 보살은 자기가 심은 선근을 이렇게 회향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의 집이 되리라, 그들이 고뇌를 없애 주기 위해서. 나는 모든 중생의 집이 되리라. 그들의 고뇌를 없애주기 위해서. 나는 모든 중생의 수호신이 되리라.그들의 번뇌를 끊어 해탈케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중생의 귀의처가 되리라, 그들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나는 중생의 안락처가 되리라. 그들이 구경의 편안한 곳을 얻을 수 있도록, 나는 모든 중생의 광명이 되리라, 그들이 지혜의 빛을 얻어 무명의 어둠을 없앨 수 있도록. 나는 중생의 길잡이가 되리라, 그들에게 걸림 없는 큰 지혜를 주기 위해서,’ 보살은 이와 같은 온갖 선 근을 회향하여 중생들에게 모든 지혜를 얻게 합니다. 여러 불자들, 보살은 친구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두루 회향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아 사랑과 미움을 초월했기 때문이며, 항상 자비의 눈으로 중생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보살을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보살은 그 중생을 위해 어진 스승이 되어 뛰어난 법을 말해줍니다. 이를테면 어떠한 독으로도 큰 바다를 독물로 만들 수 없듯이, 중생의 어떠한 죄악으로도 보살의 보리심을 흐트러 놓을 수는 없습니다. 보살이 보리심을 내어 모든 선근을 회향하는 것은 한 중생을 위해서도 아니고, 한 불 국토를 정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한 부처님을 믿기 위해서도 아니고, 한 부처님의 법을 듣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보살은 오로지 모든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서 온갖 선근을 회향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국토를 정화하고, 모든 부처님을 믿고 받들어 공양하며,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바른 법을 듣기 위해 온갖 선근을 최상의 깨달음에 회향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리심의 보물을 캐내는 것은 여래의 힘이다. 보리심은 부처님과 같이 넓고 크며 평등하다. 무량겁을 두고 수행하며 배우더라도 얻기 어렵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회향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무너지지 않을 신심을 얻어지이다. 바른 법을 듣고 그대로 수행하여 지혜와 해탈을 얻고 걸림없는 눈으로 중생을 평등하게 보며, 마침내는 부처님 처소에 편히 머물러지이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나쁜 업을 짓고 그 때문에 한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 부처님을 뵙고도 섬길 줄 모르고 바른 가르침을 듣지도 못한다. 내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다니면서 그들을 대신해 고통을 받더라도 물러나거나 두려워하거나 게으르거나 중생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보살은 이와 같이 회향하며 집착하는 데가 없습니다. 중생이나 세계의 모양에도 집착하지 않고 말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오로지 중생들에게 진실한 법을 깨우쳐 주기 위해 회향하고, 일체 중생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회향하며, 아집을 버리고 모든 선근을 살펴 회향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은 선근 회향으로 모든 허물을 떠나 부처님의 찬탄을 받습니다.”
25. 보현보살의 수행과 서원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보살들과 선재동자에게 말했다.“부처님의 공덕은 시방세계 부처님들이 무량겁을 두고 계속해서 말씀할지라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공덕을 이루려면열 가지 큰 행원을 닦아야 합니다. 첫째는 부처님을 예배 공경함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함이며, 셋째는 여러 가지로 공양함이오, 넷째는 업장을 참회함이며, 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같이 기뻐함입니다. 여섯째는 설법해 주기를 청함이며, 일곱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함이요, 여덟째는 부처님을 본받아 배움이며, 아홉째는 중생의 뜻에 수순함이요, 열째는 모두 다 회향함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26.예배와 찬탄
선재동자가 물었다. “어떻게 예배 공경하며 회향해야 합니까?” 보현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말했다.“부처님께 예배 공경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불국토의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께,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깊은 신심을 내어 눈앞에 뵈온 듯이 받들고, 청정한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항상 예배 공경하는 일입니다. 허공계가 다해야 나의 예배 공경도 다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예배 공경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세계와 업과 번뇌가 다함이 없어지므로 나의 예배 공경도 다함이 없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또 부처님을 찬탄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모든 불국토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 계신 데마다 많은 보살들을 모시고 있는 것을 내가 깊은 지혜로 눈앞에 계신 듯이 알아보아, 변재천녀보다 뛰어난 변재로써 오는 세월이 다하도록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야만 나의 찬탄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공계와 중생의 세계와 업과 번뇌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찬탄도 다함이 없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나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27. 법공양
“여러 가지로 공양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불국토의 부처님 들께 여러 가지 훌룡한 공양거리로 공양합니다. 꽃과 천상의 음악과 천상의 바르는 향, 사르는 향, 뿌리는 향, 등 이와 같은 낱낱 무더기가 수미산만합니다. 여러 가지로 켜는 등은 우유등, 기름등, 향유 등으로 심지는 수미산만하고 기름은 바닷물과 같은데 이러한 공양거리로 항상 공양합니다. 그러나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으뜸입니다. 법 공양에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 중생들을 거두어 주는 공양,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 착한 일 하는 공양, 보살의 할 일을 버리지 않는 공양, 보리심에서 떠나지 않는 공양 등이 있습니다. 앞에 말한 물질적인 공양의 공덕을 법 공양에 견준다면 잠깐 동안 법공양한 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숫자와 비유로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함이 부처님을 출현케 하는 일이고, 보살이 법공양을 하면 이것이 곧 부처님께 공양하는 거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함이 진실하고 법다운 공양인 것입니다. 넓고 크고 가장 훌륭한 이 공양은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야만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허공계와 중생의 세계와 업과 번뇌가 다할수 없으므로 나의 이 공양도 다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보현행원품>
28. 참회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나간 세상 끝없는 세월에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탓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악업이 한량없고 끝이 없을 것이다. 만약그 나쁜업에 어떤 형체가 없다면 가없는 허공으로도 그것을 다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몸과말과 생각의 청정한 업으로 법계에 두루한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 앞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나쁜 업을 짓지 않으며 항상 청정한 계율의 모든 공덕에 머물겠다.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야만 나의 참회가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공계와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수 없으므로 나의 참회도 끝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29. 같이 기뻐함
“남의 공덕을 같이 기뻐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세계의 많은 부처님이 처음 발심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 복덕을 부지런히 닦을 때에 몸과 목숨도 아끼지 않고 무량겁을 지나면서 낱낱 겁동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머리와 눈과 손발을 보시했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고행을 하면서 갖가지 보살의 행을 원만히 갖추었고, 온갖 보살의 지혜에 들어가 그 위없는 보리를 성취했으며, 열반에 든 뒤에는 그 사리를 나누어 공양했습니다. 이와 같이 착한 일을 나도 같이 기뻐하며, 시방세계의 온갖 중생들이 지은 털끝 만한 공덕일지라도 내 일처럼 기뻐하며, 성문과 독각과 배우는 이나 더 배울 것이 없는 이의 공덕도 내가 같이 기뻐하며, 보살이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면서 가장 높은 보리를 구하던 그 넓고 큰 공덕을 내가 모두 같이 기뻐합니다. 이렇게 해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내가 같이 기뻐함은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이지 않아도 몸과 말과 생각에도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30. 설법을 간청하다
“설법해 주기를 청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 모든 불국토의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께 몸과 말과 생각을 기울여 설법해 주기를 간청하는 일입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청법은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이지 않아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 모든 불국토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려 하거나, 또는 보살.성문.독각과 배우는 이와 더 배울 것 없는 이와 선지식들이 열반에 들려고 하면, 오래오래 세상에 머무르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간청하는 일은 다함이 없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31. 본받아 배움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고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몸과 목숨으로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으며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쓰기를 수미산 높이만큼이나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제왕의 자리나 궁전이나 동산 따위가 어찌 문제될 수 있으며, 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행인들 문제될 수 있었겠습니까. 보리수 아래서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시던 일이며, 여러 가지 신통을 보이고 변화를 일으키며, 많은 대중이 모인 곳에서 여래의 화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보살들이 모인 도량이나 성문과 독각이 모인 도량, 전륜성왕과 작은 나라의 왕과 그 일족들이 모인 도량, 혹은 바라문. 부호.신도들이 모인 도량에서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법을 설해 그들의 소원대로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키고 마침내 열반에 드신, 이와 같은 일들을 내가 모두 본받아 배웁니다. 지금 부처님께 하듯이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의 자취도 본받아 배웁니다.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내가 본받아 배우는 일은 다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뜻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32. 수순 동생
“항상 중생의 뜻에 수순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온 법계의 중생들은 여러 가지 차별이 있어 알에서 나고 태나 습기에서 나고 혹은 저절로 나기도 하는데, 그들은 땅과 물과 바람과 의지해 살며, 허공을 의지해 살고 풀과 나무를 의지해 삽니다. 여러 가지 몸과 형상.모양.수명.종족.이름.성질.소견.욕망.뜻.위의.의복.음식.등으로 살아갑니다. 발 없는것, 형체 없는것, 생각이 있는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 모두에게 내가 수순하여 여러 가지로 섬기고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스승과 같이 받들며 아라한이나 부처님과 다름없이 대합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 주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길을 가르켜 주며, 어둔 밤에는 등불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재물을 얻게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일체 중생을 평등하고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일체 중생을 평등하고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중생을 수순하는 것은 곧 부처님께 순종하여 공양하는 일이 되고, 중생들을 존중하여 섬기는 것은 곧 부처님을 존중하여 받드는 일이 되며, 중생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곧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입니다. 중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넓은 모랫벌에 서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수분을 받으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무성하듯이, 생사 광야의 보리수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중생은 뿌리가 되고, 부처님이나 보살은 꽃과 열매를 맺게 됩니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므로 보리는 중생에게 딸린 것입니다. 중생이 없다면 보살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중생에게는 마음을 평등히 함으로써 원만한 자비를 성취하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수순함으로써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수순해야 합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수순은 다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33. 회향
“모두 다 회향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처음 예배 공경함으로부터 중생의 뜻에 수순하기까지, 그 공덕을 온 법계 허공계에 있는 일체 중생에게 돌려보내,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합니다. 나쁜 짓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길의 문은 닫아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길은 활짝 열어 보입니다. 중생들이 쌓아 온 나쁜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보를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 다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없이 훌룡한 보리를 성취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보살은 이같이 회향합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지라도 나의 이 회향은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34. 서원의 공덕
“이것으로써 보살의 열 가지 큰 서원이 원만히 갖추어졌습니다. 보살이 이 같은 큰 서원을 따라 나아가면,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키고 최상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며, 보현의 수행과 원력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굳은 신념으로 이 열 가지 원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거나 한 구절만이라도 쓴다면 다섯 무간지옥에 떨어질 죄업이라도 이내 소멸되고, 이 세상에서 받은 몸과 마음의 병이나 갖가지 괴로움과 아주 작은 악업까지도 다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마군.야차.나찰 등 피를 빨고 살을 먹는 몹쓸 귀신들이 모두 멀리 떠나거나 착한 마음을 내어 가까이서 수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현의 원을 몸소 행동하는 사람은 어떤 세상에 다니더라도 달이 구름에서 벗어나듯 거리낌이 없을 것이며, 부처님과 보살들을 예경하고 일체 중생이 다 공양할 것입니다. 중생들이 열 가지 원을 듣고 믿고 받아 지니며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해설하면, 그 공덕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을 듣거든 의심을 내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지닐 것이며, 읽고 외우고 쓰며 남에게 말하며 베풀어주십시오. 이와 같은 사람은 한 생각 동안에 모든 행과 서원을 다 성취할 것입니다. 그얻는 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번뇌의 고통 바다에서 중생들을 건져내어 생사를 멀리 떠나게 하고 모두 다 안락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선재동자와 많은 보살들은 보현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말한 이와 같은 큰 서원을 듣고 한량없이 기뻐하였다. <화엄경 보현행원품>
제4편 교단의 규범
제1장 계율이 마련된 연유
1. 베라냐에서 생긴 일
부처님께서는 오백 명의 비구들과 함께 사밧티를 떠나 베라냐 마을에 이르셨다. 네란자라 강변의 만다라바 나무 아래 쉬고 계실 때 그 곳 사람들은 부처님 일행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문안을 드리려고 모여들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자기 방편으로 설법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였다. 마을의 어른인 베라냐 바라문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기뻐한 나머지, 부처님께 여름철 석 달 동안의 안가를 여기서 지내달라고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잠잠히 그의 청을 받아들여 베라냐에서 여름철을 지내기로 했다. 베라냐 바라문은 올릴 공양거리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마군의 심술로 그는 갑자기 정신이 흐려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부처님과 오백 명 비구들은 공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몹시 곤란했다. 거기에다 흉년까지 겹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형편이었다. 그때 마침 팔리국의 말장수가 오백 마리의 말을 몰고 지나가다가 이 마을 가까운 곳에서 우기를 지내고 갈 양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비구들은 하는 수 없이 그에게 가서 먹을 것을 빌었다. 말에게 먹일 보리를 얻어다 부처님과 비구들이 끼니를 이어갔다. 목갈라나는 생각 끝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요즘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는 형편이라 걸식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비구들은 얼굴이 마르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신통력 있는 비구들에게 웃다라쿠루 같은 데에 가서 자연산의 쌀을 가져와도 좋다고 하신다면 곧 가겠습니다.” “신통력 있는 비구들은 그 곳에 가서 쌀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신통력이 없는 비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신통력이 있는 비구들은 자기 마음대로 가고, 신통력이 없는 비구들은 제가 신통력을 써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서라, 그만 두어라. 지금 너희들 가운데 신통을 얻은 비구는 그럴 수 있겠지만, 미래의 비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비구에게는 생각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생각해야 하고 행동해야 할 일을 하면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될 것이고, 생각해서는 안 될 일과 행동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바른 법이 오래 머물 수 없다.” 이때 사리풋타는 조용한 숲속에서 선정에 들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인연으로 불법이 이 세상에 오래갈 수 있고 혹은 오래갈 수 없게 되는 것일까?’ 그는 부처님 앞에 나아가 이 듯을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과거 모든 여래의 가르침을 보면 어떤 것은 오래갔고 어떤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가르침이 오래 존속된 부처님은 반드시 계율을 제정하여 제자들에게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계율을 받아 지님으로써 바른 법을 수행하는 데에 게으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이 일은 하고 이 일은 하지 마라. 이 일은 생각하고 이 일은 생각하지 마라. 이것은 끊고 이것은 마땅히 갖추어 지켜라.’ 이와 같이 분별해 가르치지 않았어도 부처님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은 잘못됨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입멸한 후에는 갖가지 이름과 서로 다른 성과 온갖 집안에서 출가하여 저마다 제 성질을 부리게 되니, 다른 법이 빨리 멸하여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을 높은 탁상에 올려만 놓고 붙들어 매는 끈이 없으면 머지 않아 바람에 불려 흩어져 버리는 것과 같다. 사리풋타여, 여래의 바른 법이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려면 반드시 엄격한 계율이 있어야 한다. 이 계율로써 모든 제자들을 잘 가두어 그릇된 행동을 미리 막아야 할 것이다. 잘 정돈되어 흩어지지 않는 꽃다발은 끈으로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은 사리풋타는 크게 감동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일찍이 듣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그러시다면 그 계율을 지금 곧 제정해 주십시오. 모든 비구들에게 청정한 수행으로 바른 법이 오래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리풋타여, 아직 가만 있거라. 여래는 그 때를 알고 있다. 앞으로 비구들이 명예나 이해 관계에 얽히게 되면 허물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이것을 막기 위해 비구들에게 계율을 제정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잘못된 일이 없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 해지지 않은 새옷을 미리 기울 것은 없지 않느냐.” < 사분률 1 >
2.수디나의 음행
부처님께서 베살리에 계실 때 또 흉년이 들어 비구들은 걸식하기가 힘들었다. 칼란다카 마을 출신인 수디나는 그 고장에서도 재산이 많은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믿음이 굳었기 때문에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었다. 수디나는 생각하였다. ‘요즘처럼 걸식하기 어려운 때에는 차라리 여러 스님들을 우리 고향집 가까이에 모시고 가서 지내면 어떨까. 그러면 의식에 곤란도 없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친족들도 이 기회에 보시를 하여 복덕을 짓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비구들과 함께 칼란다카로 갔다. 수디나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여러 스님과 함께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찾아가 만났다. “수디나, 이제는 집에 돌아가 살자. 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안에 남자라고는 없으니 많은 재산이 나라에 몰수될 형편이다. 네가 이 집안을 돌보지 않으면 어찌 되겠느냐?” 그러나 수디나는 청정한 생활을 즐기고 도 닦는 뜻이 굳어 그런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몇번이고 간청하다가 헛수고인 줄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튿날 어머니는 며느리를 곱게 꾸며 수디나에게 데리고 와서 애원했다. “네가 정 그렇다면 자식이나 하나 두어 너의 대를 끊이지 않게 해다오.” “그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고 수다니는 승낙했다. 이때는 계율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수디나로서는 그 일은 별로 허물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팔을 끼고 숲속으로 들어가 음행을 했다. 그 후 부인은 아홉달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는 얼굴이 매우 단정하였다. 이름을 종자라 했고 그도 자란 뒤 머리를 까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신통이 자재하고 위력이 한량없어 그를 종자존자라 불렀다. 한편 수디나는 부정한 짓을 행한 뒤부터는 항상 마음이 언짢아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한께 수행하던 벗들은 수디나의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수디나여, 스님은 오랫동안 청정한 수행을 쌓아 위의와 예절을 모르는 것이 없는데 요즘은 어째서 그렇게 우울해 하십니까?” “얼마전에 예전의 아내와 관계가 있었던 그 뒤부터는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합니다.” 이때 비구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이 일로 해서 모든 비구들을 모아 놓고 수디나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려 하셨다. “수디나여, 들리는 말과 같이 너는 정말 그런 짓을 했느냐?” “그렇습니다, 부처님. 저는 부정한 짓을 범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꾸짖으셨다. “네가 한 일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위의가 아니며 사문의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청정한 행동이 아니며 수순하는 행도 아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수디나여, 청정한 법을 수행하여 애욕을 끊고 번뇌를 없애야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을 어찌하여 잊어 버렸는가?”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대지 마라. 이와 같은 인연은 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버린다. 애욕은 얽어 묶는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리는 것 같으며, 더러운 시궁창과 같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은 애욕을 떠나 도를 깨닫고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수디나가 어리석어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이제부터는 계율을 제정하여 지키게 해야겠다. 여기에는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요, 둘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요, 셋째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요, 넷째는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해서요, 다섯째는 이미 믿은 이를 더 굳세게 하기 위해서요, 여섯째는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기 위해서요, 일곱째는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요, 여덟째는 현재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요, 아홉째는 미래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요, 열째는 바른 법을 오래가기 하기 위해서다. 계를 말하려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하라. 어떤 비구가 부정한 행을 범하고 음행을 범하면 그는 파라지카(근본죄)이다. 함께 살지 못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프라티목샤(계본)의 첫째 조문을 제정하고 널리 알렸다. 이것은 교단이 생긴지 다섯 해 만의 일이다. 이때부터 때와 곳을 따라 비구들의 잘못을 보실 때마다 널리 가려 내어 말씀하셨다. 그래서 비구는 이 백 오십 계, 비구니는 삼 백 사십 팔 계가 마련되었다. < 사분률 1 >
제2장 네 가지 근본 계율
1. 음행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수많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아난다가 옷깃을 여미며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자비하신 부처님, 저는 이미 성불하는 법문을 이해하여 수행하는 일에 의심이 없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자기는 제도되지 못했더라도 남을 먼저 제도하려는 것은 보살의 발심이고, 자기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여래가 세상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비롯 제도되지 못했으나 미래의 중생을 제도하려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말세에는 사특한 무리들이 나타나 그릇된 주장이 강가강의 모래처럼 많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의 물음을 칭찬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난다여, 네 물음과 같이 말세 중생을 제도하는 방법은 그 마음을 올바르게 가다듬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데에 세 가지 정해진 도리가 있다. 마음을 거두는 계율, 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선정, 선정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지혜, 이것이 번뇌를 없애는 세 가지 공부다.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음란한 마음만 없다면 생사에서 바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는 것인데, 만약 음란한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근기가 뛰어나 선정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음행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마군의 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에는 그러한 마군의 무리들이 성행하여 음행을 탐하면서도 선지식 노릇을 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애욕과 삿된 소견의 구렁에 빠뜨릴 것이다. 네가 세상사람들에게 삼매를 닦게 하려거든 먼저 음욕부터 끊게 하여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첫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음욕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모래를 가지고는 백 천 겁을 찐다 할지라도 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음행하는 몸으로 불과를 얻으려 하면 아무리 미묘하게 깨닫는다 해여도 그것은 모두 음욕의 근본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이 음욕이므로 삼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는 것이데 열반의 길을 어떻게 닦아 얻는단 말인가. 음란한 뿌리를 몸과 마음에서 말끔히 뽑아버리고 뽑아버렸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비로소 부처되는 길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말은 여래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 말은 마군의 말이다.” < 수방엄경 6 >
2. 살생하지 말라
“아난다, 또 이 세상 중생들이 산목숨을 죽이지 않으면 생사에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는 것인데, 죽일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번뇌에서 이렇게 벗어날 수 있겠느냐? 설사 근기가 뛰어나 선정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죽일 마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의 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에는 귀신의 무리들이 성행하여 고기를 먹고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내가 비구들에게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를 허락하였으나, 그 고기는 다 내 신통력으로 변화하여 만든 것이므로 본래 생명이 없는 갓이다. 열대 지방에서는 땅이 찌는 듯하고 습기가 많으며 모래와 돌이 많아 푸성귀가 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신통력으로 마련된 고기라 이름하는 것을 그곳 비구들이 먹은 일이 있지만, 중생의 살을 뜯어 먹는 사람을 어떻게 불제자라 하겠느냐. 고기 먹는 사람은 설사 마음이 열려 삼매를 얻었다 할지라도 사실은 모두 흉악한 나찰인 것이다. 과보가 끝나면 반드시 생사의 고통 바다에 빠져 서로 죽이고 잡아먹기를 그치니 않으리니,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삼계를 뛰어나겠느냐?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삼매를 닦게 하려거든 산목숨 죽일 생각을 끊게 하여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둘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산목숨 죽이는 버릇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제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치면서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것은 숨길수록 드러나는 법이다. 청정한 비구나 보살은 걸어다닐 때에 산 풀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하물며 손으로 뽑겠는가. 대자대비를 행한다면서 어떻게 중생의 피와 살을 먹을 것인가. 만약 비구가 명주실이나 풀 솜, 비단옷, 가죽신, 가죽옷이나 털붙이를 입지 않고, 짐승의 젖이나 그 젖으로 만든 음식까지도 먹지 않으면, 그는 참으로 세상에서 벗어나 묵은 빚을 갚고 다시는 삼계에 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몸붙이를 입거나 먹으면 다 그들과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몸과 마음으로 중생의 살이나 몸붙이를 입지도 먹지도 말라. 이런 사람은 반드시 해탈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말은 여래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 말은 마군의 말이다.” < 수방엄경 6 >
3. 훔치지 말라
“아난다, 이 세상 중생들이 훔칠 마음이 없으면 생사에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수행하는 것은 번뇌를 없애려는 것인데, 훔치는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근기가 뛰어나 선정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훔칠 마음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그릇된 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에는 요사스런 무리들이 성행하여 간사와 협잡으로 선지식 노릇을 할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케 하고, 가는 곳 마다 남의 집 살림을 망하게 할 것이다. 내가 비구들에게 걸식하게 하고 제 손으로 익혀 먹지 못하도록 한 것도, 온갖 탐욕을 버리고 보리를 이루게 하려는 뜻에서다. 또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삼계에 묵어 가는 나그네로서 해탈의 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도둑들은 내 법복을 입고 여래를 팔아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이 바른 법이라고 한다.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는 비구를 도리어 소승이라 비방하고 한량없는 중생들을 의혹케 하니, 이 어찌 무간 지옥에 떨어질 죄업이 아니겠는가. 내가 열반에 든 뒤에 어떤 비구가 발심하여 삼매를 닦기 위해 여래의 형상 앞에서 지극한 신심으로 손가락 한 마디를 태우거나 향 한 개비라도 사르면, 그는 지금까지 쌓인 묵은 빚을 한꺼번에 갚아 영원히 이 세상일에 매이지 않고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지는 못한다 해도 이미 그는 법에 대한 마음이 결정된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을 버리는 조그마한 인연이라도 짓지 않으면 설사 열반의 도를 이루더라도 반드시 인간에 돌아와 내가 말먹이 보리를 먹듯이 묵은 빚을 갚게 될 것이다.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삼매를 닦게 하려거든 남의 물건 훔치는 일을 끊게 하여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셋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훔치는 짓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새는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비구는 가욋 물건을 모아 두지 않고, 빌어 온 밥을 남겨 배고픈 중생을 베풀며, 대중이 모인 곳에 합장하고 예배하며, 누가 때리거나 욕하더라도 칭찬하는 것과 같이 여겨야 한다. 몸과 마음을 모두 버리고 뼈와 살을 중생들과 함께 하며, 여래가 방편으로 한 말을 제 맘대로 해석하여 초심자를 그르치지 않으면 그는 진실한 삼매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말은 여래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 말은 마군의 말이다.” < 수방엄경 6 >
4. 거짓말 하지 말라
“아난다, 이 세상 중생들에게 죽이고 훔치고 음행하는 일이 없어 세 가지 행동이 원만하다 할지라도 큰 거짓말을 하면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고 애욕과 삿된 소견에 떨어져 여래의 종자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큰 거짓말이란 알지 못하면서 알았다 하고.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가 도인인 척 하면서 ‘나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보살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여 타인의 예배와 공양을 바란다면, 이런 사람은 부처의 종자가 소멸되고 선근이 아주 없어져 버린다. 다시 지혜가 생길 수 없으며 삼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열반에 든 뒤 말세에 보살이나 아라한을 여러 가지 인물로 화현시켜 중생을 제도케 할지라도 ‘나는 보살이다, 나는 아라한이다’하여 후학들에게 여래의 비밀을 누설치 못하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중생을 속이는 큰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삼매를 닦게 하려거든 거짓말을 끊게 하라. 이것이 모든 여래의 넷째 결정인 청정한 가르침이다. 거짓말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똥으로 전단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아무리 애쓸지라도 향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비구들에게 바른 마음이 도량이라고 했다. 평소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터인데 어떻게 자칭 도인이노라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빌어먹는 거지가 공연히 ‘나는 왕이다’라고 하다가 붙들려 처벌되는 것과 같다. 하물며 법왕을 사칭할 것인가. 곧지 못한 원인은 굽은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비구의 마음이 활줄과 같이 곧으면 온갖 일에 진실하여 삼매에 들어도 장애가 없을 것이니, 그는 보살의 으뜸가는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말은 여래의 말이고 그렇지 않은 말은 마군의 말이다. 아난다, 네가 마음 가다듬는 방법을 묻기에 나는 이와 같은 계율을 말하였다. 보살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이 네 가지 계율을 서릿발처럼 지녀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번뇌의 가지와 잎이 나지 못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과 말로 짓는 네 가지 업이 일어날 인연이 없을 것이다. 이 네 가지 계율을 잃지 않으면 마음은 어떠한 환경에도 매이지 않아 마군의 장난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 수방엄경 6 >
제3장 오계와 십계
1. 신도의 계율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를 귀의시킨 다음 장자의 아들 애사도 출가를 하였다. 야사의 부모는 집을 나간 외아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던 끝에 사방에 사람들을 놓아 아들을 찾게 했다. 아버지 자신도 아들을 찾아 나섰다. 강변에 이르러 야사가 벗어 놓은 듯한 황금빛 신을 발견했다. 강 건너 수행자들이 사는 녹야원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곧 강을 건넜다. 찾아간 곳은 부처님께서 계신 처소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여러 가지 방편으로 설법을 하셨다. 야사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마음이 열리어 신도가 되기를 원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삼귀의와 오계를 차례대로 말씀하셨다.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께 의지합니다. 올바른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가르침을 수행하는 승단에 의지합니다.” 이와 같이 삼귀의를 외게 한 다음 오계를 일러 주셨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마시오.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마시오. 셋째, 삿된 음행을 범하지 마시오.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다섯째, 술 마시지 마시오.” 부처님께서 야사의 아버지에게 “지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시니, 야사의 아버지는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지키겠습니다.” 하고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서 맨 처음으로 삼귀의와 오계를 받은 신도가 되었다. < 우바한오계상경 >
2. 사미 십계
부처님께서 카필라의 니그로다 동산에 계실 때였다. 공양 때가 되어 밥을 빌고 돌아오는데, 출가 전의 아내 아쇼다라는 라훌라를 데리고 높은 누각에 올라가 부처님께서 오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여인은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저기 오시는 분이 너의 아버지시다.” 이 말을 들은 라훌라는 달려내려와 부처님께 절을 했다. 부처님께서는 라훌라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를 데리고 니그로다 동산으로 가셨다. 그리고 사리풋타를 불러 “이 라훌라에게 계를 일러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사리풋타는 라훌라의 머리를 깍아 가사를 입히고 꿇어앉아 합장하게 한 다음 삼귀의를 세 번 외게 하고 사미 십계를 일러주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부처님과 성인과 스님을 비롯하여 날아다니고 기어다니는 보잘것없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목숨이 있는 것은 무엇이건 내 손으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좋아하지 말라. 벌레가 있는 물은 걸러 먹고 등불을 가리며 고양이를 기르지 말라. 은혜를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편히 살게 하며, 죽이는 것을 볼 때에는 자비심을 내어라.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둘째, 훔치지 말라. 금과 은이나 바늘 한 개, 풀 한 포기까지라도 주지 않은 것은 가지지 말라. 상주물이나 시주의 물건이나 대중의 것, 나라의 것, 개인 소유물을 빼앗거나 훔치거나 속여 가지지 말라. 세금을 속이거나 차삯 뱃삯을 안 내는 것은 모두 훔치는 행위이다. 옛날 어떤 사미는 대중이 공양할 떡 두 개를 훔쳐먹고 지옥에 떨어진 일이 있다. 차라리 손을 끊을지언정 옳지 못한 물건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셋째, 음행하지 말라. 일반 신도의 오계에서는 삿된 음행만 못하게 했으나 집을 나온 수행자의 십계에서는 음행은 모두 끊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도 음욕으로 인해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하게 하는데, 세속을 떠난 수행자가 어찌 음욕을 범할 것인가. 나고 죽는 근본은 음욕이니, 음란하게 사는 것은 청정하게 죽는 것만 못하다.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말에는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허황 된 말이니,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본 것을 못 보았다 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 하여 진실치 않은 것이다. 둘은 비단결 같은 말이니, 구수한 말을 늘어놓으며 애끓는 정열로 하소연하여 음욕으로 이끌고 슬픈 정을 돋우어 남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는 것이다. 셋은 나쁜 말이니, 추악한 욕지거리로 남을 꾸짖는 것이다. 넷은 두 가지로 하는 말이니, 이 사람에게는 저 사람 말을 하고 저 사람에게는 이 사람 말을 하여, 두 사람 사이를 이간하고 싸움 붙인다. 처음에는 칭찬하다가 나중에는 비방하며, 만나서는 옳다 하고 딴 데서는 그르다 한다. 거짓 증거로 벌을 받게 하거나 남의 결점을 드러내는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다. 범부로서 성인의 자리를 깨달아 증득했다고 하는 것은 큰 거짓말이다. 그 죄는 가장 중하다. 남의 급한 재난을 건지기 위해 자비심으로 방편을 써서 하는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다. 옛날 어떤 사미는 늙은 비구의 경 읽은 소리를 비웃어 개 짖는 소리 같다고 했다. 그 비구는 아라한이므로 사미를 불러 곧 참회하게 했다. 그래서 겨우 지옥은 면했으나 개 몸을 받았다. 사람의 입에는 도끼가 있어 나쁜 말 한마디로 몸을 찍는다.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다섯째, 술 마시지 말라.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독약이다.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말고 냄새도 맡지 말며 술집에 머물지도 말고 남에게 술을 권하지도 말라. 어떤 신도는 술을 마시고 다른 계율까지 범한 일도 있지만, 출가 수행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허물이다. 술 한 번 마시는 데에 서른여섯 가지 허물이 생기니 작은 죄가 아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죽어 똥물지옥에 떨어지며 날 때마다 바보가 되어 지혜의 씨가 없어진다. 차라리 구정물을 마실지언정 술은 마시지 마라.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여섯째, 꽃다발을 사용하거나 향을 바르지 말라. 꽃다발과 화려한 옷과 여러 가지 패물로 장식하거나 향수나 연지나 분 같은 것을 바르지 말라. 세속에서도 청렴하고 결백한 사람들은 사치를 싫어하는데, 하물며 세속을 떠난 사람이 어찌 화려한 사치를 즐길 것인가. 수수하게 물들인 누더기로 몸을 가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일곱째, 노래하고 춤추거나 악기를 사용하지 말며 가서 구경하지도 말라.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음악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생사를 위해 세속을 버리고 출가한 신분으로 어찌 올바른 공부는 하지 않고 노래 같은 것을 즐길 것인가. 옛날 어떤 신선은 여자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듣다가 신통력을 잃어버렸다 한다. 구경만 해도 그렇거늘 몸소 부름에 있어서랴. 장기. 바둑이나 윷놀고 노름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수도하는 마음을 어지럽히고 허물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여덟째,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는 것은 거만한 것이니 복을 감하고 죄보를 불러들이게 된다. 비단으로 만든 휘장이나 이부자리 같은 것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풀로 자리를 만들고 나무 밑에 사는 생활을 해야 할 텐데, 어찌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아 허망한 이 육신을 편하게 할 것인가.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아홉째, 제때 아니면 먹지 말라. 천신들은 가볍고 맑아 아침에 먹고, 짐승은 둔탁해서 오후에 먹으며, 귀신은 겁이 많아 밤에 먹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은 중도이니 정오에 먹는다. 많이 먹으려 하지 말고 맛을 탐해 먹으려고도 하지 마라. 오후에 먹지 않으면 여섯 가지 복이 생긴다. 아귀들은 항상 주려 바리 소리만 들어도 목구멍에서 불이 일어난다는데 어찌 제때도 아닌데 먹을 것인가.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열째, 금은 보석을 가지지 말라. 금은 보석은 모두 탐심을 기르고 도를 방해하는 물건이다. 손에 쥐지도 말아야 할 텐데 수행자가 이런 것을 탐해서 될 것인가. 이웃의 가난을 생각하고 항상 보시를 해야 한다. 돈을 벌려고 하지 말며 모아 두지도 말고 장사하지 말며, 보물 같은 것으로 기구를 장식해서는 안 된다. 이 사미의 계를 범하면 사미가 아니다. < 사미십계법 >
3. 팔관재계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밧티 동쪽으로 가시다가 한 신도의 집에 들렀었다. 유야라고 하는 신도는 여러 부인들과 같이 목욕 재계하고 부처님께 예배드린 후 지극한 마음으로 설법해 주시기를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큰 복이 되고 좋은 공덕이 될 여덟 가지 재계의 법을 설하셨다. 하룻밤 하루낮 동안만이라도 번뇌가 없는 아라한처럼 생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마시오. 아라한은 산목숨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자비로 중생을 사랑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없고 모든 생명에 대해 내 몸처럼 여깁니다. 둘째, 남의 것을 훔치지 마시오. 아라한은 탐하고 아끼는 생각이 없습니다. 항상 깨끗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며, 무엇이든지 주면서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셋째, 음행하지 마시오. 아라한은 음란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성에 대해 부정한 생각을 내는 일이 없고 청정한 마음으로 항상 정진을 즐깁니다. 넷째, 거짓말하지 마시오. 아라한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항상 진실하여 조용히 하는 말은 그 마음과 같이 법에 맞으며 거룩한 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마시오. 아라한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는 어지러운 일이 없고, 생각에는 게으름이 없으며, 밝고 바른 뜻에는 술을 생각지도 않습니다. 여섯째, 몸에 패물을 달거나 화장하지 말며 노래하고 춤추지 마시오. 아라한은 생각을 방종하게 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복이나 패물로 호사하거나 연지와 분을 발라 화장하지 않으며,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쓰는 일이 없으며 오락이라면 구경도 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뫂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마시오. 아라한은 몸을 편히 하기 위해 높은 평상이나 좋은 자리에 앉거나 눕지 않습니다. 비단으로 된 이부자리 같은 것은 쓰지 않으며, 낮고 허술한 자리에 앉고 쉬며, 올바른 가르침을 생각합니다. 여덟째, 제때 아니면 먹지 마시오. 아라한은 법답게 먹는 시간을 지켜 정오에 한 때만 식사하며, 양에 맞추어 적게 먹고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습니다. 이 여덟 가지 계법은 온갖 나쁜 짓을 막는 문이며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하는 길입니다. 출가 수행승이 되어 도를 닦는 이들은 평생을 지키지만, 세속에 있는 신도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하루낮 하룻밤 동안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삼장재월인 일월, 오월, 구월 달에나 육재일인 여드레, 열 나흘, 보름, 스무 사흘, 스무 아흐레, 그믐날이라도 깨끗하게 받아 지키면 그 복덕은 열 여섯 나라의 보물을 모두 한 곳에 쌓아 두고 혼자서 수용하는 것보다 더 클 것입니다. 모든 하늘의 선신들이 항상 보호하므로 온갖 재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지혜의 길은 장엄하며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재경 >
제4장 보살계
1. 보름마다 외우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아 크게 깨달으시고 보살의 계를 정하셨다. 그것은 부모와 스승과 삼보에 대하여 효도하는 길이고 바른 도에 대하여 효순 하는 법이다. 효순 하는 것을 계라 하고 제지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입으로 한량없는 광명을 내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보름마다 여러 부처님을 계법을 외운다. 너희 보살들도 따라 외우라. 계의 광명이 입에서 나온 것은 연만 있고 인이 없이 나는 것이 아니다. 광명은 푸른 것도 아니고 누른 것도 아니며, 붉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며 또한 검은 것도 아니다. 빛깔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인과법도 아니다. 모든 여래의 근본이고 보살도를 행하는 근본이며 모든 불자들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받아 지켜야 하고 외워야 하며 잘 배워야 한다. 불자들은 잘 들어라. 한 나라의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법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두 이 계를 받을 것이니, 계를 받음으로써 가장 청정한 자가 될 것이다. 여러 불자들, 나는 이제 보살의 열 가지 중한 계를 말하겠다.” < 범망경 >
2. 열 가지 중한 계(십중대계)
“첫째, 중생을 죽이지 말라. 온갖 목숨 있는 것을 제가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수단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워 죽여서는 안 된다. 즉, 죽이는 인과 죽이는 연과 죽이는 방법과 죽이는 업으로 목숨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보살은 항상 자비스런 마음과 공손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방자한 생각과 통쾌한 마음으로 산 것을 죽인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둘째,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주인이 있는 물건이든 도둑들이 훔친 것이든 바늘 한 개, 풀 한 포기라도 제가 훔치거나 남을 시켜 훔치거나 수단을 써서 훔쳐서는 안 된다. 보살은 항상 자비스런 마음과 공손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도와 복되고 즐겁게 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셋째, 음행하지 말라. 제가 음행 하거나 남을 시켜 음행 하게 하지 말며, 몸의 어느 부분에든지 음란한 짓은 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공손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청정한 법을 일러주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음란한 마음을 내어 가까운 친척도 가리지 않고 음행을 하여 자비한 마음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제가 거짓말하거나 남을 시켜 거짓말을 하게 하거나 수단을 써서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항상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견해를 갖게 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중생에게 옳지 못한 말과 옳지 못한 소견과 옳지 못한 업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다섯째, 술을 팔지 말라. 제가 술을 팔거나 남을 시켜 팔아서도 안 된다. 술은 허물을 짓는 인연이 된다. 보살은 항상 모든 중생에게 밝고 빛나는 지혜를 내게 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뒤바뀐 마음을 내게 한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여섯째, 사부 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출가한 보살과 집에 있는 보살과 비구와 비구니의 허물을 제 입으로 말하거나 남을 시켜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만약 나쁜 사람들이 바른 법에 대해서 법이 아니고 율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자비스런 마음으로 그들을 교화하여 대승에 대한 신심을 내게 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자신이 바른 법에 대한 허물을 말한 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일곱째,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거나, 남을 시켜 자기를 칭찬케 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게 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대신해서 남의 비방과 욕을 달게 받으며, 나쁜 일은 제게 돌리고 좋은 일은 남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공덕을 드러내고 남의 잘한 일을 숨겨 다른 사람에게 비방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여덟째, 제 것을 아끼려고 남에게 욕하지 말라. 제가 아끼거나 남에게 제 것을 아끼게 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가난한 사람이 와서 달라 하면 무엇이든지 주어야 한다. 보살이 나쁜 마음과 성낸 마음으로 돈 한 푼, 바늘 한 개라도 주지 않고,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 법문 한 구절, 게송 한마디라도 일러주지 않으며, 도리어 나쁜 말로 욕한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아홉째, 성내지 말고 참회를 잘 받아라. 제가 성내거나 남을 성내게 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끝없는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화평하게 하며 자비한 마음과 공손한 마음을 내게 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나쁜 욕지거리를 하여 주먹이나 작대기나 칼로 치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그 사람이 진심으로 참회하여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열째,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제가 삼보를 비방하거나 남을 시켜 비방케 해서는 안된 다. 보살은 이교도나 나쁜 사람들로부터 삼보를 비방하는 한마디의 말이라도 들으면 삼백 자루의 창으로 가슴을 찔린 듯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제 입으로 비방할 것인가. 신심과 공손한 마음을 내야 할텐데 도리어 잘못된 소견을 가진 자들과 어울려 삼보를 비방한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어진 불자들,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프라티목샤(계본)이다. 마땅히 매워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을 범하면 이 몸으로 보리심을 내지 못하며, 온갖 공덕을 다 잃어버리고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보살은 지금 배우고 장차도 배울 것이며 이미 배운 것이니, 이 열 가지 계를 잘 배워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지키라.” < 범망경 >
3. 마흔 여덟 가지 계(사십팔경계)
“이미 열 가지 프라티목샤를 말했으니 이제는 마흔 여덟 가지 계를 말하겠다. 첫째, 스승과 벗을 공경하라. 보살계를 받은 이는 스승과 벗을 보거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일어나 맞고 문안해야 한다. 보살이 교만하거나 게으르고 어리석고 성내는 마음에서 일어나 맞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법답게 공양하지 않으면 어찌될 것인가. 만약 공양거리(공양구)가 없으면 제 몸을 팔아서라도 스승과 벗을 공양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된다. 둘째, 술 마시지 말라. 술 때문에 생기는 과오가 한량이 없다. 술잔을 남에게 권하기만 하고도 오 백 생 동안 손이 없는 과보를 받았다는데 어찌 몸소 마실 것인가. 보살은 이웃에게 술을 마시지 않도록 권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술을 마시거나 남에게 마시게 하면 죄가 된다. 셋째, 고기를 먹지 말라. 고기를 먹으면 자비의 종자가 끊어지고, 중생들이 그를 보고는 달아난다. 그러므로 보살이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일부러 먹으면 죄가 된다. 넷째,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말라. 마늘. 부추. 파. 달래와 같이 악취가 나는 채소는 무슨 음식에나 넣어 먹지 마라. 먹으면 죄가 된다. 다섯째, 계를 범한 사람은 참회시켜라. 오계와 십계, 이 밖에 다른 금계를 범한 사람을 보거든 참회시켜야 한다. 보살이 이런 사람을 참회시키지 않고 함께 지내면서 이양을 같이 받으며,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 죄를 들어 참회시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여섯째, 법사에게 공양하고 법을 청하라. 법을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거든 일어나 맞아들이고 예배 공양해야 한다. 음식과 앉을 자리와 약과 소용될 물건을 공양하고, 법을 위해서는 몸도 잊어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설법해 주기를 청하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일곱째, 설법하는 곳을 찾아가 들어라. 경이나 계율 혹은 바른 법을 말하는 곳이 있거든 나무 아래나 숲속이나 절을 가릴 것 없이 몸소 찾아가 들어라. 불자로서 가서 듣지 않고 묻지 않으면 죄가 된다. 여덟째, 대승법을 그릇되게 여기지 말라. 대승경전과 율을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서, 소승의 교법과 이교도의 사견으로 만든 학설만을 배우는 것은 죄가 된다. 아홉째, 환자를 잘 보살펴라. 보살이 환자를 보거든 부처님처럼 잘 받들어 공양해야 한다. 여덟 가지 복밭 가운데 간호하는 일이 으뜸가는 복밭 이다. 보살이 병든 사람을 보고도 간호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열째, 살생하는 도구를 가지고 있지 말라. 사람을 죽이는 무기나 짐승을 잡는 기구는 무엇이건 마련해 두지 마라. 보살은 자기 부모를 죽인 사람에게도 원수를 갚지 않는데 하물며 중생을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도구를 마련해 두면 죄가 된다. 열 한 째, 국가의 사신이 되지 말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나쁜 생각에서 나라의 사신이 되어 적국과 통하거나 전쟁을 일으켜 많은 중생을 죽게 하지 말라. 보살은 군대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는데 하물며 자기 이익을 위해 나라를 해롭게 해서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런 일을 하면 죄가 된다. 열 두째, 나쁜 마음으로 장사하지 말라. 사람이나 가축을 사고 팔지 말며, 관 장사 같은 일을 하지 말라. 제가 하지도 않는데 남을 시켜 할 것인가. 제가 팔거나 남을 시켜 팔면 죄가 된다. 열 셋째, 비방하지 말라. 나쁜 마음으로 남을 까닭 없이 비방하면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남을 해롭게 하여 좋지 못한 곳에 들어가게 되면 죄가 된다. 열 넷째, 불을 놓지 말라. 나쁜 생각으로 불을 놓아 산과 들을 태우거나, 생물이 번성할 때 땅 위에 불을 놓지 말라. 남의 집이나 절, 혹은 전답이나 숲에 불을 놓아 태우면 죄가 된다. 열 다섯째, 딴 법으로 교화하지 말라. 보살은 누구에게나 항상 대승 경전과 대승 계율을 가르쳐 보리심을 내게 해야 한다. 그런데 보살이 만약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생각으로 소승의 경과 율이나 이교도의 그릇된 학설만을 가르치면 죄가 된다. 열 여섯째, 이익을 탐내지 말고 바르게 가르치라. 보살은 좋은 마음으로 대승의 위의와 경과 율을 먼저 배우고 그 뜻을 잘 해석해야 한다. 새로 발심한 보살이 멀리서 와서 대승의 경과 율을 배우고자 하면 법대로 온갖 고행을 일러 줄 것이고, 그 다음에 바른 법을 차례대로 말해 마음이 열리고 뜻이 통하게 해야 한다. 보살이 어떤 이익을 위해 대답할 것을 대답하지 않거나 잘못 일러주어 앞뒤가 틀리게 하여 삼보를 비방하면 죄가 된다. 열 일곱째, 세력을 믿고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라. 보살이 왕이나 관리들을 가까이 사귀어 그들의 힘을 믿고 재물을 달라고 하면 죄가 된다. 열 여덟째, 아는 것이 없이 스승이 되지 말라. 보살은 경전을 배우고 계를 지켜 그 뜻과 여래의 성품까지도 잘 알아야 한다. 경 한 구절, 게송 한마디도 알지 못하고 계율의 인연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것은 저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모든 법을 두루 알지 못하면서 남의 스승이 되어 계를 일러주는 것은 죄가 된다. 열 아홉째, 두 가지로 말하지 말라. 나쁜 생각으로 이간을 붙여 화합을 깨뜨리거나 어진 이를 비방하는 일은 죄가 된다. 스무째, 산목숨을 놓아 주고 죽게 된 것은 구제하라. 보살은 자비스런 마음으로 산 것을 놓아 주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육도 중생이 모두 내 아버지요 어머니다. 짐승을 잡아먹는 것은 곧 내 부모를 죽이고 내 옛 몸을 먹는 일이 된다. 누가 짐승을 죽이려고 하거든 방편으로 구원하여 액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며, 보살계를 일러주고 교화하여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부모와 형제의 제삿날에는 법사를 청해 보살계와 경전을 읽어 죽은 이의 명복을 빌 것이니 그러지 않으면 죄가 된다. 스물 한째, 성내고 때려 원수 갚지 말라. 보살은 마주 성내거나 때려서는 안 된다. 설사 부모 형제가 남에게 맞아 죽었더라도 원수를 갚지 말라. 산 목숨을 죽여 원수를 갚는 것은 효도에 맞는 일이 아니다. 출가한 보살이 자비심이 없어 원수를 갚는 것은 죄가 된다. 스물 두째,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법문을 청하라. 처음 출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총명한 재주를 믿거나, 지위.나이. 문벌.재산 같은 것을 믿고 교만한 생각으로 먼저 배운 법사에게 경과 율 배우기를 싫어하지 말라. 법사가 비록 나이 젊고 신분이 보잘것없고 용모가 온전치 못하더라도, 학덕이 있고 경과 율을 잘 안다면 그 법사에게 배워야 한다. 처음 배우는 보살이 법사의 문벌이나 따지면서 법을 배우지 않으면 죄가 된다. 스물 셋째, 교만한 생각으로 잘못 일러주지 말라. 보살계를 받으려 하여도 천 리 안에 법을 설해 줄 법사가 없을 때에는 불 보살 형상 앞에서 서원을 세우고 지극하게 기도하면서 상서를 보아야 한다. 법사가 경과 율과 대승법을 잘 안다는 것을 내세워 처음 배우는 보살이 경과 율을 묻는데도 교만한 생각으로 낱낱이 잘 일러주지 않으면 죄가 된다. 스물 넷째, 여래의 가르침을 잘 배우라. 보살이 여래의 경과 율과 대승법이 있어도 배우지 않고 어찌 소승과 이교도의 잘못된 학설이나 세속 학문을 배울 것인가. 이와 같은 일은 부처님의 성품을 끊는 것이고 도에 장애되는 것이며 보살의 할 일이 아니다. 일부러 그런 짓을 하면 죄가 된다. 스물 다섯째, 대중을 잘 통솔하라. 법사가 되거나 교단의 책임자가 되거나 절의 주지가 되거나 어떤 일의 책임을 맡거든, 다투는 대중을 자비심으로 화해시키고 삼보의 재산을 수호하여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만약 대중의 질서를 어기거나 삼보의 물건을 함부로 쓰면 죄가 된다. 스물 여섯째, 혼자만 이양을 받지 말라. 어떤 절이나 여럿이 모인 곳에 객스님이 오거든 먼저 있던 대중이 일어나 맞아들이고 보낼 것이며, 음식을 공양하고 방과 이부자리와 평상과 방석 등 소용되는 것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신도가 와서 대중을 초대하거든 객스님도 공양 받을 분이 있으므로 절 책임자는 객스님도 함께 보내야 한다. 만약 먼저 있던 사람들만 초대를 받고 객스님을 따돌린다면 절 책임자는 한량없는 죄를 지은 것이며 그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은 사문이 아니며 불제자가 아니다. 이런 일은 죄가 된다. 스물 일곱째, 따로 초대받지 말라. 따로 초대를 받아 자기만 이양을 취해서도 안 된다. 이런 이양은 대중들이 똑같이 받을 것인데, 만약 혼자서만 초대를 받으면 이것은 대중들의 몫을 저 혼자 독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일은 죄가 된다. 스물 여덟째, 스님들을 따로 초대하지 말라. 출가한 보살이나 집에 있는 보살이나 신도가 스님들을 초대하려거든 먼저 절에 가서 일보는 사람에게 그 뜻을 말하라. 그러면 일보는 사람은 ‘스님들을 차례로 초대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스님들을 모시는 것이 됩니다.’라고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오백 아라한이나 보살들만을 따로 초대하는 것은 차례대로 보통 스님 한 분을 초대하는 것만 못하다. 따로 초대하는 것은 이교도들이나 하는 풍습이고 여래의 가르침에는 따로 초대하는 법이 없다. 스님들을 일부러 따로 초대하면 죄가 된다. 스물 아홉째, 나쁜 업으로 살지 말라. 어떤 이익을 위해 매음행위를 하거나 관상보고 점치거나 해몽을 하거나 주문과 술법을 쓰거나 독약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런 행위는 자비스런 마음과 공손한 마음이 아니니 일부러 범하면 죄가 된다. 서른째, 재일을 공경하라. 나쁜 마음으로 삼보를 비방하면서도 겉으로는 섬기는 체하며, 행위는 유에 걸려 있으면서 입으로는 공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속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그들에게 음란한 짓을 하게 하여 속박을 지어서는 안 된다. 육재일과 삼장재월에 산 것을 죽이거나 도둑질하여 재를 깨뜨리고 계를 범하면 죄가 된다. 서른 한째, 재난을 보거든 구해 내라. 불상이나 경전을 나쁜 사람들이 도둑질하여 팔거나, 스님과 발심한 보살들이 욕을 당하는 것을 보거든, 자비한 마음으로 어떤 방편을 써서든지 구해 내야 한다. 만약 구해 내지 않으면 죄가 된다. 서른 두째, 중생을 손해보게 하지 말라. 산 것을 해치는 데에 쓰는 무기를 팔지 말며, 속이는 저울과 적게 드는 말을 두지 말라. 권력을 의지해 남의 것을 빼앗거나 다된 일을 깨뜨리지 말며, 고양이나 돼지나 개 같은 가축을 기르지 말라. 그런 짓을 하면 죄가 된다. 서른 셋째, 나쁜 짓을 보고 듣지도 말라. 방일한 마음으로 남녀의 싸움이나 전쟁이나 도둑들끼리 싸우는 것을 구경하지 말라.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구경하지 말며, 투전이나 바둑 장기를 두지 말고, 도둑의 심부름을 하지 말라. 이런 짓을 하면 죄가 된다. 서른 넷째, 잠시라도 마음을 놓지 말라. 불자는 계율을 금강석과 같이 알고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부낭같이 여기라.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부처요, 여래는 이미 이룬 부처임을 명심하고 보리심을 내어 잠시라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잠시라도 소승이나 이교도의 마음을 내면 죄가 된다. 서른 다섯째, 원을 발하라. 부모와 스승에게 은혜 갚기를 원하며, 어진 도반과 함께 공부할 선지식 만나기를 원하며, 마음을 환히 열려 법대로 수행하기를 원하며, 계율을 굳게 지켜 잠시라도 마음에 흩어지지 않기를 원해야 할 것이니, 이런 원을 발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서른 여섯째, 서원을 세워라. 불자는 계율을 지키면서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워야 한다. ‘차라리 이 몸을 훨훨 타오르는 불구덩이나 날카로운 칼날 위에 던질지언정 삼세 부처님의 계율을 어겨 여인들과 부정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뜨거운 쇠 그물로 이 몸을 얽을지언정 파계한 몸으로 신심 있는 신도가 주는 옷을 입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이 입으로 벌겋게 달은 쇳덩이를 삼킬지언정 파계한 입으로 신심 있는 신도의 음식을 먹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이 몸을 뜨거운 철판 위에 누일지언정 파계한 몸으로 신심 있는 신도가 주는 의자나 방석을 받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이 몸이 삼 백 자루 창에 찔릴지언정 파계한 몸으로 신심 있는 신도가 주는 약을 받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이 몸이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 있을지언정 파계한 몸으로 신심 있는 신도가 베푼 방이나 집이나 절을 쓰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쇠망치로 이 몸을 부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루를 만들지언정 파계한 몸으로 신심 잇는 신도의 예배를 받지 않겠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부처님이 되어지이다.’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은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죄가 된다. 서른 일곱째, 위험한 곳에 다니지 말라. 불자는 봄 가을 두타행을 할 때나 여름 겨울 참선할 때나 안거할 때에 항상 다음 열여덟 가지를 지녀야 한다. 칫솔. 비누.가사.물병. 바리. 방석.육환장.물 긷는 주머니. 수건. 주머니칼.성냥. 쪽집게. 노끈.의자. 경전.율문.불상. 보살상 등. 보살은 백리 천리를 가더라도 이 열 여덟 가지는 반드시 지니고 다녀야 한다. 이 물건이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를 마치 생의 두 날개와 같이 할 것이다. 새로 발심한 보살은 보름마다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계본을 외우라. 불 보살 형상 앞에서 열 가지 중한 계와 마흔 여덟 가지 계를 외워야 한다. 두타행을 할 때에 험난한 곳에는 가지 마라. 적국의 구경, 악독한 왕이 있는 곳, 초목이 무성한 곳,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가 사는 곳, 화재나 수재 폭풍이 있는 곳, 도둑이 들끓는 외딴 곳, 독사가 많은 곳에는 가지 마라. 두타행을 할 때나 안거할 때에 이런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은 죄가 된다. 서른 여덟째, 높고 낮은 차례를 어기지 말라. 불자는 바른 법과 같이 높고 낮은 차례를 따라 앉되 먼저 계 받은 이가 위에 앉고 나중에 계 받은 이가 아래에 앉아야 한다. 나이 많고 적음이나 신분을 묻지 말고 계 받은 차례대로 앉아라. 어리석은 이교도들처럼 나이 많은 이나 적은 이나 앞뒤도 없이 함부로 앉지 말라. 만약 보살이 차례대로 찾아 앉지 않으면 죄가 된다. 사른 아홉째, 복과 지혜를 닦게 하라. 중생을 널리 교화하여 절과 탑을 세우게 하고, 온갖 재난을 당했을 때도 대승 경전과 대승 불문을 말하여 복과 지혜를 골고루 닦도록 해야 한다. 새로 된 보살이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마흔째, 계를 가려서 일러주지 말라. 남에게 계를 일러줄 때는 그 신분을 가리지 말고 누구나 받게 하라. 다만 살인자는 제외한다. 옷은 검박하게 물들여 법에 맞게 입으라. 비구의 옷은 일반인의 옷과 달라야 한다. 출가한 사람은 국왕이나 부모나 친척들에게 절하지 않으며 귀신을 원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와서 계법을 구하는 이에게 보살인 법사가 나쁜 마음으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계를 일러주지 않으면 죄가 된다. 마흔 한째, 이익을 위해 스승이 되지 말라. 열 가지 큰 계를 범한 사람은 불 보살 형상 앞에서 참회시켜 상서를 보도록 하고, 마흔 여덟 가지 계를 범한 사람은 법사에게 참회하면 허물이 소멸된다. 계를 일러주는 법사는 이와 같은 법과 대승 경률의 가볍고 큰 것과 옳고 그른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명예와 이양을 위해서나, 제자를 탐내어 여러 가지 경과 율을 아는 체하면 이것은 저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니 죄가 된다. 마흔 두째, 계 받지 않은 이에게 포살하지 말라. 포살할 때에 이양을 위해 보살계를 받지 않은 이교도나 그릇된 소견을 가진 자 앞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큰 계를 설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런 사람들 앞에서 계를 말하면 죄가 된다. 마흔 셋째, 계 범할 생각을 내지 말라. 불자가 신심에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바른 계를 받은 뒤에는 일부러 파계한 자는 신도들의 공양을 받지 못하며, 그 나라 땅으로 다니지 못하며, 그 나라 물도 마시지 못할 것이다. 오 천 귀신들이 항상 앞을 가로막고 큰 도둑이라 하면서 그 발자국을 쓸어버릴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불법의 도둑이라 꾸짖을 것이고, 중생들은 그를 보기 싫어할 것이다. 바른 계를 깨뜨리는 이는 죄가 된다. 마흔 넷째, 경전에 공양하라. 불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승 경전과 율을 외우며 정성을 다해 써야 할 것이고 함을 만들어 모시고 꽃과 향으로 공양해야 한다. 이와 같이 법답게 공양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마흔 다섯째, 중생을 항상 교화하라. 불자는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보거든 삼보에 귀의시켜 열 가지 큰 계를 받들도록 할 것이며, 짐승을 대하면 보리심을 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해야 한다. 보살은 산이나 숲, 강이나 들에 갈 때에도 여러 중생들에게 보리심을 내게 해야 할 것인데, 만약 중생 교화할 생각을 내지 않으면 죄가 된다. 마흔 여섯째, 법답게 설법하라. 불자는 남을 교화할 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여럿이 모인 대중 앞에서 법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높은 자리에 앉아 법답게 설법해야 한다. 듣는 대중들은 아랫자리에 앉아 향과 꽃으로 공양하며 부모와 스승을 공양하듯 해야 할 것이다. 법을 말할 때 법답게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마흔 일곱째, 옳지 못한 법으로 제한하지 말라. 국왕이나 관리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믿고 불교를 파괴할 목적으로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출가하여 도 닦는 일을 못하게 하거나 불상과 탑과 경전과 절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옳지 못한 처사로 교단의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 여러 사람을 교화할 보살이 어찌 관리들의 시중꾼이 된단 말인가. 국왕이나 관리들이 신심으로 부처님 계를 받았거든 삼보를 파괴하는 일은 하지 말라. 불교를 파괴하는 일을 하면 죄가 된다. 마흔 여덟째, 바른 법을 파괴하지 말라. 신심에서 출가한 불자가 명예와 이익을 위해 국왕이나 관리들과 결탁하여 비구 비구니나 계 받은 불자들을 구속하고 죄인처럼 다룬다면, 그것은 마치 사자의 몸에서 생긴 벌레가 사자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다. 보살은 여래의 계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삼백 자루 창으로 심장을 찔린 듯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여래의 계를 깨뜨리거나 남을 시켜 파괴하는 인연을 지을 것인가. 계를 받은 이는 바른 법 보호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 하고 부모 섬기듯 하여 파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러 불자들, 이 마흔 여덟 가지 계를 받아 지키라. 과거의 보살들이 이미 배웠고, 미래의 보살들도 장차 배울 것이며, 현재의 보살들이 지금 배우고 있다. 이 보살계를 받은 이는 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써서 중생들에게 널리 펼쳐 교화가 그치지 않게 하라. < 범망경 >
제5장 화합의 법문
1. 파계에 대한 시비
부처님께서 코삼비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떤 비구가 자기 생각에는 계를 범한 것이 아닌데, 다른 비구들이 주장하기를, 계를 범했으니 법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범했느니 범하지 않았느니 서로 시비를 하다가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던 비구가 마침내 그 대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비구는 오랫동안 수행해 왔기 때문에 교리와 계율에 밝고 고에 대한 마음이 견고했다. 그는 친한 비구와 신도를 많이 알고 있어 그들을 찾아가 자기의 억울함을 말했다. 그를 동정한 비구들은 한 무리가 되어 앞의 대중들과 더욱 큰 시비를 벌였다. 그들은 서로 비방하고 헐뜯으며 욕지거리를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들이 마침내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는구나’ 하시고. 비구를 쫓아낸 대중에게 가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비구의 허물을 눈앞의 것만을 가지고 그를 미워한 끝에 쫓아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수행하여 교리와 계율에 밝고 도에 대한 마음이 견고한 비구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너희들의 할 일이라고 해서 비구를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아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이번에는 쫓겨난 비구쪽에 가서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나는 죄가 없으니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사 어떤 허물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 한 사람의 일로 교단에 불화가 생기고 싸움이 일어난다면, 대중의 화합이 깨뜨려질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위해서라도 대중의 결정된 뜻에 따르는 것이 옳다.” < 사분률 43 >
2. 여섯 가지 화합
부처님께서는 다시 여러 비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이 잇다. 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지키라. 둘째, 의견을 같이 맞추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라. 넷째,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아라. 다섯째,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께서는 이튿날 아침 코삼비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에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참고 견디며, 자비스런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 자리에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비구들, 그들은 여래의 계율에 따라 머리를 깍고 출가한 사문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자비에 의해 밝게 화합해야 한다. 부디 다투지 마라. 이 이상 화합을 깨뜨리지 마라.”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간곡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구는 말했다. “부처님 걱정 마시고 그저 가만히 계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법의 왕이십니다. 저희들의 다툼은 저희들끼리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니다, 그런 소리 말아라. 서로 싸우고 욕하고 비방하면서 시비를 가리지 말아라.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화합하여 살면서 한 스승에게 같이 배우면 여래의 법 안에서 이익을 얻고 안락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몇 번이고 거듭 말씀하셨으나 코삼비 비구들은 끝내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이같이 어리석은 겉모양에만 마음을 파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구나’ 하시고, 가르치던 대중이나 공양 올리던 신도들에게도 아무 말씀 없이 훌쩍 코삼비를 떠나셨다. 그리고 사밧티로 돌아와 어느 조용한 숲속에서 홀로 고요함을 즐기셨다. 마치 큰 코끼리가 많은 새끼 코끼리들을 떠나 번거로움 없이 즐기듯 하셨다. < 사분률 43 >
3. 양쪽 말을 들어보라
이때 코삼비의 신도들은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사밧티 쪽으로 떠나셨다는 말을 듣고 서운해하고 슬퍼했다. 그리고 비구들은 시비를 그치지 않기 때문에 가신 거라고 그들을 원망했다. 신도들은 모임을 열고, 오늘부터 코삼비에 있는 비구들에게는 공양도 올리지 말고 예배하지도 말고 아는 체도 하지 말자고 결의하였다. 공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비구들은 하는 수 없이 ‘부처님께 찾아가 이 싸움을 끝맺고 말자’ 하고, 행장을 꾸려 사밧티로 길을 떠났다. 코삼비의 시비꾼들이 사밧티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리풋타는 여러 비구들과 함께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코삼비 비구들이 싸우면서 서로 비방하고 욕지거리를 하는데 그 입이 마치 칼날 같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온다는데 저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두 무리의 말을 들어보라. 그래서 법답게 말하는 비구가 있거든 그의 말을 받아들여 칭찬하고 그의 편이 되어 주거라.” “어떻게 그 비구의 말이 법답고 법답지 못한 줄을 알 수 있습니까?” “대중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 열 여덟 가지를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계율과 계율 아닌 것, 법과 법 아닌 것, 범하고 범하지 않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 여지가 있고 여지가 없는 것, 추악하고 추악하지 않은 것, 할 것과 하지 않을 것, 막을 것과 막지 않을 것,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r서이다. 사리풋타, 네가 이런 일을 관찰하면 그 비구가 법답게 말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서로 뒤바꾸어 알고 해석함으로써 온갖 시비가 생기고 대중의 화합이 깨뜨려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밧티에 잇는 비구와 코삼비에서 온 비구들을 한데 모아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제정하여 놓은 모든 계율은 곧 너희들의 보호자요 스승이다. 바로 너희들이 믿고 의지하며 목숨이 다하도록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밥대로 다스림을 받고 참회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계율은 오로지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안락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아라. 그러므로 많은 계율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제하고, 그 나머지 사소한 계율에 대해서는 너무 고집하여 범하고 범하지 않은 것을 캐냄으로써 시비를 일삼지 않도록 하여라.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두루 살펴 삼가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여 서로서로 화합하고 예의와 법도에 맞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공경하고 순종할 법이다.” 코삼비에서 온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허물을 뉘우쳐 참회하고 다시 화합을 이루었다. < 사분률 43 >
제 5 편 조사어록
제 1장 마음 닦는 법
1. 불타는 집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째서 거기 머물러 그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면하려면 부처를 찾아야 한다.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 데서 찾으랴.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거짓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뼈와 살은 무너지고 흩어져 흙으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고 한 것이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멀리 성인에게서만 구하려 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 .’ 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태우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며, 피를 뽑아 경전을 쓰고 밤낮으로 눕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고 팔만대장경을 줄줄 외며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다.” 하시고, “모든 중생의 갖가지 허망된 생각이 다 여래의 원각효심에서 일어난다.” 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이며, 미래의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구하지 말 것이다. 마음의 바탕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을 떠나면 곧 의젓한 부처이다. <보조 수심결>
2 불성은 어디에
“만약 불성이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가운데 있으면서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저는 어째서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네 몸 안에 있는데도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차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무슨 물건인가? 또 이 육신은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인 것이므로, 그 바탕이 미련해 식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달아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그것이 바로 너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대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런데, 다만 네 눈앞에 뚜렷이 홀로 밝은 형상 없는 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을 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형상 없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너의 본래 마음이다. 즉 불성이 네 안에 버젓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밖에서 찾느냐.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옛 성이들의 도에 든 인연 몇 가지를 들어 의심을 풀어 줄 테니 진실인 줄 믿으라. 옛날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은 성품을 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성품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 버젓이 작용하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왕이 작용한다면 볼 수 있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도 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작용할 때에는 몇 군데로 출현합니까?” “출현할 때에는 여덟 군데로 합니다.”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걸어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온 누리에 다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열렸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 화상께 물은 적이 있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큰 스님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곧 너니라. ” “어떻게 닦아가야 합니까?” “한 꺼풀 가리는 것이 눈에 있으니 헛꽃이 어지러이 지는구나. ” 그 스님은 이 말끝에 알아차린 바가 있었다. 옛 성인의 도에 드신 인연이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힘들지 않았다.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그는 옛 성인과 더불어 손을 마주잡고 함께 갈 것이다. <보조 수심결> 3. 신통변화 “앞에 말씀하신 견성이 참으로 견성이라면 그는 곧 성인입니다.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요즘 수도인들은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너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아라. 정과 사를 분간하지 못함은 어리석어 뒤바뀐 것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곧잘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에 게으른 생각을 내어 도리어 자격지심에 떨어지는 수가 있으니, 다 네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데에 있는 것이다. 도를 배워도 앞뒤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본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소견이지 수학이라 이름할 수 없다. 자기를 그르칠 뿐 아니라 남까지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도에 들어감에는 문이 많으나 크게 나누어 돈오와 점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점수가 가장 으뜸가는 근기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본다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해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일시에 단박 마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므로, 이 돈과 점 두 가지 문은 모든 성인들의 길이다. 예전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이 닦음으로 말미암아 증득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해 나타난 것이요, 깨달을 때에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이치는 단박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에 따라 번뇌를 녹일 수 있지만, 현상은 단번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차례를 따라 없애는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봉스님이,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다음 같이 이른 것이다. “얼음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볕으로써 녹일 수 있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은 깨달으나 법력으로써만 훈수할 수 있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만 대고 씻을 수 있고, 망상이 다해야만 마음이 신령스레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현상의 신통변화는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닦아 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신통이 자재한 사람의 경지로는 오히려 요괴스런 짓이고, 성인의 분수에는 하찮은 일이다. 비록 나타날지라도 요긴하게 쓰지 않을 것인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을 때 한량없는 묘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하니, 이와 같은 생각은 이른바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본말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앞뒤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찾는다면 모가 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리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미리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종성을 끊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깨달음을 믿지도 않아 신통 없는 이를 보고 업신여긴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보조 수심결>
4. 돈오와 점수
“돈오와 점수 두 문이 모든 성인의 길이라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이미 단박 깨달음이었다면 왜 점수를 빌리며, 닦음이 점차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 합니까? 돈과 점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범부가 미했을 때는 사대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게 된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는 지혜 성품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그러나,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깨달았으나, 끝없이 익혀 온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하여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라 한다. 이를테면, 어린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다만 네 자심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 앎을 구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면서 다시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러 또 앎을 구할 것인가. 만약 앎을 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보조 수심결>
5. 본래 면목
“상상의 근기는 들으면 곧 쉽게 알지만, 중하의 근기는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알아 듣게 해 주십시오. ”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네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생각을 쉬고 내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이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 너의 본래 면목이며, 삼세 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인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참으로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가, 걸음걸음이 삼계에 뛰어나서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 이타를 갖추게 되며,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네가 이와 같다면 참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제 분수대로 보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의 마음입니까?” “네가 지금 내게 묻는 것이 너의 공적 영지하는 마음인데, 왜 돌이켜 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느냐? 내 이제 네 분수를 따라 바로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테니 너는 마음을 비우고 내 말을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들으며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말해 보아라. 만일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왜 사람이 한 번 명을 마치면 눈을 스스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혀는 말하지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을 잡지 못하며, 발은 걷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알아라.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너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니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요소의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형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을 통달할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라. ’ 고 한 것이다. 또 이치에 들어가는 데는 길이 많으나, 너에게 한 문을 가리켜 근원에 들어가게 하겠다. 네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 “듣습니다.” “듣는 성품을 돌이켜 보아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느냐? ”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온갖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관세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내가 다시 너에게 물어보겠다. 네가 말하기를,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온갖 분별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할 수 없다면 그 때는 허공이 아니겠느냐? ”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말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아라. ” <보조 수심결>
6.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과거 윤회의 업을 따라 생각하면, 몇 천 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그 얼마일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긴 슬픔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게을리 지내다가 다시 그전 같은 재난을 받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도 닦는 길을 어둡지 않게 한 것인가. 참으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남이요, 겨자씨가 바늘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가 만약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 한 마디 불법을 들어 믿고 받들어 괴로움을 벗고자 한들 어찌 다시 얻게 될 것인가. 위태로운 데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바라건데 도 닦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하여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무상이 빨라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저녁 노을과 같다. 오늘은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뜻에 새겨 둘 일이다.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지금 닦지 않는다면 만겁에 어긋나 등질 것이요, 힘써 닦으면 어려운 행이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허! 요즘 사람들은 배고파 음식을 대하고도 입을 벌릴 줄 모르며, 병들어 의사를 만나고서도 약을 먹을 줄 모르니, 아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슬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창해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내랴. 그러므로 말세에 이 법문을 듣고 희귀한 생각을 내어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에 모든 성인을 섬기어 갖가지 선근을 심었고, 깊이 지혜의 바른 인연을 맺은 으뜸가는 그릇임을 알아라. 금강경에 말씀하기를 ‘이 글귀에 신심을 내는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 회상에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 했고, 또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하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한다’ 고 했다. 원컨대 도 구하는 사람들은 미리 겁을 내지 말고 용맹한 마음을 낼 것이다. 만일 수승함을 믿지 않고 하열함을 달게 여겨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의 선근이 있을지라도 이제 그것을 끊는 것이므로 더욱 어려운 데로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렀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한번 사람 몸을 잃으면 만 겁에 돌이키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할 것이다. 지혜로운 이가 보배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고 어찌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할 것인가. 보배를 얻으려면 가죽주머니를 잊어버려야 한다. <보조 수심결>
제 2장 마음을 살피는 일
1. 모든 것의 근본
제자 혜가가 물었다. “불도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겠습니까?” 달마 스님은 대답했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어째서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 하십니까?” “마음이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 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나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울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도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도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은 말이다.”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십니까?”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밝게 알며, 또 자기 마음을 쓰는 데 두가지 차별이 있음을 분명히 본다. 두 가지란 맑은 마음과 물든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의 마음이요, 물든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의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본래부터 갖추어 있어 비록 인연 따라 화합하기는 하지만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맑은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즐기고, 물든 마음은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약 진여의 마음을 깨쳐 그것이 물들거나 때묻지 않은 것인 줄 깨달으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을 따라 악한 짓을 하면 온갖 괴로움과 어둠이 몸에 감기고 덮이게 되니 이를 범부라 한다. 범부는 항상 삼계에 빠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니, 그것은 물든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십지경에 말하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석처럼 굳은 불성이 있어 해와 같이 밝고 원만하며 광대 무변하지만, 오온의 검은 구름에 덮여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불빛이 밖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 고 하였고, 또 열반경에 말하기를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나 무명에 덮여서 해탈을 얻지 못한다. ’ 고 하였다. 불성이란 깨침이다. 스스로 깨치고 깨친 지혜가 밝아 번뇌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은 깨침이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근본이 되어 모든 공덕의 나무가 무성하고 열반의 열매가 여문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는 것을 마음을 알았다고 한다. “ <달마 관심론>
2. 삼독
“진여 불성의 모든 공덕은 깨침이 근본이 된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명인 마음과 온갖 악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무명인 마음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와 정욕이 있어 악한 것들이 한량없으니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나 가지는 수없이 많은 것처럼, 삼독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한량없는 많은 악업이 있어 무엇으로 비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삼독은 본체에서는 하나이나 저절로 삼독이 되어 이것이 육근에 작용하면 육적이 된다. 육적은 곧 육식이다. 육식이 육근을 드나들며 온갖 대상에 탐착심을 일으키므로 악업을 지어 진여를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 이름한다. 중생들은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생사의 구렁에 빠져 육도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다. 이를테면 강물이 원래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면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는 만경 창파를 이루게 되나,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된다. 이와 같이 해탈을 구하는 사람도 삼독을 돌이켜 삼취경계를 이루고, 육적을 돌이켜 육바라밀을 이루면 저절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삼독과 육적이 광대 무변한데 마음만을 보고 어떻게 한없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에 태어남은 오로지 마음으로 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에 있으면서 곧 삼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삼계라는 것은 곧 삼독이다. 탐내는 마음이 욕계가 되고, 성내는 마음이 색계가 되며,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가 된다. 삼독심이 갖가지 악을 짓고 맺어 업을 이루고 육도에 윤회하게 되니 이것을 삼계라 한다. 또 삼독이 짓는 무겁고 가벼운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것도 같지 않아 여섯 곳으로 나뉘게 되니 이것을 육도라 한다. 그러나 악업은 오로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거둬 그릇되고 악한 것을 버리면 삼계와 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은 저절로 소멸되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달마 관심론>
3. 삼 아승지겁
“부처님께서는 삼 아승지겁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었다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오직 삼독을 제하면 곧 해탈이라 하십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다. 아승지는 곧 삼독심이다. 아승지는 셀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 가운데는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이 있고 그 낱낱 생각 가운데 다 일 겁씩 있으니, 삼독의 악한 생각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으므로 셀 수 없다고 말한다. 범부는 진여의 성품이 삼독에 덮였으니,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에서 뛰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느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만 제거해 버리면 이것이 곧 삼 아승지겁을 지낸 것이다. 말세 중생이 어리석고 둔하여 부처님의 깊고 묘한 삼 아승지겁이라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한량없는 겁을 지내야만 성불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어찌 말세에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못 알고 의심을 내어 보리도에서 물러나게 함이 아니겠느냐. ” <달마 관심론>
4. 정념
“보살이 삼취정계를 가지고 또한 육바라밀을 행하여야 불도를 이룬다 하셨는데, 수행자가 오직 마음만 관하고 계행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삼취정계란 곧 삼독심을 다스리는 것이니, 일독을 제하면 무량한 선이 이루어진다. 취란 모았다는 뜻인데 삼독을 다스리면 곧 세가지 한량없는 선을 이루게 된다. 널리 선을 마음에 모았으므로 삼취정계라 한다. 또 육바라밀이란 곧 육근을 맑게 하는 것이니 바라밀이란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육근이 청정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에서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되므로 육바라밀이라 한다.” “경에 말씀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 ’ 하셨으니 이 묘문으로 성불할 것인데 어째서 마음을 관하여 해탈을 구하라 하십니까?” “염불하는 자는 반드시 정념을 닦아야 한다. 참된 뜻을 분명히 알면 정이 되고, 참된 뜻에 분명하지 못하면 사가 되는 것이니, 정념은 반드시 서방정토를 얻지만 사념으로는 피안에 이를 수 없다. 불이란 깨쳤다는 뜻이니 몸과 마음을 살펴 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염이란 생각하는 것이니 계행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잊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정념이다. 그러므로 염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기를 그물로 잡지만 잡고 나서는 그물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말에 의지하여 뜻을 알지만 뜻을 알았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염불의 실체를 행해야 한다. 염불한다 하면서 진실한 뜻을 모르고 입으로만 공연히 부처님의 명호를 외운다면 헛된 공만 들이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외운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은 말과 뜻이 다르다. 외운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깨달아 행하는 문임을 알아야 한다. 외우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니 곧 음성의 모양이다. 마음에 없이 입으로만 명호를 외운다면 그것은 모양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이니 그릇된 짓이다.” <달마 관심론>
5. 해탈의 나루터
달마 스님이 말했다. “경에 말씀하기를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또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한다’ 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사물이나 형체는 진실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모든 성인들이 닦으신 공덕을 말씀하실 때는 한결같이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음을 강조했다. 마음은 모든 성인의 근원이며 일만 가지 악의 주인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것이요, 삼계 윤회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곧 세간을 뛰어나는 문이고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이다. 문을 알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고, 나루터를 알면 저 기슭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가만히 살피건대,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것이 얕아 겉 모양만으로 공덕을 삼으려 한다. 힘써 공을 들여 자기도 손해보고 남도 또한 미혹하게 하며, 이러고서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나 깨칠 것인가. 세간의 덧없는 유위법을 보고는 아득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간의 조그마한 즐거움을 탐착하고 다가올 큰 괴로움은 깨닫지 못하니, 이와 같이 공부해서는 헛되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할 뿐 도무지 이익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잘 거두어 안으로 돌이켜 깨치면 보는 것이 항상 맑아, 삼독심은 끊어져 사라지고 육적이 드나들 문은 닫혀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때 비로소 한량없는 공덕의 갖가지 장엄과 무량 법문을 낱낱이 다 성취하여 순식간에 범부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깨침은 잠깐 사이에 있는 것인데 어찌 머리가 희기를 기다리랴. 참된 법문의 심오한 뜻을 어찌 갖추어 말할 수 있으랴. 여기서는 마음 관하는 것만을 말하며 나머지 세밀한 일을 짐작케 하려는 것이다.” <달마 관심론>
6. 이심전심
달마 스님이 말했다. “삼계가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은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가니 전불 후불이 이심전심하시고 문자를 세우지 않으셨다.” 제자가 물었다. “만약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네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네 마음이며, 내가 너에게 대답하는 이것이 내 마음이다. 만약 내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너에게 대답을 하겠으며, 네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나에게 물을 수 있겠느냐.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너의 마음이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는 모든 말과 행동과 장소와 시간이 다 네 본심이며 너의 본분이니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도 이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버리고 따로 부처를 구할 수 없으며, 이 마음을 떠나서 보리나 열반을 찾는다면 옳지 않다. 자성은 진실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법은 곧 마음이니 자기 마음 이것이 보리요 열반이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나 보리가 따로 있다면 옳지 않으니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비유해 말하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고 할 때 허공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달마 혈맥론>
7. 대장경을 외울지라도
달마 스님이 말했다. “누구나 부처를 찾고자 하면 반드시 견성을 해야 한다. 만약 견성하지 못했으면 염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계를 지켜도 별 이익이 없다. 염불하면 인과를 얻고, 경을 외우면 총명을 얻고, 계를 가지면 천상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된 과보를 얻기는 하나 부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밝게 깨닫지 못했으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생사의 근본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선지식은 견성한 사람이니 견성하지 못했으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다. 비록 대장경을 설하더라도 역시 생사를 면치 못해 삼계에 윤회하며 괴로움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날 선성 비구가 대장경을 다 외었어도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견성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선성 비구도 그러했는데, 요즘 사람들이 경론을 서너 권 배워 가지고 불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진실로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면 한가롭게 문서나 외워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달마 혈맥론>
8. 스승을 찾아라
달마 스님이 말했다.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으나, 만약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 간절하게 힘써 구해야 한다. 생사가 큰 일이니 헛되이 지내지 않도록 하여라. 돌이켜 보아라. 비록 보배가 산과 같이 쌓이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다 하더라도 눈을 뜨면 보이지만 눈을 감고는 볼 수 없다. 유위법은 모두 꿈과 같으며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다. 스승을 찾아가라. 급히 스승을 구하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불성은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지만, 스승을 인연하지 않고는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이니 스승 없이 깨친 자는 만의 하나도 드물다. 검고 흰 것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망녕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고 하면, 이것은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어지럽히는 짓이다. 이와 같이 무리들은 설법하기를 비오듯이 하더라도 모두가 마군의 말이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스승은 마왕이요 제자는 마왕의 권속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의 지도로 인해 생사 고해에 떨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견성하면 부처요, 견성하지 못하면 중생이다. 그러나 불성이 중생의 성품을 떠나지 않았다. 중생의 성품을 떠나 따로 불성이 있다면 부처가 이제 어느 곳에 있겠느냐. 중생의 성품의 곧 불성인 것이다. 성품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는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버리고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성품도 없다.” 제자가 물었다. “견성하지 못했더라도 염불하고 경을 외우며 보시하고 계를 지녀 부지런히 복된 일을 지으면 성불하지 않겠습니까?” “못한다! ” “어째서 못합니까?”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위법이며 인과에 얽매인 법이므로 과보를 받고 윤회를 받게 될 것이다. 생사도 면치 못했으면서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느냐. 성불은 반드시 먼저 견성을 해야 한다. 견성하지 못하면 인과를 얻는 법 같은 것도 모두가 외도들의 법이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외도법을 배우겠느냐. 또 어떤 사람이 인과를 무시하고 부지런히 악한 업을 지으면서 망령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한 것이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고 하면 그는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영 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소견을 가지겠느냐.” <달마 혈맥론>
9. 이 몸이 곧 법신
제자가 달마 스님에게 물었다. “이미 사람의 모든 말이나 행동과 그 밖의 모든 것이 본심이라면 이 몸이 허물어질 때 사람들은 어째서 본심을 보지 못합니까?” “본심은 항상 나타나 있건만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있는데 어째서 보지 못합니까?” “네가 꿈을 꾼 일이 있느냐? ” “있습니다.” “네가 꿈을 꿀 때 그것은 네 몸이냐 아니냐? ” “제 몸입니다.” “꿈 속의 네 말이나 모든 행동이 너와 같으냐 다르냐? ”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다르지 않다면 그 몸이 곧 너의 본 법신이며 그 법신이 곧 너의 본심이다. 이 마음은 시작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너와 떨어진 적이 없고, 생멸이 없으며 늘거나 주는 일도 없고 때묻거나 깨끗하지도 않다. 좋거나 나쁘지도 않고 오고 가지도 않으며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이 마음은 빛깔이나 모양이 없으니 극히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보고자 하여 이 광명 가운데서 손을 놀리고 발을 움직이는 자가 끝없이 많지만, 물음에 당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마치 나무등신 같구나. 딱하다, 모두 자기가 쓰고 있는 물건인데 어찌하여 모르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모두 미혹해 있으므로 업을 짓고, 생사 바다에 빠져, 나오고자 하여도 도리어 빠진다’ 하셨으니, 이것은 오직 견성하지 못한 때문이다. 중생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 중에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는가. 제 몸을 움직여 쓰는 것을 왜 모르는가. ” <달마 혈맥론>
10. 백정도 성불할 수 있다
제자가 달마 스님에게 물었다. “가정을 가진 사람은 음욕을 버릴 수 없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은 오직 견성을 말할 뿐 음욕을 말하지 않는다. 이 범부는 오직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욕이 문제가 되지만, 견성만 하면 음심과 욕심이 본래 공적하여 끊거나 버리기 위해 힘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지도 않으니 비록 버릇이 남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왜냐 하면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비록 색신 가운데 있더라도 물들거나 더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본래 받는 것이 없고 주리고 목마름도 없으며 춥고 더운 것도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얻어 볼 것이 없으나 다만 색신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더운 것이 있으니, 속지 않으려거든 곧 정신차려 정진해야 한다. 생사에 자재를 얻어 일체법을 굴려 걸림이 없게 되면 어느 곳이고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결코 일체 경계에 자재하지 못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만 하면 백정일지라도 성불할 수 있다.” <달마 혈맥론>
제 3 장 본원 청정심
1. 부처란 마음이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본체는 한마음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시작없는 옛적부터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푸르거나 누른 것도 아니며 어떤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이름과 말과 자취와 관계를 초월한 본체가 곧 마음이다. 여기서는 자칫 생각만 움직여도 벌써 어긋나는 것이니,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이 없으며 짐작이나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이 결코 다를 것이 없지만, 중생들이 상에 집착하여 밖을 향해 부처를 찾으니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잃게 된다. 스스로 부처이면서 다시 부처를 찾고,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잡으려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두고 몸이 다하도록 애써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생각만 쉬면 부처가 스스로 앞에 나타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는 곧 중생이니, 이 마음은 중생이 되었을 때도 줄지 않고 부처가 되었을 때도 늘지 않으며, 육도만행과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공덕이 모두 갖추어져 다시 더 닦거나 보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연을 만나면 곧 따르고 인연이 없어지면 곧 고요하다. 이 부처를 믿지 않고 상에 집착하여 수행하며 그것으로 공덕을 삼는다면, 이런 것은 모두가 망상이요, 도와는 크게 어긋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마음이 없다. 이 마음은 허공처럼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모양도 없다. 만약 한 생각이라도 움직인다면 곧 법체와는 어긋나며 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일찍이 이와 같은 상에 집착한 부처는 없었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곧 점차로 부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니 점차로 된 부처도 없다. 다만 한 마음만 깨달으면 다시 더 얻을 아무 법도 없으니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이 한마음 뿐이요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더럽히거나 무너뜨릴 수 없으며, 해가 온 세상을 비춰 밝음이 천하에 퍼지더라도 허공은 일찍이 밝은 일이 없고, 해가 져서 어둠이 천하를 덮더라도 어둡지 않다. 밝고 어둠이 뒤바뀌더라도 허공의 성질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다. 부처를 생각할 때 청정한 광명과 자재 해탈의 거룩한 모양으로 보고, 중생 보기를 때묻고 어둑하고 생사에 시달리는 혼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무량겁을 지내도록 수행해도 끝내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는 다시 털끝 만한 것이라도 얻을 것이 없으니 마음이 곧 부처인 까닭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체는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서 생각을 일으켜 밖을 향해 부처를 구하며 상에 집착하여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가 그릇된 방법이요 보리도는 아니다. <황벽 전심법요>
2. 무심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무심이란 분별 망상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본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 동요함이 없고,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 막힘이 없으며, 주체와 객체도 없고 방향과 위치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수행인이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공에 떨어져 머물 곳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강 건너 기슭만 바라보고는 스스로 물러서서 아는 것을 구하니, 아는 것을 구하는 이는 쇠털과 같이 많고 도를 깨닫는 이는 쇠뿔과 같이 드물다. 오늘날 수행인들이 자기 마음 가운데서 깨닫고자 하지 않고 마음 밖으로 상에 집착하여 대상을 취하니 모두 도와는 어긋난다. 이 마음은 곧 무심인 마음이며 모든 상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시 차별이 없으니 무심하기만 하면 이것이 곧 구경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무심하지 않으면 몇 겁을 수행해도 끝내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삼승의 수행에 얽혀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깨닫는 데는 더디고 빠름이 있다. 이 법을 듣고 한 생각에 무심한 이도 있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무심한 이도 있으니, 어느 것이든 마침내는 무심해야만 도를 얻는 법이다. 이 법은 다시 닦거나 증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실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이지만 진실하여 허황하지도 않다. 한 생각에 얻은 이나 여러 과정을 거쳐 얻은 이나 그 결과는 같으며 깊고 얕은 차이가 없다. 무심을 모르는 선행이나 악행은 모두 상에 집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행해 괴로운 윤회를 받고 선을 행해 부질없이 수고하니, 모두가 자기의 무심한 마음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황벽 전심법요>
3. 본원 청정심
이 법은 곧 마음이므로 마음 밖에 없으며, 이 마음은 곧 법이므로 법 밖에 마음이 없다. 마음은 스스로 무심하여 다시 무심한 것도 없으니, 만약 마음으로 무심코자 한다면 도리어 유심이 될 것이다. 이 도리는 모든 생각과 헤아림이 끊어졌으므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이므로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다. 고물거리는 미물 중생으로부터 불보살에 이르기까지 본래 한 몸이요 다를 것이 없는데, 망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가지가지로 업을 짓고 과보를 받게 된다. 비록 업을 짓고 과보를 받으나 본불밖에는 한 물건도 없으니, 텅 비어 일체에 통하며 또 고요하여 밝고 미묘하고 안락할 뿐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아 들어가면 바로 그 자리이니 다시 더 한 물건이라도 보태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르러 이제까지 지내온 여러 겁 동안의 많은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헛된 장난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내가 무상정각에서 실로 얻은 것이 없으니 만약 얻은 것이 있었다면 연등불께서 내게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며 이것을 이름하여 무상 정각이라 한다. ’ 고 하셨다. 이와 같이 보면 이 본원 청정심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두루 평등하여 너와 내가 없이 항상 스스로 밝아 널리 비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마에 구슬이 박힌 힘센 장사가 자기에게 구슬이 박힌 것을 모르고 밖으로만 찾아 두루 다녀도 얻지 못하다가, 지혜 있는 사람이 이마에 구슬이 박힌 것을 가르쳐 주면 당장에 구슬을 찾는다. 수행인이 자기 본심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 찾아다니면서 갖가지 공을 닦아 점차로 깨닫고자 하지만, 만 겁을 지내어도 영영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황벽 전심법요>
4. 목마르기 전에 샘을 파라
그대들이 만약 미리 칠통을 철저히 깨뜨리지 않으면 섣달 그믐날을 당해 정신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이 참선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저러고 있나?’ 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내 그런 사람에게 물으리라. “문득 죽음이 닥치면 그대는 어떻게 생사를 대적하겠는가?” 평상시에 힘을 얻어 놓아야 급할 때 다소 힘을 덜 수 있는데,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죽음이 박두하면 이미 손발을 쓸 수가 없으니, 앞길이 망망하여 어지러이 갈팡질팡할 뿐이다. 평시에 구두선만 익혀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해 제법 다해 마친 듯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평시에 남들은 속여 왔지만 이 때를 당해 어찌 자기마저 속일 수 있으랴. 권하노니, 육신이 건강할 동안에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라. 이 일은 풀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힘써 정진하려고는 하지 않고 어렵다고만 하니, 진정한 대장부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화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자 답하기를 “무(없다)” 라고 했다. 어째서 없다고 했는지 없다는 그 뜻을 참구해야 한다. 밤이나 낮이나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생각생각 끊이지 않고 정신을 차려 참구하라. 날이 가고 해가 지나 정진이 여물어지면 마음 빛이 활짝 열려 불조의 기틀을 깨달아, 문득 천하 노화상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소리치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는 것도 바람이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 것이요,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것도 오히려 허물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일 천 성인이 오히려 열지 못하는데 어찌 염라대왕을 말할 것인가? 여기에 신기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하지 마라. 일이란 마음 있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황벽 시중>
제 4장 참선에 대한 경책
1. 못 깨치더라도 다른 길 찾지 말라
선사 고봉화상은 항상 학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오직 화두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다닐때도 이렇게 참구 하라. 깊이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타파하여 벗어나면 성불한 지 이미 오래임을 알 것이다.” 참선하여 깨치지 못하더라도 부디 다른 방법을 찾지 마라. 오직 마음이 다른 인연에 이끌리지 않도록 할것이며, 또 모든 망념을 끊고 힘써 화두를 들고 앉으라. 목숨을 떼어놓고 용맹스럽게 정진한다면 백 번 죽어라도 상관없으리라. 만약 철저히 깨치지 못했거든 결코 쉬지 마라. 이런 결심만 있으면 큰 일을 마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병중 공부에는 용맹 정진도 필요 없고 눈을 부릅뜨고 억지 힘을 쓸 것도 없다. 다만 너의 마음을 목석과 같게 하고 뜻을 불꺼진 재와 같이 하여, 꼭두각시 같은 이 몸을 세계 밖으로 던져 버려라. 누가 와서 돌보아 주거나 말거나, 설사 백스무 살을 산다 할지라도, 혹은 죽어 숙세의 업에 끌려 지옥에 떨어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라. 어떤 환경에도 흔들림이 없이, 다만 간절하게 저 아무 맛도 없는 화두를 가지고 병석에 누운 채 묵묵히 궁구하고 놓아 지내지 마라. <중봉 시중>
2. 장 서방이 마시고 이 서방이 취하는 도리
3년, 5년을 정진해도 힘을 못 얻으면 참구해 오던 화두를 내버리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길을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과 같다. 이제까지 쌓은 허다한 공부가 참으로 아깝다. 뜻이 있는 자면 산수 좋고 조용한 승당에서 맹세코 3년만 문을 나서지 말아 보아라. 반드시 열릴 날이 있을 것이다. 어던 사람은 공부하다가 마음이 좀 맑아져 약간의 경계가 나타나면 문득 게송을 읊으며 스스로 큰 일을 다 마친 사람이라 자처하고 혓바닥이나 즐겨 놀리다가 일생을 그르치고 만다. 세치 혓바닥의 기운이 다하면 장차 무엇으로써 감당할 것인가. 생사를 벗어나려면 장차 무엇으로써 감당할 것인가. 생사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참다워야 하고 깨침 또한 실다워야 한다. 화두가 면밀하여 끊임없고, 몸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면, 이것은 ‘나’ 라는 집착은 없어졌으나 법에 대한 집착은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몸을 잊고 있다가 문득 다시 몸을 생각하게 되면, 꿈속에 만 길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때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마침내 깨어나는 것과 같이, 이 경지에 이르거든 오로지 화두만을 단단히 들고 가라. 문득 화두를 따라 일체를 잊어버리면 주관인 나와 객관인 법이 모두 없어질 것이다. 불 꺼진 재에서 콩이 튀어야 비로소 장 서방이 마시고 이 서방이 취하는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때 반야 문하에 와서 방망이를 맞도록 하여라. <반야 시중>
3. 보고 듣는 놈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나는 선객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것이 선인가?’ 하고 물으면 어름어름하다가 마침내 입을 다물고 마니, 이 어찌 딱한 일이 아니며 굴욕이 아니랴. 버젓하게 불조의 밥을 얻어먹고 본분사를 까맣게 알지 못하면서 다투어 말귀나 세속 지식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들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또 어떤 자는 부모에게서 낳기 전 본래 면목은 찾으려 하지 않고, 두툼한 방석 위에 앉아 부질없는 품팔이 방아나 찧으면서 복이 되기를 바라며 업장이 참회한다 하니, 도하고는 참으로 십만 팔천 리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한곳으로 굳히고 생각을 거두어 사물을 복 공으로 돌리며 생각이 일어나면 곧 눌러 막는다. 이런 견해는 공에 떨어진 외도이며 혼이 돌아오지 않는 산 송장이다. 어떤 사람은 망녕되이 성내고 기뻐하면서 보고 듣는 사물로써 명백히 알아마친 것을 삼고 일생 공부 다 마쳤다 하니, 내 잠깐 그런 사람에게 묻겠다. “문득 죽음이 닥쳐와 불구덩이 속의 한줌 재가 되면, 성내고 기뻐하고 보고 듣는 놈은 어느 곳에 있는가?” <초석 시중>
4. 조용한 환경에 탐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데는 무엇보다 고요한 환경에 탐착하지 말아야 한다. 고요한 환경에 빠지게 되면 사람이 생기가 없고 고요한 데 주저앉아 깨치지 못하게 된다. 대개 사람들은 시끄러운 환경은 싫어하고 고요한 환경을 좋아한다.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시끄럽고 번거러운 곳에서 지내다가 한 번 고요한 환경을 만나면 마치 꿀이나 엿을 먹는 것과 같이 탐착하게 되니 이것이 오래가면 스스로 곤하고 졸음에 취해 잠자기만 좋아하니 어찌 깨치기를 바라랴. 공부하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가도 가는 줄 모르고 낮아도 앉은 줄 모르며,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한 개의 의단 뿐이니 의단을 부수지 않고는 쉬지 말아야 한다. <박산 선경어>
5. 고양이 쥐잡듯이
참선할 때는 죽기를 두려워 말고 살기도 바라지 말라. 살기만 하고 죽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 진실로 의정과 어불어 한곳에 매여 있기만 하면 거친 환경은 쫓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갈 것이요, 망녕된 마음은 맑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맑아질 것이다. 육근의 문턱이 자연히 텅 비고 넓어져 손만 들면 곧 잡히고 부르면 즉시 대답하는데 어찌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인가. 화두를 들 때는 반드시 화두가 뚜렷하고 분명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굴에 주저앉아 혼혼침침하여 일생을 허송하게 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딱 버티고, 어떻게 하면 쥐를 잡아먹을까만을 생각한다. 비록 곁에 닭이나 개가 있더라도 눈 한 번 팔지 않는다. 참선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분연히 이 도리를 밝히고야 말겠다 하고, 어떠한 역경이 닥쳐오더라도 한 생각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일으키면 쥐만 놓칠 뿐 아니라 고양이 새끼마저 놓치게 된다. <박산 선경어>
6. 문자나 말에 팔리지 마라
참선할 때 조사의 공안을 생각으로 헤아려 짐작해서는 안된다. 설사 해석하여 하나하나 알았다 하더라도 본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조사의 말 한 마디, 글 한 구절은 마치 큰 불무더기와 같아, 가까이 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 어찌 그 가운데 앉고 누울 수 있으랴. 더욱 그 가운데 주저앉아 크고 작은 것을 따지고, 좋고 나쁜 것을 가린다면 목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문자를 찾거나 신기한 말에 팔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고 망상이 된다.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을 얻으려 하면서 말꼬리나 더듬는다면 아무것도 될 것이 없다. 공부할 때 공안을 진실하게 참구하여 깨뜨리지는 않고 다른 것과 비교하여 헤아리며 알고자 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으면 도와는 더욱 더 멀어진다. 그와 같이 정진한다면 비록 미래 불이 출현할 때까지 할지라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의정이 문득 일어난 자라면 은산 철벽에서 오로지 살길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만약 살아날 길을 찾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하게 앉아만 있겠는가. 참선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정진한다면 어느덧 시절이 다가와 스스로 깨칠 것이다. <박산 선경어>
7.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라
참선하는 데에 가장 요긴한 것은 간절한 마음이니 간절해야만 힘이 된다.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른 생각이 나고 게으른 생각이 나면 방종 방일하여 그르치게 된다. 만약 간절하게 마음을 쓰면 방일이나 게으름이 아예 생길 수 없다. 간절한 이 한 생각만 잊지 않으면 조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하거나 생가를 깨뜨리지 못할까 걱정이 없다. 이 간절한 생각은 당장에 선악의 허물을 뛰어 넘는다. 화두가 간절하면 망상도 졸음도 없다. <박산 선경어>
8. 깨치기를 기다리면 깨치지 못한다
참선하는 데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집에 간다면서 도중에 앉아서 가지는 않고, 집에 닿기만을 기다린다면 그는 끝내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집을 향해 가야 집에 이를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깨닫기만을 기다린다면 깨치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화두를잡아 힘 쓸 뿐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정진에 진취가 없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진취가 없거든 더욱 힘쓰는 이것이 공부다. 형상이 없다해서 머뭇거린다면 비록 백 겁 천생을 기다린다 할지라도 누가 어떻게 해 줄 것인가. 의정이 일거든 놓지 않는 것이 향상이다. ‘생사’ 두 글자를 이마에 붙인 듯 생각하고 마치 범에게 쉬지 말고 정진하라. 범에게 쫓기게 되어 안전한 곳에 피신하지 못하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니, 어찌 다리가 아프다고 도중에서 쉴 수 있으랴. <박산 선경어>
9. 화두로 병을 물리쳐라
내 나이 스물에 이 일 있음을 알고 서른 둘에 이르도록 열 일고여덟 분의 장로를 찾아가 법문을 듣고 정진했으나 도무지 확실한 뜻을 알지 못했었다. 후에 완산 장로를 뵈오니 ‘무’ 자를 함구하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물네 시간 동안 생생한 정신으로 정진하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닭이 알을 안듯이 하여 끊임없이 하라. 투철히 깨치지 못했다면 쥐가 나무 궤를 쏠 듯이 결코 화두를 바꾸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밝혀 낼 시절이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참구하였더니 십팔 일이 지나서 한 번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시니 카샤파가 미소한 도리를 깨치고 환희를 이기지 못했었다. 서너 명의 장로를 찾아 결택을 구했으나 아무도 말씀이 없더니,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다만 해인 삼매로 일관하고 다른 것은 모두 상관하지 마라.” 하시기에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두 해를 보냈다. 경정 오년 유월에 사천 중경에서 극심한 이질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빠졌으나 아무 의지할 힘도 없고 해인 삼매도 소용없었다. 종전에 좀 알았다는 것도 아무 쓸데가 없어, 입도 달싹할 수 없고 손도 꼼짝할 수 없으니 남은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업연의 경계가 일시에 나타나 두렵고 떨려 갈팡질팡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고 온갖 고통이 한꺼번에 닥쳐왔었다. 그때 내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어 가족에게 후사를 말하고 행로를 차려 좋고 좌복을 높이 고이고 간신히 일어나 좌정하고 삼보와 천신에게 빌었다. ‘이제까지 모든 착하지 못한 짓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바라건대 이 몸이 이제 수명이 다하였거든 반야의 힘을 입어 바른 생각대로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지이다. 혹 병이 낫게 되거든 곧 출가 수행하여 크게 깨쳐서 널리 후학을 제도케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하고 ‘무’ 자를 들어 마음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추고 있으니 얼마 아니하여 장부가 서너 번 꿈틀거렸다. 그대로 두었더니 또 얼마 있다가는 눈까풀이 움직이지 않으며, 또 얼마 있다가는 몸이 없는 듯 보이지 않고 아직 화두만이 끊이지 않았다. 밤늦게 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니 병이 반은 물러간 듯했다. 다시 앉아 삼경 사점에 이르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심신이 평안하여 아주 가볍게 되었다. <몽산 법어>
10. 물에 비친 달처럼
팔월에 강릉으로 가서 삭발하고 일년 동안 있다가 생각에 나섰다. 도중에 밥을 짓다가 생각하기를, 공부는 모름지기 단숨에 해 바칠 것이지 끊일락 이을락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황룡에 이르러 당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수마가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 앉은 채 정신을 바짝 차려 힘 안 들이고 물리쳤고, 다음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하여 물리쳤다. 세 번째 수마가 심하게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서 내려와 불전에 예배하여 쫓아버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미 방법을 얻었으므로 그때그때 방편을 써서 수마를 물리치며 정진했다. 처음에는 목침을 베고 잠깐 잤고 뒤에는 팔을 베었고 나중에는 아주 눕지를 않았다. 이렇게 이삼 일이 지나니 밤이고 낮이고 심히 피곤했다. 한 번은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둥둥 뜬 듯하더니, 홀연 눈앞의 검은 구름이 활짝 걷히는 듯하고 마치 금방 목욕탕에서라도 나온 듯 심신이 상쾌하였다. 마음에는 화두에 대한 의단이 더욱더 바깥 경계의 소리나 빛깔이나 오욕이 들어오지 못해 청정하기가 마치 은쟁반에 흰 눈을 듬뿍 담은 듯하고 청명한 가을 공기 같았다. 그때 돌이켜 생각하니 정진의 경지는 비록 좋으나 결택할 길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승천의 고섬 화상에게 갔었다. 다시 선실에 돌아와 스스로 맹세하기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내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고 배겨냈더니 달포만에 다시 정진이 복구되었다. 그 당시 온몸에 부스럼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목숨을 떼어놓은 맹렬한 정진 끝에 힘을 얻었었다. 재에 참례하려고 절에서 나와 화두를 들고 가다가 재가를 지나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다시 동중공부를 쌓아 얻으니, 이 때 경지는 마치 물에 비친 달과도 같아 급한 여울이나 거센 물결 속에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으며 놓아 지내도 또한 잊혀지지 않는 활발한 경지였다. <몽산 법어>
11. 파도가 곧 물이로다
삼월 초엿새 좌선 중에 바로 ‘무’ 자를 들고 있는데, 어떤 수좌가 선실에 들어와 향을 사르다가 향합을 건드려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듣고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치니, 드디어 자기 면목을 깨달아 마침내 조주를 깨뜨렸던 것이다. 그때 게송을 지었다. 어느덧 갈 길 다하였네 밟아 뒤집으니 파도가 곧 물이로다 천하를 뛰어넘는 늙은 조주여 그대 면목 다만 이것뿐인가. 그해 가을 임안에서 설암 퇴경 석범 허주 등 여러 장로를 뵈었다. 허주 장로가 완산 장로께 가 뵙기를 권하시어 완산 장로를 찾아뵈었다. 그때 장로가 물으셨다. “ ‘광명이 고요히 비춰 온 법계에 두루 했네’ 라고 한 게송은 어찌 장졸 수재가 지은 것이 아니냐?” 내가 대답하려 하자 벽력같은 할로 쫓아내셨다. 이때부터 앉으나 서나 음식을 먹으나 아무 생각이 없더니 여섯 달이 지난 다음 해 봄, 하루는 성밖에서 돌아오는 길에 돌층계를 올라가다가 문득 가슴속에 뭉쳤던 의심덩어리가 눈 녹듯 풀렸다. 이 몸이 길을 걷고있는 줄도 알지 못했다. 곧 완산 장로를 찾았다. 또 먼저 번 말을 하시는 것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상을 들어 엎었고, 다시 종전부터 극히 까다로운 공안을 들어 대시는 것을 거침없이 알았던 것이다. 참선은 모름지기 자세히 해야 한다. 산 승이 만약 중경에서 병들지 않았던들 아마 평생을 헛되이 마쳤을 것이다. 참선에 요긴한 일을 말한다면, 먼저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조석으로 찾아가 심신을 결택하고, 쉬지 않고 간절히 이 일을 구명했던 것이다. <몽산 어록>
제5장 육조의 법문
1. 반야
보리와 반야의 성품은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어두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자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으나 다만 막히고 트임이 같지 않으므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있게 된 것이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 법을 말해 그대들에게 각기 지혜를 얻게 할 것이니 정신차려 잘 들어라.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를 말하면서도 자성 반야는 알지 못하니, 마치 먹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 겁을 지나더라도 견성할 수 없다. 마하반야바라밀은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른다’ 는 뜻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행할 것이요 입으로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허깨비와 같이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 외우고 마음을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다. 본 성품이 부처요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다. 마하란 크다는 뜻이니, 심량의 광대함이 허공과 같아 끝이 없다는 말이다. 모나거나 둥글지도 않으며, 크거나 작지도 않다. 또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빛깔과 상관없으며, 위아래와 길고 짧음도 없고, 성내고 기뻐할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도 없다. 머리도 꼬리도 없는 것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다 허공과 같다. 사람들의 미묘한 성품이 본래 공해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므로, 자성의 진공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공에 걸리지 말아라. 무엇보다 공에 걸리지 말 것이니, 만약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히 앉아만 있으면 곧 무기공에 떨어질 것이다. 허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해와 달과 별, 산과 풀과 나무, 악인. 선인. 천당. 지옥, 그리고 큰 바다나 수미산도 다 허공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성품이 공한 것도 이와 같다. 자성이 모든 법을 포함하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만 법은 사람들의 성품 속에 있다. 만약 남의 선악을 보더라도 취하고 버리는 분별이 없이 거기 물들지 않으면 마음이 허공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히 앉아 스스로 크다고 일컫는다면, 이런 사람과는 더불어 말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넓고 커서 법계에 두루해 있다. 쓰면 아주 분명하고, 응용에 따라 일체를 알아서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며,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곧 반야다. 모든 반야지가 다 자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음을 쓸 때 잘못이 없으면 이것이 진성의 자용이다. 하나가 참될 때 모든 것이 참된 것이다. 반야는 지혜이니 언제 어디에서나 생각생각이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롭게 행동하면 이것이 공 반야행이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슬기로우면 반야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대개 어리석어 반야를 보지 못하고 입으로만 곧잘 말하는데 마음은 노상 어리석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슬기로운 마음이 곧 그것이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는 말로서 생멸을 떠난다는 뜻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 잇는 물결과 같으니 이것이 차안이요, 대상에 걸림이 없으면 생멸이 없어 물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피안이다. 그러므로 범부가 곧 부처이며, 번뇌가 곧 보리다. 앞생각이 어두웠을 때는 범부였지만, 뒷생각을 깨달으면 곧 부처다. 앞생각이 대상에 집착했을 때는 번뇌이지만, 뒷생각이 대상을 떠나면 곧 보리인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귀해 으뜸가는 경지이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또한 머무는 것도 아니지만,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여기서 나오신 것이다. <육조단경 반야품>
2. 정혜
내 이 법문은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정과 해가 다르다 하지 말아라. 정과 해는 하나요 둘이 아니다. 정은 해의 본체요, 해는 정의 작용이다. 곧 혜 안에 정이 있고 정안에 혜가 있는 것이니, 만약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함께 배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정이 있고서야 혜가 나온다거나, 혜가 있은 뒤 정이 나온다거나 하여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런 소견을 가지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을 두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마음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닦아 나감에는 말다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앞뒤를 다툰다면 곧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므로 승부가 끝이 없어, 도리어 아와 법만 늘어서 사상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정과 혜는 이를테면 들과 불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다.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의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그와 같다. <육조단경 정혜품>
3. 일행삼매
일생삼매란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다.” 라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는 아첨하고 굽은 짓을 하면서 입으로는 곧은 체하거나,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마음은 곧지 않게 하지 마라.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 모든 것에 걸리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법상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리켜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무정과 같아서 오히려 도를 막는 인연이 된다. 도는 반드시 통하여 흐르게 해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할 것인가. 마음이 무엇에고 걸리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해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에 걸린다면 이것은 스스로 얽히는 일이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저 사리풋다가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유마힐에게 꾸중을 들은 일과 같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고요히 마음을 관해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공이 된다.” 고 가르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집착해 전도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이와 같은 상교는 크게 그릇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육조단경 정혜품>
4. 무념 무상 무주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다. 사람의 바탕에 총명하고 우둔함이 있어 우둔한 사람은 차츰 닦아가고 총명한 사람은 단박 깨닫는다. 그러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헛이름을 붙인 것이다. 내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주로 본을 삼았다. 무상이란 상에서 상을 떠남이요, 무념이란 염에서 염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원수거나 간에,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모두 다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행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지난 경계를 생각하지 마라. 만약 지난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생각이 잇따라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얽매임이다. 모든 존재에 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무주로써 근본을 삼음이다. 밖으로 모든 상을 떠나면 이것이 무상이니, 상에서 떠나기만 하면 곧 법체가 청정하므로 무상으로 체를 삼은 것이다. 모든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니, 제 생각에 항상 모든 대상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아주 없애버리려면, 한 생각이 끊어지면서 곧 죽어 딴 곳에 태어나니, 이것은 큰 착오이므로 배우는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기만 잘못 되지 않고 남까지도 잘못되게 한다. 또 자기가 어두워 보지 못하면서 부처님 말씀을 비방까지 한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은 것이다. 무념으로 종을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둔 사람이 입으로만 견성했다 하면서 대상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문득 사된 소견을 일으켜 온갖 지저분한 망상은 낸다.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만약 얻은 것이 있다 하여 망령되어 화복을 말하면 이것이 곧 지저분한 사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은 것이다. 그러면 무란 무엇을 없앰이며, 염이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란 두 가지 모양이 없고 모든 쓸데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며, 염이란 진여의 본 성품을 생각함이다. 진여란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진여에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와 소리와 물질이 곧 없어질 것이다. 진여의 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대상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되 제 일의에 있어서는 움직임이 없다.” 고 한 것이다. <육조단경 정혜품>
5. 좌선과 선정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함도 아니고 청정에 집착함이 아니며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아니다. 만약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본래 망령된 것이므로 알고 보면 환과 같아 잡을 데가 없다. 청정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인데 망념 때문에 진여가 파묻힌 것이니, 망념만 없으면 성품이 저절로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청정하게 한다 함은 도리어 청정하다는 망념을 내는 것이 된다. 망념이란 처소가 없으니 조촐한 티를 내어 공부한다 함은 조촐한 데 얽매여 제 본성을 막는 일이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남의 시비와 선악과 허물을 보지 말 것이니, 이것이 곧 자성의 움직이지 않음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남의 시비 장단과 좋고 나쁨을 말하게 되니 이것은 도를 등지는 짓이다. 마음을 고집하거나 청정을 고집하면 곧 도에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중에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선악의 환경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하고, 안으로 자성을 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한다. 무엇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상을 떠남이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만약 밖으로 상에 걸리면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상을 떠나면 마음도 따라서 어지럽지 않다. 본 성품은 저절로 청정하며 스스로 안정한 것이지만, 대상만을 보고서 대상을 생각하므로 곧 어지럽게 된다. 만약 모든 대상을 보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참된 정이다. 밖으로 상을 떠나면 곧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이니, 외선과 내정 이것이 선정이다.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내 본 성품이 본래 청정하다.” 하였으니, 생각생각에 본성의 청정함을 보아, 스스로 닦고 행하여 스스로 불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육조단경 좌선품>
6. 오분법신향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어느 때든지 순간순간 그 마음을 밝혀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보고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건지고 조심할 것이다.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을 전할까 한다. 첫째는 계향이니, 자기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악독함이 없고 질투와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정향이니, 여러 가지 선악의 환경을 보더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다. 셋째는 혜향이니, 자기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항상 지혜로써 제 성품을 비춰 보고, 악한 일을 하니 않고 착한 일을 할지라도 자랑스런 마음이 없으며, 손위 공경하고 손아래를 생각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가엾이 여김이다. 넷째는 해탈향이니, 마음에 반연함이 없어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거리낌없음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다. 마음은 선과 악에 거리낌없더라도 공에 빠져 고요함만을 지키면 옳지 않다. 그러므로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자기 본심을 알고 부처의 이치는 통달하여 빛에 화하고 사물에 대할지라도 나와 남이 없어 뒤바뀜이 없는 지혜의 참성품에 이른다. 이와 같은 향은 저마다 자기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육조단경 참회품>
7. 무상참회
이제 너희에게 무상참회를 주어 삼세의 죄과를 없애고 몸과 말과 생각의 네 가지 업을 청정하게 할 것이니 나를 따라 이와 같이 부르라. “제가 순간순간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데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 온 나쁜 짓과 미련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데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게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무상참회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 참회라 할 것인가. <육조단경 참회품>
8. 사홍서원
이미 참회하였으니 이제는 사홍서원을 발해야 한다. “ 내마음의 중생이 끝이 없어도 건지리이다. 내 마음의 번뇌가 다함이 없어도 끊으리이다. 내 마음의 법문이 한이 없어도 배우리이다. 내 마음의 불도가 위없어도 이루리이다.” 중생을 건진다 함은 내가 그대들을 건진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이라 사되고 어두운 생각, 망령되고 진실하지 못한 생각, 착하지 못한 생각, 질투하는 생각, 악독한 생각, 이와 같은 생각이 모두 중생인 것이다. 저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로 건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질 수 있을까. 자기 마음속의 그릇된 소견과 번뇌와 무지를 바른 견해로써 건진다. 바른 견해는 지혜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스스로 건지게 한다. 그릇됨이 오면 올바름으로, 미혹이 오면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악이 오면 선으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러 건짐이다. 그리고 번뇌를 끊는다 함은 자성의 지혜로 허망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고, 법문을 배운다 함은 스스로 성품을 보아 항상 바른 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불도를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어 참되고 바르게 행동하며, 미혹도 버리고 깨달음에서도 떠나 항상 지혜를 내며, 참된 것도 없애고 망령된 것도 없애어, 바로 불성을 보면 곧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육조단경 참회품>
9. 삼귀의
네 가지 큰 서원을 발한 이는 불. 법. 승의 자성 삼보에 귀의하여라. 불이란 깨달음이고 법이란 올바름이며 승이란 청정함이다.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그릇되고 어두운 것을 내지 않고,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하게 생각하여 재물과 색을 떠나면 이것이 양족존이다. 마음이 올바름에 귀의하여 그릇된 소견이 없으면 남과 나를 따지는 일도, 탐욕과 애욕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욕존이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에 귀의하면 온갖 지저분한 것과 애욕에 물들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중중존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밤낮으로 삼귀계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부처에게 귀의한다면 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무엇을 의지해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 귀의한다는 말이 우습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신의 부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없다. 이제 스스로 깨달았다면 저마다 제 마음의 삼보에 귀의하라. 안으로 심성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남을 공경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함이다. <육조단경 참회품>
10. 마음이 밝아야 경을 알 수 있다
법달은 홍주 사람인데,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읽었다. 어느 날 조사에게 와서 절하는데 머리가 딸에 닿지 않았다. 조사가 꾸짖으며 말했다. “그렇게 머리 숙이기가 싫으면 무엇 하러 절을 하느냐. 네 마음속에 필시 무엇이 하나 들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익혀 왔느냐?” 법달이 대답했다. “법화경을 외우기 이미 삼천 독에 이르렀습니다.” “네가 설사 만 독을 하여 경 뜻을 통달했다 할지라도 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허물이 된다는 걸 모르는구나. 내 게송을 들어보아라. 절이란 본래 아만을 꺾자는 것 어째서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게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제 공덕 잊으면 복이 한량없는 것을.” 조사가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이 무어냐?” “법달이라 합니다.” “네 이름이 법달이라니 어떻게 그리 일찍이 법을 통달했느냐? 네 이제 이름을 법달이라 하니 그 동안 얼마나 힘써 외었나 허투루 외는 것은 소리만 돌 뿐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된다. 네게 이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너를 위해 말해 주겠다 부처는 말이 없는 것임을 믿으면 저절로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사과를 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모든 것을 공경하겠습니다. 제가 법화경을 외우긴 했으나 경 뜻을 알지 못해 항상 의심이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크신 지혜로 경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법달이 법은 통달하였어도 네 마음은 모르는구나. 경에는 본래 의심이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다. 너는 이 경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제가 어둡고 둔해 다만 겉으로 글자나 읽었을 뿐이니 어찌 그 뜻을 알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하니 어지 그 경을 한 번 읽어보아라. 듣고서 풀이해 주겠다.” 법달이 소리 높여 읽어 가다가 비유품에 이르자, 조사는 그만 그치라 하고 다음같이 말했다. “이 경은 본래 인연 출세로 주제를 삼은 것이니, 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했을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에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이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 하였으니, 큰 인연이란 부처님의 지견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어두워 상에 걸리고, 안으로 어두워 공에 떨어지니, 만약 상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면, 안과 밖에 함께 어둡지 않을 것이다. 이 법을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리니 이것이 부처님 지견을 얻는 길이다. 너는 경 뜻을 잘못 알아 가지고 그것은 부처님 지견을 말한 것이지 우리들 분수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말아라. 이것은 곧 부처님을 헐뜯고 경전을 비방하는 일이다. 너는 이제 부처님 지견이란 제 마음이요,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네가 그 동안 쓴 것을 대단하게 여겨 그것으로 자랑삼는다면 얼굴 소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그러면 뜻만 알면 수고스럽게 외우지 않아도 좋습니까?” “경에 어찌 허물이 있다고 네가 외우는 걸 못하게 하겠느냐. 다만 막히고 트임이 사람에게 달리고 더하고 덜함이 자신에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고 실제로 행동하면 이것이 곧 경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외워도 실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오히려 경에 읽히는 것이다.” 법달은 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다. <육조단경 기연품>
제6장 상단법어
1. 주리면 먹고 고단하면 잔다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검소한 데서 사치스런 데로 들어가기는 쉬워도, 사치한 데서 검소한 데로 나오기는 어렵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생각에 부처가 나타나고 걸음걸음에 미륵 보살이 탄생하며, 물건마다 일마다 티끌 같은 세계를 두루 나타내고, 말마다 글귀마다 대장경의 부처님 말씀을 완전히 펼친다 할지라도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예삿일이니, 거기서 무엇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며, 한가로우면 앉아 있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불법이니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생각이 전연 없고 태평스러운 풍월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경지인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도 방망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주장자를 세웠다. <진각 어록>
2. 갈등을 끊고 마주 보라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또 이렇게 설법했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향상이나 향하에 안배할 수 없고, 대장경이나 소장경의 해설로도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진여니 반야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며, 또 무엇을 가리켜 부처가 세상에 나왔고, 조사가 서쪽에서 왔다 하는가. 갈등을 끊고 당장에 마주 보아야 할 것이다.”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어서 높게 착안하라.” 고 하였다. <진각 어록>
3. 정월 초하루
스님은 정월 초하룻날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오늘 아침에 그대들을 위해 시절 인연을 들어 말하겠다. 어린이는 한 살이 보태지고 늙은이는 한 살이 줄어지며, 늙고 어림에 관계없는 이는 줄지도 않고 보태지지도 않을 것이다. 보태지거나 줄어지거나, 보태고 줄어짐이 없다는 것을 모두 한쪽에 놓아 버려라. 말해 보라. 놓아 버린 뒤에는 어떤가? 누가 이 세상에 신선이 없다 했는가. 모름지기 술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믿어라.” <진각 어록>
4. 일없는 사람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구름과 연기가 사라지고 흩어지면 둥근 달이 저절로 밝아지고, 모래와 자갈을 일어 추려 버리면 순금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 일도 그와 같아서 미친 생각 쉬는 곳에 바로 보리다.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하게 밝음은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크게 깨달으신 부처님께서도 처음 이 일을 깨친 뒤 지혜의 눈으로 시방세계를 두루 살피고 나서 감탄하신 것이다. ”신기하구나. 내가 보건대 모든 중생들은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망상과 집착 때문에 깨닫지를 못한다. 그러니 망상과 집착을 버리면 스승 없이 얻은 지혜, 자연의 지혜, 걸림이 없는 지혜가 드러날 것이다.“ 여러 대중들, 부처님은 진실로 말씀하시는 분인데 어찌 우리들을 속이시겠는가. 그 말씀을 믿고 그 경지를 향해 들어가 당장 한 칼로 두 동강을 내어 망상과 집착을 쉬어버린다면, 그것은 일마다 분명하고 물건마다 역력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도 별 사람은 아니다. 그 경지에 이르면 벗어나야 할 생사도 없고 찾아야 할 열반도 없어, 다만 일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진각 어록>
5. 크게 치면 크게 울린다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 주는 살아 있는 용이 어찌 썩은 물에 잠겨 있겠으며, 해를 쫓고 바람을 따르는 용맹스런 말이 어찌 마른 동백나무 밑에 엎드려 있겠는가. 슬프다, 한갓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정은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격이고, 문자만을 찾는 미친 지혜는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는 격이니, 그것은 모두 걸림 없는 기틀과 자재하고 미묘한 작용을 모르는 것이다. 종은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린다. 거울은 되놈이 오면 되놈을 비추고 왜놈이 오면 왜놈을 비춘다. 그들은 이런 이치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와 같이 엎치고 날치는 수단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직 생사의 기슭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말해 보라. 필경 어떤 것인가를. 깊숙한 암자 안의 주인은 암자 밖의 일을 관계하지 않는다.” <진각 어록>
6. 하늘에 구름이 깨끗하니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결박하는 것도 남이 결박하는 것이 아니고, 결박을 푸는 것도 남이 푸는 것 아니다. 풀거나 결박하는 것이 남이 아니므로 모름지기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깨닫는 요긴한 법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되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고, 놓아버릴 것이 없는 그것까지도 다시 놓아버려야 한다. 그 경지에 이르면 위로는 우러러 잡을 것이 없고, 아래로는 제 몸마저 없어져 청정한 광명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천 길 벼랑에서 마음대로 붙잡고 기회를 따라 움직이되 조금도 움직이는 일이 보이지 않는 이라야 비로소 안락하고 해탈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네 바다의 물결이 고요하니 용의 잠이 편안하고, 하늘에 구름이 깨끗하니 학이 높이 나는구나.” <진각 어록>
7. 시든 꽃잎
스님이 입적하시던 날 법상에 올라 이렇게 설법했다. ”봄은 깊고 절 안은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는데, 시든 꽃잎은 시나브로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누나. 누가 일러 소림의 소식이 끊어졌다 하던가. 저녁 바람이 이따금 그윽한 향기를 보내오는데.” <진각 어록>
8. 최상서 우에게 보낸 글
주신 글에 법어를 청했으므로 몇 가지 인연을 적어 청에 답할까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밖에 따로 전한 것으로서 바로 근원을 끊는 그 하나는, 기틀을 마주 대면하고 말을 마치자 당장 마음이 확 트이는 일입니다. 이때에는 대장경도 그 주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 말에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머리를 돌리고 골수를 굴리며, 눈을 치켜올리고, 속으로 헤아리고 생각하며, 임을 열고 혀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생사의 근본입니다. 정승 배휴가 어느 절에 들어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원주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원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승입니다.”“얼굴은 그럴 듯하군. 이 고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원주가 대답이 없자 배휴는 “이 절에 선승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대중 가운데 황벽화운 선사가 있었으므로 원주는 황벽 스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배휴는 황벽 스님에게 조금 전 이야기를 들어 물었습니다. 황벽 스님은 아까처럼 다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배휴는 “얼굴은 그럴 듯한데 그 고승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황벽 스님은 큰 소리로 “배 정승!” 하고 불렀습니다. 배휴는 깜짝 놀라 “예” 하고 대답했습다. 황벽 스님이 “어디 있는고?” 하고 물었을 때 배휴는 당장 그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산승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고승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배휴를 불러 그가 대답하자마자 “악!” 하겠습니다. 또 우적 정승이 자옥 화상에게 불도의 지극한 이치를 묻고 그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자옥 스님은 “불도의 지극한 이치는 인정과 예의를 버리는 데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우적이 ”스님은 인정과 예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적 정승!“ ”예.“ ”다시 따로 구하지 마십시오.“ 하고 스님은 말했습니다. 그후 약산 스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애석 하구나. 우적. 자옥산 밑에서 생매장을 당했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우적은 이 말을 듣고 약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우적 정승!“ ”예.“ ”이것이 무엇이오?“ 라고 물었을 때 우적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초경은 이 화두를 들어 말했습니다. ”이 답은 매우 뛰어난 천지의 차가 있다. 한결같은 것이 도다.“ 그러나 이 산승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기다려 ”머리를 돌려라.“ 라고 하겠습니다. 수능엄경에 말했습니다. ”수행자들이 최상의 보리를 이루지 못하고 따로 성문이나 연각을 이루고, 외도와 마군의 괴수나 그 권속이 되는 것은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닦아 익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모래를 삶아 음식을 만들려는 것과 같아 무량겁을 지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본래부터 있는 생사의 근본이니, 즉 네가 지금 중생들과 관계하고 있는 그 마음을 제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래부터 있는 보리 열반의 청정한 실체이니, 즉 지금의 네 알음알이가 원래 밝아 모든 인연을 지어 그 인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중생들이 이 본래의 밝음을 버리기 때문에 종일 움직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온갖 세계로 드나든다.“ 그러나 산승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어떤 것이 생사의 근본이냐고 묻는다면, ”네가 이미 드러내 보였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또 어떤 것이 보리 열반의 본래 청정한 실체인가고 묻는다면, 한 번 할을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들어 보인 몇 개의 화두가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지 자세히 참구해 보십시오. 무릇 남의 지시를 받거나 혹은 스스로 공부하여 재미있고 자신 있는 곳을 얻더라도,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고, 한꺼번에 놓아 버리되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서 다시 놓아버려야 합니다. 통 밑이 빠져 한 방울의 물도 없이 말라 터진 뒤에야 깨침이 있고 들어갈 곳이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가 끊어져, 자기 집안의 재산을 꺼내어 이리저리 마음대로 쓸지라도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취를 남기지도 않고 어느 한 끝에 떨어지지도 않아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확 트여 걸림이 없어야 생사의 바다에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중생을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힘쓰고 힘쓰십시오. <진각어록>
9.방산 거사에게 보낸 글
편지에 “생각이 잠깐 일어날 때에 그 화두를 드니 이 공 더욱 미묘합니다.” 고 하셨습니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더디게 깨닫는 것이 두렵다.” 고 했습니다. 또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 라고도 했으며, “생각은 모든 환경을 반연하는데 마음은 분별을 아주 끊는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검고 흰 것을 잘 분별하고 이익과 손해를 살펴 그 구경에 이르면 다행이겠습니다. 주신 편지에 청하신 뜻이 못내 간절하여 다시 번거롭게 말합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라 합니다. 생사에 다다라 반드시 힘을 다해 화두를 드십시오. 화두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진 곳을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한 속에서도 화두에 어둡지 않는 것을 영지라 합니다. 이 비고 고요한 영지는 무너지지도 않고 난잡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면 머지않아 공을 이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함께 한 덩이가 되어 의지하는 곳이 없고 마음의 가는 곳이 없으면, 그때는 다만 방산 거사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그림자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방산이 어디에 있는가를. 조주 스님의 ‘없다’ 고 말한 뜻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붙들면 새삼스레 벌일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물을 마시는 사람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 듯이, 천만 가지 의심이 한꺼번에 깨어질 것입니다. 혹시 완전히 깨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하도록 간절히 붙들어야 합니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모든 행동에서 한결같이 어둡지 않고, 그저 또록또록하고 분명하게 화두를 들되 하루에 몇 번이나 끊어지는가를 때때로 점검해 보십시오. 그래서 끊어지는 때가 있거든 다시 용맹스런 마음을 내고 공력을 더 들여 끊임이 없게 하십시오. 하루에 한 번도 끊임이 없게 되었다면 정력을 더욱 기울여 때때로 점검하되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만약 사흘 동안 순일하게 끊임이 없으면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한결같고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도 한결같아 화두가 항상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흐르는 여울의 달빛처럼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헤쳐도 없어지지 않으며,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고 자나깨나 한결 같으면 크게 깨칠 때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디 남에게 캐어물으려 하지 말고, 또 일없는 사람과 이야기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스물네 시간 일상 생활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이나 벙어리처럼 행동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버려 죽은 사람같이 하십시오. 안에서 내어놓지도 말고 밖에서 들이지도 마십시오. 거기서 화두를 잊어버리면 그것은 큰 잘못이니, 큰 의심을 깨뜨리기 전에는 화두에 어둡지 말고 내 말대로 하십시오. 그 경지에 이르면 어느 새 무명이 깨어지고 홀연히 크게 깨칠 것입니다. 깨친 뒤에는 부디 본분종사를 찾아가 마지막에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와 같은 종사를 만나지 못하면 열 개에 다섯 쌍이 모두 마군이 될 것입니다. 조심하기를 진심으로 빌고 빕니다. <태고어록>
10. 화두 참구하는 법
스님은 어느 날 대중을 모아 놓고 일상의 정진을 낱낱이 물은 다음 이와 같이 말했다. “모름지기 대장부의 마음을 내고 결정된 뜻을 세워, 평생에 깨치거나 알려고 한 모든 문장과 어언 삼매를 싹 쓸어 큰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다시는 집착하지 마시오. 한 번 앉으면 그 자리에서 팔만 사천의 온갖 생각을 끊고, 본래부터 참구하던 화두를 한 번 들면 놓지 마시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떤 것이 본래 면목인가?’ ‘어떤 것이 내 성품인가?’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이런 화두를 들되, 마지막 한 마디를 힘을 다해 드시오. 화두가 앞에 나타나면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 고요한 곳에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한결같을 것이오. 이 경지에 이르면 다니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 입을 때나 밥 먹을 때나 언제 어디서나 온몸은 하나의 의심 덩어리가 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똑똑히 참구하시오. 화두 위에서 그 뜻을 헤아리거나 어록이나 경전에서 그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단박 깨뜨려야 비로소 집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 만약 화두가 들어도 들리지 않아 냉담하고 아무 재미가 없으면, 낮은 소리로 서너 번 연거푸 외워 보시오. 문득 화두에 힘이 생기에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런 경우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 여러분이 저마다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용맹 정진하는 가운데서도 더욱더 용맹 정진하면 갑자기 탁 터져 백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고 묻지 말고 물가나 나무 밑에서 성태를 기르시오. 그러면 그는 금강권도 마음대로 삼켰다 토했다하며, 가시덤불 속도 팔을 저으며 지나갈 것이고, 한 생각 사이에 시방세계를 삼키고 삼세의 부처를 토해낼 것이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그대들은 비로소 법신불의 갓을 머리에 쓸 수 있고, 보화불의 머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방석 위에 우뚝 앉아 눈을 바로 하고 ‘이 무엇인가?’ 의 도리를 참구하시오.” <나옹어록> 11. 기슭에 닿았거든 배를 버려라
재를 올린 뒤 스님은 법상에 올라 한참을 잠잠히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여러 불자들, 알겠소? 여기서 당장 빛을 돌이켜 한 번 보시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은 본지풍광을 밟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조그만 갈등을 말하겠으니 자세히 듣고 똑똑히 살피시오. 사대가 모일 때에도 이 한 점의 신령스런 밝음은 그에 따라 생기지 않았고, 사대가 흩어질 때에도 그것은 무너지지 않소. 나고 죽음과 생기고 무너짐은 허공과 같거니 원친의 묵은 업이 지금 어디 있겠소. 이미 없어진 것이라 찾아도 자취가 없고 트이어 걸림 없음이 허공과 같소. 세계와 티끌마다 미묘한 본체요,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가 주인공이오. 소리도 없으면 그윽이 통합니다. 때를 따라 당당히 나타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묘하고 오묘합니다. 자유로운 그 작용이 다른 물건 아니고 때를 죽이고 살림이 모두 그것의 힘이오. 여러 불자들, 알겠소? 만약 모르겠다면 이 산승이 불자들을 위해 알도록 하겠소.” 죽비로 탁자를 치면서 한 번 할을 한 다음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서 단박 밝게 깨쳐 현관을 뚫고 지나가면,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들의 골수를 환히 보고, 그분들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다닐 것이오.” 또 한 번 죽비로 탁자를 친 뒤 말을 이었다. “이로써 많은 생의 부모와 여러 겁의 원친에서 뛰어나고, 세세 생생에 함부로 자식이 되어 어머니를 해치고 친한 이를 원망한 일에서 뛰어나고, 지옥의 갖가지 고통받는 무리에서 뛰어나시오. 이로써 괴로워하는 축생의 무리에서 뛰어나고, 성내는 아수라의 무리에서 뛰어나고, 천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무리에서 뛰어나시오.” 죽비를 내던지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기슭에 닿았으면 배를 버릴 것이지 무엇 하러 다시 나루터 사람에게 길을 묻는가.” <나옹 어록>
12. 공부 열 가지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뛰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뛰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에서 뛰어날 수 있을까? 이미 모양과 소리에서 뛰어났으면 반드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은 때는 어떤가? 공부가 익었으면 다시 거친 콧김을 없애야 한다. 거친 콧김을 없앤 때는 어떤가? 콧김이 없어지면 냉담하고 재미가 없으며, 기력이 없고 의식이 분명치 않으며 마음도 활동하지 않는다. 또 그때는 그 허망한 몸이 인간에 있는 줄을 모른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그때는 어떤 시절인가? 공부가 지극해지면 움직이고 조용함에 틈이 없고, 자고 깸이 한결같아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잃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갑자기 백이십 근이나 되는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단박에 꺾이고 단박에 끊긴다. 그때에는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인가?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작용은 인연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떤 것이 작용에 따름인가?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초월해야 하는데,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그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사대는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나옹 어록>
13. 병문안
그대의 병이 중하다고 들었다. 그것은 무슨 병인가? 몸의 병인가, 마음의 병인가. 몸의 병이라면 몸은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이루어진 것, 그 네 가지는 저마다 주인이 있는데 그럼 어느 것이 그 병자인가? 만약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은 꼭두각시와 같은 것, 비록 거짓 이름은 있으나 그 실체는 실로 공한 것이니 병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그 일어난 곳을 추궁해 본다면 난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또 고통을 아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살피고 살펴보면 문득 크게 깨칠 것이다. 이것이 내 병문안이다. <나옹 어록>
제 7 장 선가의 거울
1. 한 물건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어른은 이렇게 노래했다. 한 부처 나기 전에 의젓한 둥그러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이것이 한 물건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길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연유다.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물었다.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느냐?” 신회 선사가 곧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연유다. 회향 선사가 숭산으로부터 와서 뵙자 육조스님이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할 때에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팔 년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가령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맏아들이 된 연유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출현하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이다.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대비심으로 근본을 삼아 중생을 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 물건으로써 따진다면, 사람마다 본래 면목이 저절로 갖추어졌는데 어찌 남이 연지 찍고 분 발라 주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러므로 부처님이 중생을 건진다는 것도 공연한 짓인 것이다. 억지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 부처라 혹은 중생이라 하지만,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서산 선가귀감>
2. 선과 교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 선지가 되고, 평생 말씀하신 것이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음이 하나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임이 둘이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임이 셋이니, 이른바 카샤파 존자가 선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의 근본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의 갈래는 카샤파 존자와 아난다 존자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 교다. 또한 마음은 선법이요 말은 교법이다. 법은 비록 한맛이라도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다. <서산 선가귀감>
3. 일 없는 도인
생각 끊고 반연 쉬고 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생각 끊고 반연을 쉰다는 것은 마음에서 얻은 것을 가리킴이니, 이른바 일없는 도인이다. 어디에나 얽매임 없고 애당초 일 없어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녹수청산에 마음대로 오고 가며, 어촌과 주막에 걸림없이 지내가리. 세월이 가나 오나 내 알 바 아니지만 봄이 오니 예전처럼 풀잎이 푸르구나. <서산 선가귀감>
4. 격 밖의 선지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한맛에 돌아감이다. 이 한맛의 자취마저 떨쳐 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한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란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활같이 말씀했다는 것은 곧다는 뜻이며,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격 밖의 선지다. <서산 선가귀감>
5. 간절한 마음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에 대해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안은 것과 같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어머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을 것이다. 조사들의 공안이 일천칠백 가지나 있는데, ‘개가 불성이 없다.’라든지 ‘뜰 앞의 잣나무’라든지 ‘삼 서 근, 마른 똥막대기’ 같은 것들이다. 닭이 알을 안을 때는 더운 기운이 지속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한다. 주릴 때 밥 생각하는 것과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애가 어머니를 생각한 것들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에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긴한 것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고,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이 되고 말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뿌리가 된다.” 하셨고, 영가스님은 “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으며, 몽산스님은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고 하면서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였다. <서산 선가귀감>
6. 화두의 열 가지 병
화두는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아라. 더 생각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서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이다. 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혀 보는 것이 식정이며, 생사를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하고 있을 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 열 가지 병이 있다. 분별로써 헤아리는 것, 눈썹을 오르내리고 눈을 끔적거리기를 그치지 않는 것, 말길에서 살림살이를 짓는 것, 글에서 끌어다 증거를 삼으려는 것,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는 것,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일없는 곳에 들어앉아 있는 것, 있다는 것이나 없다는 것으로 아는 것, 참으로 없다는 것으로 아는 것, 도리가 그렇거니 하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 조급하게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들이다. 이 열 가지 병을 떠나 화두에만 정신차려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할 일이다.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병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거문고 타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 줄의 느슨하고 팽팽함이 알맞아야 아름다운 소리가 제대로 난다고 했다.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히 하면 혈기를 올리게 될 것이고, 잊어버리면 흐리멍덩하게 된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되면 오묘한 이치가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서산 선가귀감>
7. 일상의 점검
참선하는 이는 항상 이와 같이 돌이켜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더러운 이 육신이 순간순간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히 시비를 일삼고 있지나 않는가? 화두가 어느 때나 똑똑히 들리고 있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 생각을 이루고 있는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님과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꼭 부처님의 지혜를 이을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이런 것이 참선하는 이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되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이 말하기를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다시 언제 건지랴!” 하지 않았는가. <서산 선가귀감>
8.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아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버리는 것이나 찾는 일이 다 더럽히는 일이다. 모름지기 마음속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 보아, 한 생각 인연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다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여기에서는 성품과 형상을 함께 밝힌 것이다. 경에 말하기를 “무명을 아주 끊는다는 것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하였고,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고 하였다. <서산 선가귀감>
9. 참선과 계행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찌어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마군의 길을 이룰 뿐이다. 만약 계행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 했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한다면, 부처님이 늘 계시는 거나 다를 일이 없다. 모름지기 풀에 매여 있고, 거위를 살리던 옛일로써 본보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애정은 윤회의 근본이 되고, 정욕은 몸을 받는 인연이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음란한 마음을 끊지 못하면 티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고, 또 “애정이 한 번 얽히게 되면 사람들 끌어다 죄악의 문에 처넣는다.”고 하셨다. 애욕의 불꽃이란 애정이 너무 간절하여 불붙듯 함을 말한 것이다. <서산 선가귀감>
10. 자비와 인욕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몸처럼 두루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이며,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몸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 아닌가. 누가 와서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성내는 데에 온갖 장애가 벌어진다. 번뇌가 비록 한량없다 하지만 성내는 것이 그보다 더하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창과 칼로 찌르거나 향수와 약을 발라 주더라도 두 가지에 다 무심하라.”고 하였다. 수행자가 성내는 것은 흰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과 같다. 참을성이 없다면 보살의 행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닦아 가는 길이 한량없지만 자비와 인욕이 근본이 된다. 참는 마음이 꼭두각시의 꿈이라면 욕보는 현실은 거북의 털과 같다. <서산 선가귀감>
11. 첫째가는 정진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이다. 만약 정진할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망상이요 정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말하기를 “망상 내지 말아라! 망상 내지 말아라!”고 한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늘 뒤만 돌아보는데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으로 돌이켜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어리석게 공부함을 깨우친 것이니, 마치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우는 것처럼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규봉 선사가 이르기를 “글자나 알고 경을 보는 것으로는 원래 깨칠 수 없다. 글귀나 새기고 말뜻이나 물어 보는 것으로는 탐욕이나 부리고 성을 내며 못된 소견만 더 일으키게 된다.”고 하였다. 수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나 부려 서로 이기려고만 한다면 변소에 단청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말세에 어리석게 수행하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수행이란 본래 제 성품을 닦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생각일까. <서산 선가귀감>
12. 출가행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은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고 죽음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서 뛰어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이름과 재물을 따른 납자는 풀 속에 묻힌 야인만도 못하다. 제왕의 자리도 침 뱉고 설산에 들어가신 것은 부처님이 천 분 나실지라도 바뀌지 않을 법칙인데, 말세에 양의 바탕에 범의 껍질을 쓴 무리들이 염치도 없이 바람을 타고 세력에 휩쓸려 아첨을 하고 잘 보이려고만 애쓰니, 아 그 버릇을 어쩔 것인가. 마음이 세상 명리에 물든 사람은 권세의 문에 아부하다가 풍진에 부대끼어 도리어 세속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런 납자를 양의 바탕에 비유한 것은 그럴 만한 여러 가지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서산 선가귀감>
13. 한 개의 숫돌
불자여, 그대의 한 그릇 밥과 한 벌 옷이 곧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인데, 도의 눈이 밝지 못하고야 어찌 삭여낼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오늘날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거저 먹는 그런 부류들의 미래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무슨 심사일까? 참으로 딱한 일이다. 눈앞의 쾌락이 후생에 고통인 줄을 생각자 않는구나! 그러므로 도를 닦는 이는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 서방이 와서 갈고 이 생원이 갈아 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겠지만 내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남들이 와서 내 돌에 칼을 갈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닌가. <서산 선가귀감>
14. 네 마리 독사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 나오고, 백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이므로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하거나 아까워할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길러 준대도 숨 한 번에 은혜를 등지고 마는 것을. 모든 업이 이 몸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몸은 애욕의 근본이므로 그것이 허망한 줄 알게 되면 애욕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를 탐착하는 데서 한량없는 허물과 근심 걱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 특별히 밝혀 수행인의 눈을 띄워 주려는 것이다.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이 몸에는 주인될 것이 없으므로 네 가지 원수가 모였다고도 하고, 네 가지 은혜를 등지는 것들이므로 네 마리 독사를 기른다고도 한다. 내가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일로 화도 내고 깔보기도 하며, 다른 사람도 또한 허망함을 깨닫지 못해 나로 인해 성내고 깔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두 귀신이 한 송장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서산 선가귀감>
15. 대장부의 기상
죄가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쳐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 허물을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수행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진실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똑바른 줄과 같아야 한다.”고 했으며, “바른 마음이 곧 도량이다.”고 하셨다. 이 몸에 탐착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나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범부들은 눈앞 현실에만 따르고, 수행인은 마음만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 가지를 다 내버리는 이것이 참된 법이다. 현실만 따르는 것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인 줄 알고 찾아가는 것 같고, 마음만을 붙잡으려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바깥 현실과 마음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병통이기는 마찬가지다. <서산 선가귀감>
16. 자유인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즉 오온이 다 비어 이 몸에는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고, 참 마음은 모양이 없어 오고가는 것이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밝고 고요해 마음과 대상은 둘이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단박 깨치면 삼세와 인과에 얽매이거나 이끌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자유인이다. 부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운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저 무심하게만 되면 법계와 같게 될 것이다. 대장부는 부처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고,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조사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고통이므로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서산 선가귀감>
제 8 장 출가 사문에게 보내는 글
1. 그대 어째서 아직도
많은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째서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은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몸은 여섯 도둑을 따라 악도에 떨어지니 고통이 극심하고, 마음은 일승법을 등지니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처님 나시기 전이거나 그 후일 수밖에 없다. 이제 다행히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처님이 안 계신 말세이니 슬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그러나 그대가 이제라도 반성하여 애욕을 끊고 출가하여 티끌 세상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배운다면 마치 용이 물을 만난 듯, 범이 산에 의지한 듯하며 그 뛰어난 도리는 말로 다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있으나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고,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있으나 도는 성하고 쇠함이 없다. 설사 부처님 생존시에 태어났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무엇이 이로우며, 말세를 만났더라도 부처님의 교법을 받들어 행한다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의사와 같아 병에 따라 약을 주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듣고도 가지 않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방법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가령 내가 오래 살더라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 제자들이 차례차례 받들어 행하면, 여래의 법신은 항상 머물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자신이 도를 닦지 않는 것을 한탄할지언정 어찌 말세라고 걱정할 것인가.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는 모름지기 굳은 뜻을 세워 활짝 열린 마음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쉬고 뒤바뀐 생각을 버려라. 참으로 죽고 사는 이 큰 일을 위해 조사의 화두를 자세히 탐구하라. 그래서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자기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 말세에 부처님이 떠나신 지가 오래 되니 마군은 강하고 불법은 약하며 옳지 않은 사람이 많아, 남을 이롭게 하는 이는 적고 잘못 되게 하는 이가 많으며, 지혜로운 이는 드물고 어리석은 이가 많다. 스스로 도를 닦지 않으면서 남까지 시끄럽게 하니, 수행을 방해하는 일을 말로는 다할 수 없다. 그대가 길을 잘못 들까 하여, 내 조그만 소견으로 열 가지를 마련하여 경책하니, 반드시 믿고 그대로 행하여 한 가지도 어기지 마라. 어리석어 안 배우면 교만만 늘고 어둔 마음 닦잖으니 너와 나만 크네. 빈속에 뜻만 크니 굶은 범 같고 지식 없이 방탕함은 미친 원숭이. 삿된 말 나쁜 소리는 곧잘 들으면서 성현들의 가르침은 모른 체하니 착한 일에 인연 없어 누가 건지랴 나쁜 세상 헤매면서 고생할 밖에. <야운 자경문>
2. 초발심 수행자의 생활규범
첫째,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받아 쓰지 말라.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에서 먹고 입기까지 소와 사람의 수고는 물론, 벌레들이 죽고 상한 것은 한량없을 것이다. 남을 수고롭게 하여 내 몸을 이롭게 하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남의 생명을 죽여 내가 살려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농사짓는 사람들도 늘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있고 길쌈하는 아낙네도 몸 가릴 옷이 없는데, 나는 항상 두 손을 놀려 두면서 어찌 춥고 배고픔을 싫어하랴.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실 빚만 더하는 것이지 도에는 손해되는 것이다. 해진 옷과 나물밥은 은혜를 줄이고 음덕을 쌓는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낙과 풀잎으로 몸을 가리네 허공을 나는 학과 흰구름으로 벗을 삼아 높은 산 깊은 골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 둘째, 내것을 아끼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삼악도의 고통을 가져오는 데는 탐욕이 으뜸이요, 여섯 가지 바라밀다는 보시가 제일이다. 아끼고 탐내는 것은 선한 길을 막고 자비로 보시함은 나쁜 길을 방비한다. 가난한 사람이 와서 빌거든 아무리 구차하더라도 인색하지 마라. 올 때도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내 재물도 아끼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남의 것에 마음을 두랴.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평생에 지은 업만 이 몸을 따를 것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요, 백년 탐낸 물건은 하루아침 티끌이다. 어찌하여 괴로운 삼악도가 생겼는가 오랜 세월 익혀온 애욕 탓이다 부처님의 가사 바리 이대로 살 만한데 무엇하러 쌓고 모아 무명 기르나 셋째,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가벼이 말라.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아 선정을 이루고, 말이 적으며 어리석음을 돌이켜 지혜를 이룰 것이다. 진실한 본체는 말을 떠난 것이고, 진리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다. 입은 화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켜야 하고,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날뛰는 짐승은 화살에 맞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육 년을 설산에 앉아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스님은 소림굴에서 구 년을 말이 없었다. 후세에 참선하는 이가 어찌 이 일을 본받지 않을 것인가. 몸과 마음 선정에 들어 동하지 않고 토굴 속에 홀로 앉아 오가지 마라 잠잠하고 고요하여 아무 일 없이 내 마음속 부처님께 귀의하리라. 넷째, 좋은 벗은 친하고 나뿐 이웃은 멀리하라. 새가 쉴 때에는 숲을 가려 앉듯이 사람도 배우려면 그 스승을 잘 택해야 한다. 좋은 숲을 찾으면 편히 쉴 수 있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학문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좋은 벗은 부모처럼 섬기고 나쁜 이웃은 원수처럼 멀리해야 한다. 학은 까마귀와 벗할 생각이 없는데 붕새인들 어찌 뱁새와 짝할 마음이 있겠는가.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칡은 천 길이라도 올라가지만 잔디 속에 선 나무는 석자를 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소인배는 그때마다 멀리하고, 뜻이 크고 높은 사람은 항상 가까이하라. 가고 오고 어느 때나 선지식 모셔 마음속의 가시덤불 베어 버리라 그리하여 앞길이 활짝 트이면 걸음마다 그 자리가 뚫린 관문이어라. 다섯째, 삼경이 아니면 잠자지 말라. 끝없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도를 방해하는 것은 졸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루 종일 어느 때나 맑은 정신으로 의심을 일으켜 흐리지 말고, 앉거나 서거나 가만히 마음을 살펴보아라. 한평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두고두고 한이 될 것이다. 덧없는 세월은 찰나와 같으니 나날이 놀랍고 두려우며 목숨은 잠깐이라 한때라도 보증할 수 없다.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는가. 졸음 뱀이 구름 끼니 마음달 흐려 도 닦는 이 여기 와서 갈 바를 모르네 이 속에서 비수검 빼어 들면 구름이란 간데없고 달빛 밝으리. 여섯째, 잘난 듯이 뻐기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 어진 행동을 닦는 데는 겸양이 근본이고, 벗을 사귀는 데는 공경과 믿음이 으뜸이 된다. 나니 너니 하고 교만이 높아지면 삼악도의 고해가 더욱 깊어진다. 밖으로 나타난 위의는 존귀한 듯하지만 안은 텅 비어 썩은 배와 같다. 벼슬이 높을수록 겸손히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다 남이다 하는 집착이 없어지는 곳에 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며,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는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온다. 교만한 티끌 속에 지혜 묻히고 나다 너다 하는 산에 번뇌 자라니 잘난 체 안 배우고 늙어진 뒤에 병들어 신음하니 한탄뿐이네. 일곱째, 재물이나 여색은 바른 생각으로 대하라. 몸을 해치는 것은 여색보다 더한 것이 없고 도를 잃게 하는 것은 재물에 미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계율을 제정하여 재물과 여색을 엄금하신 것이다. ‘여인을 보거든 독사와 호랑이처럼 여기고, 금이나 옥을 대하거든 나무나 돌같이 보라.’ 비록 어두운 방에 홀로 있더라도 큰 손님을 대한 듯이 하고, 남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한결같이 해서 안과 밖을 달리하지 말아라. 마음이 깨끗하면 선신이 수호하고, 여색을 생각하면 천신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선신이 수호하면 험난한 곳에서도 편안하고, 천신들이 용서하지 않으면 편안한 곳이라도 불안이 따른다. 탐욕은 염라왕의 지옥문이고 청정은 아미타불의 연화대이다 고랑 차고 지옥 가면 고통이 천 가지 배로 가는 극락세계 기쁨이 만 가지. 여덟째, 세속 사람과 사귀어서 미움받지 말라. 마음속에서 애정을 끊어 버린 이를 사문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이미 애정을 끊고 세상을 떠났는데 무엇 하러 세상 사람과 다시 사귈 것인가. 세속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하면 도철이라 한다. 도철은 본래부터 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정이 짙으면 도의 마음이 멀어지니 인정에 사로잡히지 마라. 출가한 뜻을 등지지 않으려면 명산을 찾아가 깊은 뜻을 연구하라. 가사와 바리로 인정을 끊고 주리고 배부른 데에 무심하면 저절로 도는 높아질 것이다. 나와 남 위하는 일 착하다 해도 그건 모두가 생사 윤회의 씨가 된다 솔바람 칡덩굴 달빛 아래서 그릇됨이 없는 조사선을 닦으라. 아홉째,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칭찬하고 헐뜯는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절한 일 없이 칭찬을 받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허물이 있어 시비를 듣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기뻐하면 잘못을 고치게 되고, 부끄러워하면 도 닦는 데 채찍질이 될 것이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마라. 마침내는 그 허물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다. 남을 해치는 말을 들으면 부모를 헐뜯는 말과 같이 여겨야 한다. 세상은 오늘 남의 허물을 말하지만 내일은 다시 내 허물을 말할 것이다. 모든 일이 다 허망한 것인데, 비방과 칭찬에 어찌 걱정하고 기뻐할 것인가. 종일토록 잘잘못을 시비하다가 밤이 되면 흐리멍덩 잠에 빠진다 이같은 출가는 빚만 늘어서 삼계에서 벗어나기 더욱 어려워. 열째, 대중과 함께 살 때에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한 것은 온 세상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만일 가깝고 먼 것이 있다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니 그렇다면 출가하여 무슨 덕이 있겠는가.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분별이 없다면 어찌 이 몸에 괴롭고 즐거운 성쇠가 있으랴.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삼악도에 드나드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요, 육도에 오르내리는 것은 친하고 성긴 업으로 이루어진다. 마음이 평등하면 가지고 버릴 것이 없으니, 가지고 버릴 것이 없다면 생사가 어디 있겠는가.
위 없는 보리도를 성취하려면 언제나 평등심을 굳게 가지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 있으면 도는 더욱 멀어지고 업만 깊으리. 그대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눈먼 거북이 나무 구멍을 만난 것처럼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한평생이 얼마나 된다고 닦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느냐.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불법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금생에 놓쳐 버리면 만 겁을 지내도 다시 만나기는 힘들다. 이 열 가지 계법을 지키고 부지런히 닦아 물러나지 말고 속히 정각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 혼자만 생사의 바다에서 뛰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건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끝없는 옛적부터 금생에 이르도록 생사에 오락가락할 때 번번히 부모를 의지했을 것이니, 그 끝없는 세월이 부모 되었던 이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면 육도 중생이 그대의 부모 아닌 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중생들이 모두 악도에 떨어져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밤낮으로 받고 있으니, 그들을 제도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 벗어날 것인가. 가슴을 도리는 듯 애닯고 슬픈 일이 아닌가! 천만 번 바라노니, 그대는 어서 큰 지혜를 밝히고 신통 변화를 갖추며,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거친 파도에 지혜의 배가 되어, 탐욕의 기슭에서 헤매는 미혹의 중생을 제도하라. 그대는 아는가, 삼세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우리와 같은 범부였다는 사실을.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이니, 하지 않아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옛사람의 말에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도를 멀리한다’고 하였으며, 또 ‘내가 착하려고 하면 착한 것이 스스로 따라온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옳은 말씀이다. 만일 믿는 마음만 물러서지 않는다면 누가 자성을 깨쳐 부처를 이루지 못하겠는가. 이제 삼보를 모시고 낱낱이 그대에게 경계했으니, 만일 잘못인 줄 알면서 일부러 범한다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옥토끼 뜨고 지니 늙음은 잠깐 금까마귀 들락날락 세월만 가네 명예와 재물은 아침의 이슬 영화롭고 괴로운 일 저녁 연기라. 간절히 도 닦기를 권하노니 어서어서 부처되어 중생 건지라 이생에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오는 생에 반드시 한탄하리라. <야운 자경문>
3. 수행자에게 보내는 글
부처님께서 열반의 세계에 계시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끊고 고행하신 결과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누가 막지 않는 천당이지만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를 자기의 재물인 양 여기기 때문이며, 유혹이 없는데도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 이가 많은 것은 네 마리 독사와 다섯 가지 욕락을 그릇되게 마음의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그 누군들 산중에 들어가 도 닦을 생각이 없으랴마는, 저마다 그렇지 못함은 애욕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지는 못할지라도 자기의 능력에 따라 착한 일을 버리지 마라. 세상의 욕락을 버리면 성현처럼 공경받을 것이요, 어려운 일을 참고 이기면 부처님과 같이 존경받을 것이다. 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악마의 권속이요, 자비스런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로운 이의 거처할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들어선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살아갈 곳이다. 주리면 나무열매로 그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갈증을 풀어라.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이 몸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비단옷으로 감싸 보아도 목숨은 마침내 끊어지고 만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피 울어예는 기러기로 마음의 벗을 삼으라. 예배하는 무릎이 얼음같이 시려도 불을 생각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하여도 먹을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이기에 닦지 않고 놀기만 하겠느냐. 마음속의 애욕을 버린 이를 사문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비단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격이고, 도 닦는 사람이 애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 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마을에 사는 사람은 부처님이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설사 도행이 없더라도 산중에 사는 이는 성현들이 그를 기쁘게 여기신다. 재주와 학문이 많더라도 계행이 없으면 보배 있는 곳에 가려고 하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수행을 부지런히 하여도 지혜가 없는 이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을 향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이의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이고, 어리석은 이의 하는 짓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달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 모르는구나. 행동과 지혜가 갖추어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두 날개와 같다. 죽을 받고 축원을 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시주에게 수치스런 일이며, 밥을 얻고 심경을 외울 때에 그 이치를 모른다면 볼보살께 부끄럽지 아니하랴. 사람들이 구더기를 더럽게 여기듯이 성현들은 사문으로서 깨끗하고 더러움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신다. 세간의 시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데는 계행이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행을 깨뜨린 이가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죽지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을 날려는 것과 같다. 제 허물도 벗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남의 공양을 받을 수 없다. 계행이 없는 살덩이는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무리 아껴도 보전하지 못한다. 덕이 높은 큰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으려거든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천신들이 모두 찬탄하고, 수도인이 여색을 생각하면 착한 신들도 그를 버린다. 사대는 곧 흩어지는 것이어서 오래 살기를 보증할 수 없으며,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상의 향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인데 무엇을 그토록 탐하며, 한번 참으면 길이 즐거울 텐데 어찌 닦지 않는가. 도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다. 방패막이 할 말이 끝이 없는데 어찌 그리 탐착하며, 다음다음 하면서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구나. 이 일이 한이 없는데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핑계가 끝이 없는데 끊을 마음을 내지 않는구나. 오늘이 끝이 없는데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이 끝이 없는데 착한 일 하는 날은 많지 못하며,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이 다하지 않는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흘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얼마를 헛되이 살았으면서 한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죽고야 말 것인데 내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한 일이 아닌가. <원효 발심수행장>
제1장 지혜와 자비의 말씀 #1
1. 네 가지 진리
부처님께서 파탈리풋타로 가시던 도중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왕원에서 쉬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이는 반드시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 오랫동안 바른 길에서 벗어나 생사에 매여 헤매느라고 쉴 새가 없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진리인가. 첫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이니 이것을 고라 한다. 둘째는 괴로움은 집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집이라 한다. 셋째는 괴로움과 집착이 없어져 다한 것이니 이것을 멸이라 한다. 넷째는 괴로움과 집착을 없애는 길이니 이것을 도라 한다. 괴로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므로 오랫동안 먼 길을 헤매어 생사가 쉬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알 것이니, 괴로움이란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번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오온으로 된 이 몸이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인 줄 알고 애욕의 집착을 끊으면 눈을 얻었다고 하리니, 이 생을 마치고는 뒤에 다시 괴로움이 없게 된다. 집착 때문이라 함은 애욕을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괴로움과 집착을 모두 없애고 그 길을 따라 진리를 행하여 눈을 얻으면 이 생을 마친 뒤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미 진리를 보아 도의 눈을 얻은 이에게는 다시 나고 죽음이 없다. 그리고 도를 얻으려면 여덟 가지 행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마음이 다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둘째는 애욕을 버려 갈등을 없애며, 셋째는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 같은 것을 저지르지 않고, 넷째는 속이고 아첨하며 나쁜 말로 꾸짖는 일을 하지 않으며, 다섯째는 질투하고 욕심내어 남들이 믿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고이고 공이고 무아임을 생각하며, 일곱째는 몸의 냄새나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음을 생각하고, 여덟째는 몸에 탐착하지 않고 마침내는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것이다.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이 네 가지 진리를 알았고, 앞으로 올 부처님들도 이 진리를 볼 것이다. 세속적인 은혜와 사랑을 탐하고 바라거나 혹은 세상의 부귀 영화와 명예와 오래 살기를 원하는 이는 끝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얻지 못한다. 길은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깨끗해야 길을 얻을 수 있다. 그 마음이 청정하여 다섯 가지 계율을 범하지 않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만약 지옥, 아귀, 축생의 길을 끊으려거든 일심으로 여래의 가르침과 계율을 받들어 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여래가 중생을 나고 죽는 데서 해탈케 하려고 바른 길을 열어 보였으니,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잘 생각해 보아라.”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파탈리풋타에 이르러 성 밖 어떤 나무 아래 머무셨다. 그 곳 바라문과 거사들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부처님 계신 데로 모여들었다.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앉을 방석을 가지고 혹은 물병과 등잔을 들고 와서 예배하였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였다. “사람이 세속에서 함부로 탐욕을 즐기면 다섯 가지 소모되는 현상이 있다. 스스로 방종하므로 재산이 줄어들고, 몸을 위태롭게 하고 도를 잃게 되며, 사람들이 공경하지 않고 죽을 때에 뉘우치게 되며, 추한 소문과 나쁜 이름이 널리 퍼지고, 스스로 방종하므로 죽은 뒤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을 조복받아 방종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덕을 갖추게 된다. 검소하고 절약하므로 재산이 날로 늘어나고, 도의 뜻에 가깝게 되며, 사람마다 우러러 공경하고 죽을 때도 뉘우침이 없으며, 덕망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검소하고 절약하므로 죽은 뒤 천상이나 복된 곳에 태어난다. 사람이 방종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좋은 일이 있으니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부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펴시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장아함 반니원경>
2. 계, 정, 혜를 닦아라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와 함께 콜리성 북쪽의 한 나무 아래 머무르시며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으며 지혜를 구하여라. 청정한 계율을 지니는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선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되며, 지혜를 구하는 이는 애욕에 매이지 않으므로 하는 일에 걸림이 없다. 계, 정, 혜가 있으면 덕이 크고 명예가 널리 퍼지리라. 또 세 가지 허물을 떠나면 마침내 아라한이 될 것이다. 지금의 이 몸으로 삼매를 얻고자 하면 부지런히 깨닫기를 구해 이 생이 다하도록 청정한 도에 들어가라. 마땅히 실행할 것을 행하면 죽은 뒤에 다시 윤회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 요긴함을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를 지니고 선정을 닦아 지혜를 깨달으라.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는 사람은 덕망이 높고 명예가 드날리게 될 것이다. 음란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잡된 생각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을 일러 해탈이라 한다. 이 계행이 있으면 저절로 선정이 이루어지고, 선정이 이루어지면 지혜가 밝아지리니, 이를테면 흰 천에 물감을 들여야 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있으면 도를 어렵지 않게 얻을 것이고, 일심으로 부지런히 닦으면 이 생을 마친 후에는 청정한 데에 들어갈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면 스스로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나지 않은 줄을 알리라. 만약 계, 정, 혜의 행을 갖추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갖추면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문득 천상, 인간, 지옥, 아귀, 축생들의 세상을 보게 되고, 온갖 중생들의 생각하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시냇물이 맑으면 그 밑에 모래와 돌자갈의 모양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 맑으므로 보고자 하는 것이 다 나타난다. 도를 얻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치 물이 흐리면 그 속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을 깨끗이 지니지 못하면 세상에 나고 죽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스승이 보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마땅히 실행해야 할 것이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제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생각을 잡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과 마음이 청정한 사람은 도를 스스로 얻을 것이다. 여래는 청정함을 가장 즐거워한다.” <장아함 반니원경]>
3. 고행과 바른 수행
부처님께서 녹야원에 계실 때였다. 발가숭이 이교도 카샤파가 부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온갖 고행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카샤파여, 그것은 내 뜻이 아니오. 또 내 말을 바르게 전한 것도 아니오. 나는 천안으로써 고행자가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보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봅니다. 이와 같이 고행자 중에는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천상에 태어나는 이도 있는데, 어떻게 통틀어 고행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할 수 있겠소.” 카샤파는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알몸이라든가 공양을 받지 않는 일, 또는 쇠똥을 먹고 나무껍질이나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며, 항상 서 있거나 하룻밤에 세 번씩 목욕을 하는 것 같은 고행은 사문과 바라문에게도 알맞은 일이라고 합니다.” “카샤파, 아무리 그와 같은 고행을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계행과 선정과 지혜가 없으면 그것은 참된 사문이나 바라문과는 멉니다. 화내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이 없으며 자비심을 기르고 번뇌가 없어 현재에 깨달아 있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문이요 바라문이라고 할 것이오.” “부처님, 사문이나 바라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 어려움이 곧 고행을 닦는다는 뜻은 아니오. 고행쯤이야 물항아리를 나르는 하녀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화내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이 없으며 자비심을 기르고 번뇌가 없이 현재에 깨닫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교도 카샤파는 다시 물었다. “부처님, 그러면 그 계행과 선정과 지혜의 성취란 어떤 것입니까?” “계행의 성취란 이런 것이오.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스스로 깨닫고 남을 가르칠 때에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신심을 내어 출가합니다. 그래서 계율에 따라 행동을 삼가고 바른 행동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조그마한 허물도 두려워하고 감관을 다스려 바른 지혜를 갖춥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여자를 범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거나 거친 말을 쓰지 않으며 바른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오. 또 선정의 성취란, 눈으로 사물을 볼 때라도 감관을 잘 지켜 그 모양에 팔리지 않고 가나 오나 앉으나 누울 때에도 항상 마음의 눈을 밝히어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에 머뭅니다. 새가 날개밖에는 아무것도 갖지 않듯이 몸을 가리는 옷과 배를 채우는 밥으로 만족하고, 나무 밑이나 동굴 속, 숲이나 묘지 등 한적한 곳을 찾아 고요히 앉소.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게으름과 의심을 버리고, 건강하고 자유롭고 안온한 사람이 되어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오. 그리고 지혜의 성취란, 선정에 의해 고요하고 맑고 밝아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이 세상의 덧없음과 ‘나’라고 내세울 것 없음을 알며, 다섯 가지 신통을 얻고 네 가지 진리를 알아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했다는 분명한 자각을 가지는 것이오. 카샤파여, 이보다 더 뛰어난 계행과 선정과 지혜의 성취는 없소. 계와 고행과 지혜와 해탈을 칭송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지만, 여래처럼 맑고 높은 계와 고행과 지혜와 해탈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자가 바로 여래입니다. 나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사문 고타마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자후를 하지만 그것은 신념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한다 할지라도 만족시키거나 믿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신념을 가지고 사자후를 합니다. 많은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고 만족시키며 믿게 합니다. 카샤파여, 일찍이 라자가하의 영축산에서 당신과 같은 고행자 니그로다는 욕망을 없애는 최고 형식에 대해서 내게 물어 대답을 듣고 무척 기뻐한 일이 있소.” 이 가르침을 듣고 이교도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부지런히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남전 장부경전 8>
4. 신통을 금하다
부처님께서 나란다성 바바리암라 동산에 계실 때였다. 하루는 견고라고 하는 남신도 한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왔다. “부처님, 이토록 번화하고 잘 살고 있는 나란다 사람들이 부처님을 공경하고 믿고 있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어떤 비구로 하여금 신통 변화를 나타내 보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부처님의 법을 믿고 공경할 것입니다.” “나는 비구들에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신통 변화를 나타내 보이라고 가르친 일이 없소. 다만 한적한 곳에 앉아 도를 생각하고, 공덕이 있거든 안으로 감추어 두고 허물이 있으면 몸소 드러내 놓으라고 가르칠 뿐이오.” 그러나 견고는 거듭거듭 부처님께 간청했다. 부처님은 그의 청을 거절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신통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몸소 체득한 것이니 말해 보겠소. 신족통과 타심통과 교계통이 그것이오. 신족통이란,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나타내기도 하고 여러 몸을 합쳐 한 몸을 만들기도 하며 또는 나타내고 숨기기도 하오. 산과 장벽을 지나되 허공과 같이 걸리지 않고, 땅 속에 출몰하되 물 속에서처럼 자유로우며, 물 위로 다니되 땅 위와 같고 허공에 앉되 날개 있는 새와 같소. 큰 신통력과 위력으로 해와 달을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범천에 이르기도 하오. 어떤 신도가 비구의 이러한 신통을 보고 아직 믿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저 비구는 간다리라는 주문을 외어 그러한 신통을 얻은 것이다’라고 할 것이오. 이것은 오히려 불법을 비방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소? 그러므로 나는 신통 변화 같은 것을 부질없게 여기어 비구들에게 금하도록 한 것이오. 그리고 타심통이란, 남의 마음을 관찰하여 ‘너의 뜻은 그렇고 네 마음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오. 이것을 보고 믿음을 얻은 이가 아직 믿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저 비구는 마니가라는 주문을 외어 그런 신통을 얻은 것이다’라고 할 것이오. 이것은 오히려 불법을 비방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소? 그러므로 나는 이런 허물을 보고 신통 변화 같은 것을 부질없게 여기어 비구들에게 금하도록 한 것이오. 교계통이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여 사문이나 바라문들에게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는 생각하지 마라. 이런 일은 하고 저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버리고 저것을 취해라.’ 이와 같이 가르쳐 훈계하는 것이오. 그들은 모두 어둠을 떠나 밝음을 찾고 죄악을 버리고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오. 이렇게 출가하여 정진 수행하므로 계행이 갖추어지고 선정이 갖추어지며 지혜가 갖추어져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오. 이 세 가지 신통은 여래가 스스로 체득하여 가르치는 것이오.” 견고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장아함 견고경>
5. 적을 막는 길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영취산에서 천이백오십 명의 비구들과 계실 때였다. 마가다의 왕 아자타삿투는 밧지국과 서로 좋지 않은 사이였다. 어느 날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밧지국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많으며 땅이 기름지다. 해마다 풍년이 들고 진기한 것이 많이 나는 것만을 믿고 나에게 굴복하지 않으니 쳐들어가 정복하고야 말겠다.” 왕은 바라문 출신인 어진 신하 우사에게 자기 대신 부처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아 오도록 분부했다. 우사는 오백 대의 수레에 기마 이천 마리와 부하 이천 명을 데리고 영축산으로 향했다. 그는 부처님을 뵙고 공손히 꿇어앉아 여쭈었다. “마가다의 왕 아자타삿투는 부처님께 머리 숙여 거처가 편안하고 기력이 좋으신지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고맙소, 왕과 온 백성들과 당신도 평안하십니까?” 우사는 찾아온 뜻을 말했다. “임금님은 밧지국과 뜻이 맞지 않아 여러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그 나라를 정복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저를 보낸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찍이 밧지국에 머무르면서 본 일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근엄합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일곱 가지 법을 말한 적이 있소. 만일 지금도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면 날로 더욱 흥할지언정 쇠약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사는 합장을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여쭈었다. “그 일곱 가지 법을 들려 주십시오. 어떻게 실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너는 밧지국 사람들이 자주 모임을 가지고 바른 일을 서로 의논하여 몸소 지킨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른과 젊은이들은 서로 화목하여 갈수록 흥할 것이다. 그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여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또 밧지국의 임금과 신하가 화목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공경한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여 갈수록 흥성하고 누구의 침락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밧지국 사람들이 법을 받들어 삼가야 할 것을 알고 예의를 어기지 않는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또 밧지국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여 순종한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조상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또 그 나라의 부녀자들이 정숙하고 진실하며 웃고 농담할 때라도 그 말이 음란하지 않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 나라 사람들이 수행자를 공경하고 계행이 청정한 이를 존경하고 보호하며 공양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들은 일이 있느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른과 젊은이들은 서로 화목하여 갈수록 더 흥성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는 언제나 안온하여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이 일곱 가지 법을 실행하면 어떤 적이라도 그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우사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밧지국 사람들이 이 일곱 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지닐지라도 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일곱 가지를 다 지닌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나라 일이 많으므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자리를 떠났다.<장아함 유행경>
6. 마음의 주인이 되라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견고한 것도 없으며 결국은 모두 흩어지고 만다. 망상 분별로 하는 일은 속임이 될 뿐이다. 세속의 인연으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느냐. 천지와 저 큰 수미산도 결국은 무너질 것인데 이까짓 사람 몸 따위이겠느냐. 나는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아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법으로 부처를 이룬 것이다. 이미 교법이 갖추어져 있으니 너희들도 부지런히 배워 실행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해탈을 얻도록 하여라. 분별하는 작용이 끝나면 죽지도 않고 다시 나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몸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온의 작용을 끊으면 배고프고 목마르며 춥고 더우며 근심, 슬픔, 괴로움, 번민 같은 것도 없어진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천신들도 기뻐할 것이다 마음을 조복받아 부드럽고 순하고 스스로 텅 비어야 한다.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마음 가는 대로 한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도를 얻는 것도 또한 마음이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귀신이나 축생 혹은 지옥도 만들므로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온갖 법이 일어난다. 마음이 바탕이 되어 뜻하는 것이 행이 되고 행의 하는 일이 명이 되니, 어질고 어리석음이 행에 있고 오래 살고 일찍 죽음이 명에 달린 것이다. 대개 의지와 행과 명, 이 세 가지가 서로 관계되어 좋고 나쁜 짓을 하므로 스스로 그 과보를 받는다. 아비가 착하지 못한 짓을 했더라도 자식이 대신 받지 못하고, 또 자식이 옳지 못한 일을 했을지라도 아비가 대신 받지 못한다. 착한 일은 스스로 복을 받고 나쁜 짓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여래가 천상 천하에서 높이 공경받는 것도 그 뜻이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마음으로 진리를 행동으로 옮겨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현세에서 휴식과 안락을 얻을 것이니, 잘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며 조용히 생각하여라. 그러면 곧 나의 깨끗한 법이 오래 머무를 것이며, 세상의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여 편안케 하리라.” <장아함 반니원경>
7. 법이 쇠퇴하지 않으려면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비구에게 일곱 가지 가르침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곱 가지 가르침이란, 첫째는 자주 모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며 외는 데 게을리하지 않음이다. 둘째는 화합하고 순종하며 서로 바르게 가르치며 돕는 일이다. 셋째는 남의 것을 가지거나 탐내지 않고 오로지 한적한 산천을 좋아하는 일이다. 넷째는 음욕을 끊고 어른과 어린이가 예의로써 서로 아끼고 섬기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과 효도로 스승을 섬기며 가르침을 듣고 아는 것이다. 여섯째는 법을 받들어 교법과 계율을 공경하며 청정한 행을 닦는 일이다. 일곱째는 도를 만들어 행하고 성자들을 공양하며 어린이를 타일러 알게 하고, 와서 배우려는 이를 맞아 의복과 음식과 침상과 의약을 베푸는 일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가르침 속에서 법은 오래 머물게 된다. 또 비구에게 일곱 가지 지키는 것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 실행하여라. 첫째는 청정함을 지켜 덧없는 유위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는 욕심 없음을 지켜 탐내지 않는다. 셋째는 잘 참아 다투거나 소송하는 일이 없다. 넷째는 고요한 행을 지켜 번거로운 여러 무리들의 모임에 섞이지 않는다. 다섯째는 법의 뜻을 지켜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섯째는 한 마음을 지켜 고요히 앉아 생각을 한 곳에 모은다. 일곱째는 검소하고 절약하며 옷과 밥이 거칠며 풀자리로 침상을 삼는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지킴으로써 법이 오래 가게 된다. 또 비구에게 일곱 가지 공경함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실행하여라. 첫째는 부처님을 공경함이니 착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어 섬기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둘째는 법을 공경함이니 뜻을 도에 두고 다른 곳에 의지하지 않음이다. 셋째는 승단을 공경함이니 의지해 가르침을 받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넷째는 배움을 공경함이니 계 지키는 이를 섬기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여섯째는 깨끗하여 욕심 없는 이를 공경하여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일곱째는 삼매를 공경함이니, 좌선하여 선정 닦는 이를 섬기고 다른 데 의지하지 않음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공경하면 법이 오래가게 된다. 또 비구에게 일곱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법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잘 생각해서 행하여라. 첫째는 경전의 뜻 생각하기를 부모 생각하듯 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은혜가 한 세상에 그치지만, 법은 무수한 세상에 걸쳐 살면서 생사를 건지는 것이다. 둘째는 인생살이가 고통 아닌 것이 없는 줄을 생각함이니, 살아서는 처자 권속에 대한 걱정을 하다가도 한 번 죽어 뿔뿔이 흩어지면 흩어진 줄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하여 마땅히 도 닦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는 정진을 생각함이니 몸과 말과 생각을 단정히 하면 도를 이루기가 어렵지 않다. 넷째는 겸허하기를 생각함이니 교만하고 잘난 체하지 말며, 현명한 이를 섬기고 배우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겨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는 마음 조복 받기를 생각함이니 감정을 마음대로 놀아나지 못하게 하고, 음란하고 성내거나 어리석은 태도를 억제하여 사특한 것이 없게 하라. 여섯째는 이 육신이란 냄새나고 더럽고 피를 담은 것이므로 탐낼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라. 일곱째는 스스로 관찰하되 사람의 몸은 거름과 같아서 있은 이래 죽지 않는 이는 없다. 세상이란 꿈과 같은데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 변하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 알고 보면 허망한 꼭두각시 놀음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 일곱 가지 법대로 하면 법이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땅 위를 흐르는 여러 갈래의 물이 쉬지 않으면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듯이, 비구들도 도 닦기를 그치지 않으면 구경의 해탈을 얻게 되리라. 여래의 교법을 서로 이어받아서 그 말씀을 외어 지니고 때때로 일깨우며 사부대중들이 서로 가르치면 이러한 가르침이 오래 이어질 것이다.” <장아함 반니원경>
8. 악인은 침묵으로 대하라
아난다는 부처님의 얼굴빛이 오늘처럼 빛나고 화평스러운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금빛처럼 빛나는 얼굴을 보고 그는 꿇어앉아 여쭈었다. “제가 부처님을 모신 지 이십여 년이 되었지만 오늘처럼 얼굴빛이 빛나고 화평하신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아난다여, 그것은 두 가지 인연으로 그러하다. 두 가지 인연이란 내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열반에 들 때이다. 내가 오늘 밤중에 열반에 들려고 해서 안색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아난다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 그렇게 빨리 열반에 드시렵니까? 세상에 빛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춘다에게 가서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여라. 여래에게 공양한 인연으로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라고 위로해 주어라. 너도 잘 알아 두어라. 반드시 여래를 공경하고 교법을 배우고 섬겨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찬다카 비구는 성미가 급하고 괴팍하여 욕지거리를 잘하고 말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열반하고 난 후에는 찬다카를 위해 대중들이 침묵을 지키고 그를 상대하여 말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뉘우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마치고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자리를 깔게 하셨다.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무릎을 굽혀 다리를 포개고 누워 성인의 바른 지혜를 생각하셨다.<장아함 반니원경>
9. 수행자와 여인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한 세상 여인들은 출가 사문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서로 마주 보지 말아라.” “만약 서로 마주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불어 말하지 말아라.” “만약 더불어 말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라. 아난다여, 너는 여래가 열반한 뒤에 보호할 사람이 없어 혹시 닦아 오던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까지 말한 교법과 계율이 곧 너를 보호하고 또한 네가 의지해야 할 곳이다. 오늘부터는 비구들에게 사소한 계율은 버리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화목하여 마땅히 예절을 따르라고 일러라. 이것이 출가한 사람들이 공경하고 순종할 법이다.” <장아함 유행경>
10. 사성에서 뛰어난 사람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녹자모 강당에 계실 때였다. 바라문 출신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한 바셋타와 바르드바자에게 부처님은 물으셨다. “바라문 중에서도 뛰어난 너희들이 집을 버리고 출가 사문의 생활을 하니 바라문들이 혹시 너희를 보고 비난하지 않더냐?” 바셋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 바라문들은 남을 멸시하는 버릇으로 저희를 비난하여 욕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 비난하고 욕을 하더냐?”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중에 바라문만이 가장 높은 종족이고 그 밖에는 다 하잘것없는 낮은 종족이다. 바라문은 살빛이 희고 다른 종족은 살빛이 검다. 바라문만이 오직 순수한 범천의 혈통을 받은 종족이다. 바라문만이 범천의 입에서 나왔고 범천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범천의 상속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고귀한 계급을 등지고 미천한 계급의 사람들과 가까이 사귀고 있으니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머리 깎은 사문 가운데는 범천의 발에서 나온 천한 자들도 있지 않느냐.’ 이러한 말로 저희를 비난하고 욕합니다.” “바셋타여,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바라문도 시집가고 장가가며 여인은 임신해서 아이를 낳고 있지 않더냐. 그들의 출생도 다른 사람과 꼭 같으면서 어떻게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라고 범천의 입에서 나왔으며 범천의 상속자라고 남을 욕하고 업신여긴단 말이냐. 세상에는 왕족과 바라문과 평민과 노예 등 네 가지 계급이 있다. 그러나 왕족이라고 해서, 남의 생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거나 음란한 짓을 하고 거짓말과 이간질, 악담을 하며 탐욕과 성냄과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도 또한 죄를 범하게 되며 그 갚음을 받게 된다. 바라문이나 평민, 노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 왕족이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약탈과 음행과 거짓말과 이간질, 악담, 탐욕, 성냄 등에서 벗어나 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그것은 착한 일이며 착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것은 바라문이나 평민이나 노예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요 나머지는 미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네 가지 종족이나 계급은 그 사람의 혈통이나 신분으로서는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번뇌가 없어지고 청정한 계행이 성취되어 생사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완전한 지혜를 얻어 해탈의 도를 이루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태생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가계가 다르더라도 너희가 출가하여 집을 버린 수행자가 되었을 때 저 바라문들이 ‘너희는 무엇이냐?’고 묻거든 ‘우리는 사캬족의 자손이다. 사캬무니의 진정한 아들이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법에서 났으며 법의 상속자이다’라고 대답하여라. 너희는 여래를 의지하여 새로 얻어 성취된 청정한 계행의 몸이요, 선정의 몸이요, 지혜의 몸이요, 해탈의 몸이요, 해탈지견의 몸이기 때문이다.”
11. 사문의 과보
부처님께서 많은 제자들과 함께 라자가하의 신의인 지바타 소유의 암라 동산에 계실 때였다. 마가다의 아자타삿투왕은 사월 보름날 밤에 재계하고 궁전 누각에서 밝게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곁에 있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 밤에 덕이 높은 사문이나 바라문을 모시고 설법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왕은 지바카의 말을 듣고 곧 암라 동산으로 갔다. 왕은 부처님께 공손히 예배드린 후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이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보수로써 부모 처자를 부양하고 자기도 안락을 누립니다. 그런데 출가 수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현세에서 어떤 과보를 받게 됩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여기 왕을 섬기는 한 사람의 종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왕을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할 것이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자며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말씨도 공손히 하여, 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항상 애를 쓸 것이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을 돌이켜 출가를 합니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 몸과 말과 생각을 조심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과 의복에 만족하며 세속을 떠나 고요한 숲에서 살게 될 것이오. 이때 어떤 신하가 숲에서 수행하고 있는 예전의 종을 보았다고 왕께 전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에게 예전처럼 돌아와 시중을 들라고 하겠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절하고 그를 맞아 가사와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며, 병이 나면 약과 필요한 물건을 대주면서 그를 보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눈앞에 보이는 사문의 과보가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사문의 과보입니다.” <남전 장부 사문과경>
12. 청정한 계행의 과보
아자타삿투왕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눈앞의 과보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귀족의 가장이나 자제나 혹은 천민의 자제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내어 장애 많은 세속 생활을 떠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는 청정한 계행을 닦고 정진하여 조그만 허물도 두려워하고 깨끗한 몸과 말과 생각을 지니며, 모든 감관의 문을 잘 보호하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두루 갖추게 될 것이오. 그러면 어떤 것이 계행을 갖춘 것인가. 살생을 하지 않고 모든 생물을 가엾이 여기며,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고 남의 것을 가지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떳떳하지 못한 음행을 하지 않고 밝고 깨끗한 행동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하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화합하고 친밀한 말을 하며,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누구나 들으면 기뻐하는 말을 하고 부질없는 말을 하지 않고 도리와 교법에 맞는 말을 합니다. 하루에 한 번 먹고 연극이나 노래, 춤, 오락 등의 유흥장에 가지 않으며, 몸을 꽃다발이나 향수로 치장하지 않고 높고 큰 침상이나 의자를 사용하지 않소. 금, 은 같은 귀금속과 곡식을 저장해 놓는 일도 없고 부인이나 소녀 또는 남녀의 노예를 받아 부리는 일이 없으며, 코끼리, 말, 소, 산양 등의 가축이나 토지 전답을 받는 일도 없소. 공사간의 심부름이나 중매 혹은 팔고 사는 행위를 하지 않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모든 그릇된 행위를 하지 않소. 이것은 또한 비구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오. 비구가 이와 같은 계행을 두루 갖추면 이 계행의 위력으로 어느 곳에 갈지라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마치 사방의 적을 정복한 위력 있는 왕은 어디를 가나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소. 비구가 청정한 계행을 갖추면 마음속으로 티없이 깨끗한 평안을 누리게 되니 이것이 비구가 계행을 구족한 현세의 과보인 것이오.”
<남전 장부 사문과경>
13. 계행과 정진으로 얻은 자유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비구는 또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감관의 문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마치 부자가 창고의 문을 단속하여 도둑의 침범을 막듯이, 비구가 눈으로 사물을 볼 때에는 어떤 현상이나 특수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생각을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다면 탐욕과 애착과 비애 등의 부정법에 흘러가고 말 것이오. 그러므로 눈을 잘 단속하여 감각 작용을 조절함으로써 보는 감각이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순결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오. 소리를 듣는 귀와 냄새를 맡는 코, 맛을 보는 혀, 차고 덥고 거칠고 부드러움을 느끼는 몸, 시비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도 그와 같아서 어떤 현상이나 특수한 환경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는 것이 모두 제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순결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오. 이와 같이 모든 감관을 잘 단속하여 그 공덕이 갖추어지면, 마음속으로 티없이 깨끗한 안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감관의 문을 보호한 공덕의 과보입니다. 또 어떤 것이 비구의 지족인가 하면, 그 몸을 보호하는 옷과 얻은 것에 만족하여 어디를 가든 한 벌 옷과 한 벌 바리때를 지니고 가는 것이오. 마치 새가 어디를 가든 날개만을 가지고 나는 것처럼. 비구는 이와 같이 청정한 계행과 감관과 만족을 갖추어 조용한 숲속이나 나무 아래, 동굴이나 묘지 등 세속을 떠난 한적한 곳을 선택해 한 그릇 밥을 얻어 먹은 뒤에는 단정히 앉아 바른 생각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오. 그는 세속의 탐욕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에 머물며 남을 해치려거나 성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여의고, 모든 생물을 가엾이 여기어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 머물며, 정신이 혼미한 데서 벗어나 산뜻하고 올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에 머뭅니다. 산란하고 헐떡거리는 생각을 쉬어 고요하고 차분한 마음에 머물며, 망설이고 의심하는 데서 벗어나 깨끗하고 의심하지 않는 마음에 머물러 그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서 빌린 돈으로 처자를 부양하고 스스로도 만족하는 것과 같이, 비구도 계행과 정진으로 묵은 죄업을 청산하고 새로운 도업에 의해 스스로 평안을 얻어 만족하는 것이오. 또 한 가지 비유를 든다면, 남의 노예가 되어 마음대로 오고 가지 못하다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면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떳떳한 자유인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과 같이, 비구도 청정한 계행과 줄기찬 정진의 힘으로 세속적인 오욕의 노예에서 벗어나 독립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비구가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를 갖추어 만족할 줄 알고 번뇌에서 벗어난 현세의 과보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마가다의 왕 아자타삿투는 감격한 끝에 이렇게 여쭈었다. “거룩하십니다.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고, 파묻혀 있던 것을 드러내놓으며,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 주고, 어둔 밤에 불을 밝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같이 온갖 방편을 들어 진리를 말씀해 주시니, 저는 지금부터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에 귀의하고 승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이 목숨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여 신도가 되고자 하오니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왕권을 얻기 위해 잔인하게도 덕이 많은 부왕을 살해하였습니다. 부처님, 앞으로 제가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저의 이 죄악을 죄악으로 인정하시고 저를 받아 주십시오.” “대왕, 참으로 당신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큰 죄악을 저질렀소. 당신은 그처럼 덕이 많은 부왕을 살해하였소. 그러나 당신이 죄악은 죄악대로 인정하고 법에 따라 그 죄를 참회하겠다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누구든지 죄를 인정하고 법답게 참회하여 앞으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계를 지키려 한다면 성자의 계율이 번창할 것이오.” 아자타삿투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왕이 물러간 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아자타삿투왕은 진심으로 뉘우친 것이다. 만일 그가 부왕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바로 이 자리에서 마음의 때를 벗고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을 것이다.” <남전 장부 사문과경>
14. 허물어진 탑에는 흙을 바를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파바에 있는 어떤 동산에 머무르고 계실 때였다. 부처님은 달이 밝은 보름 밤에 맨땅에 앉아 비구들에게 법을 설한 다음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사방에서 많은 비구들이 모여 함께 정진하면서 자지 않는다. 나는 등이 아파 좀 쉬고 싶으니, 네가 비구들을 위해 법을 설해 주어라.” 부처님은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우셨다. 사리풋타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 파바성은 이교도 니간타가 살던 곳인데 그는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두 파로 갈라져 서로 잘잘못을 캐면서 시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법을 잘 알지만 너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바른 법을 가졌는데 너는 사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말이 서로 얽히어 앞뒤가 없이 저마다 자기 말만을 참되고 바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니간타를 따르던 이 고장 사람들은 다투는 무리들을 싫어합니다. 옳다고 주장하는 그 법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올바르지 못하면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허물어진 탑에는 다시 흙을 바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래의 법은 올바르고 참되어 해탈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탑은 장엄하게 꾸미기가 쉬운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교법과 계율을 모아 그들과 같은 다툼을 막고 청정한 수행을 쌓아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야겠습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안으로 살펴야 합니다. 만약 성냄과 원한을 가지고 저들처럼 대중을 어지럽힌다면 화합한 대중을 모아 널리 방편을 베풀어 다툼의 근본을 뽑아야 합니다. 맺힌 원한이 다했을 때는 그 마음을 거두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성냄이 뒤틀어지면 시기하고 교활하여 스스로 자기 소견에 말려들어 사견에 헤매고 치우친 편견에 떨어지고 맙니다.” 부처님은 사리풋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셨다.<장아함 중집경>
제2장 지혜와 자비의 말씀 #2
1. 탐욕의 재앙
부처님께서 카필라성 밖에 있는 니그로다 숲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사캬족의 왕 마하나마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는 오랫동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의 더러움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사히 받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와 같은 번뇌가 제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인가 제 마음에서 버려져야 할 것이 아직 버려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소, 마하나마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아직도 당신 마음에서 가셔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만약 마음속에 그와 같은 번뇌가 말끔히 가셔졌다면 당신은 가정에서 살지 않을 것이며, 또 갖가지 탐욕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오. 탐욕이란 어디를 가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오. 탐욕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오. 우리들을 절망의 구렁으로 떨어뜨리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오. 바른 지혜로써 그것이 그른 줄 알더라도 평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탐욕에 쫓기고 마는 것이오. 그것이 그른 것인 줄 바르게 알고 탐욕을 떠나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은 내 경험이오만,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 탐욕이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리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임을 알기는 알았었소. 그러나 평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탐욕에 쫓기면서 지내왔던 것이오. 그 후 그것이 그른 줄 바르게 알고 평안한 경지에 이른 그때부터 비로소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오. 탐욕에는 즐거움과 재앙이 있소. 탐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이 그것이오. 이 다섯 가지 탐욕에 대해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데 이것이 탐욕의 즐거움이오. 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추위와 더위, 바람과 비, 벼룩, 모기, 뱀들에 시달림을 받고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받소. 그래서 낙담과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 아니 그처럼 애쓰고 고생한 끝에 부자가 됐다 합시다. 이제 그는 부를 지키기 위해 전에 없던 걱정 근심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왕에게 몰수당하지 않을까.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불에 타지 않을까. 물에 떠내려 보내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귀찮은 친척들에게 뜯기지 않을까.’ 이와 같이 온갖 걱정을 하지만 마침내는 몰수당하고 빼앗기고 떠내려 보내고 뜯기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내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도 내것이 아니구나 하고 비탄에 빠지오. 이것이 탐욕의 재앙이오. 우리가 겪는 현재의 괴로움은 모두 탐욕에 기인한 것이오. 그리고 그 탐욕 때문에 왕은 왕과 다투고 바라문은 바라문과 다투며 부모는 자식과 다투고, 형제끼리 친구끼리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오. 다투고 싸우고 욕질하다가 마지막에 몽둥이를 들거나 칼을 휘둘러 서로 죽이기까지 하니 이것이 탐욕의 재앙이오. 또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몸을 망치고 함부로 빼앗으며 간음을 행합니다. 왕은 이들을 붙들어 온갖 형벌을 가합니다. 채찍으로 갈기고 몽둥이로 치며 팔과 다리를 끊고 귀와 코를 자르오. 또 목에서 발끝까지 가죽을 벗기고 팔과 무릎을 쇠기둥에 못박아 불을 지르오. 끓는 기름을 몸에 부어 굶주린 개에게 주고, 몸을 말뚝에 매어 칼로 목을 베오. 이와 같은 고통이 모두 탐욕의 재앙인 것이오. 마하나마여, 사람들은 이 탐욕 때문에 몸과 말과 생각으로 갖가지 악을 지어 죽은 후에는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소. 이것이 다 탐욕의 재앙으로서 미래의 고통 또한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오.” 마하나마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돌아갔다.<중아함 소고온경>
2. 세속에서 뛰어나는 법
부처님께서 강가강을 건너 앙가국 아바나라는 마을 밖 숲속에 머물러 계실 때였다. 하루는 거리에 들어가 밥을 빌고, 숲으로 돌아오니, 장자 포타리야가 양산을 받고 신을 신은 채 숲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을 보자 가까이 와서 인사한 뒤 앉지도 않고 머뭇거렸다. 부처님은 그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장자님, 자리가 있으니 앉으시오.” 포타리야는 장자라고 불린 것이 못마땅해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이 거듭 권하자 입을 열었다. “부처님 나를 장자라고 부른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장자의 차림을 하고 있지 않소?” “나는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소?” “나는 내 재산 전부를 아들에게 물려 준 뒤 아무 간섭 없이 다만 옷과 먹을 것만 받으면서 숨어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 가르침에서는 여덟 가지 법으로 세속을 떠나오. 그 여덟 가지란,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고, 화합을 깨뜨리지 않으며, 탐욕을 버리고 성내지 않으며, 시기하지 않고, 그리고 교만을 버리는 일 등이오. 그러나 이것으로도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오.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법은 따로 있소.” “그 법도 말씀해 주십시오.” “장자님, 이를테면 굶주린 개에게 살이 조금도 붙어 있지 않은 뼈를 던져 준다면 개는 굶주림을 달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뼈로 인해 피로와 고달픔은 더할 것이오. 내 제자는 이 뼈의 비유처럼 바른 지혜로 쾌락을 잘 살펴 그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라고 사실대로 알아 오욕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오. 독수리나 솔개 같은 날짐승이 고깃덩이 하나를 가지고 날아갈 때 다른 사나운 개가 쫓아와 그것을 덮치려 한다면, 새들이 그 고깃덩어리를 버리지 않는 한 서로 싸워 죽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것이오. 또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때 그 횃불을 버리지 않는 한 손을 데거나 타 죽게 될 것이오. 향락은 꿈과 같아 깨어 보면 아무것도 없소. 무서운 독사를 보고 손을 내밀어 물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남의 돈을 함부로 빌려 쓰면 마침내는 빚쟁이에 몰려 곤란을 당할 것이오. 나무 열매가 익은 것을 보고 올라가 따먹고 있을 때 누가 도끼로 나무 밑동을 찍는다고 합시다. 그때 나무에 오른 사람이 얼른 내려오지 않으면 손발을 다치거나,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될 것이오. 이것이 모두 욕락에 대한 비유입니다. 내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이런 비유와 같이 욕락을 관찰하고, 그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라고 바른 지혜로써 사실 그대로를 알아 세상 욕심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소. 내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얻은 청정으로 이 세상에서 해탈을 얻소. 이것을 내 가르침에서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법이라 하오. 당신도 이와 같이 세속을 떠났습니까?” “부처님,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전에 다른 가르침에 빠져, 모르는 것을 안다 하고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줄 알고, 아는 것을 아는 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사문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존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도가 되겠습니다.”
<남전 중부 포타리야경>
3. 백골로 돌아갈 육신
부처님께서 쿠루수의 서울 캄마싯담마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 있느니 곧 사념처법이다. 과거 모든 여래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비구는 그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 이 네 가지에 대해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이 몸을 바로 관찰하는 법인가. 비구가 숲속이나 나무 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바로하고 앉아 오로지 한 생각으로 호흡을 조절하되,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짧다는 것을 알아라. 온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이 몸을 관찰하되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 때에는 앉고 누웠다는 상태를 바로 보아 생각이 그 몸의 동작 밖에 흩어지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다만 이 몸 관찰하는 데에 머물게 하여라. 이와 같이 이 몸의 굴신과 동작의 상태를 사실대로 관찰하여 한 생각도 흩어지지 않게 되면, 몸에 대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 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이 세상 어떤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몸이 애초에 무엇으로써 이루어졌는지 사실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 몸은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된 것임을 밝게 보아야 한다. 솜씨 있는 백정이 소를 잡아 사지를 떼어 펼쳐 놓듯이 비구도 이 몸을 네 요소로 갈라 눈앞에 드러내 놓아야 한다. 숲속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이 몸도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형상이 눈앞에 역력하면 모든 허망한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숲속에 버려진 시체의 백골, 한두 해 지나 무더기로 쌓인 백골, 다 삭아 가루가 된 해골을 보는 것과 같이 비구들도 그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저 꼴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관찰하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는 몸에 대해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때와 장소를 따라 그 느끼는 작용에 대해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괴로움을 느끼는 작용, 즐거움을 느끼는 작용,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는 작용이다. 즐거움을 누릴 때는 즐거운 줄 알고, 괴로움을 당할 때는 괴로운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또한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타인의 느낌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 느낌이 눈앞에 나타난다. 느낌이 시시로 변해 고정된 괴로움이나 즐거움, 고정된 불고 불락이 없음을 알아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가 느낌에 대해 관찰하는 법이다. 또 어떤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법인가. 마음에 탐심이 일어나면 ‘이것이 탐심이구나’라고 알고, 탐심을 버리면 버린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낱낱이 안팎으로 살피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눈앞에 대하듯 하면 세상의 어떤 집착이라도 놓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바로 관찰하는 법이다. 끝으로 어떤 것이 관찰하는 것인가.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며, 또 탐욕이 일지 않았더라도 일어난 것으로 관하고, 일어났을 때에는 없어진 것으로 관하며, 이미 없어진 것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졸음, 산란함 마음, 의혹 등도 안팎으로 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그것이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관을 단 한 달만이라도 법대로 닦으면 탐욕과 불선법을 떠나 성인의 길에 들게 될 것이다. 이 사념처관은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져내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비구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중아함 염처경>
4. 최상의 법륜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곳 녹야원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도 또 어느 곳에서도 굴린 적이 없는 최상의 법륜을 처음으로 굴렸었다. 그것은 네 가지 진리인데, 곧 고, 집, 멸, 도이다. 비구들이여,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를 잘 섬기고 받들어라. 그들은 지혜로워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사리풋타는 너희들의 생모와 같고 목갈라나는 양모와 같으리라. 사리풋타는 처음 발심하여 수행하는 이를 잘 길러주고, 목갈라나는 그들을 이끌어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제 사리풋타가 너희들에게 네 가지의 진리를 잘 가리어 말해 줄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뜨셨다. 사리풋타는 모인 대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이 녹야원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도 또 어느 곳에서도 굴린 적이 없는 최상의 법륜을 굴리셨으니, 그것은 곧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고의 진리입니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요, 원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 고요, 사랑에는 이별이 있으니 그것이 고요,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고요, 걱정 근심과 번민과 슬픔이 고입니다. 한 말로 한다면 인생의 존재 그 자체가 고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나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중생들이 각기 그 종류를 따라 오온이 화합하여 목숨을 이룬 후 세상에 태어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나와 그 생명을 보존하고 키워 가려면 천만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이것을 태어남의 고라 합니다. 늙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털이 희어지고 이가 빠지며 얼굴이 쭈그러지고 등이 굽으며 기력이 쇠해집니다. 몸은 날로 무거워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다닐 때는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니 이것을 늙음의 고라 합니다. 병드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온몸은 균형을 잃고 기혈이 순조롭지 못해 두통이나 치통, 요통을 앓으며 눈이 어둡고 귀가 먹습니다. 혹은 열병, 냉병, 풍병, 습병으로 사지가 뒤틀리고 온갖 고통이 엄습하니 이것을 병고라고 합니다. 죽음의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중생들이 그 몸의 기력이 다하고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아직 끊어지지 않은 잔명이 죽음의 막다른 길에 이르러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죽음의 고라 합니다. 또 원수를 만나는 고라 함은, 일찍이 서로 미워하며 원한을 품고 해치거나 죽이려 했던 자와 만나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사랑에 이별이 있는 고라 함은,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부모와 처자라도 언젠가는 서로 이별하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고라 함은, 모든 중생은 나지 않으려고 해도 업에 따라 나게 되며, 나거든 늙거나 병들어 죽지 말든지 죽거든 나지 말든지 해야 할 텐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원하고 온갖 재난과 슬픔이 없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것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일단 생명을 받아 태어난 것은 결국 모든 고통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고의 진리입니다. 다음 어떤 것이 집의 진리입니까. 그와 같은 고의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이 다음 생의 업보를 부르게 되는 애욕과 번뇌를 말합니다. 어떤 것이 멸의 진리입니까. 저 애욕과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도의 진리입니까. 멸에 이르는 방법 즉 여덟 가지의 바른 길입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입니다.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보는 지혜요,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이요,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부질없는 잡담을 떠난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이요,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고 올바른 계행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른 생활이란 출가자의 생활 방법으로 부정한 장사나 점술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을 얻어 생활하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은 없애버리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억이란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선정이란 모든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어감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진리입니다.<중아함 분별성제경>
5. 정견과 사견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세 가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외도가 있는데, 슬기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밝게 가려내어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견해를 따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그릇된 견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괴롭든 즐겁든 모두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이다.’라고 한다. 셋째, 혹은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말한다. 나는 언제나 무엇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의견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하고 거짓말하고 탐욕과 성냄과 삿된 소견을 갖는 것도 모두 전생에 지은 업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또 모든 것은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약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살생하는 것도 자재천의 뜻이고,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그릇된 소견을 갖는 것도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그리고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살생하는 것에도 인과 연이 없고 그릇된 소견을 갖는 것에도 인과 연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에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을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비판이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되고 마침내는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그릇된 의견을 잘 가려내어 버림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이치로써 차근차근 설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셨다. 사리풋타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어떤 것이 부처님 제자의 바른 견해이며, 진리에 대해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통달할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불제자는 먼저 어떤 것이 불선법인지, 불선법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이 선법인지, 선법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제자의 바른 견해로 그 보는 바가 올바르고 절대적인 신념으로 진리에 통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불선법이란 산 목숨을 죽이는 일,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일, 사음, 거짓말, 악담, 이간질, 꾸미는 말, 탐욕, 성냄, 그릇된 소견 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불선법의 근본은 또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선법이란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을 하지 않고 거짓말과 악담과 이간질과 꾸미는 말을 하지 않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버린 것을 말하며, 이러한 선법의 근본은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음에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이와 같은 불선법과 그 근본을 알고 또 선법과 그 근본을 알면, 그는 탐욕과 성냄의 번뇌를 없애며 ‘나’를 내세우려는 아만을 버리고 무명을 끊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 현실의 괴로움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의 바른 견해로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올바른 진리를 통달하게 되는 길입니다.” 비구들은 사리풋타의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중아함 삼도경>
6. 뗏목의 비유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독수리 잡기를 좋아하는 아리카 비구는 나쁜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언젠가 말씀한 ‘장애’라는 법도 그걸 직접 실행해 보니 그렇게 장애가 되지 않더라고 말했다. 다른 비구들은 그릇된 그의 소견을 고쳐 주려고 토론도 하고 타이르기도 해보았지만 아무 보람이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처님을 아리타를 불러 꾸짖으신 후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땅꾼이 큰 뱀을 보고 그 몸뚱이나 꼬리를 붙잡았다고 하자. 그때 뱀은 몸을 뒤틀어 붙잡은 손을 물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뱀 잡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여래의 교법을 배우면서도 가르침의 뜻을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토론할 때 말의 권위를 세우려고 곧잘 여래의 교법을 인용하지만 그 뜻을 몰라 난처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여래의 가르침을 들으면 그 뜻을 깊이 생각하여 진리를 바르게 알기 때문에 항상 기쁨에 싸여 있다. 이를테면 어떤 땅꾼은 큰 뱀을 보면 곧 막대기로 뱀의 머리를 꼭 누른다. 그때 뱀이 자기를 누르는 손이나 팔을 감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그 때문에 물려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뱀 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또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갈까?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겠군.’ 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그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바다를 건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뗏목에 대해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야 자기 할 일을 다하게 되겠는가. 그는 바다를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워 놓고 이제 나는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서 할 일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을 배워서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자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 <남전 중부 사유경>
7. 네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뗏목의 비유를 말하고 난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소견이 일어날 수 있는 다섯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물질과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이다. 무지해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경우에 대해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나’다’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많이 배우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 다섯 가지에 대해서 그와 같이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하여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이때 어떤 비구가 물었다. “부처님, 어떤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이것이 전에는 내것이었는데 이제는 내것이 아니다. 다시 내 소유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래서 그는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고 운다. 이것이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떠는 일이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지 않는다면 그는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부처님, 그렇다면 마음속의 어떠한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세계와 나 자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나는 없다’고 하는 여래의 가르침을 들으면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 것이다. 이것이 마음속의 어떠한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다. 너희들은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되는 것을 가지고 있거나 본 일이 있느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는 ‘나’에 집착하면 항상 근심과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있다면 내것이 있을 것이고 내것이 있다면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것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계와 내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소견이다. 이 가르침을 안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들어서 물질과 분별을 싫어하고 욕망을 버리고 해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구를 가리켜 장애를 벗어난 자, 장애를 부순 자, 번뇌의 기둥을 빼어버린 자, 걸림이 없는 자,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자, 속박을 벗어난 성자라 부른다. 이와 같이 말한 내게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저 사문 고타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없어져 버린다고 가르치는 자다’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이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현재의 고뇌를 말하고 그 고뇌를 끊어 없애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남들이 비난하고 욕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 또 누가 칭찬하고 공경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기뻐하거나 우쭐거리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칭찬하거나 나는 ‘그들이 내게 이렇게 하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너희 것이 아니란 것은 무엇인가. 물건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물질을 버려라. 감각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감각을 버려라. 생각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을 버려라. 의지 작용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의지 작용을 버려라. 의식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의식을 버려라. 어떤 사람이 이 숲속에 와서 풀과 나뭇가지를 날라다 불사른다고 하자. 너희들은 이때 그는 우리 물건을 날라다 마음대로 불사른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나도 아니고 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너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남전 중부 사유경>
8.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얻는 도
부처님께서 베사카라 숲에 계실 때 아니룻다는 파치나 숲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선정에 들어 생각하였다. ‘아, 이 도는 욕심이 없는 데서 얻는 것이고 욕심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구나. 이 도는 만족할 줄 아는 데서 얻는 것이고 족할 줄 모르면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군중을 멀리 떠남으로써 얻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번거로움 가운데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바른 생각으로써 얻는 것이고 그릇된 생각으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고요 속에서 얻는 것이고 시끄러운 속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지혜로운 사람이 얻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때 아니룻다의 생각을 아시고 아니룻다 앞에 나타나셨다. “착하다, 아니룻다. 너는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있구나. 그 다음 한 가지는 부질없는 궤변을 하지 않는 일다. 너는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해 수행하는 동안 욕심과 옳지 못한 것을 버리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맛보아 초선을 거쳐 제이, 제삼, 제사 선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네가 이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제사선의 기쁨에 들어가면, 여인들이 여러 가지 옷을 옷장에 가득 채워 두고 즐거워하듯이 만족함을 느끼고 기쁨에 넘쳐 다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열반의 길을 가는 너는 남루한 옷도 마음에 들 것이고, 빌어먹는 밥도 맛이 있을 것이며, 나무 밑 풀자리에 앉아도 마음은 늘 즐거울 것이고,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썩은 거름으로 만든 약이라도 만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다시 베사카라 숲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을 가르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해서 나는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말하지 마라. 만족함을 알았다고 해서 나는 만족할 줄 알았다고 말하지 마라.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해서 나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궤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궤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이것이 욕심을 적게 가지는 법이다. 또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주나 약을 얻더라도 그것을 만족하게 여김이다. 멀리 떠나는 법이란 비구의 처소에 어떤 비구, 비구니, 신남, 신녀 혹은 왕이나 이교도가 오더라도 비구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기는 마음에서 진실한 법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진하는 법은 비구가 나쁜 법을 버리고 좋은 법을 얻기 위해 정진할 때에 확고하게 설법에 대한 책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생각하는 법이란 비구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이전에 해 온 온갖 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을 돌이켜보고 새로운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법이란 법의 흥성하고 쇠함을 지혜로 살펴 네 가지 진리의 도리를 잘 아는 것이다. 궤변을 즐기지 않는 법이란 그 마음이 궤변 없는 경지로 나아가 부질없는 이론이 끊겨진 경지에 이르러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다.” <중아함 팔념경>
9. 검은 업과 흰 업
용모가 뛰어난 가미니는 이른 아침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을 섬깁니다.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바라문은 마음대로 죽은 이를 천상에 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원컨대 법의 주인이신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이 목숨을 마치거든 천상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미니여,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아는 대로 대답하여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게다가 산 목숨을 죽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사음을 행하며, 거짓말을 하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업만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십시오’라고 했다고 하자. 가미니여, 이렇게 여러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게으른 그가, 더구나 온갖 나쁜 업을 지은 그가 축원을 받았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못가에 모여서 ‘돌아, 떠올라라’ 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쁜 업은 검은 것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밑으로 내려가 반드시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고 온갖 착한 업을 닦는다고 하자. 그가 목숨을 마칠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당신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여 온갖 착한 업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에 가서 지옥에 떨어지십시오.’라고 저주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과연 그들의 저주대로 지옥에 떨어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착한 업은 흰 것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름병을 깨뜨려 못물에 던지면 부서진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지만, 기름은 물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한 육신은 흩어져 까마귀와 새가 쪼아 먹고 짐승들이 뜯어 먹거나 혹은 태우거나 묻히어 마침내는 흙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마음의 업식만은 항상 믿음에 싸이고 정진과 보시와 지혜에 싸여 저절로 위로 올라가 좋은 곳에 나는 것이다. 가미니여, 산 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특한 소견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이 있다. 이른바 팔정도가 위로 오르는 길이며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가미니와 여러 비구들이 다들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중아함 가미니경>
10. 설법과 침묵
부처님께서 어느 날 오후 아난다를 데리고 아지타바티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셨다. 목욕을 끝낸 후 부처님은 아난다의 청을 받아들여 바라문 람마카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 마침 람마카의 집에서는 많은 비구들이 모여 설법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문 밖에 서서 비구들의 설법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이윽고 설법이 끝난 것을 안 부처님은 문을 두드렸다. 곧 비구들이 나와 문을 열고 부처님을 맞아들였다. 부처님은 자리에 앉은 뒤 물으셨다. “너희는 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였으며 무슨 일로 여기 이렇게들 모였느냐?” “부처님, 조금 전에 저희들은 법을 설하였으며, 그 법을 설하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착하다. 비구들이여, 너희는 모여 앉으면 마땅히 두 가지 일을 행해야 한다. 하나는 설법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중아함 나마경>
11. 독 묻은 화살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말룽캬 존자는 홀로 조용한 곳에 앉아 이렇게 생각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부처님은 이러한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겠다.’ 말룽캬는 해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로 갔다. 아까 혼자서 속으로 생각한 일들을 말씀드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님께서는 저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기탄없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물으셨다. “말룽캬, 내가 이전에 너를 위해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따라 수행을 하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그 밖의 의문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에 너를 위해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다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따라 도를 배웠느냐?” “아닙니다.” “말룽캬여, 너는 참 어리석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너에게 말한 일이 없고 너도 또한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너는 어째서 부질없는 생각으로 나를 비방하려고 하느냐?” 말룽캬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 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깃이 매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며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펴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중아함 전유경>
12. 길을 가리킬 뿐이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자모 강당에 계실 때였다. 바라문 출신인 수학자 목갈라나가 부처님을 찾아와 말했다. “부처님, 여쭐 말씀이 있는데 들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목갈라나, 마음대로 물어서 의문을 풀도록 하시오.” “부처님, 이 녹자모 강당의 층계는 일층을 오른 뒤에 이 삼사 층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층계를 따라 차츰차츰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도 순서를 따라 길들일 수 있습니다. 바라문들도 차례를 따라 베다를 배웁니다. 우리들이 수를 배우고 수학으로써 살아가는 것도 또한 순서에 따라 차츰차츰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부처님이 법과 율에는 어떠한 순서가 있어 차츰차츰 성취하게 됩니까?” “목갈라나여, 바른 주장이라면 그것은 순서대로 차츰차츰 성취하게 될 것이오. 나는 이 법과 계율을 순서대로 성취하였소. 만약 나이 어린 비구가 처음으로 와서 도를 배우고자 하여 법과 계울에 들어오면 나는 먼저 이렇게 가르치오. ‘너는 와서 목숨을 다해 몸을 지켜 청정하게 하고 말과 뜻을 지켜 청정하게 하라.’ 그가 시킨 대로 하면 나는 다시 그 다음을 가르치오. ‘너는 홀로 멀리 떠나 나무 밑이나 숲속 혹은 무덤 사이 같은 한적한 곳에서 살아라. 그런 곳에 가서 단정히 앉아 원을 바로 세워 생각이 다른 데로 팔리지 않도록 하여라. 남의 재물과 가구를 보더라도 탐심을 내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가져라. 성냄과 수면에도 그렇게 하고 의심을 끊고 미혹을 막아 그 마음을 깨끗이 지켜라.’ 목갈라나여, 그러나 장로 비구나 학덕이 높은 바라문에게는 더 깊은 것을 가르치오. 구경에 가서는 모든 번뇌가 다하고 지혜를 얻는다고 가르치오.” “부처님, 그와 같이 가르치고 훈계하면 제자들은 다 구경의 지혜를 얻어 반드시 열반을 얻게 됩니까?” “누구나 한결같을 수는 없소.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소.” “열반은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은 현재 그 길을 가리키시는 분인데, 어째서 그들은 구경의 열반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합니까?” “목갈라나여, 당신에게 묻겠소. 당신은 라자가하를 알고 거기로 가는 길도 알고 있소?”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라자가하와 그 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당신은 아는 대로 가르쳐 줄 것이오. 그러면 그는 가르쳐 준 길대로 따라가면 거기에 도달할 것이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 길을 들거나 게으름을 부린다면 끝내 그 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오. 라자가하가 있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리고 당신은 그 길잡이였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가지 못하오?” “부처님, 저는 그 일에 책임이 없습니다. 제 가르침을 따른 사람은 도달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소. 나도 또한 책임이 없소.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어 나는 길잡이로서 비구들에게 가르치고 훈계하였지만, 열반을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한 이도 있소. 그러니 그것은 저마다의 행동에 달린 것이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고 그의 행동에 달린 것이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고 그의 행동을 보고 ‘마침내 번뇌가 다하였다’고 인정할 따름이오.” 수학자 목갈라나는 모든 의심이 풀렸다. “부처님,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에 귀의합니다. 원컨대 저를 받아 신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부터 이 몸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학자 목갈라나와 비구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중아함 산수목건련경>
제 3장 지혜와 자비의 말씀 #3
1. 괴로움을 없애려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 혼자 고요한 곳에 앉아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 생,노,병,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생,노,병,사와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어 생이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생이 있는가?’ 그렇다 취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취는 사물에 맛들이고 집착하여 돌아보고 생각하여 마음이 거기에 묶이면, 애욕이 더하고 자라나게 된다.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가 있고, 또 욕망을 인연하므로 취가 있다.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켜지고 기름과 심지를 더하면 오래 가게 된다. 그와 같이 사물을 취하고 맛들이고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면 욕망의 무더기는 더하고 자라난다.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어야 노,병,사가 없어질까?’ 그렇다, 생이 없으면 노,병,사도 없을 것이다. 존재가 없으면 생도없다. 취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욕망을 떠나 마음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묶이지 않으면 욕망도 곧 멸할 것이다. 그 욕망이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존재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도 멸한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는 것이다. 기름과 심지로 등불을 켜는 것이므로 기름을 더하거나 심지를 돋우지 않으면 등불은 오래지 않아 꺼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덧없이 생명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욕망을 끊어 버리고 마음이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묶이여 집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괴로움의 무더기도 멸해 없어질 것이다.” <잡아함 불전경>
2. 너무 조이거나 늦추지 마라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 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여,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소오나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으로 해탈한 기쁨을 지니고 부처님을 찾아가 뵈었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의 법안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번뇌를 다하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버렸습니다. 또 바른 지혜로써 욕심을 떠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로부터의 해탈, 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 등 여섯 가지 해탈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만약 조그마한 신심으로 욕심을 떠나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소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써 자기는 성냄에서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성냄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양을 멀리 벗어나려고 닦아 익힌 것으로써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가리켜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로부터의 해탈,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존자 소오나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기뻐하셨고 수행자들도 한결같이 환희에 젖었다. 소오나가 그 곳을 떠나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그와 같이 말해야 한다. 소오나는 지혜로써 말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추켜세우지도 않고 남을 낮추지도 않고 그 이치를 바로 말하였다.” <잡아함 이십억이경>
3. 법을 보는 이는 여래를 본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성 밖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무렵 박칼리라는 비구는 라자가하에 있는 어떤 도공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병은 날로 위독해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곁에서 간호하고 있는 스님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스님, 미안하지만 부처님이 계시는 죽림정사에 가서 부처님께 제 말을 전해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내 병은 날로 더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소원으로 저는 부처님을 한번 뵙고 예배를 드렸으면 싶은데, 이 몸으로 도저히 죽림정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의 뜻을 부처님께 좀 사뢰어 주십시오.” 간호하던 스님은 부처님을 찾아가 박칼리의 소원을 여쭈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처님은 그 길로 성 안에 있는 도공의 집으로 오셨다. 박칼리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앓는 몸을 뒤척이었다. 부처님은 박칼리의 머리맡에 앉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그대로 누워 있거라. 일어날 것 없다. 병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 박칼리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통 먹을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 하여 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박칼리여, 너는 어떤 후회되는 일이나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은 없느냐?” “ 부처님이시여, 저는 적지 않은 후회와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뵙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후회되고 원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정색을 하고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형체를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형체는 덧없는 것입니다.”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도 덧없는 것입니다.” “박칼리여, 덧없는 존재는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주체가 없다. 또 덧없는 것에는 나와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봄으로써 내 제자들은 형체와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을 싫어하고 욕심을 떠나 해탈하고 해탈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박칼리는 지혜의 눈을 떴다. <잡아함>
4. 복짓는 사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많은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실 때엿다. 그 자리에는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설법 도중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처님은 설법이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여,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않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여,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타이름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의사 자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하셨다. 아니룻다의 증세를 살펴본 자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니룻다님이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쉰다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니 큰 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여,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고,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으며,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리고 여래는 열반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열반은 무엇으로 먹이를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먹이를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였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 하였으나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꿰어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하였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부처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여,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더 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한 법의 몸이신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도 복의 힘은 가장 으뜸이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니룻다, 너도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은 너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증일아함 구품>
5. 바다의 진리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야원에서 오백 명의 비구들과 같이 계실 때였다. 그때 부처님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젊은이를 만나 물으셨다. “바다 속에는 무슨 신기한 것이 있기에 너희들은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느냐?” 젊은이는 대답했다. “바다 속에는 여덟 가지 처음 보는 법이 있으므로 저희들은 거기서 즐깁니다. 첫째,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넓습니다. 둘째, 바다에는 신비로운 덕이 있는데 네 개의 큰 강이 각각 오백의 작은 강과 합쳐서 바다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셋째, 바다는 모두 똑같은 한맛입니다. 넷째, 드나드는 조수가 그 때를 어기지 않습니다. 다섯째, 여러 중생들이 그 속에서 삽니다. 여섯째, 바다는 어떠한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비좁아지지 않습니다. 일곱째, 바다에는 진주와 같은 여러 가지 진귀한 보석이 있습니다. 여덟째, 바다에는 금모래가 있고 네 가지 보배로 된 수미산이 있습니다. 여래의 법에는 어떤 것이 있기에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깁니까?” “내게도 여덟 가지 처음 보는 법이 있어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기고 있다. 첫째, 내 법 안에는 계율이 갖추어져 있어 방일한 행이 없다. 그것은 저 바다처럼 매우 깊고 넓다. 둘째, 세상에는 네 가지 계급이 있지만 내 법 안에는 마치 네 개의 강이 바다에 들어가면 한맛이 되듯이 도를 배우게 되면 그들은 그전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셋째, 정해진 계율에 따라 차례를 어기지 않는다. 넷째, 내 법은 결국 똑같은 한맛이니 팔정도가 그것이다. 다섯째, 내 법은 갖가지 미묘한 법으로 가득차 잇다. 바다에 여러 중생들이 사는 것처럼 비구들은 그것을 보고 그 안에서 즐긴다. 여섯째, 바다에 온갖 보배가 있듯이 내 법에도 온갖 보배가 있다. 일곱째, 내 법 안에는 온갖 중생들이 집을 떠 머리를 깍고 법복을 입고 도를 닦아 열반에 든다. 그러나 내 법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다. 바다에 여러 강이 들어와도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과 같다. 여덟째, 큰 바다 밑에 금모래가 깔려 있듯이 내 법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삼매가 있다. 비구들은 그것을 알고 즐기는 것이다.” 젊은이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거룩하십니다. 부처님 여래의 법 가운데 처음 보는 법들은 바다의 그것보다 백 배 천 배 뛰어나 견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인의 여덟 가지 길입니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차례로 법을 말씀하셨다. 보시와 계율과 천상에 나는 법을 가르치셨고, 탐욕은 더럽고 번뇌는 큰 재앙이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열리고 의심이 풀린 것을 보시고 괴로움과 그 원인과 없앰과 없애는 길 등의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증일아함 팔난품>
6. 법다운 보시
라자가하에 바드리카리는 부호가 있었다. 그는 재산이 남아 주체할 수 없이 많으면서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남에게 조금도 베풀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에 지은 공덕을 까먹기만 하고 새로운 공덕을 쌓을 줄 몰랐다. 그는 어찌나 인색했던지 일곱 개의 문을 겹겹이 닫아 얻으려 오는 사람을 막았고, 그물을 쳐 새들이 뜰에 내려와 모이를 쪼아먹는 것까지 막았다. 어느 날 목갈라나, 카샤파, 아니룻다 들이 모여 바드리카를 교화하기로 의논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이때 바드리카는 자기 방에서 혼자 맛있는 떡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바리를 들고 나타난 아니룻다를 보고 놀랐다. 마음으로는 아주 못마땅했지만 아니룻다에게 남은 떡을 조금 주었다. 아니룻다가 돌아간 후에 그는 문지기를 불러 왜 사문을 들여 놓았느냐고 꾸짖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바드리카가 이번에는 구운 떡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때 불쑥 카샤파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또 하는 수 없이 먹던 떡을 조금 떼어 주었다. 카샤파가 돌아간 후에 다시 문지기를 불러 꾸짖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몰라 잔뜩 화가 난 그는 사문들이 요술을 부려 사람을 놀리는 것이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그의 아내가 칫타 비구의 누이동생인데, 남편의 욕설을 듣고 말했다. “그렇게 욕설을 마세요 당신은 두 스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먼저 분은 카필라의 드로노다나왕의 아들 아니룻다 스님입니다. 그분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천안통이 으뜸이라고 합니다. 또 한 스님은 카필라 부호의 외아들 카샤파입니다. 그분은 뛰어난 미인을 아내로 맞았다가 함께 출가하여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부처님께 두타 제일이라고 칭찬받은 스님입니다. 그와 같은 두 스님이 우리 집에 오신 것은 다시 없는 영광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언젠가 그 이름을 들은 것 같군.” 이때 목갈라나는 쇠그물을 뚫고 공중에 뜬 채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바드리카는 놀랍고 두려워 이렇게 소리쳤다. “너는 천신이냐, 귀신이냐, 간다르바냐, 야차냐?” “천신도 아니요 귀신도 간다르바도 야차도 아니오. 나는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이며 법을 설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나타난 것이오.” 바드리카는 그가 사문이라는 말을 듣고 보시를 청하는 거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요구가 있더라도 거절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목갈라나는 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법과 재물 두 가지 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정신차려 잘 들으시오. 내 이제 법의 보시를 말하리라. 부처님은 다섯 가지로 이 법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 둘째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않는 것, 셋째는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는 것, 넷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이 다섯 가지가 법의 보시입니다. 당신은 한평생 이 큰 보시를 지켜야 합니다.” 바드리카는 이 다섯 가지 법보시가 아무 손해될 것 없음에 우선 마음이 놓였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고, 자기는 부자이니 남의 것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않는 것은 좋은 일이며, 더구나 술 마시지 말라니 그것은 돈을 모으는 요긴한 방법이라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부처님은 가르침이 이런 것이라면 즐겨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목갈라나를 청해 처음으로 공양을 내었다. 공양을 마친 뒤 다시 옷을 공양하기 위해 창고에 들어가 가장 허름한 천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이 저절로 좋은 천으로만 옮겨져 집었다가 놓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이때 문득 목갈라나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남에게 베풀면서 마음과 싸우는 것은 어질고 착한 이로서는 차마 못할 일, 보시란 원래 싸움이 아니니 당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오.” 바드리카는 이 소리를 듣자 자기 마음이 환히 드러나 보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좋은 천을 가져다 목갈라나에게 공양했다. 목갈라나는 옷감을 받고 그를 위해 다시 보시의 공덕에 대한 법을 설했다. 설법을 들은 바드리카는 비로소 마음의 눈이 띄어 기뻐하면서 한평생 부처님의 신도가 되기를 맹세했다. <증일아함 성문품>
7. 피할 수 없는 죽음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파세나디왕은 나라 일로 성 밖에 나가 있었다. 그 때 왕의 어머니는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불행히도 아이 나가고 없는 사이에 돌아가셨다. 지혜로운 신하 불사밀은 효성스런 왕이 이 불행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까 염려한 끝에 어떤 방편을 써서라도 왕의 슬픔을 덜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백 마리의 코끼리와 말과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많은 보물과 기녀들을 실은 뒤 만장을 앞세워 풍악을 잡히면서 상여를 둘러싸고 성 밖으로 나갔다. 왕의 일행이 돌아오는 도중에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은 호화로운 상여를 보고 마중 나온 불사밀에게 물었다. “저것은 어떤 사람의 장례 행렬인가?” “성 안에 사는 어떤 부잣집 어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왕은 다시 물었다. “저 코끼리와 말과 수레는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그것들은 염라왕에게 갖다 바치고 죽은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하려고 한답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리석은 짓이다. 목숨이란 멈추게 할 수도 없지만 대신할 수도 없는 것. 한번 악어의 입에 들어가면 구해낼 수 없듯이, 염라왕의 손아귀에 들면 죽음은 면할 수 없다.” “그러면 여기 오백 명의 기녀들로 죽은 목숨을 대신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녀도 보물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면 바라문의 주술과 덕이 높은 사문의 설법으로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왕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한번 악어 입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것, 생이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겠는가. 부처님께서도 한번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거늘.” 이때 불사밀은 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대왕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다 죽는 법입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태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왕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착하구나. 불사밀이여, 그대는 미묘한 방편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구나. 그대는 참으로 좋은 방편을 알고 있다.” 파세나디왕은 성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향과 꽃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공양하고 나서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수레를 몰았다. 전에 없이 한낮에 찾아온 왕을 보고 부처님이 물으셨다. “이 대낮에 웬 일이오?” “부처님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백 살에 가까운 어머님은 매우 노쇠했지만 저는 한결같이 공경해왔습니다. 만약 이 왕의 자리로 어머님의 죽음과 바꿀 수 있다면, 저는 왕위뿐 아니라 거기에 따른 말과 수레와 보물과 이 나라까지도 내놓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은 반드시 죽는 법입니다. 모든 것은 바뀌고 변하는 것 아무리 변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렇게 될 수는 없소, 마치 질그릇은 그대로 구운 것이건 약을 발라 구운 것이건, 언젠가 한번은 부서지고 마는 것과 같소. 네 가지 두려움이 몸에 닥치면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오. 그 네 가지란, 늙음과 질병과 죽음과 무상이오.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소. 마치 큰 산이 무너져 사방에 덮쳐 누르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소. 견고하지 못한 것은 아예 믿을 것이 못되오. 그러므로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고 법이 아닌 것을 쓰지 마시오.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면 그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천상에 태어나지만, 법 아닌 것으로 다스리면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왕은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 슬품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나라 일이 많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파세나디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물러갔다. <증일아함 사억단품>
8.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마가다나라에 머무르면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강변으로 나가셨다. 때마침 강 한가운데 큰 통나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저기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보아라. 만일 나무가 이쪽 기슭이나 저쪽 기슭에 닿지 않고 중간에 가라앉지도 않고, 섬에 얹혀지지도 않으며, 사람에게 건져지거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히지도 않으며, 물을 따라 돌아오거나 물 가운데서 썩지 않는다면, 저 나무는 결국 바다로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그와 같아서 만일 도의 강물 위에서 이쪽 기슭이나 저쪽 기슭에 닿지 않고, 중간에 가라앉거나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히지 않고, 물을 따라 돌아오거나 썩지 않는다면, 열반의 바다에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은 반드시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때 난다라는 소치는 사람이 멀리서 이 말씀을 듣고 부처님께 와서 여쭈었다. “부처님, 저도 지금부터 그렇게 노력한다면 열반에 이르게 됩니까?” “물론 그렇다. 누구든지 그와 같이 하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도 사문이 되어 도 안에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네가 맡아 있는 그 소를 주인에게 돌려준 뒤에라야 사문이 될 수 있다.” “이 소는 집이 있는 송아지를 생각하지 때문에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제가 사문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 소는 혼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네가 끌고 가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자 난다는 소를 돌려주고 와서 사문이 되었다. 사문이 된 난다는 부처님께 또 물었다. “부처님, 양쪽 언덕은 무엇이며, 중간에 잠기고 섬에 얹히며,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힌다는 것은 무엇이며, 물을 따라 돌아오고 썩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이쪽 기슭이란 육신을 말하고, 저쪽 기슭이란 육신이 없어짐을 말한다. 중간에 가라앉음은 욕락에 빠지는 일이고, 섬에 얹힌다는 것은 교만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잡힌다는 것은 비구가 재가신도와 사귀어 세속의 정을 같이 함으로써 도 닦는 마음을 타락케 함이고, 사람 아닌 것에 잡힌다는 것은 비구가 천상에 나기 위해 수행하되 ‘이 계행과 이 고행에 의해 천상에 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을 따라 돌아옴이란 그릇된 의심이고, 썩는다는 것은 비구들이 성질이 악하고 계를 지키지 않으며, 착한 일에 용감하지 못하고 자기 허물을 덮어 높으며, 청정한 수행자가 아니면서도 청정한 수행자인 체하는 것을 말한다.” <증일아함 마혈천자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