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사찰순례지는 완주 대원사, 김제 금산사입니다.
대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670년(신라 문무왕 10) 일승(一乘)스님이 심정(心正)·대원(大原)스님 등과 함께 창건하였다. 일승스님 등은 고구려보장왕(재위: 642∼668) 때 백제에 귀화한 보덕(普德)스님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모두열반종의 교리를 익힌 뒤 보덕스님이 머물고 있는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대원사(大原寺)라 하였다. 한때는 대원사(大圓寺)로 표기하였으나, 현재는 대원사(大院寺)라고 한다. 1066년(고려 문종 20) 원명국사(圓明國師)징엄(澄嚴: 1090∼1141)국사가 중창하였는데, 이 때를 창건한 때로 보기도 한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나옹(懶翁)혜근(惠勤)선사가 중창하였고, 1415년(태종 15)에도 중창하였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06년(선조 39) 진묵(震默)일옥(一玉)대사가 중창하였고, 1733년(영조 9) 동명(東明) 천조(千照)스님이, 1886년(고종 23)에는 건봉사(乾鳳寺) 승려 금곡(錦谷)스님이 중창하였다. 금곡스님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칠성각을 짓고 산내암자인 내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옮겨왔다. 조선 말기 종교사상가로 유명했던 증산(甑山)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이 절에서 도를 깨우쳤다.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탔으며, 1959년 덕운스님이 요사를 다시 세우며 불사를 일으켜 1960년 칠성각, 1962년 산신각을 세웠다. 1993년에는 칠성각을 헐어 요사채를 짓고 1990년 장마로 무너진 산신각을 삼성각으로 다시 세웠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나한전·응향각·삼성각·봉익루·범종각·구요사·객실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건물이다.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아미타불과 약사불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있다. 불상뒤에는 삼신후불탱화와 칠성탱화·신중탱화가 있으며, 탱화 옆에는 진묵일옥대사의 진영이 걸려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고종 24) 금곡스님과 수산거사가 세웠다. 내부에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판관·녹사·사자·인왕·동자등 지장보살 권속이 모셔져 있다. 유물로는 2기의 오층석탑과 6기의 부도 등이 있다. 오층석탑은 대웅전 앞과 뒤에 각 1기씩 서 있다. 뒤에 있는 석탑은 높이 238cm로 고려 시대 유물이고,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은 높이 420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부도는 모두 9기 있었으나 대웅전 남쪽 아래에 있던 3기는 소재가 불분명하다. 남아 있는 6기의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유물은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각(龍刻) 부도이다. 옥개석 가운데에 두 마리의 용이 뒤엉켜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 187cm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7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대웅전 안에 있던 목각사자상은 1606년 이 절을 중창한 일옥대사가 만든 것으로, 북을 올려놓는 북대이다.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가 도난되면서 지정이 해제되었다.
금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서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過去佛)인 가섭불(迦葉佛)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율사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율사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대사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을 끝낸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主佛)로 모셨고, 금당(金堂)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육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율사의 중창 이후 후백제 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慧德)대사가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석련대(石蓮臺)·오층석탑·노주(露柱)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간경(看經)·법석(法席)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규모가 큰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智訓)·덕행(德行)·석준(釋俊)·천정(天淨)·응원(應元)·학련(學蓮)·태전(太顚)·운근(雲根) 등이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남악(南岳)대사가 화엄대법회를 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摠攝)으로 취임한 용명(龍溟)대사가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成烈)스님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율사와 혜덕대사를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僧統) 도생(導生)대사, 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해원(海圓)대사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處英)대사과 서산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던 태능(太能), 편양파(鞭羊派)의 후계자인 남악·태우(泰宇)대사 등이 머물렀다.
또한 포광(包光)이 지은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신라 문성왕 때부터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和尙) 또는 사주(寺主)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 1902년에는 섭리(攝理)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거대한 사역에 대사(大寺)·봉천원(奉天院)·광교원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년 만에 대사지역의 건물만 재건되었고, 나머지 사지(寺址)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 전해지고 있다.
근년에 월주(月珠)큰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약 500m 밖에 위치하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普濟樓)·미륵전·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승당(僧堂)·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였다.
또한 1962년 국보 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鐵須彌座)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보물로 지정된 중요 문화재로는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된 금산사 노주(보물 22호), 금산사 석련대(보물 23호), 금산사 혜덕왕사탑비(보물 24호), 금산사 오층석탑(보물 25호), 금산사 금강계단(보물 26호),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보물 27호), 금산사 당간지주(보물 28호),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보물 29호), 1985년 보물로 지정된 금산사 대장전(보물 827호), 금산사 석등(보물 828호), 등이 있다.
대적광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1922년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覆鉢)과 보주(寶珠)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전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아난(阿難)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으며, 나한전은 방등계단(方等戒壇)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방등계단 앞에는 1998년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일주문은 1975년에 고평용이 건립하였으며,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서 법요(法要)와 강설당(講說堂)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현존하는 당우로는 성렬이 1939년에 신축한 종각과 1940년에 신축한 중향각(中香閣), 1943년에 신축한 칠성각, 연대 미상의 송대향각(送大香閣)이 있다. 또한 1999년에 금산사 내의 성보문화재를 보관 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을 경내에 지었다.
석조유물 중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다. 이 계단에 부도가 있으므로 탑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방등계단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의 정중탑(庭中塔)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의 부속 암자 등으로는 심원암, 용천암, 청련암, 부도전이 있다.
① 심원암(深遠庵): 금산사에서 동북쪽으로 1.5㎞ 지점에 있다.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인법당과 산성각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암자이기 때문에 연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원암의 북쪽 산정 0.5㎞ 지점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탑돌이를 하면서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 성취한다고 하여 전국의 신도들이 찾고 있어 한때 별도의 객사를 따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② 용천암(龍天庵): 금산사의 동쪽 기슭 1.8㎞ 지점에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지금의 본당인 관음전과 요사는 1974년에 중건한 것이다. 산세가 용이 비천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용천암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법당 자리는 용의 혀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한다.
③ 청련암(靑蓮庵): 금산사에서 1.5㎞ 거리에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정유재란 이전에는 청사굴(靑社窟)이라고 불렀다. 1959년 극락전과 삼성각, 그리고 두 동의 묘사(廟祠)로 구성되어 있는데, 1962년 대법화보살이 중창했다.
④ 부도전(浮屠殿): 금산사의 동쪽 0.2㎞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혜덕왕사의 탑비를 비롯하여 남악당선사(南嶽堂禪師)의 부도 등 모두 12기의 부도와 2기의 비석이 있다.
- 순례일시 : 2023. 3. 5(일) 08:00 대전세무서 출발
- 순례장소 : 대원사, 금산사
- 순례코스 : 대전(08:00) - 대원사 사시불공(10:30~11:30) - 점심공양(11:30~12:30) - 금산사 및 부속암자(13:30~15:00) - 대전(17:00)
* 점심공양 : 대원사
- 순 례 비 : 40,000원
- 입금계좌 : 하나은행 740-910157-83807 정인자(010-5454-4560)
대원사 :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모악산길 243) 063-221-8502
금산사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모악 15길 1) 063-548-4441(팩스 063-548-1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