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어디?
최봉호
여러 사람들이 고향인 그곳을 얘기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곳은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말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에서의 그곳이다. 실개천이 흐르고, 황금빛 들판에서 황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시골풍경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향의 모습이다.
낭만가객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노래도 자기 고향인 부산에 대한 얘기이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스폰 소릴 들어보렴, 샛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스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이 가사를 쓸 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2~30대엔 쓸 수 없는 가사다. 이 노래를 통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새삼 느낀다. 가사의 장소 배경은 그가 우연히 갔던 부산 동래의 한 다방이다. 다방에서 색소폰 음악을 듣고 가슴의 울림을 느껴 만들었다고 한다.
반면에 권성희 가수는 <나성에 가면>에서 자기를 떠난 사람이 새롭게 꿈을 펼칠 미래의 그곳을 노래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 ~~.”
다들 고향을 분명하게 멋있게 얘기하는데, 나의 고향은 좀 애매하게 다가온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용인 백암 면소재지이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20대 젊었을 적 직장을 다녔고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는 백암에서의 특별한 추억은 별로 없다. 백암에서 오리 떨어진 외갓집이 있는 용인 원삼면 두창리 벌터라는 곳에서의 추억이 훨씬 많다. 외갓집은 원래 안성군 고삼면에 있었는데, 그곳이 저수지가 되는 바람에 ‘벌터’라는 마을로 이사해 터를 잡았다. 나는 초·중·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외갓집이 있는 그곳에서 살았다. 벌터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30여 호가 있었고, 70년대 중반까지 전기가 들어가지 않아 석유등잔으로 불을 밝힌 촌이었다. 마을 집들 대부분은 초가집이었다. 내게 고향이 어디인지 물어보면 백암이라고 건성 대답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벌터를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은 백암이 아니라 서울에서 했다. 아버지가 서대문구에 위치한 본부로 전근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 사람으로 살다가 98년 ‘정부 3청사’가 대전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옮겨, 그 때부터 20년 넘게 쭉 대전에서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처럼 자기가 태어난 시·도를 떠나 다른 시·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기가 태어난 시·도에서 계속 쭉 살고 있는 사람은 10명 중 7명이고 3명은 나처럼 다른 시·도로 이사해 살고 있다. 대전은 어떻게 될까? 대전인구 150만 명 중 1/3인 50만 명은 대전에서 태어나 쭉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1/3은 충북과 충남지역 출신이다. 대전인구 중 충청도가 고향인 사람이 2/3이다. 나머지 1/3은 충청이 아닌 경인·경상·호남지역 출신이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대전이 고향이 아니신가 봐요!” 충청이 아닌 다른 지역출신인지 금방 안다. 나는 대전에 20년 넘게 살면서, 고향이 대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렇게 물어보는데 사실대로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예, 저는 태어난 곳은 경기도이고요, 자란 곳은 서울입니다.”
대전 문화를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을 하면서 대전사람 행세를 했는데, 내 고향이 대전이 아니라고 말한다. 맞다. 나는 아직도 이해 못하는 충청도 문화와 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개 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서울말로 “보신탕 먹을 수 있는지요?” 정도를 표현하는 말 같다. 열 자나 되는 것을 단 두 자로 축약해 말을 하니 눈치가 부족한 나는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대전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대전을 많이 알게 되었다. 대전 둘레산길과 대청호 오백리 길을 두 번이나 둘러보았다. 대전 둘레산길은 대전을 외곽에서 빙 둘러 싸고 있어 이를 모두 돌면 대전의 동서남북 윤곽을 알게 해준다. 시내도 여기저기 다녀 보았다. 이렇게 대전을 물리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고향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용인으로 가고 싶으나 거기에 기댈 언덕이 없다. 막상 가본들 반겨줄 사람들도 없을 것 같다. 후배 중에 대전 인근에 집을 구해 들어갔는데, 수 년 동안 지금까지 거기 마을 사람들과 교류가 없다고 한숨을 쉰다. 옛날 인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푸념도 했다. 전남의 한 농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한 동료가 있는데 그는 그냥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태어났지만 살지 않았던 고향에 대해 최근까지 왕래하면서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빠지지 않는 등 틈틈이 동네일을 챙겼다고 한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많은 추억이 있었던 그곳을 지인처럼 공을 들이지 못했고 방치했다. 수년전 벌터와 백암을 찾아가 보았다. ‘벌터’는 펜션 촌이 됐고, 백암엔 다방이 7~8개나 들어섰고 모든 게 낯설게 보였다. 인심도 각박해졌다. 용인으로 귀향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20년 넘게 살고 있는 대전이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어야 한다. 이곳에서의 추억이 많이 쌓였다. 아들도 이곳에서 초·중·고를 모두 다녔다. 대전이 나를 더욱 넉넉하게 품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젠 대전이 나의 고향이 되었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수필 잘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고향을 떠올리게하는 참 좋은 수필 작품입니다.
자주 방문해주셔요.
최봉호님의 수필 잘 읽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고향이 어디일까 하는 문제를 다룬 귀한 작품이군요.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