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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역사를 생각하면서 상하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쑤저우(소주)에 가다!
2023년 10월 24일 상해 푸동공항 上海 浦东国际机场 에 도착해 지하철역 서비스센터에서 원데이 패스 One
day pass 를 18元 에 구입해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한 다음 다시 상하이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런민꽝창 人民广场 (인민광장) 역에 하차해 보행자의 거리인 난징뚱루 (南京东路 남경동로) 를 구경했습니다.
상하이 는 중국의 근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곳에 모여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으니 거리는 깨끗하고 정돈
되어 있고 글로벌 기업, 브랜드와 매장들 수가 대한민국 서울 보다 더 많을 정도이며 지하철 노선망도 잘
구축되어 있어 여행하기 편리한 도시이고 치안도 세계 정상급 이기 때문에 야간에 도심 관광 을 해도 됩니다.
몇년전 상하이가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으니 33세 중국인 여인 덩모씨와 무더기 불륜 관계를 맺은 상하이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한국인 영사들 이 여자에게 국내 고급 정보들을 몽땅 흘려버린 어처구니 없는
희대의 섬스캔들 사건인 상하이 한국 영사 스캔들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덩모씨는 비자 브로커 (...) 에
불과했고 미인계에 넘어가 듣보잡 브로커에게 진짜 신분을 만들어 주고 고급 정보까지 흘려준 셈이었습니다.
또 상하이는 연예계, 스포츠 와도 관계깊은 도시이니 축구는 상하이 상강, 상하이 선화 가 이 곳을
연고지로 하고 있으며 연예인중 중국의 안젤라베이비 가 상하이 출신이고, 농구에서는
야오밍 이 태어난 곳이며, 상하이교통대학을 거쳐 CBA 상하이 샤크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는데 42연패로 최다 e스포츠 연패 팀인 상하이 드래곤즈도 이 곳을 연고지로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중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펼치는 동안에는 코로나 유연 대응으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2022년 3월 기어이 봉쇄 에 들어가 예상 기간을 한참 넘긴 4월 중반 까지
봉쇄상태에 들어갔으니 상하이 경제는 올 스톱됐으며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저번 여행기에서 1932년 벌어진 1차 상하이 사변 을 이야기 했는데 5년이 지난 1937년 8월 13일 부터 11월
26일 까지 3개월에 걸쳐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를 상하이 전투 또는 제2차 상하이
사변 이라고 하니..... 쌍방 합쳐 백만명 대병력 이 투입된 전투로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비회된 사건입니다.
1937년 8월 9일, 일본군 중위 오오야마 도시오 가 정찰을 한다며 자동차를 타고 훙차오 공항 에 난입을 시도
하다가 중국군에 의해 사살되니 전투가 벌어지는데.... 사이고 다카모리 가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조선에 가서 조선인들을 도발해서 자기가 죽거든 그걸로 전쟁의 명분 으로 삼으라고 말했던게 떠오릅니다.
8월 13일 바오산 도로로 진입한 일본군을 중국군이 총격을 가해 전투가 시작되니 중국군은 30만명
이 희생 되었으며, 장제스가 어렵게 육성한 독일식 정예사단과 중앙군 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상하이에서 벌인 무리한 결전으로 중군은 항전을 이어갈 역량을 상실 하였고 중화국민의 수도
난징의 함락 으로 이어지고..... 출혈을 강요받은 일본군이 적개심에 빠져 난징 대학살로도 이어집니다.
일본군은 베이핑-톈진 점령후, 평한-진포 철도를 따라 정저우-지난-쉬저우 로 진출하여 중국군의 주력을 격멸
하거나, 중국군을 압박해 봉쇄하려 할 것이다. 조공작전으로는 장가구-쑤이위안-하투-대동, 베이핑을 경유,
바오딩, 스좌장을 지나 타이위안으로 진격해 산서를 포위할 것이고 또한 해상권을 이용하여 교주만-해주
등에 상륙하여 황하 북안에 작전 중인 중국군을 측면에서 위협할 것이니 34개 사단 60만명을 동원할 것이다!
중일전쟁 초기 전개는 중화민국 참모본부의 예상 과 정확히 일치했으니 중화민국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일본이 중국만을 침략한 갑안 과 일본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을안 을
입안했는데, 갑안에서 중국군의 단계적인 퇴각을, 을안은 일본군 저지 이후의 만주 진공을
상정한 것이었으니.... 일본이 침략할 경우 즉각 상하이의 일본 주둔군을 섬멸 하기로 계획했습니다.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 내부에는 소련을 주적국으로 삼자는 육군의 북진론 과 영미를 가상 적국으로
삼자는 해군의 남진론 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제국 국방방침에는 육군의 전략이 채택되어 소련을 주적국
으로 상정하고 있었으나.... 하세가와 기요시등 해군의 강경파 들은 제국 국방 방침 개정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해군은 1936년 중일 전면 전쟁 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임전태세를 다지고 있었고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주요 도시에 대한 공습과 연안 봉쇄 작전에 돌입했으니 이는 중국 해군 기지
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적극적 전면작전을 실시, 해군의 실적을 일본국민들에게
과시하여 해군 예산을 늘려 군비를 확장 하여 미해군에 대항할 수 있는 군세 를 갖추려 했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는 항공모함의 부산물로 여겨지던 항공전력 을 독립시키고 항공 군비 확충, 전력 개발
을 꾀하며 항공주병론 을 제기하여 전함주병,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 사상파와 대치 하였으며,
육군은 이시와라 간지 등이 대소련 군비를 완성해 국방을 다질 때이며, 국민정부는 과거의
오합지졸 중국이 아니라고 확전에 반대했으나 무토 등은 상관인 이시와라의 판단에 정면으로 저항합니다.
1937년 8월 13일 일본 해군 육전대가 공격에 나섰으니 자베이등 상하이의 거점들을 점령했고 황포강
의 일본 군함도 포격을 시작하였으니 일본군은 5천명이고 중국군은 5만명 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는데다가 무장상태도 좋아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못했으니..... 장제스는
일본 증원군이 상하이에 도착하기까지 10일간의 여유를 활용해 상하이의 일본군을 몰아내려 합니다.
8월 14일 중국 공군이 일본 해군 육상 기지등을 폭격 했고 해안가의 포대와 중국 해군 군함들도 포격을 했지만
성과는 신통찮았았으나, 하남성 주가구에서 항저우로 비행하던 가오즈항 대대장 휘하 제4대대 17중대
소속 27대의 P-26 전투기가 일본 해군 96식 육상공격기 16대 와 조우, 한대의 피해도 없이 6대를 격추 시킵니다.
일본도 반격에 나서 타이완에서 해군 항공대가 출격 하여 난징, 항저우, 광더, 난창, 우한 을 폭격했으며
다음날부터는 난징 도양폭격이 개시되어 난징이 집중타격 당했으니 거기에 일본 해군 항공모함
카가, 류조, 호쇼 등이 도착하여 함재기들이 가세함으로 많은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다수의 항공모함을 동원해 해전과 폭격전을 치른건 현재 까지도 미국과 일본 단 두 나라 에 불과합니다.
고성능 폭약의 황색 연기가 지나간후 상하이시 난징로는 공포의 현장 이었으니 불타는 차량에서 치솟는
화염이 차 안에 탑승자들의 시체를 재로 만들었고 팰리스 호텔에는 괴상망측한 인파가 몰렸으니
파란색 작업복은 빨갛게 변한채였으며 머리, 팔, 다리가 갈기갈기 찢겨 엉망진창으로 흩어졌고
키가 큰 유럽인의 하얀 플란넬 양복은 물든 곳 없이 깨끗했지만 두개골은 부서져 산산조각 이 나 있었다.
87사단은 양수포 공장 지대의 일본군 방어선을 분쇄 하였으며 36사단도 황푸 강 기슭에서 부두로 일본군
을 밀어냈는데 이때 섣부르게 전진하던 중국군 경전차대가 일본군 대전차포 사격에 격파
되었고.....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 과 중화기 결핍등 화력 부족으로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했는데 일본군은 방어진지를 갖추어놓았으며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 으로 화력면에서 우세했습니다.
장제스는 화북으로 가야 할 주력부대들을 포함한 중앙군을 상하이로 급파했으니 8월 20일 강소성 남부에서
절강성 포함 제3전구가 수립됐으며, 8월 21일 중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 을 체결하고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3백명의 군사 고문단을 받아 들였으며 또한 1억 달러의 차관과 1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들도 지원 받았으며 중국 공산당을 인정하고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하니 국공합작 입니다.
8월 23일 우쑹 해안가에 2개 사단을 태운 일본군 함대가 나타났으니 일본군 3사단은 우쑹만 의
오송잔교 에, 11사단은 우쑹 서북 15킬로미터 촨사전 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해 상하이
이북을 포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우쑹 지역은 장제스가 1935년 부터 군사 고문 팔켄하우젠의
권고에 따라 콘크리트 벙커와 기관총 진지 로 이루어진 촘촘한 방어선을 꾸려놓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지뢰밭, 철조망까지 해변 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니 해변에 내린 일본군 3사단은 중국군의 집중
사격에 많은 인원이 전사 했으며 탄약은 금방 떨어졌고 일본군은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격퇴당했으니 3주가 지난 후 우쑹 해안가에 제일 먼저 상륙한 3사단은 96%가
전투불능 에 빠지는등 지리멸렬했고 경악한 3사단장 후지타 스스무 중장이 후퇴를 고려할 정도였습니다.
11사단 역시 고생하긴 마찬가지였으니 6일 동안 겨우 5킬로 를 전진해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엄청난 사상자
를 내면서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으니 절망적인 자살 돌격 이 이어져 한달 만에야 겨우 상하이
남쪽의 뤄뎬전까지 전진했지만 거기에도 강력한 중국군 방어진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9월 28일이
되어서야 뤄뎬전이 함락되었고 중국군 피해도 50%에 달했지만 이들은 질서정연하게 상하이로 퇴각 합니다.
방어선이 뚫려도 중국군은 후퇴를 통한 재정비 가 가능했기때문에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해 교착에 빠지자
일본군은 중포 120문을 집결해 포화를 끼얹었고 400대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 했는데 그래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그동안 재미를 많이 본 무기인 독가스 를 뿌렸으며, 결국 중국군은 공세는 무리라는 것을 인정,
23일 공격 부대를 철수시켰고 25일에 다창전이 함락되니 중국군은 이로써 쑤저우 강 남안으로 철수 합니다.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이 10만명 으로 늘자 장제스 역시 증원을 결정, 8,9,10,15,19,21 6개 집단군 소속
50여개 사단을 상하이로 증파했으니 화중, 화남의 모든 군대들이 상하이로 기차를 타고 달려왔고
10월 말에 7개 집단군 85개 사단, 70~80만 대군이 집결했는데 장제스가 정성껏 가꾸어 온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도 포함되었으니 중국군 전체 4할 에 가까운 병력이 투입된 것입니다.
1937년 10월 20일까지 중국군은 13만명의 사상자 를 냈으며 공군도 일본군의 항공모함 카가
가 도착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보잘 것 없었던 해군은 양쯔강 하류에 일본 해군이
진입하는 것만 겨우 저지하고 있었으니 결국 9월 20일 양쯔강 입구의 장인에서 중국
해군은 일본 항공대의 공격으로 전멸 했고 극소수 함선만이 살아 난징과 우한으로 퇴각합니다.
10월 25일 다창전이 함락 되자 상하이의 육전대도 반격에 나섰는데 장제스는 주력 부대가 포위섬멸 되는 최악
의 상황을 막기 위해 10월 26일 전병력에 철수 명령을 하달해 10월 26일, 88사단장 손원량은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사진원에게 사행창고를 수비해 일본군을 유인시켜 공격 속도를 둔화할 것을 명령했으며
18세의 양혜민이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 안으로 난입, 사행창고 옥상에 4미터 짜리 청천백일기 를 게양합니다.
상하이 북정거장과 자베이 를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6일 바쯔차오를 점령함으로 상하이 를 손에 넣었고 전
중국군은 상하이 외곽으로 빠져나갔으며.... 10월 31일 일본군은 쑤저우 강을 도하해 중국군을 쳤지만
수십만의 중국군을 이길 순 없었는데 하지만 중국군 역시 예의 지나친 밀집으로 인해 큰 피해 를 입었습니다.
일본 항공모함 함재기의 공습 으로 중화민국 해군은 궤멸 되었고 장인요새도 결국 함락 되었으니
이 전투로 중국 해군은 격멸되어 중일전쟁이 끝날때까지 유의미한 전력으로 활동하지 못했
는데, 하지만 장인 요새가 함락된 것은 상하이에서 대세가 기울어 중국군의 총퇴각이 내려진
이후였으니 중국 해군은 상하이 전투의 거의 두 달 내내 일본군의 양쯔강 진입을 저지한 셈입니다.
1937년 11월 5일 새벽, 일본군 10군 예하 6사단과 18사단이 공중 엄호를 받으며 진산웨이 (금산위)에 상륙
했는데 남쪽에서 일본군 10군이 북상하고 북쪽에서 상하이 파견군이 몰려오자 중국군은 포위될 위기
에 처했으며 한편 산시성도 무너지면서 화북 전선도 파탄 지경에 몰으니, 장제스와 중국군 3전구
지휘부는 11월 8일 야간에 상하이 방어군에게 방어선을 쑤저우-복산 라인으로 이동 하라고 지시합니다.
11월 10일 상하이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 일본군이 시가지 전지역을 장악했으니 11월 13일
16사단이 바이마오커우(백묘구) 에 상륙해 일본군은 중국군이 버린 엄청난 숫자의 장비를 노획 했고
중국 해군의 주요 함정들도 침몰하거나 노획당했으며 공군도 50%의 전력을 잃었는데 하지만 장제스가
재빨리 정신차려 신속한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주력부대가 포위섬멸 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군은 무려 73개 사단이 무력화 되었고 그중 27개 사단은 독일식으로 구성된 정예병 이었으니 겨우 훈련된
30개의 독일식 사단 중에 27개가 여기서 날아가 버린 것 이니.... 이로 인해 난징을 사수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진지라 결국 난징은 상하이 함락 불과 한달 후인 12월 13일 함락되고 난징에선 대학살 이 자행됩니다.
일본군은 9,11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등 4만명 의 피해를 입었는데 빠르게는 2주, 길어야 5개월이면 중국의
항복 을 받아낸다고 자랑하던 일본군은 3개월 만에야 상하이를 함락 시킬 수 있었으니 그 결과 일본군은
초반의 파죽지세 같은 기세를 잃고 충칭이나 청두로 진격할 역량 자체를 상실했으며 그리고 장제스와
중국 지도부의 구상대로, 중일전쟁은 중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무제한적 소모전, 지구전 으로 접어듭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후에 걸어서 상하이역 에 도착하는데..... 역 오른쪽에 있다(?)는 외국인
매표소는 결국 찾지 못하고 왼쪽 일반 매표소 수피아오처 Shoupiaochu 售票处
로 들어가 줄을 서서 쑤저우로 가는 기차표 를 끊는데.... 여권과 함께 종이 를 제출합니다.
여행계획서를 작성하면서 늘 칼러로 프린트 해서 가져가는데, 원래 상하이에서는 시외 버스로
루지 로 갈 계획이었던지라 종이를 준비하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직접 종이에 한자로
적었는데 혹시나 내가 원하는 시간에 기차 좌석이 없을수 있는지라 출발시간을 바꾸어 가며
무려 8장의 종이 를 준비했는데, 다행히 첫 번째 시간으로 기차표를 사는데 1인당 42위안 합니다.
上海 ⇒ 苏州 10月 25日 高速动车 G7006
09 时 分 出发 二等 2人, 沒有 一等
옛날에 기차역에서는 표를 사는 줄이 엄청 길어서 한참 기다려야 했는데, 이번에 보니 상하이역,
후저우역, 진화역등 모두 줄이 짧은 것이.... 아마도 인터넷이나 트립닷컴 등에서 표를 예매한
경우도 많고 또 역에 비치된 기차표 발매 기계 에서 직접 표를 사는 경우도 많아 그런 것 같으며
오늘은 첫 번째 종이인 9시에 표를 구하기는 했지만 좌석은 11A 와 7A 로 좀 떨어져 앉아 가야 합니다.
기차 시간표를 찾는 것은 휴대폰 에서 구글에 들어가 “상하이에서 쑤저우” 를 치면
여러 사이트가 뜨는데 그중에 "트립닷컴" 을 클릭해서 날짜와 출발역 및
도착역을 넣으니 많은 시간이 뜨는지라 그 중에서 8개 시간을 종이에 적은 것입니다.
중국에서 기차표는 수피아오처 Shoupiaochu 售票处 라는 곳에서 사고 다른 건물인 候车室
(후차실) 이라고 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작은 역은 큰 대합실 하나 뿐이지만
상하이나 항저우등 큰 역은 여러개의 대기실이 있으니 자기 해당 대기실 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대기실에 들어갈때 짐을 엑스레이 기계 에 통과시키며 몸수색 도 하는데.... 마눌의 배낭이 걸리고 말았으니
배낭을 풀어보라며 칼을 보이는데 마눌이 채소를 썰거나 과일을 깍아 먹이 위해 작은 칼 을 넣었으니
꺼내서 자로 재니 7cm 라 압수 를 당했는데 작은 미용 가위는 통과했으며 그외 여권(신분증) 이 있어야
하며 우린 8호 후차실로 들어가는데, 출발 15분 전 에 개찰구 문이 열리고 출발 3분전에 개찰구가 닫힙니다.
옛날에 보니까 늦게 온 사람들은 개찰구가 닫히고 역무원도 보이지 않자 저 철제 펜스를 뛰어 넘어 달려
가기도 하며.... 오늘은 개찰하는 줄에 섰다가 낭패를 당했으니, 우리 상식으로로는 기차표를 보여
주는 걸로 생각을 했는데, 중국에서는 아무도 기차표는 보지도 않으며 신분증을 기계에 대고
나가는데 중국인 신분증이 없으니 줄을 나와 역무원 있는 곳으로 가서 한구런 이라 하니 문을 열어 줍니다.
고속 열차는 상하이 시가지를 빠져나가 넓은 들판을 서쪽으로 달려서 30분 이 채 되기도 전에
소주 기차역 (苏州火车站) 에 도착하는지라, 배낭을 메고는 북광장 으로 나오니......
불과 100미터 앞에 버스터미널 苏州北广场汽车客运站 (소주북광장 기차객운참) 이 보입니다.
기차객운참 건물에 우리 호텔 锦江之星旅馆 (금강지성여관) 은 오른쪽 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반가운 마음에 뒥쪽으로 돌아가서 찾으니 이 부근에 있지 싶은데 아무리 둘러보나도
보이지가 않는지라 행인에게 인쇄해 가져온 종이 를 보이고 호텔이 어디쯤 있는지 물어 봅니다.
請 問, 锦江之星旅馆 在哪儿 칭 원, 쑤저우 레일웨이 스테이션 짜이날?
그러니까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키는데.... 5~6미터 를 가니 거기에 우리 호텔
입구가 나오는데, 그러니까 우리 호텔 건물 앞에서 호텔 위치를 물어본 것 입니다?
입구는 1층 에 있지만 우리 호텔은 4층에 리셉션 이 있는지라 엘리베이터 를 타고 올라
가야 하는데....... 그럼 우리 호텔은 저 버스터미널 苏州北广场汽车客运站
(소주북광장 기차객운참) 윗층에, 그러니까 저 복합 건물의 4~6층 을 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