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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월입니다.
날씨도 제법 쌀쌀한 것을 보니 연말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매년 이맘때면 영화계는 한 해를 정리하는 영화상 시상식으로 술렁거립니다.
대종상영화상, 청룡영화상는 한국 영화상 중에 중심에 있는 영화제입니다.
특히 대종상은 언론사, 상업방송국이 주최하는 영화제와 달리 정부에서 주관하는
유일한 영화부문 상입니다.
오늘은 대종영화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10월 27일, 46회 대종상영화제 개막식을 겸한 47회 영화의 날 기념식이 한국영화인협회
주최로 열렸다. 대종상 본상 시상식은 11월 6일이니 전야제 정도 된다.
신영균, 남궁원, 최은희, 황정순 등과 공로상을 수상한 남기남 감독(영구와 땡칠이) 등
19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계를 이끌던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원로영화인과
젊은 영화인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담당하는 안성기, 이덕화, 독고영재 등은 참석했으나
젊은 영화인은 시상자로 나선 김인권(해운대) 홍수연(인사동스캔들)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유인촌 장관이 축사를 통해 쓴 소리 한 마디 한다.
"최근 한국영화가 발전해 창투사가 생기고 배우 매니저먼트를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들이 많이 생겼지만 예전과 같은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
요즘에 젊은 배우들을 부르려면 개런티를 줘야 한다고 들었다"
"내년부터 (젊은 배우들을 부르기 위해) 필요하다면 내가 개런티를 내겠다.
그깟 영화를 수출해봐야 얼마나 벌겠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에 담긴 우리의
정신과 문화다. 선배가 있어야 후배도 있는 법"이라고 ........
맞는 말이다. 선배가 있어야 후배도 있고 먼저 고생하며 터를 닦아온 원로영화인을
대접해 드려야 한다는 것에는 어떤 영화인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1회작품상 연산군)
헌데 왜 젊은 영화인들은 대종상에 참석하지 않을까?
정말 개런티 문제가 전부일까?
9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온 감독, 배우, 기획자, 영화사 등은
왜 대종상 알기를 우습게 알까?
정부가 주관하는 유일한 영화상이면 그것에 상응하는 권위도 있을 터인데
왜 대종상영화제에서 받은 트로피는 진열장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둘까?
대종상은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60년대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지금은 권위가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한 편으로는 유신시대 권력의 통제수단으로
영화가 이용되면서 대종상이 피해 입은 과정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종상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대종상의 태동(우수 국산영화 선정제)
대종상의 뿌리는 1959년에 당시 문교부 고시로 발표된 국산영화 보호육성 계획의 일환으로 시행한
우수국산영화 선정 및 보상제도이다.
이 시상제도는 59년 제2회로 끝이 나고. 1961년에는 영화관련 업무가 공보부로 이관됨에 따라
우수영화상'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공보부 주최로 시행되었으나 이 또한 단 1회로 끝이 난다.
대종상 초창기(1962 - 1970. 1회-8회)
공보부 주최의 우수 국산영화 시상제가 ‘대종상’으로 명칭이 바뀐 것이 1962년 제 1회 대종상 시상식이다..
이후 대종상은 그 주최가 영화인협회로 잠깐 이관되었다가(6∼7회),
제8회와 제9회(69∼70년)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영화부문상으로 흡수되어 대종상의 독자성을
상실한 때도 있었다.
이 시기는 년간 200편이 넘게 제작되던 한국영화의 황금기이다.
신상옥 감독의 ‘신 필림’이 날리던 시절이었고
신성일이 동시에 4편 겹치기 출연할 때가 이 때다.
특히 신 필림은 7회까지 작품상을 네 번이나 수상했다.
수상작은 주로 원작이 있는 문예물 중심이었고.
부상으로 주는 외화수입쿼터가 이때 등장한다.
1966년 제5회부터 부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작품상,
제작상, 우수반공영화에 각 한 편씩 배정했고,
6회 때에는 3개 부문 외에 장려상에도 쿼터가 주어졌고,
7회 때에는 작품상에만 1편을 주고 제작상, 반공상,
문화영화상에는 쿼터의 1/5만 수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다.
외화수입업이 정부 허가사항이었던 시절에 수입권을
매개로 영화제작을 정부가 통제하려 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1/2도 아니고 1/5쿼터라면 20%만 수입허가한다는 것인데 외화 한 편 수입하려면 4년 동안
수상하며 100%를 채우란 이야기이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당시 수입외화쿼터제에 목말랐던 영화업계의
현실을 대변하는 이야기이다.
당시 외화(헐리우드 영화)는 돈 되는 노 나는 사업이다.
지금처럼 자유수입이 아니라 정부 허가를 받아야 수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외화수입 허가를 받기 위해 정부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수입외화쿼터는 정부의 대표적 영화통제정책이다.
정부통제기(1971 - 1985 9회-24회)
박정희 유신시대, 전두환 철권시대인 이 시기는 대종상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대종상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역사도 마찬가지다.
제10회부터 영화진흥조합(영화진흥공사 전신)과 문공부, 그리고 영화진흥공사가 15년간 주최했고
유신영화기(1971∼1980)의 대종상은, 영화가 이미 정권 홍보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1971년에는 <분례기>가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도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했고
이후 작품상은 계속 최우수작품상, 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으로 나뉘어 시상되었는데 이는 반공과 정책 홍보용
영화가 단골 수상작이어서 관객에게 대종상 수상작은 재미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시기 역시 외화 수입쿼터는 여전히 최대의 화두였다.
10,11,12,14회 때, 외화 쿼터보상제를 부상으로 주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당근이 없어진 대종상은 당연히 김빠진 행사가 되고 말았다.
이에 15회 때인 1976년부터 다시 쿼터 부상이 주어졌다.
이는 대종상이 영화상으로서 독자성과 권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외화쿼터 없는 대종상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이니까요.
영화를 잘 만들어 관객에게 보여주는 목적 외에 외화쿼터를 목적으로 하는 상황에서
관객이 많이 보는 영화가 나오기란 애초에 불가능 했다..
따라서 대종상 수상작의 관객동원은 바닥도 완전 바닥이다.
14회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불꽃>은 4일 상영, 1,416명의 관객이 전부이다.
80년 전두환 철권시절 동안에도 대종상은 별다른 방향전환을 모색하지 못하고
유신시대의 구태를 반복한다. 이때는 젊은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세대로
등장하는 시기여서 낡은 대종상의 관행은 현실의 영화발전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젊어지고 나날이 발전하는데 대종상은 과거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보면 충돌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도기(1986 -1991 25회-29회)
제작자유화, 외화쿼터제 폐지, 외화수입자유화 등을 골자로 하는 영화법 제5차 개정(1985)과 UIP 직배로
알려져 있는 외국영화 직접배급이 주 내용인 영화법 6차 개정(1986)이 있었던 때이다.
다시 말해 유신의 긴 터널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한국영화는 미국영화의 직접배급에 노출되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시기 대종상은 정부 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인다.
제25회(86년)부터 대종상은 영화인협회가 영화진흥공사와 공동주최 했고
제26회(87년)부터는 겉으로는 영화인협회가 단독 주최였으나 실제로는 영화진흥공사를 통해 국고보조를
받았기 때문에 사실 문공부(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또한, 외화수입 자유화로 외화쿼터 보상제가 폐지되긴 했으나 수상을 둘러싼 로비와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민간주도와 국고지원(1992-현재 30회-46회)
29회가 끝난 후, 영화인협회는 대종상에 드리워진 관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없애고자
정부지원을 포기하고 삼성의 재정지원으로 1992년 30회를 치룬다.
이 시기 <서편제>가 나왔고 시민감상회 등을 통해 대종상의 공정한 노력을 알리려 애쓴 시기이기도 하나
심사공정성 시비에 휘말린 <애니깽> 사건도 이 시기이다.
제35회부터는 (주)쌍방울이 재정지원을 하다 IMF의 영향으로 쌍방울의 법정관리로
인하여 계약이 파기되어 다시 국고 지원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대종상의 역사를 한국영화 중요시기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첫째, 대종상은 1960년부터 대부분 정부 주도의 영화제였고 정부의 영화통제 정책으로
인해 영화의 사회비판, 영화창작의 자유는 불가능 했습니다.
둘째, 당시 많은 영화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정부 정책에 순응했고 따라서 대종상
또한 정부의 입맛대로 흘러왔습니다.
셋째, 90년대 이후 권력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 시기 이후에도 독자성과 권위를
스스로 만들지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유인촌 장관의 말대로 현재 대종상의 가장 큰 문제는
원로 영화인과 젊은 영화인 간의 간극입니다.
그러나 대종상에 관한 신구(新舊) 영화인의 불화는 요즘 X가지 없는 젊은 영화인의
인간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화제의 심사기준에 관한 신뢰,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란 것이지요.
극단적인 예로 1996년 당시 미개봉작 출품작인 김호선 감독(서울무지개, 사의 찬미)의 <애니 깽>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특별공로상 4개를 몰아주면서 젊은 영화인들은 대종상을 우습게보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전에도 고운 시선은 아니지만 <애니 깽>은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시 미개봉작으로 수상한 <애니깽>이 개봉되어 “그래 받을 만한 작품이네”라는 평이 나왔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애니깽>은 김호선 감독의 작품 중 足 팔리는 영화지요.
대종상은 십 수 년 동안 공정성 논란으로 그나마 있던 권위도 스스로 까먹어 왔습니다.
올 해도 한 건 제대로 합니다.
지난 10월 21일 영화제 사무국이 발표한 후보 명단에 미개봉작인 장나라 주연의
<하늘과 바다>가 작품상, 여우주연상, 음악상, 신인여우상 등 4개 부문에 오른 것이었다.
반면, 칸국제영화제 수상작인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여우조연상을 제외하고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 주연상 부문에서 모두 제외됩니다.
여기에 남녀 주연상에 송강호, 하지원이 빠져 공정성 시비는 더욱 확산되었지요.
물론 하지원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장나라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해야 함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필 또 미개봉작입니다. 96년 <애니 깽>으로 그 난리를 쳐 놓고 또 이런 식이니 젊은 영화인들이
대종상에 대한 신뢰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대종상 측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지만 제작 여건상 대형제작사나 배급사에 밀려 개봉이 미뤄지거나
제작사의 상황에 따라 상영이 종종 미뤄지는 경우가 있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배우의 연기가 돋보인다면
개봉이 미뤄지거나 개봉 예정인 작품 모두 다 출품을 할 수 있고 수상내역에 올라갈 수 있다"고 밝힙니다.
좋다. 그렇다 칩시다.
그러면 대종상 출품작 54편 중 유일한 미개봉작인 <하늘과 바다>가 심사위원의 기준으로 좋은 작품이여서
후보에 올렸다 하자 그러면 나머지 53편의 작품 중 완성도가 높고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며 관객에게 이미 검증된
<박쥐>,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쓰 홍당무> 등이 후보에 거론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올 해 대종상 후보작 선정 문제는
하지원이 여우주연상에 빠지고 장나라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매 년 지적되어 온 것처럼
영화제의 방향성 없는 심사기준에 있는 것이다.
대종상 예심은 10인으로 구성된 예선심사위원회가 담당하고, 본심은 본심위원회와 100인 이내
일반심사위원이 함께 맡는다. 예심위원은 본심위원을 겸임할 수 없습니다.
10인의 예심 위원은 김갑의, 김영호, 이경수, 이철혁, 박경원, 박창호, 이윤정, 변성찬, 김문옥, 김형종이다.
년간 100편 정도 제작되는 한국영화를 감안할 때 10인의 심사위원이 100여편을 심사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또 하나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기 이전에 이들 예심 위원의 조합이 한국영화의 대표 영화상
심사위원으로 적합하냐 하는 문제이다.
예심심사위원회의 종잡을 수 없는 심사 기준은 작품상 후보와 신인감독상 부분에서 나타난다.
신인감독상 후보는 <킹콩을 들다> <똥파리> <작전> <여름, 속삭임> <영화는 영화다> 등 작품 성향이 들쑥날쑥하다.
<미쓰 홍당무> <불신지옥>은 빠졌다.
작품상 후보를 보면, 미개봉작 <하늘과 바다>를 제외하면 <국가대표> <마더> <신기전> <해운대> 등
흥행작들로만 채워졌다. 흥행작 위주로 선정했다면 작품상 후보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과속스캔들>이 포함돼야 한다.
한 배우의 작품이 다수 출품되면 표가 갈려 후보에 오르지 못할 수 있다는 대종상 사무국 측의 설명도
후보 명단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정재영은 주연작으로 분류된 <김씨표류기> <신기전> <강철중 공공의 적 1-1> 중 <신기전>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박쥐> <놈놈놈>의 송강호는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사무국 설명에 의하면 세 작품으로 나뉜 정재영이 두 작품의 송강호보다 불리 할 텐데 말이다.
대종상은 한국영화 영화상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허나 역사만큼 지녀야 할 권위와 공정성 대신 많은 논란을 키워 왔고 질타를 받아 왔다.
이에 대종상이 더 이상의 시행착오 대신 권위 있는 영화상으로, 신구 영화인이 함께하는
영화상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다음의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심사위원 선정과 심사기준을 바꿔야 한다.
대종상은 ‘한국영화인협회’가 주최 한다.
영화인협회의 주요인물은 원로영화인들이다.
젊은 영화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심사위원도 일정부분 그들의 지분을 줘야 한다.
현재의 10인의 대종상 예심 심사위원 중 일반 관객이 알만한 위원은 하나도 없다.
‘그들만의 리그’ 잔치를 벌여 놓고 젊은 영화인들에게 참여 안 한다고 뭐라 하면 설득력이 없다.
예심 심사위원도 30명 정도로 늘여야 한다.
대종상은 일반 대중을 위한 시상식이다.
독립영화, 실험영화나 환타스틱 영화 등 일정 매니아를 위한 영화상이 아니라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상영된 영화들을 후보로 하는 대중 영화상이다.
영화상의 방향성은 취지와 목적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으나 선정 방법은
대중이 납득할 정도는 되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예심 10인, 본심 50의 심사위원은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기 쉽다.
그리고 반드시 일반 관객에게 일정기간 상영된 작품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미개봉작은 안 된다.
미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상은 공정성을 얻기 위해 5,800여명의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회원이
두 번의 투표를 거쳐 후보자(작)와 수상자(작)를 결정한다.
AMPAS 회원은 작가, 배우,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음악감독, 미술감독, 편집기사 등 영화 각 분야에 이른다.
후보 선정 투표 시에는 각 회원이 오로지 해당 분야에만 투표할 수 있다.
감독은 감독 부문만, 배우는 배우 부문만 후보를 선정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수상자(작) 투표 시에는 전 부문에 걸쳐 투표할 수 있다.
꼭 미국의 방법을 따라 할 필요는 없지만 현재의 방식으로는 공정성 시비를 벗어날 수 없다.
참고할 만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정부지원 없이 한국영화인협회 단독으로 주최해야한다.
대종상은 그동안 정부주도로 많은 왜곡과 질타를 받아왔다.
대종상 입장으로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다.
정부지원의 빈 자리를 젊은 영화인들이 채워주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 정부지원 없이 삼성, 쌍방울 등 기업 후원으로 한 적도
있지만 만만치는 않았다. 허나 그때도 젊은 영화인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이는 서로 간격이 있는 신구 영화인들이 합심해서 하라는 말이다.
원로영화인은 “그 시절 우리가 그렇게 고생한 토대 위에 지금의 너희들이 있지 않느냐”
하며 선배로서의 권위만 찾지 말고, 젊은 영화인의 공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일정부분 권리도 이양하며
대종상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명분을 주어야 한다.
젊은 영화인은 밖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원로영화인들과 같이 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며
선배로서의 대접은 해야 할 것이다.
대종상은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치된 예술영화상이다.
한국영화의 좋은 시절, 슬픈 시절을 함께 한 영화상이다.
비록 지금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지만 신구영화인이 함께 노력하면 새로운
대종영화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蛇足) 1. 장나라는 2004년 <오! 해피데이>로 <질투는 나의 힘>의 배종옥을 제치고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더니 올 해도 그러네.... 심사위원 눈에는 이 친구 연기력이 대단한가벼요 ㅎㅎ
2. 우리나라도 영화상 시상식 때 수상을 거부하는 배우가 나왔으면.....
마론 브란도나 죠지 C 스코트처럼....
“나는 대종상이 신뢰할만한 심사기준과 권위가 설 때까지, 신구영화인이 합심하여 대종상을
이끌때까지 남우주연상을 거부합니다” 이런 배우 어디 없나!!
첫댓글 시방 눈이 침침한 관계로 낼
아니 오늘 다시 들어와 읽고 ....
나 무쟈게 알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는...씨유

하고 샆은 이야기의 1/10도 안 되지만 대종상에 관한 대략적인 개괄은 될 것이라는....
36년의 식민통치가 있었으면 협조한 자와 저항한 자는 서로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그 사이에 '그래도 生은 계속된다.' 중간파가 있는 것이고

전쟁후 독재와 철권통치와 저항운동, 그들 사이의 문화예술에서도 순응파와 저항파간에 불화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그 서로를 할퀸 상처의 잔흔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삐죽거리는 것이지요. 


'들국화는 피었는가 
' 라는 임권택 감독의 쿼터획득용 반공영화가 불현듯 생각납니다.
담쟁이 님의 댓글이 장문의 제 글보다 함축적이고 명확하다는......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군요. 좋은 글, 잘 읽고 대종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갑니다.
애고 형님 !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언제 함 뵈어야 할 텐데 시간만 보냅니다. 뵐 때까정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지호락님 바쁘셨어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대종상에 대해선 전 아무런 말도 하고싶지 않죠..ㅎㅎ
제가 좀 부드럽게 썼지요 ??ㅎㅎ 저 역시 별로 언급조차 하기 싫은 대종상이지만 일반 분들이 잘 모르시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글구 대종상에 협조적이지 않는 젊은 영화인들이 선배도 몰라 보는 X가지 없는 인간들로 매도되는 것 같아서......
담쟁이로 로그인되어 있었는데.. ***님이 들렀다가는 잠시 자리비운 사이에 ...명의도용(
, 
) 위글은 저 담쟁이의 멘트가 아닙니당.
지호락 벨일 없소


항상 좋은 글 감사 하게 보고 이쏘.건강 하게 잘 지내시길


큰형님 ! 오랜만입니다. 최근 바쁘셨던 것 같던데 ... 워낙 건강하신 형님이지만 그래도 항상 건강하시길......
심사기준에 관한 신뢰, 믿음에 관한 문제가 있다는 건 오래 전부터 느꼈던 부분이었어요 올해는 장나라가 여우주연상
. 참으로 쌩뚱 맞다는.... 언젠가 장나라가 가수부분 대상을 받을때도 '쟈는 뭔 빽이 있는가벼' 라고 생각했었는데...
대종상의 공정성 시비는 분명 대종상 집행부의 100% 잘못이지요. "전문가인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뽑았으니 잔말하지 마"라는 식의 일 처리에 무신 설득력이 있겠냐는...... 당췌 뭔 최소한의 명분 있는 구석을 찾을 수 있어야지 원......
의문점도 적잖이 남는 좋은 글 잘 일었습니다.
메이디님 안녕하세요? 옛날 고전영화에 관심이 많으시죠....
좋은글 잘 읽었슴다. 근데 우리나라의 이런 현상은 대종상뿐이겠습니까...사족..공감..
올만입니다. 코다님. 대종상은 타 분야보다 좀, 많이 심하죠... 근디 요즘 작품 쓰시고 계신겨??
명의도용은 무신? ㅋ 누구 아디 인지도 몰라보는 나의 치매 수준.. 지호락님..건강한 모습 보고싶습니다.
시나리오 잘 보고 있습니다. 바쁘시죠? 크랭크 인 들어가면 연락 함 주십시오.
넵 당연 초대 함 하겠습니다..건강하시구요
영화인뿐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모든이들과 함께 공감하는 잔치가 되어야 할텐데...참 씁쓸하군요^^::
대종상 시상식 결과를 보니 역쉬나..... 절묘한 나눠주기, 원로 김유진 감독(신기전)과 강우석 제작자을 위한 잔치 정도..... 잘 지내시죠?
늦었지만 저도 좋은 걸 배우고 갑니다...그런일이 영화계에 있었군요 ..난 멀리서 한국 영화가 엄청 발전해 간다고 내심 좋다고만 생각 하고 있었는데...

..
90년대 이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이룩한 것은 맞습니다만 스탭처우문제, 스크린 쿼터. 미국직배사와 극장문제, 배급시스템과 제작비 문제 등과 함께 대종상으로 표출되는 구시대적 행태는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