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객잔(龍門客棧)
최용현(수필가)
1960년대 중국무협영화의 전성시대를 연 효시(嚆矢)는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제작한 호금전 감독의 ‘대취협(大醉俠, 1965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방랑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성협객 정패패는 ‘와호장룡’(2000년)에서 주윤발에게 독침을 쏘는 푸른 여우로 나온다.
‘대취협’의 속편 ‘금연자(金燕子, 1968년)’는 우리나라에서 ‘심야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영화는 호금전 감독이 홍콩 쇼브라더스의 다작(多作) 스타일에 반기를 들고 대만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장철 감독이 연출했다. 호금전 감독이 대만에서 연출한 영화는 ‘용문객잔(龍門客棧, 1967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용문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1968년에 개봉되었다.
2011년, 대만에서 122명의 영화관련 전문가들이 뽑은 ‘100대 중국어 영화’에서 ‘용문객잔’은 ‘화양연화’(2000년)와 함께 공동 9위를 차지했다. 객잔은 우리나라의 주막과 비슷한 개념으로,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중국식 여관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인 15세기 중엽, 동창(東廠)의 환관 출신 최고권력자 왕진(백응 扮)은 곧은 성품의 병부시랑 우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고 그의 자녀들을 변방으로 추방한다. 그러고도 후환이 두려운지 자신의 두 심복에게 동창의 관원들을 이끌고 가서 우겸의 자녀들을 처치하라고 밀명을 내린다.
추방 길에서의 암살 시도가 협객의 등장으로 실패하자, 두 심복은 우겸의 자녀들이 호송되는 변방의 길목에 위치한 용문객잔에 들어가 미리 내부를 장악한다. 그러자 무예고수인 협객 서소주(석준 扮)가 객잔 주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고, 이어 남매무사인 추협객과 추낭자(상관영봉 扮)도 객잔으로 들어온다.
우겸의 동지였던 용문객잔의 주인 우대인은 서소주와 남매무사를 은밀히 방으로 불러 동창의 만행과 두 심복의 흉계를 알려주면서 우겸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한다. 다음날, 우겸의 자녀들이 객잔으로 들어오자, 협객들은 자녀들을 헛간에 숨기고 동창의 관원들과 치열하게 결전을 벌인다.
이때, 환관 왕진에게 잡혀서 거세당한 채 동창에 배속된 타타르족 형제가 왕진의 악행에 반기를 들고 우대인을 찾아와 협객들과 합류한다. 왕진의 두 심복은 협객들과 결전을 벌이다가 서소주와 추낭자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그러자 절대무공을 지닌 왕진이 직접 관원들을 이끌고 용문객잔으로 향한다.
왕진과 그의 관원들은 산곡(山谷)에서 협객들을 포위한다. 추낭자가 우겸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사이 서소주와 추협객, 그리고 타타르족 형제가 한 팀이 되어 왕진과 무협대결을 펼치지만 역부족으로 밀린다. 결국 추낭자까지 합세하여 혼신을 다한 분투 끝에 가까스로 왕진을 처치하고 우겸의 자녀들을 안전하게 변방으로 보내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용문객잔’은 잘 짜진 플롯에 뛰어난 화면구도와 영상미, 치밀하고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토담집 같은 객잔 안의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심리전은 마치 한 편의 경극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고 스릴도 있다. 또 멀리서 추낭자가 객잔으로 걸어오는 롱 테이크 장면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홍콩 쇼브라더스 무협영화의 러닝 타임이 보통 1시간 30분 전후인데 비해 이 영화는 1시간 50분으로 좀 긴 편이다. 그것은 시퀀스마다 철저히 계산된 상황이 전개되고, 객잔 안팎에서 벌어지는 무협대결 후에는 약간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을 주는 등 강약조절을 하는 호금전 감독 특유의 꼼꼼하고 진중(鎭重)한 연출 스타일 때문이다.
보통 무협영화에서 악당 두목은 초절정의 무예고수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도 환관 왕진은 흰 머리와 흰 수염, 그리고 붉은 도포로 카리스마를 뿜으며 무예고수들인 서소주와 추낭자, 그리고 타타르족 형제를 압도한다. 확연한 실력차이로 고전하던 협객들이 악전고투 끝에 왕진의 목을 날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후일 ‘협녀’(1969년)에서도 주인공으로 나오는 석준은 호금전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검술연기는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인다. 그에 반해 추낭자로 나오는 상관영봉의 검술연기는 상당히 날렵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홍콩의 무협 여걸이 정패패라면 대만의 무협 여걸은 단연 상관영봉이다. 그녀는 이후 ‘일대검왕’(1968년) ‘용문객’(1970년) ‘흑백도’(1971년) ‘소림사 18동인’(1976년)에서도 맹활약을 펼친다.
‘용문객잔’이 나온 지 25년만인 1992년, 양가휘 임청하 장만옥 견자단 등 홍콩의 정상급 배우들의 현란한 액션을 조합하여 만든 리메이크 작 ‘신용문객잔’이 나왔다. 그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촬영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이혜민 감독이 만든 블록버스터로, 중국 사천성 장강유역의 소삼협 중 용문협 부근의 한 객잔에서 촬영하였다.
중국 돈황 일대의 사막에서 촬영한 ‘용문객잔’은 나온 지 50년이 넘다 보니 액션이 너무 투박하고 허접한 것이 사실이다.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중화권 무협물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용문객잔’이 앞서겠으나,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는 장만옥의 색기(色氣) 넘치는 코믹요소가 가미된 ‘신용문객잔’이 더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2천 년대에 들어와서, 대만의 채명량 감독은 폐업을 앞둔 영화관에서 ‘용문객잔’을 마지막으로 상영한다는 줄거리의 ‘안녕, 용문객잔’(2003년)을 연출하여 걸작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또, 서극 감독은 이연걸을 주연으로 ‘용문객잔’의 속편 냄새를 풍기는 ‘용문비갑’(2011년)을 연출하여 평단의 찬사와 함께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세월이 더 흐르면 다시 또 ‘용문객잔’을 리메이크하는 감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