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 온 기독교방송 김진성PD는 데뷔곡 <이름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짜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 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이다.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워했던 평생의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고 용기를 내 집으로 찾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 않았던 이영희는 1974년 늦은 봄 쉘브르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3년간의 열애 후 1977년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인기정상의 가수였건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 만남에 감격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 19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래 '작은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의 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19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을 맡겼다. 1983년 재개발로 헐릴 때까지 '꽃잎'은 유일한 그의 노래무대였다.
김정호는 좌절 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달 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19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 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를 불러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였다. 일년 이상 치료를 해야했건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과 가까워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19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애틋한 유언만을 남긴 그는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 고양의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워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김정호...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정음반과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소박하고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어둡고 깊고 그윽한 필링으로 노래했던 가수였다. 김정호의 노래가 보유하고 있는 미덕은 동심원을 그리듯 번져 가는 파문의 양상이 참으로 그 노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그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30대를 못 넘긴 요절가수, 김정호가 그렸던 고독한 인생의 이미지는 짙은 회색빛이었다. 비범한 재주는 신조차 질투가 솟았을까! 너무도 젊은 나이에 빼앗겨버린 그의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삶의 반영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 듯 가슴속의 한을 토해내게 했다.
<글 -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