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들었던 횃불
지 석 동
태풍 볼라벤에 맞은 7만 7천 톤급 선박이 두 동강이 난 뉴스를 보았다. 그 순간 1969년 추석 전날 겪었던 끔찍한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함께 조난당했던 선원들은 저 화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당시의 일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그 해 8월 하순에 지겨운 가난을 면해 보려고 원양어선을 탔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공화국의 수도 '수바 항'에 있던 370톤급 태백501호였다.
배에 오르니 고기 썩는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처지니 짐을 풀고, 다음 날부터 배 수리를 했다. 덥고 힘들었지만 참고 견디었다. 힘든 일과가 끝나면 나가서 남국의 신비로운 풍광을 즐겼다. 처음에는 언어장벽으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다가 한 보름쯤 지나, 토막 영어와 보디랭귀지를 섞어 쓰니 지낼 만했다.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어 한 달 만에 시운전까지 마치고 출항 준비를 했다. 조업 때 먹을 주 부식과 어구를 싣고 식수와 연료를 가득 채웠다. 이제 참치미끼로 쓸 꽁치만 실으면 되었다. 그런데 그 꽁치는 배로 여덟 시간이나 걸리는 동북쪽의 섬 오발라우 레부카 항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어 그리로 가야 했다.
추석 전날인 9월 25일 아침 8시에 수바 항을 출발했다. 그날 태백501호와 같은 회사 배 2척도 합류하여 레부카 쪽으로 달렸다. 502호는 앞서 가고 내가 탄 501호는 가운데 서고 503호가 뒤따랐다. 출항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여기저기서 멀미를 했다. 배를 처음 탄 선원들이 특히 심했다. 선수가 높이 솟으면 창자가 다 올라오는 것 같고, 반대로 내려가면 창자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배멀미다.
선장은 멀미하는 선원들을 선수에 세워놓고 바람을 쐬게 했다. 앞으로 2년 동안 그들을 데리고 조업을 할 터이니 미리 단련을 시키자는 조치였다.
출항한 지 일곱 시간 만에 저 멀리 수평선 위로 오발라우가 거뭇하게 보였다. 선장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키를 잡던 선원을 내려보내고 항해사가 선장이 부르는 데로 각도를 복창하며 키를 잡았다. 오발라우 섬은 거대한 환초가 두르고 있어 큰 배가 드나들지 못했다. 그러던 것을 서양인들이 환초 한쪽을 폭파해서 뱃길을 낸 다음, 그 위치를 해도에 그려 넣었다. 하지만 물밑에 난 좁다란 뱃길이라 위험했다.
우리 앞에 가던 태백502호가 그 위험한 수로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신호를 하고 저만큼 갔다. 우리 차례였다. 모두 무사히 통과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때 동북쪽으로 가던 배가 레부카 항을 향해 선수를 북쪽으로 틀었다. 이제 통과하는가 보다 했다. 그런데 한 이십 초쯤 지났을까. '드르륵' 소리가 나며 배가 흔들렸다. 그때가 오후 세 시 반쯤이었다. 경험자들은 얼굴에 핏기가 가셨고, 신입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
고 물었다. 그 한 번의 드르륵 소리가 난 다음 배가 기운을 잃었다. 힘을 못 쓰게된 배는 금세 파도가 일렁이는 대로 건들댔다. 그리고 찌그덕 삐그덕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기관실과 어창에 물이 들고 선원침실에도 반이나 찼다. 급히 방향을 틀다가 배가 빠른 조류에 밀려서 암초에 얹혔다. 그리고 금세 뱃바닥이 찢어졌다.
모두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망연자실했다. 원양어선을 타면 돈을 번다는 말에 겁 없이 뛰어들었는데 조업도 해보지 못하고 좌초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기관장이 어느 정도 피해가 났는가를 보고 와서 탄식 조로
"다 끝났어요!"
그 말에 그 서슬이 퍼렇던 선장이 썩은 나무토막 넘어가듯 주저앉으며
"대물림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많은 땀을 흘렸는데 왜 이런 사고가…."
우리 뒤에 오던 태백503호도 무사히 통과했다. 502호와 힘을 합해 501호를 끌어내려고 굵은 밧줄을 매어 끌어 봤지만, 줄이 국숫발 끊어지듯 끊어질 뿐이었다. 몇 번 해보다 안 되자 자기들도 좌초될까 싶어 레부카 항으로 들어갔다. 우리만 물이 차오르는 배에 남아 밤을 맞아야 했다.
노을이 지자 8월 열 나흘 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찌나 밝던지 손금이 다 보였다. 순식간에 조난을 당한 선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말없이 담배만 연신 태웠다.
그때 갑판장이 점심도 거른 선원들을 생각해서 창고를 열었다. 조업을 시작하는 날 용왕님께 올릴 제물과 조업하며 먹으려고 쌓아둔 것이 많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조난을 당한 마당에 뱃멀미를 하느라 점심도 못 먹은 선원들의 배나 불리자는 마음이었다. 좌초되는 순간 밥도 국도 끓일 수가 없었다. 요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술과 안주가 될만한 것뿐이었다.
당시 피지에는 태백501호를 끓어낼 만한 장비가 없었다. 설령 끌어 낸다고 해도 막대한 인양비와 수리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암담한 현실에 선원들은 술이라도 마셔야 속이 편할 것 같아 빈속에 술을 부었다. 선장도 취했다.
좌초될 때 배가 좌측으로 많이 기울었다. 큰 너울이라도 밀려오면 그대로 전복이 될 것 같았다. 그 급박한 처지에 누구 하나 대비는커녕 술만 퍼마시고 아무 데나 누워 코를 골았다. 마치 유령선 같았다.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입었던 상의를 벗어 돌돌 말아서 한 발쯤 되는 철사에 묶어 기름을 흠뻑 묻혔다. 그것을 들고 마스터로 올라갔다. 저만큼 레부카 항이지 싶은 곳의 불빛이 아련히 보였다. 가지고 올라간 것에 불을 붙였다.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저 아래 술에 취해 널브러진 가여운 군상들이 보였다. 길 잃은 양들이 폭풍우에 겁을 먹고 풀밭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 같았다.
불붙인 것을 돌리자 '활활' 타는 불빛이 원을 그렸다. 팔이 아프도록 돌리며 빌었다. 하늘에는 우리가 무사히 나가게 해달라고 빌고. 누가 보면 와서 구조해달라는 애원의 횃불 질이었다. 그리고 두고 온 가족한테 즐거운 추석이 되기를 빌었다.
불을 보고 갈매기가 날아와 내 옆에 앉았다. 그나마 횃불을 든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됐다. 중천에 뜬 달이 내려다보고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웃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보고 구해 줄 것 같아서 쉬지 않고 돌렸다.
외로웠다. 그때 가슴 저 아래에서 살 수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찝찔한 것이 볼을 타고 흘렀다. 횃불이 밤새 원을 그리며 SOS를 보냈다.
날이 밝을 무렵 선원들이 물을 찾았다. 술에 곯아떨어졌던 선원들이 갈증이 난 것이다. 그러나 식수 탱크에 해수가 들어가 먹을 수 없었다. 당시 제일 급했던 것은 먹을 물이었다. 다행히 우려했던 높은 너울이 오지 않아 목숨을 부지했다.
다음날 정오 무렵 자그만 배를 타고 온 피지인 서넛이 선원들의 상태를 멀리서 보고 갔다. 그때 그들에게 물과 먹을 것을 부탁했다. 급할 것이 없는 그들은 오후 5시쯤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던진 밧줄 끝에 얼마간의 식수와 먹을 것을 매달아 놓고 갔다. 그 것으로 허기와 갈증을 해결했다.
너울에 언제 전복될지 모르는 배에서 3일을 보내고 피지 구조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배는 4,500마력 짜리 호주 구조선이 와서 끌어냈다.
그때 낚시로 잡아 올린 예쁜 열대어가 힘이 되어 우리를 버티게 했다. 그 후로 힘든 일이 생기면 가슴졸이지 않고 시간에 맡기는 버릇이 생겼다. 2012. 9.
첫댓글 원양어선 처음 타실 때에 그렇게 위험한 일이 있으셨군요.
글을 읽으며 가슴을 조마조마 애를 태웠는데 다행이 무사 구조되었네요.
어려웠던 시절, 가난을 벗어나고자 원양어선을 타신 분들의 애환을 너무 실감나게 쓰셔서
재미있게, 짠하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꼭 한만에 올려주신 석동 님의 수필...
짠한 내용이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왜 재미있는가 생각해보니 우리가 현장에 있는 듯한
실감나게 쓰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필력이 좋으시다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