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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신뢰와 규율의 분위기가 나라에 퍼지는 지금, 그렇다, 대담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출처: 마르소 피베르, 「Tout est possible」, 『Le Populaire』, 1936년 5월 27일.
9-1. 유령 사냥을 위한 신성동맹
대전쟁 이후 프랑스 공화국의 경제는 오랫동안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전쟁부채와 재건비용, 공공부채, 무역적자는 사라지지 않았고, 프랑화 가치의 추락과 물가상승은 실질임금과 구매력을 갉아먹었습니다. 프랑스에는 저축과 연금, 공채에 기대어 사는 금리생활자와 소액저축자가 많았습니다. 이들에게 인플레이션과 평가절하는 단순한 물가문제가 아니라, 평생 모은 저축과 국가가 약속한 채권의 가치가 녹아내리는 일이었습니다.
1926년 레몽 푸앵카레가 복귀해 프랑화를 안정시켰을 때, 프랑스 정치권과 중간계급은 그것을 “단호한 재정과 강한 정부가 프랑을 구한 사건”으로 기억했습니다. 실제로는 프랑화 가치를 전전 금가치의 5분의 1 수준에서 고정한 것이었고, 다시 말해 80%의 평가절하를 인정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대중적 기억 속에는 그 복잡한 사실보다 푸앵카레 프랑의 신화가 남았습니다. 프랑을 지킨다는 것은 공화국의 신용을 지킨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대공황은 그 신화를 다시 시험했습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떠나 파운드를 절하했고, 1933년 미국도 달러를 절하했습니다. 1935년 3월 벨기에까지 벨가를 절하하자, 프랑화 역시 곧 절하될 것이라는 기대가 강해졌습니다. 프랑스는 그대로 서 있었지만, 주변 통화들이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에 프랑스 상품은 상대적으로 비싸졌습니다. 프랑을 내릴 수 없다면 프랑스 상품 자체를 싸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임금과 생산비용, 공공지출을 낮추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이 1930년대 중반 프랑스를 강타한 디플레이션 논쟁의 본질이었습니다.
1935년 5월의 금융위기는 그 논쟁을 정치위기로 바꾸었습니다. 벨가 절하의 충격, 좌파의 세력 확대, 중도우파 정부의 행정능력에 대한 의심, 프랑화 절하 가능성에 대한 투기가 겹치며 금 유출이 빨라졌습니다. 5월 지방선거에서 PCF, SFIO, 급진당이 중간 단일화를 통해 강한 성과를 내자 금융권의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방크 드 프랑스는 금리 인상으로 프랑을 방어하려 했지만, 금은 빠져나갔습니다. 피에트리 내각은 재정 분야의 긴급권한을 요구했으나, 특별권한법은 상원에서 부결되었습니다. 피에트리는 총사퇴를 건의했지만, 르브룅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피에트리 내각은 살아남았고, 대신 법률 없이 가능한 행정우회 긴축을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임금을 직접 깎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공사업을 멈출 수 있었고, 공공기관 유지비를 삭감할 수 있었고, 보조금 지급을 늦출 수 있었으며, 신규채용을 동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곧 나타났습니다. 8월 초 브레스트와 툴롱의 해군공창과 조선소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파리에서도 버스 노동자와 공무원, 공공기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새로 재통합된 CGT 중앙이 폭력적 충돌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훨씬 큰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수적 은행가와 상류층은 바로 그 점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좌파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분노를 멈추고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제와 금융권, 군부, 교회, 보수적 상공업자들과 지방 명사들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좌파는 단순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반격의 통로로 등장한 인물이 뤼도비크-오스카르 프로사르였습니다. 그는 SFIO와 PCF의 당수를 모두 지냈던 독립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노동운동의 언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를 모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프랑화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굶는 사람은 노동자이고, 예산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잘리는 것은 사회보험이며, 파업이 공화국의 목을 조르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반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프랑 방위·노동질서 및 공화국 안전 보전에 관한 특별위임법안이 제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법안은 세 개의 칼날을 한 손잡이에 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프랑화 방위였습니다. 정부는 공공지출을 줄이고 공공사업을 동결하며, 보조금과 행정비를 삭감하고 국가가 지급하는 봉급과 수당을 조정할 권한을 요구했습니다. 두 번째는 노동질서였습니다. 파업권은 폐지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쟁의는 먼저 조정되어야 했습니다. 필수산업과 공공서비스의 파업은 특별절차에 묶일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공공안전이었습니다. 우익 리그, 정치적 체육단체, 반파시스트 행동위원회, 외국 망명자 지원망, 노동자 생활조직, 지방의 가격감시 모임이 모두 공공질서의 관점에서 신고·감독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좌우를 모두 겨냥한다고 했지만, 좌파는 어떤 조직이 더 쉽게 “정치적 선동망”으로 분류될지 알고 있었습니다.
1935년 9월 18일, 파리 노동거래소는 평소보다 일찍 붐볐습니다. 샤토도 거리의 석조 건물 앞에는 신문기자 몇 명과 사복경찰로 보이는 남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안쪽 복도에는 젖은 외투 냄새와 담배연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법안의 문구가 신문에 실린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대회의실의 목재 벤치들은 이미 거의 다 찼습니다. 철도, 버스, 항만, 우편, 금속, 해군공창, 시청 고용원, 교사, 실업자위원회 대표들까지, 자기 봉급과 파업권과 회합의 자유가 같은 법안 안에 묶인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연단 가까운 자리에는 CGT 총서기 레옹 주오와 중앙 간부들이 앉았습니다. 그 옆에는 아직 통합의 기름칠이 마르지 않은 옛 CGTU계 간부들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PCF 쪽에서는 자크 도리오가 와 있었고, SFIO에서는 레옹 블룸의 측근으로 알려진 뱅상 오리올이 서류철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PUP 대표단은 뒤쪽에서 조용히 서로 말을 주고받았고, 좌파 급진당 연락대표 두 명은 연필을 쥔 채 말을 아끼고 있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의사진행은 흐트러졌습니다. 누군가는 프로사르의 이름을 듣자마자 욕설을 뱉었습니다. 해군공창 대표 하나는 공무원 봉급표를 흔들며, 이것을 더 삭감하겠다는 것은 자기 가족들을 거리로 내몰겠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버스 노동자들은 벽에 기대어 서서 반동 우파정부 타도를 외쳤습니다. 주오와 CGT 중앙서기들은 장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처음 몇 분 동안 회의장은 법안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보다 법안을 어떤 말로 저주할 것인가에 더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레옹 클레르퐁은 그 소란 속에서 발언했습니다. 그는 프로사르 법에 대한 반대에는 이견이 없어 보이니,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이 법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였고, 다른 하나는 이 법의 대안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는 독일 방향을 가리키며, 독일 SPD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몰락을 기다리겠다는 생각은 독일과 같은 결말을 반복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발언권을 가장 먼저 잡은 쪽은 SFIO 좌파였습니다. 마르소 피베르 계통의 다니엘 게랭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안을 부르주아 공화국의 계급전쟁 선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선전포고가 내려졌다면, 노동자도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랭은 CGT를 주축으로 하는 산별 노동자 평의회를 구성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발언에 구 CGTU계 활동가들이 호응했습니다. 도리오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클레르퐁도 처음에는 그 흐름에 올라탔습니다. 그는 계급전쟁 국면에 돌입한 이상 노동자 평의회를 조직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들이 급진당과 별도로 더 긴밀한 통일전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급진당은 우방이지만 결국 중산층의 정당이며, 지금은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따로 뭉쳐 강력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뱅상 오리올이 곧바로 반문했습니다. 그것이 급진사회당을 제외한 PCF, PUP, SFIO,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좌파 세력들만의 연계조직을 만들자는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오리올은 클레르퐁이 다가오는 총선거에서 프랑스의 중간계급과 중도적 공화주의자들을 떼어낸 채 링 위에 올라가자는 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협력 중인 정파들에 대한 비하와 괄시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급진당 연락대표들의 표정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굳어졌습니다. 몇몇 SFIO 당원들이 그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클레르퐁은 오리올과 더 논쟁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쯤에서 사회주의 정당만의 통일전선 주장을 거두었습니다.
그 사이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은 회의장 밖과 안쪽 복도의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반응을 파악하려 했습니다. 법안에 대한 일반 여론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프랑화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 자체에는 상당한 공감이 있었습니다. 저축이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법안 자체에는 비판적 목소리가 컸습니다. 공무원, 교사, 비숙련 노동자, 은퇴자와 연금생활자들은 특히 격렬했습니다. 법이 너무 세고 독재적이라는 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이앙리는 동시에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좌파의 총파업도 두려워했습니다. 버스, 철도, 우편, 전기 같은 공공부문이 한꺼번에 멈추면 일상이 멈춥니다. 상점주들은 약탈을 두려워했고, 중산층 시민들은 거리의 고성과 폭력, 뒤집힌 자동차와 경찰의 곤봉을 떠올렸습니다. 루이앙리는 그 결과를 회의장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총파업으로 행동하면 좌파의 의견은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좌파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따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클레르퐁은 노동계급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지 소부르주아 계급의 눈치를 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응수했습니다. 루이앙리는 일반 사람은 노동자가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마르그리트 데쉴리는 법안의 언어를 다른 방식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몽트뢰의 파시스트 국제회의 관련 문서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노동정책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취지의 발언과 문서들은 충분했습니다. 그녀가 얻은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파시즘은 노동자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더 불쾌하게도 노동자를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다시 소유하려 합니다. 노조를 폐지하기보다 직업공동체로 바꾸고, 대표를 금지하기보다 국가가 임명한 대표로 대체합니다.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의 위험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노동자를 거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허가받은 조직 안에 가두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이 논리를 모든 사람 앞에 던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일부 CGT 간부들과만 공유했습니다. 총파업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총파업이 노동자만의 전면전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습니다. 피에트리와 프로사르가 이탈리아식 노동통제를 프랑스 공화국의 이름으로 수입하려 한다고 선언하고, 그에 맞서 노동자만이 아니라 다른 프랑스 시민들까지 함께 나오게 해야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투쟁의 초점을 정권 전체에 대한 혁명적 공격이 아니라,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의 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공화국적 저항으로 좁히려 했습니다.
그 말은 CGT 내부에서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주오와 벨랭, 라코스트 같은 전통적 지도부는 여전히 총파업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러워했지만, 노동자의 싸움을 시민적 저항으로 넓히자는 발상에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구 CGTU계는 동의하면서도, 노총이 총파업이라는 단어조차 조심해야 하는 시대가 왔느냐며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통합 이후 중심부로 떠오른 중간파는 가장 빠르게 반응했습니다. 로베르 보트로는 총파업보다 전국 노동행동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행동은 해야 하지만, 이름과 형태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옹과 루이앙리는 이 논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글로 옮겼습니다. 레옹은 무솔리니의 “리라를 위한 전쟁”을 피에트리-프로사르 법과 연결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통화방어라는 이름으로 임금삭감, 노동통제, 국가의 직업단체 장악이 이루어졌듯, 프랑스 정부도 프랑을 위한 전쟁을 노동자에 대한 전쟁으로 바꾸려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 글은 강했습니다. 피에트리와 프로사르는 무솔리니의 길을 걷고 있으며, 프랑을 지킨다는 말은 노동자 조직과 공무원 봉급을 국가와 경찰의 허가 아래 두려는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이앙리의 글은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좌파 선전문처럼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실들을 차례대로 배열했습니다. 무솔리니가 리라를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무엇을 했는지, 파시즘이 노조를 어떻게 직업공동체와 국가조정기구 속에 묶었는지,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이 어떤 식으로 독립노조와 생활위원회, 실업자 조직과 파업권을 행정절차 안에 넣으려 하는지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간결했습니다. 피에트리와 프로사르는 검은 셔츠를 입지 않았지만, 그들의 법안은 검은 셔츠가 하던 일을 의회공화국의 이름으로 수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이 회의장 안에서 공유되자 분위기는 한순간 가라앉았습니다. 폴 리브는 법안에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노동자 집단행동을 지금 당장 해버리면 의회 내 급진당이 곤란해질 것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전선주의자당 소속이자 CRR과 가까운 젊은 하원의원 가스통 베르주리가 그 말을 이어받았습니다. 거리의 투쟁이 프랑스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경고였지만, 장내의 일부는 그것을 가능성으로 들었습니다.
도리오가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그는 반혁명주의자들이 언제나 혁명에 대한 마지막 방어수단으로 파시즘을 채택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핀란드에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의회적 합법의 가면을 쓴 채 노동자의 공화국에 대한 법률 테러리즘을 자행하는 기성 우파의 민낯을 폭로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전쟁을 전쟁이라고 인정하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앙리 바르베가 옆에서 호응했고, 자크 뒤클로는 이마를 짚었습니다.
클레르퐁은 뒤클로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도리오의 발언은 이론적으로 잘못되지 않은 듯한데, 실리적으로 잘못된 측면이 있는 것이냐고 했습니다. 뒤클로는 지금의 노선이 가결된다면 호응은 좋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공화국의 중간파도 사실상 총파업과 큰 차이가 없는 공동행동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의회 안의 공화좌파들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좌파연합이 집권해도 상원은 여전히 급진공화파와 우파가 우위를 점할 것이고, 군부와 금융권과 우익 리그가 대통령과 상원을 요새 삼아 인민의 정부를 죽이려 들면 막아낼 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길이 시민적 저항으로 포장되었지만 결국 좌경맹동모험주의로 향하는 길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 말은 클레르퐁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다시 발언해, 지금의 노선이 호응을 얻더라도 의회 안의 공화좌파들과 결별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민의 정부가 나중에 들어서더라도, 군부와 금융권, 우익 리그가 합세해 대통령과 상원을 근거지로 삼으면 그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실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도리오에게도 조용히 같은 취지의 말을 전했습니다. 당중앙이 좌경맹동모험주의를 우려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도리오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자신도 당장 혁명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물러섰습니다. 지금 상황이 사실상의 전쟁 상태라는 말은 은유였다고 정리했습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는 더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노동거래소를 빠져나와 코민테른 연락선을 찾으려 했지만, 마누일스키나 톨리아티로 이어지는 선에는 닿지 못했습니다. 대신 주프랑스 소련대사관 라인을 접촉했습니다. 소련 대사대리 알렉세이 바레츠노프는 그녀를 보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코민테른 프랑스 지부와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노동자-농민 소비에트와 총파업, 정권과의 충돌 이야기가 회의장 안에서 오간다고 말했습니다.
바레츠노프는 잠시 침묵했습니다. 그는 도리오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면, 피에트리 내각보다 더 빠르게 소련-프랑스 조약을 죽이는 법을 알고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프랑스 공화국과 조약을 맺었지, 파리 코뮌과 혁명적 연대를 맺은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코민테른의 결정을 해석할 위치는 아니지만,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모스크바에 필요한 것은 파리의 10월이 아니라,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프랑스라고 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반드시 막겠다고 답했습니다.
회의장에서는 PUP 대표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마르그리트의 방안, 즉 노동자 집단행동이라는 언어로 정부의 파시즘적 기조에 대항하는 시민적 저항을 조직하는 안에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그 과정은 CGT 중앙도, 특정 정당 지도부도 아닌 노동자 자신이 선출한 대표기구가 주도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들은 소비에트라는 단어를 피하려 애썼습니다. 루이앙리는 곧바로 그 이상의 발언을 제지했습니다. 그는 민주공화정에 대한 혁명을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개혁은 천천히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마르그리트의 제안에 찬성하는 길로 가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레옹도 공산당원들에게 같은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마르그리트 데쉴리의 의견대로 반파시즘적 시민저항을 조직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도리오에게는 따로, 공화좌파와 연결된 다리를 불태우는 모험주의보다 공산당이 특기인 조직력을 기반으로 시민적 저항을 주도하고 그 내부에서 입지를 확대하는 편이 코민테른의 인민전선 노선에도 부합한다고 말했습니다.
회의장의 급진적이고 강경한 열기가 약간은 식어가고 있었지만, 마르그리트 데쉴리는 확실한 냉각을 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다른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프랑스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면 어렵게 지켜온 노동조합의 독립성은 특정 당에 종속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당들은 동지이지 사령관이 아닌데, 지금 누군가는 노동자들을 병사로 부리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정보는 빠르게 퍼졌습니다. 노동거래소 바깥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CGT가 공산당의 졸개냐고 물었습니다. 파리 코뮌을 다시 세우자는 말이 사실이냐고 외쳤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증조부모가 코뮌 학살 때 총살당했다고 했습니다.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세탁용 다듬이를 지휘봉처럼 들고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의견이 정리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클레르퐁, 루이앙리, 마르그리트를 불러모았습니다. 48시간 경고파업을 하되, 동원 규모는 최대한 크게 하고 구호는 피에트리와 프로사르의 파시즘적 정책을 규탄하는 것으로 제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정권 전체를 향한 총공격이 아니라, 두 사람을 향한 좁은 범위의 강한 공격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노동자 소비에트를 세우자는 말에는 참고할 부분이 있더라도, 이름과 형태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CGT 조합원을 넘어서는 연락조직은 필요하지만 평의회 같은 이름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별·지역별 노동자 연락위원회, Comités de liaison ouvrière par branche et par localité라는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그 안은 받아들여졌습니다. 루이앙리는 동의했습니다. 클레르퐁도 종합적으로 주오의 판단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벨랭과의 언쟁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르네 벨랭은 클레르퐁이 방금 전까지 사회주의 정당들만의 통일전선과 사실상 혁명적 대응을 말하다가 이제 와서 말을 바꾸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레옹 클레르퐁은 벨랭의 태도에 항의했습니다. 레옹으로서는 억울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도리오를 말렸고, 마르그리트의 노선을 지지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CGT 지도부, 특히 벨랭의 눈에는 그 차이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의 초반에 사회주의 정당만의 통일전선을 꺼낸 사람도, 도리오와 생드니 조직에 오래 기대어 온 사람도 결국 레옹이었습니다. 벨랭에게 문제는 레옹이 마지막에 어떤 결론을 냈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결론까지 가는 데에 이렇게 많은 불을 질렀느냐였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뒤클로와 주오에게 바레츠노프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소련이 협력하는 대상은 프랑스 공화국이지 파리 코뮌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뒤클로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당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할 수는 없겠지만 토레즈는 개인적으로 크게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조간에 레옹과 루이앙리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예상보다 반응은 컸습니다. 피에트리와 프로사르는 법안을 설명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것부터 해명해야 하는 위치에 몰렸습니다. 특히 프로사르는 단순히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흔한 독립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언어를 국가노동통제에 바친 극우 소렐주의자처럼 취급받기 시작했습니다. 피에트리는 프랑스 공화국에 파시즘을 수입하려다 거리에서 쫓겨날 총리라는 낙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피에트리-프로사르의 파시즘적 조치로부터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노동자-시민 공동행동이 시작되었습니다. CGT 중앙은 48시간 경고파업을 지령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동원은 그보다 넓었습니다. CGT 조합원뿐 아니라 비가맹 노동자, 독립노조, 일부 CFTC 조합원까지 참여했습니다. 48시간 동안 프랑스는 정지했습니다. 버스와 전차가 멈추고, 우편과 항만의 움직임이 느려졌으며, 해군공창과 철도 주변에서도 작업이 크게 줄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폭동이 아니었습니다. 거리에는 삼색기가 나왔고,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습니다. “피에트리 물러가라”, “공화국에 파시즘을 위한 자리는 없다”, “긴급입법 철회하라”, “프로사르 사퇴하라”는 구호가 반복되었습니다.
3일 뒤, 프랑수아 피에트리는 르브룅 대통령에게 사의와 내각 총사퇴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르브룅은 이번에는 막지 못했습니다. 1932년 이래 가장 오래 버틴 피에트리 내각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피에트리는 단순히 사임한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화국에 파시즘을 수입하려다가 거리에서 쫓겨난 총리로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사르는 좌파에서 우파로 옮겨간 흔한 전향자가 아니라, 공화국 장관의 이름으로 노동조합을 국가에 묶으려 한 소렐주의 극우처럼 낙인찍혔습니다.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은 본회의에 오르기도 전에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화 방어, 디플레이션, 금융권의 불안, 시장의 불신, 만성적 무역적자라는 문제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기뻐할 수도,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큰 승자는 CGT였습니다. CGT는 프랑스를 멈췄다가 다시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노동자들 간의 연락기관으로 출발한 산별·지역별 노동자 연락위원회는 CGT, CFTC 좌파, 독립노조를 잇는 광범위한 노동자 대표기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CGT 중앙은 그것이 소비에트처럼 보이는 모든 언어와 행동을 제한하려 했지만, 노동자의 조직된 힘 자체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르그리트 데쉴리는 CGT 연맹서기가 되었습니다. 주오의 신뢰는 두터워졌고, 그녀보다 우파적인 르네 벨랭도 그녀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SFIO 좌파와 구 CGTU 강경파는 그녀가 노동자들을 동원해 자신들을 겁박했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성을 데쉴리가 아니라, 악명 높은 19세기 극우사상가인 그녀의 조상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드술리로 불렀습니다.
SFIO 내부에서는 세 해석이 갈렸습니다. 블룸의 중앙파는 노동자와 시민이 공화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고 보면서도, 이번 승리는 사회주의로의 질서 있는 이행 과정 안에 놓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베르의 좌파는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CGT가 왜 노동자 생산통제로 나아가지 않는지 답답해했습니다. 폴 포르와 그의 평화주의 우파는 공동행동을 승리로 인정하는 데에도 주저했습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고, 다음번에는 쿠데타나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습니다.
PCF에서는 균열이 공개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은 곧 도리오를 제명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토레즈는 도리오와 바르베, 생드니 조직을 당에서 떼어냈습니다. 클레르퐁은 PCF 생활전선조직의 탈도리오화 작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도리오는 기다렸다는 듯 새 당을 차렸습니다. 반공 파시즘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너무 깊이 좌파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 노동당, Parti du Travail Français가 창당되었습니다. 국민주의와 반코민테른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좌파였고, 프랑스 노동자의 당을 자임했습니다. 레옹 블룸은 그것을 급진적 최소강령주의라고 불렀습니다.
PUP도 큰 이득을 얻었습니다.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의 이름은 알려졌고, 당의 인지도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PUP는 여전히 만년필과 윤전기의 당이었습니다. 독자적 조직을 갖기보다는 CGT와 함께 움직였고, 노동조합의 독립성을 주장하면서도 CGT의 정치적 언어를 대신 만드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PUP를 국민의회에 파견된 CGT의 대사관이라고 불렀습니다. CGT 중앙은 그런 해석을 부정했지만, 그 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습니다.
우파의 적색 공포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프랑스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울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번졌습니다. 그러나 피에트리-프로사르 법이 이미 파시즘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좌파를 곧장 치자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없었습니다. 이때 우파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은 전 내무장관 조르주 망델과 프랑수아 드 라로크였습니다. 라로크는 USPF를 프랑스 사회운동으로 개칭하고, 껍데기로 남아 있던 불십자단을 완전히 해산했습니다. 망델의 프랑스사회당과는 정식 제휴관계를 맺고, 각각 원내조직과 원외 사회조직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MSF 일부 조직의 반유대주의자들은 망델의 본명인 조르주 로쉴드라는 이름을 거론하며 이탈했고, 악시옹 프랑세즈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물론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합법적 대항혁명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우파는 더 어두운 곳을 보았습니다. 샤를 모라스의 악시옹 프랑세즈, 앙리 도르제르의 녹색셔츠단, 피에르 테탱제의 애국청년단 같은 우익 리그들은 이제 400만에 가까워진 CGT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기성 우파 일부가 더 은밀하고 더 지저분하며, 문제가 생기면 쉽게 잘라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급진사회당이었습니다.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와 피에르 코트 등 CRR계 좌파 급진당원들은 공동행동 자체를 긍정했습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민주공화국이 필요하면 채택할 수 있는 경제체제였습니다. 그러나 급진당 중간파와 우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달라디에의 중간파는 사회주의자들을 마냥 비난할 수도, 적극 긍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카미유 쇼탕과 조르주 보네 같은 우파·상원 급진당원들은 확고한 반좌파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좌파가 자제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필요하다면 중산층 의회공화국을 전복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불편했습니다.
거리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제 의회가 답해야 했습니다.
Event 9-2. 거리가 묻고, 의회가 답하다
1935년 9월 30일, 팔레 부르봉 하원의장실 뒤편 소회의실에는 급진당 좌파와 달라디에계 중도파, 쇼탕-보네계 우파, 공화사회당 인사들, 그리고 SFIO 측 대리인들이 모였습니다. 피에트리 내각이 무너진 지 열흘이 지났지만, 프랑은 여전히 불안했고 금 유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르브룅 대통령은 여러 우파 인사들에게 조각을 타진했으나, 누구도 피에트리처럼 정치적으로 매장되는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엘리제는 급진당에 “프랑화, 공공질서, 차기 총선까지의 정국 관리”에 관한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했습니다.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먼저 얇은 비공개 메모를 꺼냈습니다. 표지에는 “프랑 안정화에 관한 예비검토”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평가절하”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내용은 분명했습니다. 프랑화 가치를 맹목적으로 수호하는 것은 프랑스 실물경제를 의미없이 희생시키는 실책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피에르 코트 의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그 문서는, 결론을 “검토 필요”라는 애매한 문장으로 흐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단어를 피했지만, 그 단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장 뒤퐁은 잠시 메모와 회의실 안의 얼굴들을 번갈아 본 뒤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만큼, 각자 이 메모에 대해 생각을 말해보자고 했습니다. 조르주 보네가 가장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는 메모를 접어 내려놓고, 교사와 우체국 저축자, 퇴역군인, 국채 보유자들은 이런 문장을 읽으면 곧장 알아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실물경제를 위해 당신들의 절약을 양보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달라디에계의 마르크 뤼카르는 보네의 우려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태를 그대로 두면 저축자가 정말 보호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장이 멈추고 세수가 줄며 정부가 다시 공공사업과 봉급과 보조금을 깎으면, 프랑의 숫자는 보존되어도 그 프랑이 기대고 있는 나라가 약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쥘 모크(Jules Moch)는 SFIO가 프랑 절하를 승인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피에트리-프로사르식 특별권한이 되살아나고, 노동조합이 국가질서의 적으로 취급되며, 공화국이 프랑 공포에 매달려 아무 결정도 못 하는 상황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SFIO의 최소 조건은 분명했습니다. 노동권 현상유지, 파업 보복 금지, 소액저축자 보호, 총선 보장이었습니다.
미셸 부스케는 올 것이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프랑의 가치 조정 문제를 계속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장 평가절하를 선언하는 방안은 정치적 재앙으로 드러났습니다. 저축자, 연금생활자, 국채 보유자의 분노는 급진당을 향할 것이고, 방크 드 프랑스(Banque de France)는 공개적으로 저항할 것이며, SFIO와 CGT도 물가안정책 없는 절하에 반대할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총선 이후로 모든 조치를 미루는 것도 위험했습니다. 시장은 총선 후 절하를 예상하고 금을 더 빠르게 빼낼 것이며, 가치 방어를 위해 더 강한 긴축이 필요해질 것이었습니다.
보네는 바로 그 이유로 정부가 “프랑화의 가치를 보증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워도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로자의 봉급을 크게 줄이고, 사기업에도 비슷한 가이드라인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피에트리-프로사르식 포괄 위임이 아니라, 재정 권한에 한정한 특별위임을 다시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굳었습니다. 며칠 전 특별위임과 노동통제가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보네는 더 좁은 이름의 같은 문을 다시 열자고 말한 셈이었습니다.
장 뒤퐁은 다른 방향에서 자료를 살폈습니다. 푸앵카레 안정화 이후 물가는 안정적이었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상점 매출, 농가 소득, 공장 주문, 세수가 모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이미 금본위제를 떠났고, 프랑스만이 높은 가치의 프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프랑스는 세계 금의 거대한 몫을 쥐었지만, 그 금은 화폐로 풀리지 않고 불태화되어 있었습니다. 장은 결론을 짧게 정리했습니다. 프랑스 국고는 금고 속 프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고팔고 일하고 세금을 낼 때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프랑 절하가 경제를 살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물가방어였습니다. 절하가 노동자와 소액저축자에게 청구서를 보내는 방식이 된다면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산업계에도 긴급히 문의했습니다. 생산총연맹(CGPF) 쪽에서 온 답은 계산적이었습니다. 핵심은 수입 원자재, 연료, 운송비였습니다. 철도와 항만 이용료, 간접세를 낮추고, 장기 공공구매계약을 맺어 국내 기업에 신용을 공급하며, 원자재 수입에는 필수외환을 우선 배정하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결국 물가를 지키려면 달러와 파운드가 필요했고, 그 문은 다시 BdF의 금고 앞에서 멈췄습니다.
마르셀 포쿠아는 SFIO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정리했습니다. 공동행동 참가자에 대한 보복 금지, 노동권 추가 후퇴 금지, 생필품 물가 안정, 일정 이상의 물가상승 시 임금과 연금 재협의, 수입물가 안정, 소액저축자 보호, 특별권한의 배제가 필요했습니다. 미셸은 그 조건을 받아들여 급진당 좌파와 망데스 프랑스 쪽에 넘겼습니다. 이제 논의는 프랑을 낮출 것인가가 아니라, 프랑을 낮추더라도 누구를 먼저 지킬 것인가로 옮겨갔습니다.
몇 시간 뒤 BdF 제1부총재 피에르외젠 푸르니에(Pierre-Eugène Fournier)가 도착했습니다. 장 타네리(Jean Tannery) 총재의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앉아 서류를 검토한 뒤, 은행이 국가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정부의 적이 아니면서도 정부의 임시 금고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프랑의 신뢰는 법률과 절차, 그리고 침묵 위에 서 있으며, “절하”라는 단어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면 그때부터는 정책이 아니라 공황을 다루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금 보유를 정치적 기금처럼 다루거나, 중앙은행 정관개혁과 통화조정을 동시에 발표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셸은 제도개혁이 있어야 시장 안정과 통화조정도 가능하다고 맞섰지만, 푸르니에는 시장이 개혁의 의도를 읽지 않고 권한 공백과 충돌의 조짐을 먼저 읽는다고 답했습니다. 중앙은행 정관 개혁 논의는 테이블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장은 그 순간 이 회의가 얼마나 좁은 복도 위에 서 있는지 보았습니다. BdF 없이는 외환시장 개입도, 필수수입 결제도, 은행 유동성 공급도, 안정화기금의 신뢰도 얻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BdF가 원하는 순서대로 가면, 정치가 다시 기다림 속에서 마비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마르셀은 재무부와 BdF의 상시 정보공유, 필수외환 우선배정, 신용경색 방지, 통화조정 비상계획 사전 작성 같은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푸르니에는 일부 기본적인 정보공유에는 동의했지만, 소유구조나 정관개혁 논의는 총선 이후로 미루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미셸과 망데스 프랑스는 그 관료적 태도에 불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망데스는 BdF가 지금의 신용경색, 금 불태화, 디플레이션에 의한 실물경기 둔화에 직접 책임이 있는 기관이라며, 안정화기금의 운영주체는 재무부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단어의 문제만큼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셸은 1926~28년의 푸앵카레 안정화를 떠올렸습니다. 전쟁 전 제르미날 프랑의 금가치 대부분을 포기했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프랑의 폭락보다 안정화로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제2의 “안정화(stabilisation)”라는 이름이 제시되었습니다.
장이 푸르니에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는 중앙은행을 존중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지 않도록 이 자리에 모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거리에는 빵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를 이용해 은행 금고를 열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푸르니에는 잠시 생각한 뒤 양보안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BdF가 기금의 기술적 운용권을 갖고, 기금의 목적과 한도는 재무부 법령으로 정하되 1년 안에 법률화하며, 재무부는 감독권과 공동서명권을 갖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부가 금고에 손을 넣되, 금고를 접수하지는 않는다는 타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타협은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보네만이 비교적 안도했고, 뤼카르도 한숨을 쉬었습니다. 마르셀은 여기서 더 강한 압박을 생각했습니다. 협조하지 않으면 BdF의 금 불태화, 고금리, 신용경색, 200대 주주 영향력을 의회조사와 여론전으로 터뜨리자는 발상이었습니다. 장은 즉각 반대했습니다. 협박하려고 BdF 인사를 불렀다는 말이 나오면 푸르니에 부총재는 회의실을 나가 신문사로 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쥘 모크는 그 말을 날카롭게 받았습니다. 시위와 파업이 정부정책을 좌초시켰다면, 그 정책이 무엇이었는지도 함께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리가 먼저 협박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먼저 생활을 압박했고 거리가 답한 것이라는 반박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르셀은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모습과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본래 도덕적이고 원칙주의적인 사회주의자였습니다. 협박과 공작을 혐오하고, 정치가 아무리 더러워져도 최소한의 인간적 선은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회의실에서 그는 BdF가 버티는 한 노동자와 소액저축자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이 인간적 도덕감각을 밀어냈고, 그는 조급함 속에서 200가문 스캔들을 폭로하기 위한 공작을 시도했습니다.
그 시도는 심하게 실패했습니다. 푸르니에와 보네가 보는 앞에서 그 움직임은 들켰고, 회의실의 공기는 즉시 깨졌습니다. 장은 기겁해 마르셀을 내보내야 한다고 외쳤고, 푸르니에는 SFIO와는 협상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보네는 모든 논의의 뿌리가 저축자의 생활저축을 일부 급진좌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용하자는 불순한 의도였다고 규정했습니다. 프랑화의 평가는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못박았습니다. 푸르니에도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장은 어떻게든 보네와 푸르니에를 앉히려 했고, SFIO에 공식 사과와 징계를 요구했지만 모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SFIO의 일은 SFIO가 알아서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모크는 뒤로 물러나 더 이상 발언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습니다. 그 순간까지 쌓아온 안정화기금, 소액저축자 보호, 필수외환 배정, 통화조정 비상계획은 모두 휴짓조각이 되었습니다. 프랑화 절하 자체가 불가능해졌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미셸에게 조기총선을 건의하자고 말했습니다. 급진당과 SFIO가 동의한다면, 피에트리 내각이 짧은 기간 관리용 내각으로 존속하고, 금 유출을 막기 위한 임시조치 정도는 합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셸은 다른 해결책이 없다면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보네는 장에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공화국 중간계급은 결국 안정을 원하고, 안정이란 거리의 총파업에도 국가가 정상운영된다는 신호라고 했습니다. 프랑을 포기하는 말 자체가 거리의 떼쓰기에 굴복하는 증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그 말이 지금 급진당 우파의 세계관이라는 사실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뤼카르가 모두가 피하고 있던 단어를 꺼냈습니다. 분당이었습니다. 그는 당내 의견의 비가역적 불일치 문제를 예비 조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파멸적으로 찢어지는 것보다 최소한의 협약을 통해 헤어지는 편이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장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지금 당장 분당하는 것은 더 큰 공황을 부를 것이라며 총선 이후로 미루자고 제안했습니다. 피에르 코트는 총선 전까지 당을 유지한다면 공천에 중립적 인물을 배정해야 한다고 했고, 장은 그 제안을 지지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절하가 없는 임시 대응책뿐이었습니다. 장은 당보 스크랩에서 예전의 논쟁을 찾아냈습니다. 앙드레 타르디외의 국민장비계획, 즉 대규모 국민장비공사(grands travaux d’outillage national)였습니다. 프랑 절하도 무제한 적자도 하지 않고, 장기공채를 발행해 도로, 항만, 전기, 주택, 학교, 수도 같은 생산적 공공사업을 벌이자는 구상이었습니다. 좌파는 그것이 토목업자 배만 불리는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장은 거기서 우회로를 보았습니다. 실업자 구제와 공공주택 보급 비중을 늘리면, 절하 없이도 당장의 디플레이션 압력을 일부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장비계획 수정안은 의외로 급진당 좌파와 공화사회당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SFIO 쪽도 뒤로 물러난 채 검토할 수는 있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보네는 만족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거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방안은 프랑을 건드리지 않고도 공채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었고, 우파는 그것을 생산적 투자로 부를 수 있었으며, 좌파는 노동조건과 공공주택을 붙여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회의의 마지막 정리는 불완전했습니다. 프랑화 가치 조정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금 유출 방지에는 필요시 공공자금을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선거관리용 내각을 세우고, 총선은 앞당기는 방향으로 엘리제에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국민장비공채는 재무부 등 다부처 관할로 제한 발행해 디플레이션 문제에 임시 대응하고, 총선 후 차기 내각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재평가하도록 했습니다. 급진당 분당 문제는 총선 이후로 미루고, 공천 공정성을 위해 중립적 관리위원장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미셸은 회의가 끝난 뒤에도 소액예금자 보호 법안을 작성했습니다. 10,000프랑 미만 예금은 국가가 전액 보장하고, 50,000프랑 미만 구간에서는 원금에 한해 보호하며, 10,000프랑 미만 예금에는 1년간 특별우대금리 3~5%를 적용하는 초안이었습니다. 프랑이 낮아질 미래가 오더라도 소액저축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표시였습니다. 하지만 그 법안은 당장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BdF의 금고는 여전히 닫혀 있었고, 프랑은 여전히 높은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 엘리제에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르브룅 대통령은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그가 기대한 것은 급진당이 SFIO를 달래고 우파를 겁먹이지 않으면서 총선 전까지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중앙은행과의 결렬, 급진당의 분열, 프랑 문제의 유예, 그리고 타르디외식 장비공채를 조금 왼쪽으로 고친 임시방안이었습니다. 르브룅의 평가는 차가웠습니다. 급진당은 실패했고, 사회주의자들은 타협 의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르브룅은 결국 피에트리를 다시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좌파와도 말이 통하고, 법률가적이며 원칙주의적인 공화사회당의 조제프 폴봉쿠르(Joseph Paul-Boncour)에게 임시내각을 맡겼습니다. 폴봉쿠르는 총리와 외무장관을 겸했고, 재무장관에는 마르셀 레니에(Marcel Régnier)가 유임되었습니다. 국민장비공채를 담당할 공공사업장관에는 급진당 우파 상원의원 앙리 루아(Henri Roy)가 임명되었습니다. 루아는 타르디외식으로 토목업자들의 배만 불리는 정책을 펴지도 않았지만, 좌파가 만족할 만한 거국적 투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공자금을 이용해 고용과 경기를 떠받치려 한 기억은 남았습니다.
즉각 총선은 거부되었지만, 이듬해 5월까지 기다리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하원 중도파와 우파, 그리고 상원은 1936년 2월 말이라는 애매한 조기총선 일자를 의결했고, 르브룅은 서명했습니다. CGT는 즉각 총파업을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폴봉쿠르는 피에트리처럼 권위주의적 시도를 할 사람이 아니었고, 국민장비공채는 실업자 구제라는 점에서 노동조합의 이익에도 부합했습니다. 그러나 CGT는 노동자 연락위원회를 노동자 대표위원회(Comité des représentants ouvriers)로 개칭했습니다. 그것은 총파업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두겠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거리에서는 작은 습격들이 늘었습니다. 군소 우익 리그들이 노동자 집회와 조합 사무소 주변을 공격했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아직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CGT 중앙은 방어적 대응만 지시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들이 우익 리그를 추적해 박살내기 시작하면, 좌파 전체에 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참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누가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외교에서는 더 큰 균열이 열렸습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전면 침공하자, 영국의 새뮤얼 호어(Samuel Hoare) 외무장관은 프랑스에 이탈리아에 대한 전향적 양보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은 더 이상 피에르 라발이 아니었습니다. 폴봉쿠르는 국제연맹을 통한 다자적 해결을 중시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영토 점령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항만 이용권과 상업권, 개발 이권 같은 비주권적 보상만 허용하는 호어-폴봉쿠르 제안이 국제연맹에 제출되었습니다. 무솔리니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35년 11월 말, 그는 로마 주재 독일 대사 울리히 폰 하셀(Ulrich von Hassell)에게 이탈리아는 더 이상 로카르노 체제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며, 이탈리아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독일의 주권 회복을 지지하겠다고 알렸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급진당의 분열이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 등 청년 당원들이 이끄는 급진당 좌파와 달라디에계 중도파는, 폴봉쿠르의 공화사회당과 SFIO 우파 출신 사회민주주의자들, 라마디에계 신사회주의자들과 합당 예비회담을 진행했습니다. 마르케와 데아는 급진공화주의자들의 방법론이 너무 미온적이라 보고 이탈해 독자 계파를 준비했습니다. 새 신당의 이름은 급진공화사회당(PRRS)이 되었습니다.
조르주 보네와 카미유 쇼탕을 중심으로 한 급진당 우파는 독립급진연합(URI)이라는 당명을 내걸었습니다. 상원 급진당의 거의 전부, 하원 급진당의 상당 부분이 그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급진당은 아직 ‘공식적으로는’ 갈라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이미 다음 선거 이후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의회는 거리의 질문에 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답은 확신이 아니라 유예에 가까웠습니다. 프랑은 그대로 남았고, 금고는 닫혀 있었고, 노동자들은 다음 신호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공화국은 한 번 더, 투표함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Intermission-E. 피레네 이남, 찢어진 공화국
일행이 바르셀로나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분파들의 통합을 돕고, FAI의 무정부적 모험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뒤, 스페인의 좌파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단단해졌습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명실상부한 좌익의 지도자로 올라섰고, POUM-I는 사회주의 좌파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력한 축으로 성장했으며, FAI를 어느 정도 제어하는 데 성공한 CNT는 UGT 및 좌익 정당들과 훨씬 원활하게 공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좌파가 강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공화좌파와 중도공화파의 완충력이 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알칼라사모라와 레루스를 CEDA의 압박으로부터 보호해주던 중간지대는 얇아졌고, 1935년 3월, 실제 역사보다 두 달 빠르게 CEDA 소속 장관들이 추가 입각합니다. 호세마리아 힐로블레스는 전쟁장관직에 오릅니다. 그는 공화국을 당장 군부에 넘겨주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스투리아스 진압의 얼굴인 몰라나 프랑코를 중앙 요직에 노골적으로 올리면 좌파가 즉각 반란에 나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한 행정군인 산체스오카냐를 육군참모총장에, 프랑코를 작전동원국장에, 몰라를 아프리카군 사령관에 배치하고, 자신이 신뢰하는 CEDA계 정치군인 판훌을 차관으로 앉혔습니다.
하지만 CEDA의 조기 장악은 우익의 절제보다 우익 내부의 퇴행을 더 빠르게 불러왔습니다. 사회가톨릭적 개혁파 히메네스 페르난데스는 더 빨리 밀려났고, 지주 이해를 대변하는 농민당의 니카시오 벨라요스가 더 일찍 전면에 나섰습니다. 윤테로스 법은 농업연도가 끝나기도 전에 누더기가 되었고, 점유농의 경작권은 사실상 취소될 운명에 놓였습니다. 농지개혁법 수정안은 더 퇴행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빈농들에게 이것은 선전포고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당장 보호해줄 수 있는 조직, 즉 UGT 산하 토지노동자전국연맹 FNTT로 몰려들었고, FNTT의 지지를 등에 업은 카바예로의 권위는 더욱 커졌습니다.
중도공화파는 무너졌습니다. 레루스가 물러나고 재무관료적 성격의 차파프리에타가 총리가 되었지만, 곧바로 스트라페를로와 놈벨라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급진공화당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공화국의 중도적 균형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패, 거래, 낡은 인맥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1935년 12월, 힐로블레스가 총리직을 요구했을 때 알칼라사모라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공화국을 조건부로만 인정하는 가톨릭 우익에게 국가장치를 넘겨주거나,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위험을 감수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칼라사모라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정치인이었지만, 결국 공화파였습니다. 그러나 우익, 군부, 왕당파, 파시스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화국의 틀 안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면, 공화국 자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거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1936년 1월 10일 총선거일, 군부와 우익 민병대는 질서 있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힐로블레스의 합법적 질서국가 구상은 이미 무너졌고, 군부 급진파와 카를리스트 레케테, 팔랑헤, CEDA 청년조직 JAP은 전국 곳곳에서 투표소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의 계산은 단순했습니다. 좌파 우세 지역의 투표를 막고, 전국적 혼란을 만들어 선거무효 또는 비상정부 구성을 요구하며, 좌파가 반격하면 그것을 사회주의 반란으로 규정해 군부 개입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좌파 우세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1934년 아스투리아스의 패배와 1935년의 긴장 속에서 단단하게 조직되어 있었고, 투표소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반대로 우익이 강한 지역과 중도적 지방에서는 우익 민병대와 군부 동조세력이 투표를 방해했고, 지방 당국은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투표를 중단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선거에 제대로 반영된 것은 스페인 전체의 민의가 아니라, 투표가 실제로 지켜진 지역의 민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들은 대체로 좌파 우세 지역이었습니다.
알칼라사모라는 선거무효를 거부했습니다. 폭력으로 선거를 무효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무장한 자들의 거부권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체 473석 중 100석이 무효·쟁송 상태로 남았고, 유효하게 반영된 373석 중 PSOE가 162석, POUM-I가 64석, 기타 사회주의 좌파가 15석, 공화좌파와 자치공화좌파가 64석, 공화연합이 10석, 바스크민족당이 7석을 얻었습니다. 인민전선 계열은 성립한 의석의 86.3%를 차지했습니다. 우익은 좌파 승리를 막으려다 중도와 우파의 정상적 대표성까지 함께 태워버린 셈이었습니다.
힐로블레스의 정치 생명은 끝났습니다. CEDA 내 의회주의파는 밀려났고, 나바라와 카스티야, 아라곤 일부에서는 레케테가 적색 코르테스 불복종을 선언했습니다. 안달루시아와 에스트레마두라에서는 FNTT가 지주 민병대 해산을 시도했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농민 투표소 방위조직이 군대의 해산 요구와 충돌했습니다. 알칼라사모라는 포르텔라, 아사냐, 프리에토 같은 온건한 대안을 모색했지만 실패했고, 1월 24일 결국 카바예로의 총리 취임을 승인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군 지휘관들의 공개적 명령거부가 시작되었습니다.
1936년 2월 19일, 스페인 국민질서위원회 JONES는 호세 상후르호를 수장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하나였어도 지휘는 일원화되지 않았습니다. 몰라, 프랑코, 판훌, 고데드는 각자 움직였고, 카바예로는 즉시 무기고를 개방해 노동자-농민 무장조직과 충성파 군경의 공조를 명령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몬타냐 병영 반란이 충성파와 노동자 방위대, 시민들의 저항에 막혔습니다. 산체스오카냐 육군참모총장이 합법정부 명령에 따라 반란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자 우익 장군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판훌은 고립 끝에 체포·총살되었고, 프랑코는 직접 전선으로 향했다가 퇴로가 차단되어 체포된 뒤 총살되었습니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역시 몬타냐 병영 주변 연락지점에서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카바네야스는 JONES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도망치다 추락해 중상을 입었고, 정치적으로 끝났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우에스카에서 원격 지휘하던 고데드가 헤네랄리타트의 장악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바르셀로나로 향하던 그의 차량은 충성파 병력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불탔습니다. 남부에서는 케이포 데 야노가 망설였고, 그 사이 바렐라가 코르도바에서 세비야 공략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세비야는 오래 버텼고, 안달루시아와 에스트레마두라의 농민들은 더욱 격렬하게 조직되었습니다. 쿠데타군은 카디스, 알헤시라스, 코르도바, 그라나다 같은 항구와 도시 거점에 고립되었습니다.
그러나 JONES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후르호는 부르고스에 안전하게 착륙해 국민파 정부의 수장이 되었고, 몰라의 아프리카군은 세우타와 멜리야를 장악한 뒤 반란군의 제1야전병력이 되었습니다. 살리케트는 바야돌리드에서 승리해 부르고스를 지켜냈고, 팔 콘데의 레케테는 나바라의 카를리스트 동원을 성공시켰습니다. 쿠데타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지만, 북부와 북아프리카, 일부 남부 거점을 확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페인 내전은 실제 역사보다 더 빠르고, 더 선명하고, 더 이념적인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공화국은 살아남았지만, 이미 찢어졌습니다. JONES는 도시 권력 장악에는 실패했으나, 상후르호와 몰라, 레케테, 아프리카군을 중심으로 보수적이고 가톨릭적이며 교권주의적이고 왕당파적인 국민파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피레네 이남의 공화국은 이제 투표함과 무기고, 농민조직과 장군들의 명령서 사이에서 완전히 갈라져 있었습니다.
10. 2월 6일의 그림자
스페인의 총선거가 투표함과 소총, 농민 방위대와 우익 민병대 사이에서 찢겨나갔다는 소식은 프랑스 우익에게 너무나 편리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아직 프랑스의 투표소는 열리지 않았지만, 거리에서는 이미 선거가 시작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노동자 집회가 끝난 뒤 귀가하던 행렬이 골목에서 습격당했고, 공장 정문 앞 경비조가 곤봉과 권총을 든 청년들에게 공격받았으며, CGT 지역사무소와 좌파 후보 선거사무소의 유리창이 밤마다 깨졌습니다. 경찰은 대개 이를 “상호충돌”이나 “정치적 시비”로 처리했지만, 현장의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발적 난동이 아니었습니다. 공격자들은 치고 빠지는 길을 알고 있었고, 차량과 은신처를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개인화기까지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외젠 들롱클 주변으로 모여든 극우 행동대원, 퇴역장교, 사설경비 인맥, 기업가와 금융가의 자금줄은 느슨하지만 실제적인 테러망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직 누구도 그것을 하나의 국가전복 조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했지만, 습격은 점점 더 군사적이고, 더 정확하고, 더 정치적인 냄새를 풍겼습니다. CGT 중앙은 각지 조직에 “철저히 방어하라. 그러나 추격하지 마라. 우익이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주지 마라”라고 지시했지만, 피 묻은 동료를 들것에 실어 나른 노동자들에게 그 지시는 날마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루이 마랭과 자비에 발라, 필리프 앙리오 같은 우파 정치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페인을 끌어왔습니다. 그들은 “좌파가 집권하면 프랑스도 스페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익 언론 르 피가로, 르 마탱, 레코 드 파리는 매일같이 질서, 군대, 재산, 가족, 공화국의 붕괴를 논했습니다. 논조는 점잖았지만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인민전선은 투표함을 통해 들어오는 내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퇴역 장군과 예비역 대령들도 신문 지면을 채웠습니다. 그들은 군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썼고, 군은 헌법에 충성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국가는 군을 정당의 실험도구로 만들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1936년 2월 6일, 파리의 공기는 유난히 무거웠습니다. 꼭 2년 전, 극우 리그와 참전군인 단체들이 콩코르드 광장과 부르봉 궁전 앞을 뒤흔들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때 공화국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 밤이 완전히 끝났다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폴봉쿠르 내각은 임시내각이었습니다. 선거를 관리하고, 국가를 다음 의회로 넘기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습니다. 국민장비계획은 어렵게 법제화되어 제한적으로 집행되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정부가 큰 개혁을 밀어붙일 힘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회의는 조용히 소집되었습니다. 총리실 정무차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주재했고, 내무차관 미셸 부스케는 다른 공무로 늦고 있었습니다. RSR에서는 마르셀 데아와 보좌역 라디슬라스 로랑이 왔고, 노동자 좌파의 신뢰를 받는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도 자리에 앉았습니다. SFIO에서는 로제 살랑그로 의원이 조심스럽게 합류했습니다. 명목상 주제는 선거관리였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회의는 투표함과 경찰배치만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우익 리그의 폭력을 어디까지 단속할 것인지, 노동자 방어조직을 어디까지 묵인할 것인지, 우파 언론의 스페인 공포전과 퇴역장교들의 경고성 기고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정해야 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스페인에서 무너진 것이 단순한 투표소가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국가가 폭력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공화국은 이미 반쯤 패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루이앙리는 이에 동의하며 우익 리그의 행동양식이 스페인 극우와 어디까지 닮았는지 짚었습니다. 스페인 군부 급진파, 레케테, JAP, 지주 자경단의 폭력은 프랑스 우익 리그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러나 방식은 닮아 있었습니다. 공포 분위기 조성, 투표장 밖에서 선거의 의미 훼손, 좌파가 이기더라도 그 승리를 상처 입은 승리로 만드는 정치기술이었습니다.
라디슬라스 로랑은 ‘질서 있는 선거와 권력 승계’라는 표현을 일부러 세게 발음했습니다. 살랑그로는 곧바로 맞받았습니다. 노동자들이 우익 리그에게 얻어맞고, 경찰이 그것을 “상호간 우발적 충돌”이라고 부르는 질서라면, 그것을 공화국적 질서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데아는 조용히 반문했습니다. CGT는 프랑스 전체를 멈췄다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조직인데, 그것을 단순한 피해자처럼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익 리그를 단속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공장을 지키는 독자적 무력조직을 국가가 어디까지 관리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논쟁은 곧 CGT의 조건으로 옮겨갔습니다. CGT는 경찰이 우익 리그를 실제로 먼저 단속해야 하며, 표면적 폭력뿐 아니라 자금망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노동자 방어조직을 범죄단체 취급하지 말고, 노동자 연락관을 정식 창구로 인정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무엇보다 파리 경찰청장 로제 랑주롱을 해임하거나, 적어도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라고 했습니다. 로랑은 그것이 방어조직 합법화 요구를 돌려 말한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살랑그로는 방어조직이 없으면 노동자들이 우익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어렵다고 반박했습니다. 데아는 노동자 방어조직이 국가권력을 대신하겠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로랑은 경찰이 정상화되고 우익 리그 수사가 시작된다면,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간다는 확약이 있어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논쟁을 정리했습니다. CGT를 약자 취급만 할 수는 없지만, 현재 파리 경찰당국의 수사 기조 역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외젠 들롱클의 조직과 우익 리그들이 어디서 어떤 지원을 받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수사 경로였습니다. 랑주롱의 파리경찰청을 믿을 것인지, 다른 우회로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훨씬 큰 정치적 결단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때 내무장관 조제프 파가농이 회의장에 들어왔습니다. 파가농은 병약해 보였고, 말끝마다 기침을 했지만, 문제의 무게를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데아의 도발적 계산과 루이앙리의 언론공작 구상을 합쳐 이해하고는, 이번 내각까지 무너뜨릴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1934년 2월, 시아프 경찰청장 해임 이후 달라디에 내각이 무너졌던 기억은 아직 생생했습니다. 선거관리 임시내각이 우익 리그를 자극해 다시 대폭동을 불러온다면, 공화국은 스스로 위기를 초대한 셈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결국 아직 상정되지 않은 법안 하나를 꺼냈습니다. <전투집단 및 사설민병대에 관한 법>, 약칭 반리그법이었습니다. 핵심은 대통령의 인준을 받은 각료회의 결정으로 전투집단이나 사설민병대 성격의 단체를 행정해산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먼저 해산하고, 사후에 법리를 다투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안 구조상 해산에는 대통령의 승인과 각료회의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르브룅 대통령이 우익 리그 해산은 지연시키고, 노동자 방어조직 단속만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만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로랑은 이 점을 간파했습니다. 프랑스의 보수적 관료조직이 개입하면, 법의 칼날은 쉽게 비대칭으로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루이앙리는 CGT와 예비접촉에 나섰습니다. 파가농은 노동자 급진주의자인 루이앙리 혼자 보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달라디에계의 마르크 뤼카르를 감시역처럼 붙였습니다. CGT에서는 마르그리트 데쉴리와 브누아 프라숑이 나왔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정부가 지금까지 노동자들에게 몇 번이나 자제 지령을 요구했는지 세어보자며 냉소했습니다. 루이앙리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CGT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진짜 효과적인 수사가 있어야 노동자들을 다시 단속할 명분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을 믿어보라는 말은 치료받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직접 가서 해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뒤늦게 회의에 합류한 미셸 부스케는 파리시경에 수사를 맡기는 것보다 법무부와 협조해 예심판사부에 중대범죄 수사를 의뢰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파가농은 이첩을 허가했습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맡기느냐였습니다. 요구되는 인물상은 분명했습니다. 좌익에 호의적인 사람도, 우익에 친화적인 사람도 아니어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강직하며,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자기 기준에 따라 움직일 사법관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피에르 베테유 판사가 선택되었습니다. 로랑은 알베르 프랭스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수사 인력의 경호를 요청했고, 파가농은 내무부 직속 중앙경찰, 즉 쉬르테 나시오날에 경호 임무를 맡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중앙경찰은 파리시경과 달랐습니다. 파리시경은 경찰 프레페 랑주롱의 직접 지휘를 받으며, 정치적 사교망과 우익 언론, 보수적 참전군인단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내무부 직속 중앙경찰은 더 국가에 종속된 공무원 조직이었고, 그런 유착은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파시스트 투사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질서수호자였고, CGT가 국가권력 밖에서 움직인다고 판단하면 그들에게도 적대적으로 나올 것이었습니다.
베테유 판사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외젠 들롱클이 악시옹 프랑세즈 내부 행동조직 출신이지만 사실상 독립된 테러조직인 라 카굴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이 조직은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조직 카멜로 뒤 루아와 연결되어 있었고, 1934년에 사망한 향수 재벌 프랑수아 코티 계열의 자금도 흘러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뚜렷한 자금줄은 로레알의 창립자이자 화학·화장품 자본가인 외젠 슈엘레르였습니다. 베테유는 들롱클과 슈엘레르를 긴급 구속했고, 라 카굴 조직원들을 차례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의구심은 남았습니다. 로레알 자금이나 코티의 잔여 자금만으로 전국적 테러조직을 운영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더 큰 자금망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때 루이앙리는 출처가 매우 불분명한 투서를 받았습니다. 투서에는 슈엘레르와 코티 자금은 곁가지일 뿐이며, 진짜 큰 손은 루이 르노의 르노 공업과 클레르몽페랑의 미슐랭 가문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루이 마랭 같은 원내 강경우파, 막심 베강 같은 퇴역장성, 일부 현역장교, 르 피가로 같은 우익 언론까지 한 몸으로 노동자의 정부를 막기 위한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베테유의 조사는 불충분하다는 비난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루이앙리는 투서를 망데스 프랑스와 미셸에게만 보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검증 불가능하다고 하면서도, 정황 증거가 이미 있는 만큼 조사범위를 확대해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아예 의회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를 제안했습니다. 미셸은 우려했습니다. 의회 차원으로 격상하면 우익 리그가 악에 받쳐 행동할 수 있고, 르노나 미슐랭을 직접 겨냥한다면 달라디에계 PRRS조차 반대할 수 있었습니다. 르노는 단순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군수업체였고, 국방을 중시하는 달라디에가 ‘르노 특별조사’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그래서 범위는 포괄적으로 잡고, 베테유의 보수적 원칙주의가 좋은 쪽으로 작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실적 차선책으로 떠올랐습니다.
정파 접촉 결과, PCF, SFIO, PUP는 특별조사위원회에 찬성했습니다. PRRS는 특정 기업이나 인명을 명시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URI/GR은 군 현역 인사와 현직 원내 인사를 명시적으로 제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RSR은 처음에는 기권하려 했지만, 좌우파를 막론한 폭력조직 일반을 수사한다는 전제 아래 찬성으로 돌아섰습니다. 결국 2월 14일, 총선을 2주 앞두고 두 법안이 하원에 제출되었습니다. 하나는 반리그법, 다른 하나는 ‘1935년-1936년 정치적 폭력사태에 대한 국민의회 특별조사위원회 설립에 관한 법’이었습니다.
우파 의원들은 대체로 반대했습니다. 특히 루이 마랭을 비롯한 공화연맹은 임시내각이 우익 리그 수사와 해산을 명분으로 우파 전체를 공격하려 한다며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보수적 사법관인 베테유조차 “좌파 판사”, “공화좌파 카르텔에 매수당한 사법부의 수치”, “모스크바 고정간첩”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효과를 냈습니다. PDP를 비롯한 가톨릭 세력은 도덕적 관점에서 법안을 지지했고, AR의 폴 레노 등 일부 중도우파도 찬성했습니다. 망델의 프랑스사회당 역시 뜻밖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PSF가 반대했다가는 라 로크의 원외조직이 우익 리그와 한통속으로 보일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베테유는 우익 정치권의 인신공격에 몹시 분개했습니다. 그는 수사범위를 후원 의혹이 있는 기업체, 개인, 언론으로 넓혔습니다. 법안이 통과된 지 사흘 만에 레코 드 파리의 편집장이 소환조사를 받았고, 우익 언론은 “좌파 판사의 언론탄압”이라고 날뛰었습니다. 클레르몽페랑의 미슐랭 계열 사업장이 압수수색을 당하자 반응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퇴역군인들이 1934년 2월을 재현해야 한다고 떠들자, 보다 못한 페탱 원수가 자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종합적 수사결과는 총선 이후에도 몇 달이 지나야 나올 일이었지만, 우익 언론의 발작적 반응은 중도 유권자들에게 오히려 이렇게 보였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찔리니까 저러겠지.”
루이앙리는 여기에 더해 우익 리그의 상징자본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기대는 것은 ‘거친 남성성’이었습니다. 참전군인의 명예, 질서와 규율, 가족과 국가를 지키는 보호자라는 이미지였습니다. 루이앙리가 좌익·중도 계열 언론인 단체를 통해 퍼뜨린 프레임은 바로 그 남성성 숭배를 겨냥했습니다. 우익 리그는 밤에 번호판 없는 자동차를 타고 노동자 숙소에 찾아와 노동자들을 린치하고 황급히 도망치는 비겁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CGT 행동조직의 얼굴인 마르그리트 데쉴리는 여성이었고, 르포들은 우익 행동대원들을 “여자한테 맞을까봐 무서워 도망가는 철없는 사내아이들”로 그렸습니다. 우익 정치인들은 선거가 무서워 선거 자체를 방해하려 들면서도, 대놓고 책임지지는 못하는 무능한 비겁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이미지는 선거를 앞두고 반리그법에 반대한 우익에게 큰 역풍으로 작용했습니다. 우익 리그는 자신들을 파시스트, 극우파, 사회악, 폭력배, 깡패로 비판하는 것보다 “남자도 아닌 애새끼”라고 불리는 것을 더 참지 못했습니다. 선거 D-5,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복수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수는 CGT 행동대에 대한 공격도, 좌파 후보 사무소 습격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습격한 것은 CFTC 가맹 여성노동자 야학이었습니다. 언론은 다음날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우익 리그, 기독교 여성노동자 야학 습격!”
이 사건은 우익 리그의 자기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PDP는 그들을 거의 사탄의 자식처럼 비난했습니다. 라 로크는 이때다 싶어 자신의 조직이 저런 인간말종들과 다르며, 여성과 노동자를 더 잘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CGT는 “공화국 시민이기를 포기한 자들이 인간이기마저 포기했다”고 논평했습니다. 루이 마랭은 자신이 반리그법에 반대표를 던진 손목을 자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는 한 번만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호소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1936년 2월 28일과 3월 4일, 총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인민전선의 승리였습니다. 공산당은 68석, 프롤레타리아통일당은 22석, 프랑스노동당은 5석, SFIO는 157석, 급진공화사회당은 129석, 사회공화연맹은 22석을 얻었습니다. 독립급진연합-급진좌파는 27석, 공화좌파-독립좌파는 23석, 공화중앙파는 23석, 인민민주당 및 기독교 세력은 35석, 프랑스사회당은 81석, 공화연맹-독립공화우파는 20석을 얻었습니다. 우익 리그와 가까웠던 낡은 의회우파는 크게 위축되었지만, 라 로크와 망델의 PSF는 합법적 대중우파로 살아남았습니다.
여섯 명의 일행도 모두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미셸 부스케는 파리 15구 제1선거구에서 당선되어 남서부 파리의 중산층, 공무원, 소상공인, 세속 공화주의자를 대표하는 PRRS 의원이 되었습니다. 장 뒤퐁은 마르세유 제7선거구에서 항만, 선원, 해운업자, 항구노동자, 상공업자의 이해를 묶어낸 PRRS 의원이 되었습니다.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은 파리 11구 제2선거구에서 노동자, 수공업자, 인쇄공, 조합사무소들이 얽힌 동부 파리의 PUP 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라디슬라스 로랑은 파리 14구 제2선거구에서 철도노동자와 소상공인, 서민주거지를 기반으로 RSR 의원이 되었습니다. 레옹 드 클레르퐁은 생드니 제4선거구에서 인민전선 단일화로 자크 도리오를 결선에서 꺾었습니다. 도리오에게 PCF만 막자는 우파 표가 몰렸고, 도리오는 그 사실을 매우 수치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마르셀 포쿠아는 생드니 아롱디스망 제11선거구, 퓌토-쉬렌 지구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행정상 생드니권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북동부 공산당 벨트와 달리 파리 서부 부르주아 지대와 가까운 숙련공·도시사회주의 기반이었습니다.
선거 직후 우익 리그는 활발하게 단속되었고, CGT는 노동자들을 다시 다독였습니다. 곳곳의 노사분규가 공장점거운동으로 번지는 일은 일단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좌파가 압승한 상황에서 노동권, 임금, 노동시간, 단체협약, CGT의 위상은 곧 더 뜨거운 쟁점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공화국은 2월 6일의 그림자를 넘긴 듯 보였지만, 그 그림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음 국면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국민의회 대의원(Chambre des députés, 하원) 의석표 - 1936년 2월말 총선 후.
국민의회 상원(Sénat) 의석표 - 1935년 10월 의석 1/3에 대한 선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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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지파일 독일 측이 이상한 말장난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프랑스의 전략이 먹히고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영국이 말로만 비개입을 주장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독일의 노림수는 반쯤 막혔습니다.
슈타들러는 점점 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프랑스가 최소한의 스페인 주권 보장 장치까지 거부한다면, 우리측 역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영국 쪽이 급해집니다. 말킨 경은..
“스페인 주권을 존중한다는 비구속적 선언이라도 발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ㅣ
@E.E.샤츠슈나이더 '절차가 안된건 우익이 깽판쳐서였지만'
그래도 외교사절단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그런 파토날 말...비록 지금 봐선 파토나도 이상하지 않은 회의같긴 해도(..), 일단 말을 참아보는 장입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자르에 군대를 보낸 프랑스의 정당성도 이해해 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소득이군요.'
라고 말할뻔 합니다. 아니 진짜 쓰다보니 말하면 안될 것 같네(..)
우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분위기를 살핍니다.
@E.E.샤츠슈나이더 그럼 로랑은 혼신의 연기력(그런거 없지만)으로 진심으로 안타까워합니다.
"일단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영국과 전폭적으로 협력을 할 의향이 있습니다. 일단 말씀하신 바 대로 선언을 발표하고, 무리한 계획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안, 예를 들어 합동 중립 해상 순찰 같은 계획을 짜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 그 사이 프랑스에서 몰래 지원을 하겠지만, 식민부 차관인 로랑이 알 바는 아니므로(?))
@E.E.샤츠슈나이더 말킨의 얘기를 들으니, 눈눈이이가 다시 떠오른(..) 장 뒤퐁은, 달라디에에게 다시 전달합니다.
"(소곤소곤) 비구속적 선언을 말하는걸 보니 영국은 더이상 막을 생각을 안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독일, 이탈리아에서 수작 부리면 같이 수작 부리는게 어떨까요?"
(..)
그러면서 슈타들러가 이번 회의에서 노리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한번 유추해봅니다. 자료가 없어서 유추나 분석 등이 안된다면 이 커맨드는 못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통장 회의는 여전히 전혀 진전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네요. 그 와중에 독일 측은 영국의 ‘비구속적 선언‘ 제안에 동의하고 나섭니다.
”반파시즘을 명분으로 유럽 곳곳에 자기 세력을 마음껏 투사해야 직성이 풀리는 반평화 세력이 있으니, 우리도 비구속적 선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네요.“
@렌지파일 오.. 진짜로 실현 가능한 방법이 나오면, 이번엔 독일 쪽에서 반박합니다.
“그거야말로 스페인 불개입을 핑계로 지중해에서 무력시위를 이어나가겠다는 반평화적 발상이 아닙니까?”
프라이타크로링호펜은 발끈합니다. 당연히, 해상 통제력이 증가하면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지원은 실질적으로 감소하고 육로로 연결된 프랑스는 계속 몰래 지원이 가능하니까요.
@통장 독일쪽은 당연히 프랑스가 영국 눈치보느라 불개입에 동의하고, 독일-이탈리아는 그 사이에 콘도르 군단 같은 거 투입해서 재미보려고 했는데, 프랑스가 대놓고 ‘영국 너네 어차피 아무것도 못 막잖아’라고 까발리고 있으니..
@E.E.샤츠슈나이더 장은 박수를 치며 주변을 돌아보는 이상한 모습으로 미소짓습니다.
"자르 문제도 해결하고, 비구속적 선언으로 서로가 타협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챗필드 제독님께서 걱정을하시니, 굳이 스페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중해 치안을 제고하고자 하신다면 일조하도록 해군에 건의하겠습니다."
눈새 모드(..)
@E.E.샤츠슈나이더 일단 독일-이탈리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진 않은 것 같은데, 비구속적 발언을 동의했다는게 찜찜하네요. 영국 동맹 유지가 불가능한건가 이러면(..)
@통장 아마 실제로도 동의하고 무시하고 그냥 지원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비구속적이니 (?
@렌지파일 진짜 눈눈이이였다니(..)
@통장 영국 대표단은 급격히 느슨해집니다. 적당히 위에 보고할 선언문 한 장은 생겼으니 성과는 있고, 나중에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가 무슨 지원을 하든 영국은 ‘노력했다’고 퉁칠 수 있겠다는 계산입니다.
독일도 최악은 면했다는 계산입니다. 어차피 프랑스는 공화파를 지원할테고, 영국은 성의있게 막지 않을 거고, 이탈리아는 지금도 강한 지원을 지속하고 있으니 손해보지는 않았다는 입장입니다.
‘스페인 상황에서의 주권존중에 관한 런던 선언’은 세상에 나오자 마자, 화장실 휴지만도 못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이벤트를 일단 종료하고, 8시 50분까지 간단한 추가행동을 받은 뒤 간단하게 결과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고생하셨습니다!
영국 체면 챙기기 대성공(?)
@E.E.샤츠슈나이더 로랑은.. 향후 자신의 평판(?)을 개선할 목적으로 일부러 E. H. 카에게 사과를 하겠습니다. 들어주든 말든 결과는 개의치 않죠.
고생하셨습니다.
@렌지파일 심지어 스페인 지원을 막을 르브룅도 사라졌으니, 아마 공화파 표준무장이 MAS-36이 되고, 르노 B1과 T-28이 같이 돌아다니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E.E.샤츠슈나이더 추가행동...이면,
1. 마르세유에서 스페인 공화정부까지의 경제적/국사적 지원을 효율적이면서 티가 덜 나게(..) 수행할 수 있는 루트 개발
2. 지중해 해군을 통한 치안 제고활동(?) 계획 및 실행으로 독-이의 지원비용 증가(지원을 못하는 것X, 비용증가)를 노리겠습니다.
여기서 되는 것만 하겠습니다. 둘다 안된다면 독일 인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라인란트 철수 후 지역 경제 공동개발(?) 같은 것이 있는지 얘기해보고 수행해서 전쟁을 막...지 못하겠지만, 막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르노 B1... 참 보병전차 설계를 어떻게 잘못하면 저렇게 나왔을까하는 전차죠(?)
사정은 다르지만 비슷한 나온 전차로 M3 리도 있고....
+생각해보니 이러면 스페인으로 간 소련군 장교가 B1을 보고 뻑이가서 KV - 1을 만들겠네요(?)
@dnjdss B1의 스페인 도입으로 2차대전은 더 나은 보병전차가(?)
@통장 FCM F1: 짜잔!(??)
@렌지파일 일단 4화 올라오고 다음 이벤트 시간 수합중입니다!
Event 13의 결과입니다.
◼️ 영국, 프랑스, 독일 3국은 「자르-라인 사태에 관한 런던 임시의정서」를 채택합니다. 의정서는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침략’으로도, ‘조약 위반’으로도 부르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자르 진입 역시 ‘무력침공‘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책임에 관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흐려지고, ‘프랑스-독일 양국간의 국지적 무력충돌(armed conflict)’이라는 애매한 문구만이 남습니다.
조항 역시 애매합니다.
1.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30일 이내에 자르 지역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한다.
2. 자르에 독일 치안유지 인력을 복귀시킨다.
3. 독일은 라인 지역 내 1936년 4월 1일 수준의 병력 규모를 동결하며, 중포, 공군기지, 영구요새를 증강하지 않는다. 사단급 이상 병력의 재배치는 48시간 이전 영국과 프랑스에 통보한다.
4. 국제연맹 이사회는 자르 및 라인 지역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발간한다.
5. 빠른 시일 내 유럽의 안보 환경을 재평가하고 우호적,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다자 외교회의를 개최하기로 한다.
영국이 보기에 이 해결책은 독일과 프랑스가 조금씩 이익을 보는 타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보기에 이 타협안은 독일의 평화체제 파괴에 국제법적 변명을 달아준 것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독일의 ’모험‘에 상당한 비용을 강제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영국이 대독 포위망의 일원이 아닌 ’중립적 중재자‘로 나섰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인들에게는 배신감으로 작용했습니다.
◼️ 독일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최악은 막았다”고 자화자찬하며 베를린으로 돌아왔지만, 히틀러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분명 나에게 ‘총성 없이 외교로 프랑스를 굴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굴복인가? 독일민족의 주권영토인 라인란트에서 우리 병사들을 재배치하는 데에조차 영국과 프랑스의 허락을 구걸해야 하도록 만든 당신은 독일민족에게 [반역]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노이라트는 즉각 해임당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의 인물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로 대체됩니다. 그뿐 아니라, 전통적 외교관료와 국방군 수뇌부에 대한 히틀러의 불신 역시 극에 달합니다. 히틀러는 SS 보안대를 동원해 어떻게든 블롬베르크, 프리치, 베크 등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국방군 지도부 인원들을 공격하게끔 했고,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곧 결과물을 냅니다.
1936년 5월 6일, 육군최고사령부(OKH) 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상급대장은 ‘동성애’ 혐의로 긴급 체포됩니다. 그 과정에서 SS 보안대의 게르하르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소령이 우발적 총격전 끝에 사살당하는 촌극이 발생하고, 국방군과 SS의 사이는 극악으로 치닫습니다. 게르하르트의 아버지이자 국가교회장관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백작은 “민족의 반역자들인 국방군 장성들을 싸그리 끌어내 총살해야 한다”며 길길이 날뜁니다.
@E.E.샤츠슈나이더 아ㅋㅋㅋㅋㅋㅋ 이번엔 쿠노가 가톨릭 나치인건가요ㅋㅋㅋㅋㅋㅋ
이럼 독일군 질이 더 나빠지겠네요?
◼️ ‘스페인 주권 존중 선언’은 발표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독일의 신임 외무장관인 리벤트로프가 그 선언문을 무효로 선언하면서 정말로 불쏘시개만도 못한 문서가 됩니다. 아프리카군은 이탈리아 해군의 적극적 지원으로 본토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고, 안달루시아 지역의 공화파 거점은 하나둘씩 함락되기 시작합니다. 바다호스가 함락되며 남부의 정예 아프리카군이 마드리드로 진격할 길이 열렸다는 것이 공화파 입장에서는 뼈아픕니다. 하지만 다행히 북부의 이룬 전투는 공화파의 승리로 끝나며, 프랑스와 스페인을 잇는 보급로는 지켜낼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질세라 프랑스군은 치장물자를 공화파 군대에게 넘겨줍니다. 또한 장 뒤퐁 해군차관의 건의를 들은 프랑스 해군은..
운영-제국 굴림, +6.
Rolling 3d6+6(to total) : 3, 4, 5, + 6, TOTAL: 18
남부 해안에 돌출된 공화파 거점인 말라가에 대대적인 보급 작전을 실시합니다. 일찍이 보수파 장교들을 싹 다 처단하고 해군 대부분을 장악한 공화파 수병들은 ‘수상하게 프랑스어를 잘하는’ 임시 함장들의 지휘 아래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반란군 병력에게 함포사격을 퍼붓고,
말라가 요새의 해안포 방향을 역으로 돌려 포신이 휘어질 때까지 쏘아대는 혈투 끝에 거점을 지켜냅니다. 이 귀중한 승리로 국민파는 바다호스 점령으로 북부와 남부 점령지를 잇는 데 성공하고도 마드리드에 재접근하지 못합니다.
◼️ 장 뒤퐁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뒤퐁의 ‘국민장비계획’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후에는 그 국민장비계획이 폴봉쿠르 내각 아래에서 사실상 죽어버렸다며 가열차게 비판하던 경제학자 장 쿠트로(Jean Coutrot)는 주간지 《라 뤼미에르》의 주필 조르주 보리스(Georges Boris)와 함께 도발적인 논설문을 발표합니다.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프랑스 경제는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지나치게 고평가된 화폐가치, 정부의 인위적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인해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므로, 안보환경이 위험해진 지금 국방 및 군수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해 실업을 낮추고 경제활동인구의 구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총리청의 쥘 모크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이 논리가 거칠지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콘 정통 보수혁명주의자부터 가톨릭 좌파, 골수 나치까지 가능해서 이래저래 써먹기 좋은 캐릭터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아니 이게 보정해서 18이 뜨네(..) 이걸로 공화파 쪽에서 반격할 여지는 생기겠네요 ㅋㅋ
드디어 전시경제가(..)
@E.E.샤츠슈나이더 오.... 대규모 지원의 안착 성공이군요
+아니.... 히틀러가 저러면 프랑스에겐 호재, 독일에겐 화재니 이득이네요(?) 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음, 역시 다음 이벤트가 경제라면, 장 뒤퐁의 노선은 확실하겠네요.
???: 장 쿠트로 박사님의 글은 옳았다! 계획된 보급과 계획된 루트로 스페인이 살아난 것처럼, 국방과 군수산업을 계획적으로 관리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야한다! 박사가 길을 제시한다면, 내가 그 길에 돌을 깔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