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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가까운 미래
--깨어진 약속
허리케인의 힘은 바닷물이 증발할 때 대기권으로 전달되는 열에 의해서 보다 막강해진다. 해수면의 온도가 높고, 더운 물이 바다 깊숙한 곳까지 존재할수록 허리케인은 더욱 강력해진다. 즉 바닷물이 해수면 아래 2~3미터 정도에서 차가워지면 허리케인은 곧바로 그 찬물을 휘젓게 되고 그러면 폭풍에 제동이 걸린다. 하지만 온수가 깊이 존재할수록 허리케인은 점점 더 거세시는 것이다.
열대지방의 해수 온도가 27도 정도인 현재 상황에서 1988년 가을 윈드워드섬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길버트는 MIT 케리 에마뉴엘 교수가 계산한 허리케인의 최상강도까지 육박했다. 중심기압은 885밀리바(1기압은 1013밀리바)로 떨어지고, 풍속은 시속 322킬로미터에 달했다. 현재의 기후 조건에서 그보다 더 최악의 허리케인이 발생할 수는 없었다.
이제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로 시각을 옮겨 지구 기온이 상승하고 그 결과로 해수 온도도 상승했다고 가정해보자. 열대 해수면 온도가 1~2도 오르면 허리케인 강도의 상한선도 오를 것이다. 이렇듯 더운 폭풍의 중심에서 대기압은 800밀리바까지 떨어질 수 있다. 그 결과 이 슈퍼허리케인의 파괴력은 40~50% 증가하여 허리케인 길버트의 1.5배 위력이 된다.
우리는 인간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했고, 이후로도 인간사회를 부양했던 자연을 파괴해버렸다. 물론 밖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있다.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의 자리에 이제 우리가 만든 새로운 자연이 자라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적 과정(비, 바람, 더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자연과 같지만, 인간사회를 벗어난 은거나 지속감, 더욱이 영원의 느낌 같은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대신 1입방미터의 공기마다, 1평방미터의 흙마다 거칠고 지워지지 않는 인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아이즐리는 자연은 변화하고 있으며, 이것은 ‘무기 생물의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는 변화하고 말했다. 계절은 절대로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가고 오는 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약속이다. 40억 년 동안 한번도 어긴 적이 없는 약속이라서 우주는 그에 대해 기묘한 합리성과 기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 나그네 비둘기에게도, 조상이 살던 상류로 돌아가다 댐에 막혀버린 연어에게도, 그리고 DDT 때문에 알껍질이 하도 약해져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게 된 송골매에게도 말이다. 이제 그 약속은 인간에게도 깨졌다. 자연의 평생보증기간이 시효가 지난 것이다.
변화의 단위가 이제 1000년에서 10년이 되었다. 국립기상연구센터의 슈나이더는 인간이 기후를 자연변화속의 10~60배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연구원들의 특정 도시에 대한 장기적 예측은 별로 의미가 없으며 온난화의 실제 결과는 훨씬 다를 것이다. 더 나을 수도 더 못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학문적 추측과는 ’다를 ‘ 것이다. 불행히도 지구의 역사에는 이산화탄소량이 현재의 두 배가 되었던 때가 없었고, 또한 당시 지구 기후가 어땠는지 알려줄 만한 측정기구도 없다. 대신 우리는 대규모 기후변화와 기후 모델이라는 자연적 유사 상황을 근거로 추정치를 계산해야 한다.
그런 유사 상황 중 하나가 북극지방이다. 생물학자들은 기후학적인 이유에서 오래전부터 북극지방을 ‘스트레스 지역’ 또는 ‘사고 다발지역’이라 부르는데 이는 온대나 열대지방에 비해 북극지방이 재난 수용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로페즈는 <북극의 꿈>에서 그러한 예를 들고 있다.
“1973년 가을 10월의 폭풍우가 지면에 얼음층을 만들었고, 사향소들은 이 얼음을 뚫지 못해 먹이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캐나다 군도에서 75%에 달하는 사향소가 죽었다.”
우리 지역의 기후가 북극권 이북처럼 그렇게 가혹해지지는 않겠지만, ‘자연의’ 날씨는 우리가 익숙해진 것처럼 그렇게 관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개개의 식물을 보면, 열기와 가뭄을 제외한다 해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식물에 영향을 미친다. 식물의 건조 중량 중 90%가 광합성에 의해 이산화탄소를 녹말로 전환하는 작업에 생긴다.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는 다른 조건이 없고 충분한 햇빛과 물, 영양분이 있다면 증가된 이산화탄소는 소출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실험실 환경에서는 이런 일일 일어난다. 그 결과 일부 기자들은 거대한 ‘슈퍼 오이’를 찬양하고 온실가스 속에서 다양한 장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일부 농작물이 더 빨리 자라면 농부들은 질소 비료를 더 많이 구입해야 한다. 식물의 잎에 공급되는 탄소는 풍부하지만 질소가 부족할 경우, 그 식품의 질은 저하된다. 질소를 좋아하는 곤충들은 필요한 질소량을 흡수하기 위해 더 많은 잎을 먹어치울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증가된 이산화탄소가 수확량에 끼치는 직접적 영향은 작을 것이다. 이산화탄소가 400ppm에 달하고 다른 모든 조건이 똑같다면 잘 가꾼 옥수수의 연 수확량은 5%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조건이 당연히 똑같을 리 없다. 수분, 기온, 작물의 성장 계절 같은 다른 조건들은 달라질 것이다. 물고기와 몇 가지 온실 채소를 제외하면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노출된 대기에서 성장 계절을 보낸다. 생물학자 폴 웨고너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날씨라는 1년 짜리 복권에 노출된 채로’ 살아간다. 오늘 식탁에 오른 저칼로리 냉동식품은 캔자스주의 어떤 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는 동안 병충해의 공격을 견디며 물과 햇빛과 양분의 공급량이 허락하는 한 최대의 속도로 자라난 것이다. 미국의 농경지와 방목지 중 20만 평방킬로미터가 관개수를 사용하지만, 그들 역시 장기적으로는 날씨 변화에 의존한다. 밀 생산을 모조리 온실 속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날씨의 변화가 작물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하는 것은 변수가 많아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성장기(서리가 없는 기간)가 길면 분명 작물에 도움이 된다. 습기가 부족하면 분명히 해가 되고, 기온이 계속 따스하면 식물을 잘 자란다. 하지만 기온이 지나치게 뜨거워지면 식물은 시든다. 실제로 35도 이상이 오래 지속되면 옥수수는 수분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기후예측모델은 너무 불안정해서 특정 지역에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측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연구를 중단한 일은 없었지만.
컴퓨터 모델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만큼 식량이 충분하다고 하면 우리는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하지만 세계 농업처럼 복잡한 대상을 모델링할 때 컴퓨터 오류의 가능성은 실로 엄청나다. 1988년의 혹서와 가뭄은 대부분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단 몇 주 만에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프로그램은 이산화탄소가 두 배가 되면 날씨가 덥고 건조해져 미국의 옥수수와 콩 소출이 27%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1988년 여름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미국의 옥수수 수확은 35% 이상 감소하여, 52억 말밖에 거두지 못했다. 남극의 오존층 구멍처럼 1988년 여름의 이상기온은 컴퓨터 모델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혹서가 온실효과와 별 관련이 없다 해도 일단 혹서가 밀어닥치면 어떠할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1989년 초 전 세계의 식량보유고는 단지 2억 5천만 톤밖에 되지 않았다. 세계인구가 54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이 저장량은 1973년 이래 최저였다. 1989년 세계 식량소비량은 생산량보다 1억 5200만 톤이나 많았다. 적자예산으로도 사람은 한동안 살 수 있지만, 식량이 떨어지면 화폐의 경우처럼 돈을 더 조폐할 중앙은행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다.
다시 한번 가뭄이 해를 넘겨 이어진다면 ‘재앙’이 될 것이라고 농림부 차관은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날씨가 돌아갈 정상 상태가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날씨는 더 이상 과거의 날씨나 그 결과로부터 예측될 수가 없다. 국립과학아카데미의 웨고너는 1983년 출판된 보고서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예측은 농부들이 기후변화에 적응하여 그 상황을 십분 이용함으로써 우리의 예측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음을 증명해주리라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농부들은 과저에 의존한다. 과거는 그들의 기술의 원천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들은 이탈리아 탱크의 공격에 창을 던지면 대항하는 에티오피아인 격이 되어버렸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날씨 변화의 속도만큼이나 증대한다.
1989년 가을 미국 농부들이 그나마 옥수수 수확을 하여 곡물 엘리베이트에 실었을 때 농림부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했다. 미국 옥수수의 절반을 생산하는 아이오와, 일리노이, 인디애나를 포함한 7개주의 옥수수 샘플이 토양에서 흔히 발견되는 곰팡이이이며 발암성독소인 아를라톡신에 오염된 것이다. 가뭄과 더위로 과열된 옥수수 알갱이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곰팡이가 침입했다. 아플라톡신은 간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강력한 발암성물질로 허용치는 식용 옥수수의 경우 20ppb, 어린 돼지 사료의 경우 100ppb, 다 자란 소 사료의 경우도 300ppb 미만이다. 연방검사관이 추수한 옥수수를 자외선으로 조사한 결과 곰팡이 감염률은 경악할 정도였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많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동시에 날씨는 더 더워지고 건조해지며, 해수면은 식품가격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쇠파리는 만연하며, 허리케인은 더 드세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온난화된 기후의 그 어떤 것도 이미 일상적 생활의 단면이 아니다. 미국인 모두의 화제가 온통 더위가 언제 끝날 것이였든지 1988년 여름은 예년보다 다만 0.5~1도 높은 기온일 뿐이었다. 하지만 컴퓨터 모델은 머지않아 여름 기온이 예년의 ‘정상기온’보다 2.5~3도 높아지리라고 예고하고 있다.
공중보건 연구원들은 기온과 사망률의 상관관계를 계산했는데 날씨가 더워지면 조산율과 사산율이 모두 높아졌다. 또한 혹서에는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이 늘어나고 기종(氣腫)도 악화되었다. 한경보호국은 일부지역에서 ‘기후변화로 인해 숲이 초원으로 변하게 되면 꽃가루 또한 증가한다“고 보고했다. 그렇게 되면 건초열과 천식이 악화된다. 기온이 16~35도인 날이 증가하면 모기도 늘어날 것이다. 환경보호국은 이러한 상황이 미국 대륙에 말라리아와 뇌염, 그리고 관절에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뎅기열이 발생할 것이며, 적어도 약간의 황열과 리프트밸리열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예측했다.
환경보호국에 의하면 미국의 많은 질병이 날씨 변화에 대한 민감성에 발생한다고 한다. 높은 습도는 백선이나 무좀 같은 진균성 피부병과 칸디다증 같은 이스트 감염을 발생시키고 악화시킨다.
사람들은 이 모든 기후 지역을 상황에 적응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실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아마도 기후변화가 여행을 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여행을 하고 있다. UN 연구에 의하면 “핀란드의 기후는 독일 북부 기후와 비슷해지고, 캐나다의 서스캐처원 남부는 미국의 네브래스카 북수와, 레닌그라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우랄 지역 중앙은 노르웨이 중앙과, 홋카이도는 혼슈 북부와, 아이슬란드는 스코틀랜드 북수와 기후가 비슷해진다“고 한다. 그동안 익숙해진 기후를 유지하고 싶다면 이제 옮겨가야 하는 것은 우리다. 더위보다 앞서 북쪽으로 말이다.
태양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은 심해지는 더위로 이전보다 줄었지만 오존층의 잠식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기후변화로 인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자외선이 모두 다 위험한 것은 아니다. 320나노미터 파장 이상의 자외선 A는 비타민D 생성에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자외선 B 광자에 있는 에너지는 자외선 A보다 훨씬 높아 세포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햇빛 중 성층권의 오존과 산소가 걸러내고 남은 파장은 주로 290~320나노미터이다. 현재 수준에서도 지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 B는 피부를 노화시키고 피부암을 유발한다. 자외선은 거의가 세포의 표피 두세 개 층에서 흡수되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크기를 가진 생물은 주로 피부나 눈처럼 외부에 노출된 기관에서 그 영향을 받을 것이다.
대부분의 자외선은 피부의 상피층에 있는 멜라닌 색소에서 흡수된다. 하지만 자외선은 멜라닌 색소의 양에 따라 하피층까지 파고 들어 기저세포나 편평상피세포의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써 피부암을 유발할 수 있다. 이것은 백인이 흑인보다 악성 흑색종에 걸릴 확률이 7~10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환경정책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 질병은 흥미롭게도 농부들보다는 사무 근무자에게 더 흔히 발병한다고 한다. 자외선은 상반신처럼 평소 태양에 노출되지 않는 부위에 영향을 끼치는데 휴가 중의 과도한 일광욕이 발병의 원인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은 현재 오존이 3% 감소했다고 관측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피부암 환자는 주로 북아메리카, 유럽, 소련,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 등지에서 20만 명 정도 더 늘어날 것이다.
증가된 자외선은 식물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쳐 온난화로 야기되는 문제를 악화시킨다. 자외선 수치를 높인 상황에서 200종의 식물을 검사한 결과 약 2/3가 어느 정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증가된 자외선은 잎의 크기를 제한하여 식물이 태양으로부터 합성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을 감소시켰다. 완두콩, 콩, 호박, 멜론, 양배추가 특히 심한 영향을 받았다. 세계작물 생산량 중 5위를 차지하는 콩을 연구한 결과 오존층이 심하게 잠식되면 수확이 1/4에서 1/2까지 줄어들 수 있었다.
오존 감소는 동물성 플랑크톤 같은 작은 해양 동물이나 식물성 플랑크톤 같은 작은 해양식물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이 된다. 이들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자외선에 민감하다. 인간의 경우에는 증가된 자외선의 대부분 또는 전부를 피부가 흡수할 수 있지만, 이처럼 작은 생물들은 자외선이 생명체 중심부를 관통해버린다. 많은 플랑크톤 종이 이미 자외선 최고 허용치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있다.
전 세계 단백질의 약 절반이 해양생물로부터 나오고, 제3세계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다. 또한 식물성 플랑크톤은 광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탄소 순환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세계 조류(藻類) 중 많은 양이 죽게 된다면 온실효과는 그만큼 가속화될 것이다.
전 세계 곳곳의 은신처에 살고 있는 동식물이 조만간 그 은신처나 보호지가 참을 수 없는 덫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날씨의 온난화에 따라 숲이 죽어버리면 수많은 동물들도 그와 함께 죽는다. 환경보호국 보고서가 지적하듯이 무화과나무가 없으면 장수말벌은 살아갈 수가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산호초를 형성하고 있는 수백만 마리의 작은 동물들이 온난화된 해수로 인해 그들의 주식인 갈조류의 멸종에 따라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전적 반사작용
에너지 위기를 겪은 지 15년이 지난 현재에도 분명히 에너지는 낭비되고 있다. 한 작은 예로 산업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전력은 모터를 가동시키는 데 쓰인다. 기업은 확장을 예견하고 필요보다 큰 모터를 구입한다. 하지만 대형 모터가 최적속도 이하로 가동될 때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미국 산업계의 모든 모터가 현재 사용 가능한 속도조절 기술을 장착한다면 미국의 전체 전력소비는 7% 절감될 것이라고 <세계자원연감> 최신판은 밝히고 있다. 또한 전형적인 미국의 온수기가 연 4500~6000킬로와트를 사용하는 데 반해 첨단기술 모델은 단지 800~1200킬로와트만을 사용한다고 천연자원보호위원회는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낭비를 중단해야만 한다. 이는 빠를수록 더 좋다. 하지만 그런 조치가 문제를 해결할까? 잠시 세계자원연구소의 어빙 민처가 제공한 몇 개의 숫자를 검토해보자. 좀 극단적인 면은 있지만 그 숫자들은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잘 묘사해준다. 민처가 요약한 ‘기본적인 경우’의 시나리오는 “기술적 변화, 경제적 성장, 지구 에너지 체계의 변화에 대한 가설에 인습적지혜를 반영하였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각국은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 정책, 에너지 효율성 증가 및 태양열 에너지 개발을 위하여 최소한의 지원밖에 하지 않는다.
그 결과 2000년에는 지구의 기온이 0.9~2.6도, 그리고 2030년에는 1.6~4.7도 상승할 것이다. 민처는 ‘이것은 절대 최악의 가능성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숫자가 가져올 영향과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
거의 모든 사람은 직관적으로 세상의 무한한 발전을 믿고 있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독된 고무젖꼭지를 빨 때부터 우유와 함께 흡입된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가 옳을 가능성도 높다. 우리는 새로운 도구들을 발명할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곧 자세히 다룰 유전공학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술로서, 그 중요성은 최소한 불의 발견에 견줄 만하다. 그것과 다른 새 기술들로 인간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계속하고 지구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지배 능력은 완벽하게 연장되어, 심지어 우리가 지난 세기의 진보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낸 말썽꾸러기 자연까지도 우리의 지배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이미 너무나 늦어버려 우리가 숲이나 메탄저장층 등에 촉발하는 다양한 피드백이 인류를 말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사이몬과 스타인의 저항적 낙관주의는 우리가 ‘거시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주장에서 보면 맞을 수도 있다. 그곳은 사람과 사물이 매우 크고 복잡하고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 관리되는 곳이다. 그런 세상은 다가오는 온난화 세상에서도 우리의 생활양식을 지속시켜 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면책의 수단일 수도 있다. 지구에 대한 인간의 야만적인 지배를 더 교묘하고 광범위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그런 미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계속 바라는 사람이 사치나 방탕을 일삼는 무리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들은 진실하고 인간에 대해 ‘진보적인’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다. 벅민스터 풀러가 아마도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풀러는 시대의 우상이었고 충실한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의 강연을 듣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강연에서 다룬 주제는 동인도주식회사, 토마스 멜서스의 인구론, 왕족의 혈통, X선의 발견, 보이지 않는 현실로서의 전기, 1마일 파장의 라디오 주파수, 새로운 합금, 물고기의 지느러미, 새의 날개, 요하네스 케플러, 순간 대 영원, 인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가해지는 거대한 부담, 인간이 우주에 존재하는 이유, 특허출원 과정, 목성의 일식, DC-4 항공기,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 알렉산더 대제였다. 풀러 같은 사람의 사상을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풀러가 믿고 있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직 잠재능력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오진 기술의 발전만이 그 실현을 도우리라는 것이었다.
풀러는 환경의 적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지오데식 돔은 보통 건물의 3% 무게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주 안정적이었다. 그런 돔에 산다면 숲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풀러는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최대의 인간 옹호론자였다. 그른 20년 전에 대중 앞에서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 실패할 운명이라는 가정 하에서 일해 왔다. 하지만 인간은 분명 수소원자 같은 존재라고 나는 말하겠다. 성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진정 멋진 디자인이다”
하지만 성공하려면 인간은 과학적으로 진보해야 한다. 1960년대에 시위하던 학생들은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움직였다. 실은 디자인학의 혁명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우주선인 지구를 기계로 대해야 하며 실제로 지구는 기계다”라고 풀러는 말했다. 그는 공학기술이 우리의 기계 효율을 4~12% 상승시킨다면 온 인류를 보살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자연의 종말을 두려워하며 바라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 번도 인류가 익숙해진 환경에서 오랫동안 머물거나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껍질 속의 병아리와도 같다. 껍질 안에는 충분한 음식, 즉 충분한 석탄과 석유 및 산소 등이 있어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성장하도록 해준다. “하지만 기본설계상 영양분은 병아리가 자라나 자신의 두 다리로 움직일 수 있을 때쯤 바닥이 난다. 그래서 병아리는 먹이를 찾아 껍질을 쪼개 되고, 그러는 와중에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이 비유법은 약간 이기적이긴 하다(껍질 안에 우리 이외의 다른 생물종이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생각이 정확할 수도 있다. 인간은 충분히 온실효과에 저항하고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리된 세계의 개념은 최근 다수의 환경전문가들 또는 최소한 유사 환경전문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프레온가스가 대기권에 확산되는 것을 최초로 주목한 영국 과학자 러브록은 1970년대에 ‘가이아 가설’을 확립했다. 이것은 행성인 지구가 단지 ‘생명’을 위한 ‘환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스스로 지속하는 시스템이며,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그 환경을 변화시켜가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대기와 해양, 기후, 지표면은 이 살아 있는 유기체의 행동 때문에 생명이 살아가기에 편안한 상태로 조정된다.“
그동안 우리는 지구를 신이나 화학적인 기적으로 인해 생명이라는 얇은 막으로 뒤덮인 암석덩어리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 놀라운 주장이다. 가이아 학파는 거대한 붉은 삼나무를 상상해보라고 한다. “나무는 분명 살아 있으나 그 94%는 죽어 있다.” 현재의 생명이 거대한 둥치 안의 오래된 목질소와 셀룰로오스를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가이아 가설이 놀라운 것은 그보다 더 큰 이유, 즉 무언가가 지구를 지켜주며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다.
러브록은 지구의 자율조정장치가 자동적이므로 의식적인 안내나 세균들의 회의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데이지월드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지구와 크기가 같은 데이지월드는 태양으로 부터의 거리가 지구와 같지만 오직 데이지만이 살고 있는 행성에 대한 컴퓨터 모델이다. 이 데이지들 중 일부는 백색, 일부는 흑색, 일부는 회색이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열기가 수십억 년 간 점점 증가한 데이지월드에는 구름이 없다. 그러므로 그곳의 기온은 표면의 반사율에 따라 결정되고, 반사율은 또 흑색과 백색 데이지의 혼합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태양이 비교적 서늘했던 초기에는 흑색 데이지가 햇빛을 더 많이 흡수하여 빨리 자랐다. 하지만 그런 좋은 조건에서 흑색 데이지가 늘어나자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기온이 하도 뜨거워져서 서늘함을 유지하는 백색 데이지의 생존 조건이 더 좋아졌고, 이제 백색 데이지의 확산이 기온을 식혀줄 것이다.
물론 이런 작용은 자동온도조절계가 장치된 용광로처럼 의식적인 안내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과정과 아주 비슷한 일이 지구에서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 양은 지난 30억 년간 1/4 이상 증가했다. 그에 따라 봄의 온기가 여름의 열기로 변하면 지붕 밑 다락에 달린 환풍기가 절로 돌아가듯이 열을 가두어두는 이산화탄소의 양 역시 그렇게 감소했다.(물론 최근 몇 백 년 간 인간의 광적인 노력이 있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생명들 역시 지구 대기의 거의 모든 산소를 만들어냈고, 수억 년 동안 대기 중에서 21%의 성분 수준을 유지했다. 만약 산소량이 15%에 불과했다면 불을 피울 수가 없었을 것이고, 25% 이상이라면 열대우림의 가장 습기 찬 숲마저도 ‘어마어마한 불꽃’ 속에 타올랐을 것이다.
언뜻 보면 가이아 가설은 사태가 그리 절망적이지 않으며, 지구 위의 생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계속될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 같다. 러브록은 실제로 그러하며 지구는 자신에게 필요한 조정을 스스로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구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 예를 들면 미행성체들이 지표면에 비처럼 쏟아져 ‘인간의 피부로 치면 60%의 화상을 입은 것’만큼의 피해, 핵전쟁마저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그런 피해를 적어도 10번은 겪었다. 러브록에 의하면 오존층 파괴가 거의 모든 생명을 죽이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지구의 파괴되기 쉬운 차폐막‘이란 말은 거짓이다. 오존층은 오늘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존재가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엉뚱한 상상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생명’이지 ‘인간의 생명’이 아니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 가이아는 꿈틀거리는 단세포동물이나 막강한 인간이나 차별 없이 똑같이 좋아한다. “비록 가이아가 인간처럼 제멋대로인 종의 변덕에 면역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으로서의 인간이 그들의 집단적 어리석음의 결과에 상관없이 보호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이아는 얼빠진 어머니도 소심한 소녀도 아니다. 가이아는 35억 살의 거친 처녀다. 한 종이 잘못되면 지체 없이 그를 제거한다. 이때 개입되는 가이아의 감정은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적재된 작은 인공두뇌의 감정 정도일 뿐이다.”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세상이 부적합한 곳이 되었을 때 우리가 여전히 캐딜락을 몰 수 있도록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을 가이아가 모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안정 상태가 신속하게 전개될 것이고, “그 새로운 상태는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환경보다 인간들에게 덜 우호적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므로 가이아 이론은 도전적인 인간중심의 자세에서 탈피하여 나머지 피조물들에 대한 강력한 존경과 배려로 이끌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보다 적은 양의 전기톱과 소들과 자동차라고 러브록은 말한다. “건설적인 방식으로 개인적 차원의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러브록은 영국 콘월지방의 농장에서 생태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며 살고 있다. 그는 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만들어 “소와 닭을 기르는 지저분하고 좁은 우리와 추한 판금으로 만든 건물, 냄새나는 기계로 구성된 현대 농업의 저급한 단일문화를“ 그 울타리로 막아내고 있다.
그의 견해를 잘못 해석한 일부 사람들은 세상이 자동으로 청소되는 거대한 오븐과도 같아서 우리가 오염이나 이산화탄소 등을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그들은 인간이 오븐 벽에 붙어 있는 타다 남은 찌꺼기일지도 모른다는 러브록의 지적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지구가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그의 생각을 좀 더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만약 자동온도조절계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조정해야 하며, 환경의 자연적 과정에 우리가 점점 더 깊이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항이 많은 길, 그러나 겸허한 길
우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변하는 이상야릇한 순간에 살고 있다. 나는 창 밖에 있는 나무를 사랑한다. 그들은 내 삶의 일부이다. 나는 그들이 열기에 시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지만 또한 그들이 완벽하게 클론된 묘목 대열 속에서 싹트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가 이미 지구에 끼친 피해, 그리고 유전공학적 산업을 통해 다가올 미래에 끼칠 피해는 나로 하여금 다른 방법을 숙고하게 만든다. 더 겸허한 대안이 없을까. 그나마 남아 있는 자연을 잘 지키고, 만약 회복할 수 있다면 회복할 여지를 주는 그런 대안이 없을까. 우리의 행동방식뿐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변화시키는 그런 대안이 없을까.
그런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인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던 시절부터 금욕주의자와 은자들은 늘 있었다. 소로우는 종교를 이러한 은자적 사고 안에서 희석시킨 후 다시 현대의 주류사상에 영입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간을 되찾자는 것이었지 자연을 구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우 강렬한 인간중심적인 설명을 했다. 그가 우려한 것은 인간이 자연을 모독하는 것보다 인간이 인간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자연은 중요하긴 하지만 단지 멋진 책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늘 하루를 자연처럼 유유자적하게 지내보자. 내 앞에 닥치는 소소한 것들 때문에 놀라 여유를 잃지 말자. 아침 일찍 일어나 금식을 하거나 아침을 먹자. 천천히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이.” 자연은 그에게 교훈이었다.
인간 외에 생명체도 그 자체로 중요하며, 인간이 결코 이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겸허한 철학은 몇몇 저자에 의해 중요한 다음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뮤어는 작품 전반에 걸쳐 이를 암시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온실효과의 영향이 더 분명해짐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욕구를 줄이고 차단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로 긴 여행을 하는 대신 길 옆의 도로를 자전거로 다녔다. 뒤뜰에 장작으로 물을 덥히는 욕조 대신 멋진 이중 유리창을 설치했다. 다른 대부분의 변화도 이와 유사하게 소소한 것들이다. 우리는 장작을 때서 난방을 한다. 실내온도는 대체로 13도를 유지한다. 쇼핑은 1년에 열두 번만 가기 때문에 이전보다 차도 덜 쓴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때가 몇 주씩 계속될 때도 있다. 나는 농사를 잘 못 짓지만 그래도 우리가 먹을 것을 점점 많이 기르려 한다.
그래도 역시 그런 일은 쉽다. 특히나 시골에서 산다면 말이다. 그것들은 희생이기도 하나 즐거움이기도 하다.
2년 전 결혼했을 때 아내와 나는 평균적인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머지않은 장래에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여행을 사랑한다. 그래서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렇게 인생을 설계했다. 우리 집은 크고 좋다. 집이 아이들 떠도는 소리로 가득 차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온실효과의 영향이 더 분명해짐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욕구를 줄이고 차단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로 긴 여행을 하는 대신 집 옆의 도로를 자전거로 다녔다. 뒤뜰에 장작으로 물을 덥히는 욕조 대신 멋진 이중유리창을 설치했다. 다른 대부분의 변화도 이와 유사하게 소소한 것들이다. 우리는 장작을 패서 난방을 한다. 실내온도는 대체로 13도를 유지한다. 쇼핑은 1년에 열두 번만 가기 때문에 이전보다 차도 덜 쓴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때가 몇 주씩 계속될 때도 있다. 나는 농사를 잘 못 짓지만 그래도 우리가 먹을 것을 점점 많이 기르려 한다.
역시 그런 일은 쉽다. 특히나 시골에서 산다면 말이다. 그것들은 희생이기도 하나 즐거움이기도 하다. 집안 다른 곳은 매우 춥지만 난롯가는 따뜻하다. 순전히 취미였을 때보다는 나를 불안하게 하지만 나는 밭에서 흙을 파는 것을 좋아한다. 폭풍으로 토마토 나무가 쓰러지면 나는 약간 불쾌해진다.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새로운 경치를 보지는 못하지만, 대신 우리 집 주변 몇 평방킬로미터 내의 자연은 철마다 다른 분위기를 더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더 어려운 변화도 있다. 점점 작아지는 세상이 우리를 구속하고 답답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나와 아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이전에 자라던 세상이 아니며, 우리의 꿈과 희망이 형성되던 그 세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아기를 원하는지 되도록 이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간다.
나는 내 온 삶을 ‘더 많이’ 원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부정적이 아닌 방식으로 ‘더 조금’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상상력이 중요하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게 되면 행동은 자연히 따라온다.
예를 들면 온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좀 더 효율적인 세탁기를 들여놓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런 세탁기를 사고 나서도 옷을 많이 가지는 것이 당신의 권리이고 기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본질적인 타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옷이 많다는 것은, 소유물을 축적하고 오직 인간의 욕망만이 중요한 척도인 현재 세계와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은 어느 정도 온실효과를 이겨낸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유전공학의 풍요의 뿔 같은 것에 넘어갈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가진 옷을 최소한의 편안함 수준으로 줄이고 이웃집과 공동으로 효율적인 세탁기를 사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 지점, 커다란 옷장 가득히 옷을 쌓아놓은 것이 약간 불합리하고 비자연적으로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면, 우리는 현재 매달려 있는 흔들리는 가지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합리’와 ‘비자연적’은 ‘틀린’과 ‘비도덕적’ 과는 다르다. 이것은 도덕적 논쟁이 아니다. 멋진 옷을 가지고 있는 데는 아름다움이나 기발함 등과 관련된 이유가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은 그런 욕망이 자연세계에 주는 부담보다 더 크지 않다. 우리가 그를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사고는 절로 바뀔 것이다.
욕망도 중요하다. 우리에게 반드시 겸허하게 살라고 강요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그와는 다른 도전적인 코스를 선택해 결과를 지켜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 하나 절대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화석연료의 즉각적 절감이다. 이것만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어떤 미래를 선택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시에 물질적 욕구를 줄이리라는 확실성은 없다. 그러나 점점 더 자연과 괴리되는 세상에 살지 않겠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도전적 대안이든 겸허한 대안이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온실효과에 적응할 방법은 제시된다.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한 첫 번째 분명한 반대는 선택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언제나 쉬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불가피한 생물학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 책임회피다. 그것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선택이라는 도덕적 부담이 있다. 주로 동양의 경우지만 선택에 의해 수백 년간 시간을 정지해놓은 문명의 예가 있다.
두 번째 분명한 반대는 지금 결정할 필요 없이 미래 세대에게 미루는 것이다. 이렇게 미루는 것은 매력적이고 전통적으로 해온 일이다. 우리도 이 특정 문제를 1864년부터 지금까지 미루어왔다. 그때 환경전문가 조지 마시는 인류의 벌목 행위 및 습지에서 물을 빼내는 행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마룻바닥과 문과 창틀과 목재 몰딩장식까지 뜯어 태워서 몸을 덥히는 격”이라고 비유하며 경고했다.
나는 지금까지 왜 더 이상 그 결정이 유보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용납할 수 없는 정도까지 증가해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의 열대우림은 지구를 둘러싸는 갈색 띠가 되어 수천 년을 갈 것이다. 우리가 불운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유전공학이 이미 속도를 얻기 시작해 아무도 그를 멈출 수 없게 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기술이 루이스 토마스의 말처럼 “사회에 존재하는 미해결 질병의 대부분을 치유하는 데”만 쓰이고, 나무를 곧게 만들거나 거대한 송어를 기르는 데는 쓰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편안한 생각은 내게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볼 때 우리의 무력함은 풍요의 문제다. 통찰력 있는 수필가이며 농부인 웬델 베리는 말했다. “농경생활이 인간에게 혜택을 주는 대가로 심한 보상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런 보상을 회피하기 위해 산업시대가 창조되었다.” 그러한 초기 농경시대에서 수세대를 지나온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현재의 풍요를 당연한 권리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에너지 위기가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끈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카풀을 했다. 즉 차내 라디오 주파수의 독점 조작권을 포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