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그 새로운 시각”
전시회가 열렸던 플러싱 타운홀을 찾았다.
지난 1월 31일은 태음력을 사용했던 우리 조상들의 전통명절인 설날이었다. 달이 차고 기읆을 기준으로 한 달을 정하는 태음력은 절기를 포함한 태양의 주기까지 고려한 역법이라고해서 태음태양력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태음태양력에 기반을 둔 우리의 전통명절 설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집안 어른들과 이웃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고유한 풍습이 있다.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는 어른들 말씀에 쏟아지는 잠을 참다참다 스르르 잠이 들었던 기억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있을듯한 어린시절 추억이기도 하다. 또한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의 15일 동안은 정초라고 해서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등 다양한 민속놀이와 풍습이 행하여졌는데 이러한 세해맞이 풍습 중에는 가까운 친지나 이웃에게 세화를 선물하는 풍습도 있었다. 세화를 순우리말로 하면 세해맞이 그림인데, 정초에 액운을 막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를 담아 집안에 한시적으로 붙여놓는 그림이었다. 이렇듯 세화는 덕담과 그림이 합쳐진 일종의 연하장과 같은 그림이었고 이때 일반인들 사이에서 세화로 이용되었던 그림들은 전문화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린 그림으로 오늘날 우리가 민화라고 부르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세화로서 인기가 많았던 민화로는 액막이와 경사의 의미를 가진 까치와 호랑이, 새벽을 밝혀 귀신을 쫒는다는 닭, 집을 지켜주는 개, 불의 재앙을 막아주는 해태와 더불어 용이나 십장생에 나오는 여러 동물들을 그린 그림이나 산신, 선녀, 처용과 같은 인물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이렇듯 우리민족은 새해가 되면 대문이나 집안 곳곳에 ‘세화’를 붙여 액막이와 함께 좋은 한해를 기원했는데, 궁중에서도 왕이 ‘관동팔경도’ ‘궁중모란도’ ‘금강산도’와 같은 그림을 고관대작들에게 세화로 선물했다는 기록도 있다. 수십 점에서 많게는 수백 점의 고급스러운 세화 제작을 위해 도화서 화원들은 아마도 연말부터 바쁜 일과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화는 궁궐에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널리 행하여졌던 우리의 전통문화였고, 이러한 세시 풍속은 다양한 민화제작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설날이 막 지났던 지난 2월 8일 플러싱 타운홀에서는 정초라는 시기에 걸맞게 한국 민화 전시회가 열렸었는데, 한국의 설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던 뜻깊고 값진 자리였다. 플러싱 타운홀의 2014년 설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던 이번 특별전시회는 창원대학교 강바램교수가 이끄는 한국전통회화연구회 회원들의 민화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태극도, 산수도, 문자도, 화조도, 화훼도, 책가도, 사신도, 황룡도, 어락도등 다양한 쟝르의 민화를 한자리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전통민화의 형식을 보전하면서 작가들의 절제된 해석을 통해 표현된 이번 작품들은 그동안 민화를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많은 관람색들에게 전통민화의 모습을 직접 체험해보고 나아가 민화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했다.
2012년 ‘한국의 전통 사경’ 행사를 통해 고려 사경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뉴욕에 선보였던 뉴욕 한국문화재단과 플러싱 타운홀 한국 프로그램 기획팀의 공동주최로 열렸던 이번 한국 민화 전시회에는 미국내 한국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론 킴 뉴욕주 하원의원, 홍종학 전 플러싱 한인회장, 윤여태 뉴저지 주 저지시티 시의원 등 많은 한국계 인사들의 축하와 격려속에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시와 더불어 한국 전통공예 워크샵과 한국 전통음악 공연등 3일에 걸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선보였던 이번 전시회는 한국의 문화를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총체적인 행사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민화를 알려야 한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더욱 우리 민화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창원 대학교 강바램교수의 우리 그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남달랐다. 알면 알수록 우리 조상들의 탁월한 미학적 품격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민화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는 강바램 교수는 이러한 우리의 훌룡한 문화유산인 민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한국 미술사에서 잊혀져가는게 너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알려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크고 작은 민화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국내외에서 민화 알리기에 앞장서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일본과 프랑스등에서 많은 초대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던 그녀에게 미국내에서는 첫번째 한국 민화전이기도 했던 이번 전시회는 우리 전통 민화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뜻깊은 행사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빛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로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민화는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는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낙관이 없어서 작가 또한 알 수가 없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민화 역사의 시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세시풍속에서 민화 기원을 찾기도 한다, 또는 통일신라시대의 처용 문배가 민화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신선도, 장생도, 수렵도, 백제 산수문전의 산수도 등에서 한국 민화의 연원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민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나 학술적 연구가 많이 부족한 상태라고 말하는 강바램 교수는 첫번째로 민화에 대한 용어적 정의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그는 한국의 전통 미술및 공예품에대한 관심이 많았고 우리의 전통 예술품에 대한 많은 평론을 썼고 수집을 했던 일본 민예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었다고 한다. 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가 우리의 전통 예술품에 민화라는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우리 민속 예술품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그림을 우리의 용어로서 정의하고 이해해야 바람직하다는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구체적인 용어에 대해서는 학계의 심도있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민화의 기능과 자생 배경을 고려해볼때 실용화, 장식화, 민속화 등을 민화의 성격에 부합되는 새로운 용어로서 제시하기도 했다.
민화란 어떤 그림인가?
민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었다. 건강, 장수, 입신양명등 복된 삶에 대한 주술적 염원을 담은 예술작품으로 오랫동안 민중의 삶에 뿌리를 내려 왔기에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과 멋, 신앙이 담겨져 있는 그림이기도 했다. 민화는 생활 속에서 장식화나 기록화로 많이 그려졌는데, 세시풍속에 따라 세화로 집안을 장식했고 역신이나 화마등 악귀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벽사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혼례식에는 모란도, 화조도, 백자도 등의 병풍을 사용했고, 돌잔치에는 꽃이나 새를 그린 애기 병풍에 기원을 담았다고 한다. 화갑연에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나무와 학 그림과 같은 불로장생의 그림을 그렸고, 어린아이가 책 한권을 뗄때마다 책거리 잔치를 열어 책거리 그림(책가도)을 그려주던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무서운 호랑이를 아주 친근감있고 해학적으로 그렸는데 그것은 호랑이가 두려운 존재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강자와 약자와의 소통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다. 특히 호랑이 얼굴 표정은 다채롭고 재미있는데, 이빨을 드러낸 포악한 표정에서부터 어리바리한 모습, 바보 같은 모습,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모습, 술에 취해 눈알이 뱅뱅 돌아가는 모습까지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호랑이의 모습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났지만 나중에는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 추상성과 단순성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 모든 예술은 실제로부터 시작해 추상으로 완성되는것처럼 이렇듯 민화가 추상의 경지까지 이른 것은 단순한 세화나 장식화의 기능적인 그림의 영역을 벗어나 독자적인 작품으로 발전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민화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그림이었다
민화를 평범하고 서민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민화는 매우 독특하고 조형적으로도 앞선 그림이었다. 민화는 아마추어의 서툰 그림이 아니라 아마추어만이 가질 수 있는 형식의 자유와 해방을 보여 주고 있는 그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화를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살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이라고 말한 미국의 민간미술 연구가인 베트릭스 럼포트의 말은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민화의 자유로운 표현력은 민화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이렇듯 규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꿈꿨던 민화의 모험적 자유는 creativity의 충분한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사라졌다 다시 살아나는 민화
벽사와 기복의 사상을 품고 생활 속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화를 찾아보면 그 다양함에 놀라고 만다.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에도 당초문, 꽃, 난초, 문자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이불깃, 베갯잇, 베갯보, 버선에도 정성을 다한 민화가 수놓아져 있는 것이 우리 생활 속의 민화인 것이다. 한창 성행을 했던 민화가 일제에 짓밟히고, 전쟁에 불타고, 개화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거듭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많은 민화 작품들은 현재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양이 훨씬 많다고 한다. 또한 문명의 발달은 토속적인 것들을 배척하고 새로운 문화를 취하고자했으며, 민화도 그렇게 흔적을 감추었다가 강바램 교수님과 같은 의식있는 사람들에 의해 요사이 민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민화를 이해하고, 민화를 그리고, 민화를 생활 속에 수용하며, 민화는 우리와 함께 역사를 다시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예술적 가치를 지닌 민화가 다시 한번 그 빛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