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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한민족의 이동 경로.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410 14.03.21 06: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인의 기원.


영국 캠브리지 대학 인류진화학과 폴 멜러 교수팀은 약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현생 인류의 조상이 6만 년 전에 세계 도처로 인구이동을 한 이유가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2006년 6월에 발표했다.


같은 해 4월 출범한 ‘제노그래픽(genographic) 프로젝트’는 2010년까지 세계 각지의 현대인 10만 명의 유전자 샘플을 분석해 현생 인류가 최초의 거주지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이동경로 지도를 작성하는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를 이끄는 영국 옥스퍼드대 유전학과 스펜서 웰스 교수는 인류의 이동경로와 특정지역에서의 공동체 형성과정이 DNA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그의 저서 ‘인간의 여행(Journey of man, 2002년)’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족보를 추적해 현생인류의 최초 여성이 아프리카 중부 동해안 근처임을 밝혀냈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만 유전되는 Y염색체를 추적해 현생인류 최초의 남성은 6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았음을 밝혀냈다. 언뜻 보면 모순 같지만 15만 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등 현생인류와 속(屬)이 다른 인종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의 유전자 지표와 여성의 유전자 지표를 거슬러 가면 여성의 경우 15만 년 전까지 또 남성의 경우는 6만 년 전까지가 현생인류와 동일한 유전자 지표를 갖는다고 한다. 유전자 공학자들은 특정 유전자의 변화가 일어난 지점을 추적하여 각 지역에 분포하는 인류의 공통 조상을 좁혀 감으로써 인류의 이동경로를 알아냈다.



스펜서 웰스 교수의 유전자 분석에 의한 한국인의 기원.


아프리카?아라비아반도?이란고원?파미르고원?티벳?장강?주강?베트남?황하?요하(만주)?한반도                                                                      ?                   ㅣ                                ㅣ

                       ?-------------------------?-->인도 ? 인도네시아 ? 필리핀 ? 남중국 ? 한반도 (일본) 

 

          ?                                


파미르고원 기원설에 의한 한국인의 기원.


파미르고원 ? 텐샨산맥 ? 알타이산맥 ? 바이칼호 ? 아무르강 ? 요하 ? 둥베이평원 ? 한반도(단군조선)  

      ㅣ 

        ?------->메소포타미아

      


스펜서 교수에 의하면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는 다른 지역에서 구석기 문화를 향유하며 살고 있던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속(屬, genus)의 인류를 멸종시키고 새 주인으로서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가장 먼저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는 유라시아 대륙 남단의 해안선을 따라 인도네시아를 거쳐 호주로 이동했고 아메리카 원주민은 약 2만 년 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아메리카로 이동했다고 한다. 따라서 피부색과 외모만 가지고 동아시아인과 다른 지역 황인종의 혈통적 유사성을 연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Y염색체 분석을 통해 한국인의 선조는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동아시아로 이동했음을 알아냈다. 고대 인류가 한반도에 진출한 시기는 약 3만5천 년 전이라고 한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구석기문화가 발견되는 시기이다. 그러니까 한반도에 최초로 진출한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이동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나서였는데 신석기문화를 가져온 신인류는 아니다. 페르시아만에서 이동한 M9 유전자형에서 M175 유전자형으로 변이하여 한반도로 진출한 인류는 현대 한국인의 약 30%라고 한다. 또 M175에서 M122 유전자형으로 변이한 인류는 한반도 주변의 극동지역에서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멈췄는데 M175와 M122 유전자형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역에 따라 60~90%에 이른다.


파미르고원과 만나는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동쪽에 살고 있는 동아시아인에게 많은 M175 유전자형은 공통의 조상에서 분화되었으므로 동아시아인들은 혈연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민족들이다.


벼농사를 지은 M175 유전자형 인류는 약 3만5천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분화돼 베트남을 경유하여 중국 북동부로 진출했고 약 1만 년 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M122 유전자형으로 변이되었다. 이들이 홍산문화 등 요하문명을 일으킨 인류의 직접 조상으로 추정되며 조선인, 만주퉁구스족, 화북인(북방중국인)의 조상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해안선을 따라 가장 먼저 동방으로 이동한 M130 유전자형은 약 5만 년 전에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는데 남방중국인은 동남아시아에서 북상한 M130 유전자형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10년 넘게 한국인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는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에 의하면 Y염색체와 미토콘드리아 DNA를 조사한 결과 한국남성은 남방계 유전자형 비율이 절반이 넘고 한국인의 60% 가량은 몽고와 중국 동북지방에 많은 유전자형인 북방계 혈통이라고 한다. 즉, 고대에 북방계 민족과 동남아시아에서 북상한 농경민족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융합하여 농경문화를 건설했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유전자에는 북방에서 내려온 천손신화에 대한 본능적 기억이 간직돼 있는데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분석 연구결과는 천손신화와 난생신화를 보유한 두 세력이 동북아시아에서 융합하여 고대한국인을 형성했을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아쉽게도 파미르고원에서 알타이산맥을 넘어 바이칼호에 도착한 인류가 요하로 내려온 이동경로에 대해서는 유전자분석 연구가 없다. 오늘날 이 경로는 녹지대이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M242 유전자형은 북방시베리아를 지나 캄차카반도를 거쳐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유전자 지표만 알려준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는 후빙기가 시작된 약 1만 년 전 이후이므로 고대한국인을 형성한 주요세력 중 하나가 파미르고원을 끼고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동방으로 이동해왔음은 분명한 것 같다. 

 

 

 

“한민족 뿌리는 이주 농사꾼” 유전적 연구로 근거 찾았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479520.html 

 

유전자를 이용한 민족 기원 연구들을 보면,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엔 이미 정착한 수렵채취 집단들에 견줘 새로 이주한 농경 집단들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부산 가덕도에서 발굴돼 최근 공개된 8000년 전(추정) 신석기 시대의 사람뼈. 사진 한국문물연구원 제공


김욱·김원교수팀 남자 506명 Y염색체 분석
80%서 농경집단 유전형
한국인 특이 유전형 집단1만 년 전쯤 옮겨와


동북아시아의 현재 민족 집단은 나중에 이주한 원시 농경 집단이 먼저 정착했던 수렵채취 집단을 대체하면서 형성됐음을 확인해주는 유전학과 언어학 연구들이 나왔다. 이는 농업이라는 특정 기술문명이 원시 집단의 팽창과 언어의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농경 집단 팽창설을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새롭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와 김원 서울대 교수 연구팀은 한국 남자 506명을 대상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유전되는 와이(Y)염색체의 유전자를 분석해보니, 한국인 남자 80%가량에서 농경 집단에 고유한 여러 유전형들이 나타났으며 그중 상당수는 한국인 특이 유전형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이 집단들은 6만~8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온 뒤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팽창하며 이주한 농경 집단의 갈래들이다. 논문은 법의학 국제저널 <수사유전학>에 최근 발표됐다.


와이(Y)염색체는 부계를 통해 거의 그대로 유전되기 때문에, 현재 남자의 와이염색체엔 수만 년 동안 인류 이동과 민족 분화의 과정에 돌연변이로 생긴 여러 유전형들이 차곡차곡 누적돼 있다. 이 때문에 와이염색체는 인류의 과거를 간직한 ‘유전자 화석’으로 여겨진다. 디엔에이 돌연변이율을 계산하면 특정 유전형이 출현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이번 연구에선 중국 농경 집단 계통(45%)이나 북방 몽골 계통(15%) 이외에 1만 년 전쯤 한반도 근처에서 새로운 돌연변이를 얻어 분화한 농경 집단의 유전형(O2b)도 30%가량 발견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여기서 더 분화한 유전형은 일본인한테서도 다수 발견된다. 김욱 교수는 “한국인 특이 유전형의 집단이 1만 년 전쯤 팽창해 들어와 한민족의 중심 계통 중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논문의 제1저자인 김순희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동부분원 유전자분석실장은 “흔히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우리 민족의 기반이 형성됐다고 하는데 이번에 그런 학설의 유전학적 근거를 찾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농경 집단과 언어의 관계를 보여주는 연구도 나왔다. 일본 도쿄대 연구팀은 영국 <왕립학회보> 최신호에 “현대 일본어의 59개 지방어에서 기본 단어 210개씩을 뽑아 통계기법을 써서 언어 진화의 계통을 분석해보니 일본어는 2200년 전쯤 이주한 농경 집단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논문을 냈다. 연구팀이 지목한 2200년 전은 이미 정착한 수렵채취 집단인 ‘조몬족’에 더해 농경 집단인 ‘야요이족’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던 때와 겹친다.


제1저자인 션리(인지행동과학 박사과정)는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언어도 생물처럼 진화한다는 데 착안해 생물 진화 역사를 연구하는 통계기법을 언어에 적용해 분석한 논문”이라며 “이주한 농경 집단이 새로운 영토에서 유전자와 언어를 통해 정복 역사의 흔적을 남겼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민족 기원 연구들이 한·일 두 민족의 현재 관계를 직접 보여주진 않는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션리는 “한국어가 일본어의 뿌리라고 말할 순 없다”“두 언어는 한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공통조상의 언어에서 각각 유래해 다른 진화의 길을 걸은 것”이라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신문(http://www.hani.co.kr)  등록 : 2011.05.24 21:11수정 : 2011.05.25 11:04 

 

 

 

한민족의 이동 경로. 

 

http://www.scs.uiuc.edu/~mcdonald/WorldHaplogroupsMaps.pdf


 

C3 유전자의 분포도. 한국인의 14%를 차지하는 C3 유전자는 약 1만6천 년 전에 발생하여 아마도 바이칼호수 지역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듯하다. 이들은 빙하기가 끝난 이후에 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북미 인디언이 된 듯하다. 이는 흑요석(클로비스) 유적 분포와도 일치한다.

 

 

O-M175 유전자의 분포도.  한국인의 약 60%를 차지하는 O-M175 유전자는 4만1천 년~2만8천 년 전에 발생하여 신석기 농업혁명과 더불어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확산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해수면이 140m 이하일 때 인도네시아, 베트남, 해남도, 타이완섬, 제주도를 잇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빙하기 때 이미 확산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Haplogroup_O_(Y-DNA)


 

아래 분포도는 동아시아만 좀 더 확대한 것이다. 

 

http://www.genebase.com/learning/article/21

 

아래는 파란색 O의 하위 분류를 자세히 살펴본 것이다. 

 

http://www.investigativegenetics.com/content/2/1/10/figure/F2


The distribution and frequency of Y Hoplogroups in Asia란 분포도를 보면, 파란색의 O형과 황색의 C형 그리고 초록색의 D형이 동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유형이 생겨난 순서는 C형이 먼저 생겨나고 곧이어 D형 그리고 O형은 맨 나중에 생겨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황색으로 표시된 C형은 아시아 북부와 남태평양으로 양분되어 분포하는데, 동남아시아에서 6만여년 전에 발생하여 이들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C형은 극동의 퉁구스족에게서 매우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데 몽골 사람들에게서도 50%가 넘는 비율로 나타난다. 중국 북부지역과 한반도에서는 10%내외의 비율로 나타난다.


초록색으로 표시된 D형은 특이한 분포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티벳과 일본열도로 양분되어 분포한다는 점이다. D형도 동남아시아에서 C형에 뒤이어 발생한 후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의 분포도로 봐서는 O형의 사람들에 의해 밀려나 오지인 티벳고원과 일본열도로 분리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열도 내에서는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D형의 비율이 높아지는데 홋까이도의 아이누인에게서는 매우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O형은 D형보다 수 만 년 뒤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높은 비율로 분포되어 있다. 타이완과 하이난섬은 O형의 비율이 100%에 가깝고 중국 북부와 한국은 70%정도이며 일본은 50%정도가 된다. 이 O형도 다시 몇 개의 하위 유형으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 만주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O2b형은 일본, 한국, 류큐 그리고 만주의 O형에서만 높은 비율로 존재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과 류큐의 O형은 한반도에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일본열도 내의 D형의 분포와 또 일본 선사시대의 역사와 함께 엮어져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일본의 선사시대는 죠몬시대에 이어 야요이시대가 이어지는데 야요이문화는 일본열도의 서부에서 시작해서 점차 동쪽으로 확산되어 갔다. 두 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골을 비교해 보면 야요이인의 신체적 특징은 죠몬인과 매우 달랐던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위에서 살펴본 인류유전학의 연구결과와 종합하면, ‘원래 D형의 죠몬인들이 살던 일본열도에 O형의 야요이인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가 서로 섞여 일본민족을 형성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살펴본 것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줄거리가 만들어진다.


‘처음에 C형을 가진 사람들이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이동해 와서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O형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 중국 남부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 왔는데 기존의 C형 토착민들보다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 후 한반도인들 중 일부가 D형이 살던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일본인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Y-DNA 분석을 통하여 민족의 이동경로와 기원을 추정해 보면 한민족은 북방계 민족들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한민족의 외모가 몽골이나 부리야트 사람들과 매우 유사한 점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은 MTDNA분석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


아래 그림은 MTDNA분석을 통해 추정한 인류의 이동경로다. 

 

http://en.wikipedia.org/wiki/Human_mitochondrial_DNA_haplogroups

 

MTDNA의 이동경로가 북방으로부터 한반도 방향으로 그려진 것은 한민족의 MTDNA가 북방의 시베리아나 몽골로부터 많이 유래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으로 한민족의 외모가 북방계 민족의 외모와 유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백인에 대해 흑인의 형질이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한민족에게서도 북방계 모계의 형질이 우세하게 발현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닮았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발현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선사시대에는 피정복민의 Y-DNA가 소멸되고 MTDNA만 후손에게 전해질 가능성이 높다.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방의 농경민족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지배했던 역사를 배워온 우리는 한민족의 경우도 북방계가 남방계 토착민을 정복해서 혈연적 바탕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민족에게서 북방계의 Y-DNA는 많이 검출되지 않고 MTDNA만 많이 검출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그러한 추정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것이 인류의 긴 역사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의 일로서 그 이전에는 북방이나 남방이나 모두 수렵과 채집생활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인류가 말을 타기 시작한 것도 농경보다 더 최근의 일이어서 유목민이 농경민에 대해 전력상 우위에 섰던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란 점도 그러한 이해를 돕는다.


우리는 흔히 한반도의 선사시대 사람들을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북방과 연관을 지으려 하고 남방과의 연관은 애써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인돌, 난생신화, 벼농사와 같은 남방계 문화에 이어 최근의 인류유전학에 의한 연구결과는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남방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한민족 유·이민사(流·移民史).


삼국시대부터 최근까지 우리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유·이민(流·移民)의 행렬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수천 년 단일민족 국가를 유지해온 사실만을 강조해왔을 뿐 우리 민족사의 뒷골목으로 사라진 유·이민의 행렬을 간과해왔다.

과연 한민족의 유·이민사(流·移民史)는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 우리 민족의 유·이민의 역사는 성격상 삼국시대부터 구한말 /일제시대 /광복 이후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 영토변경, 조공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났지만 그 이후 관계가 끊어져 민족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경우, 수(隋)·당(唐)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인과 3국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고구려·백제 유민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유·이민은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어서 규모나 정착지 등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백제 패망 이후 의자왕(義慈王)을 비롯한 1만2천8백7명의 백제인이 포로가 되어 낙양(洛陽)으로 끌려갔다.」 「고구려가 망하자 보장왕(寶藏왕)과 그 가족, 백성 3만8천3백 호 약20만 명이 끌려갔다.」는 것과 같은 기록들로 그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중국에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노예 등 사회 하층민으로 흡수돼 그 사회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최근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들이 산동성(山東省) 요양(遼陽)·해성(海城) 일대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우리 유·이민사에 있어서 망각됐던 부분을 상당 수준 되살려주는 부분이다.


또 백제유민 등 일본으로 대거 이주해간 한족이 많지만 대부분 일본의 상층사회로 편입, 출신을 감추는 바람에 민족사로부터 이탈해버렸다.


고려 때는 거듭된 요(遼) 등의 침략으로 잡혀간 상당수의 포로들과 상인들이 중국 각지에 집단부락을 형성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1231부터 30여 년간 계속된 몽골 침입에서 20만6천8백여 명의 포로가 잡혀간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중앙정부의 학정과 경제난으로 인해 유민은 계속됐으며 중엽에는 특히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병자호란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및 중국으로 잡혀갔다.


다분히 유민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앞 시대와 비슷하지만 한민족사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우선 중국에는 조선 중엽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건너 만주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짓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869년과 1870년 북한 지방에 몰아친 흉년 때문에 더욱 가속화돼 수많은 사람이 만주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다.


특히 국운이 완전히 기운 1907년부터 만주로의 유민은 급증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1910년에는 10만9천5백 명, 1921년에는 30만7천8백 명, 1943년에는 1백20만 명을 헤아리게 됐다.


간도의 한족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청나라와 일본이 짜고 「간도협약」 「재만조선인지도요강」 등을 통해 이주민 수를 제한하려 했으나 망국민의 만주행을 막지는 못했다.


러시아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1863년 포시에트연안에 정착한 13가구가 첫 기록이지만 실제로는 만주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국경지방 사람들이 봄에는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본격적 이주는 역시 1869년 북한 지방에 몰아친 대기근 이후이다. 이들은 연해주 곳곳으로 퍼져나가 하바로프스크, 사할린, 캄차카 지역까지 진출해 수많은 한인촌을 형성했다.

연해주 거주 한인 수는 1882년 1만여 명, 1910년 5만1천 명, 1914년 6만4천 명, 1926년 18만5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한인들은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강제이주당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으로의 이주는 한일합방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10년 합방 당시에 약790명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유학생, 망명객 등이었다. 합방 이후 완만한 증가속도를 보이던 일본으로의 이주는 1차대전 특수로 일본의 산업이 호경기를 맞으면서 크게 늘어났다. 1920년 3만 명에 달한 한인들은 주로 방직공장, 유리공장, 광산, 도로 공사장에서 일했다.


1920년대 초반 불경기로 한때 위축됐던 일본행은 30년대 들자 군국주의 일본의 필요에 따라 다시 급증해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에는 32만여 명,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는 1백47만 명, 광복이 될 무렵에는 2백36만여 명을 기록했다. 광복이 되자 대부분 귀국하고 60만여 명이 잔류했다.


미국이민1903년 1월 배편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사탕수수밭 노동자 101명이 시초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중단됐다. 3년여 동안의 이민자 수는 7200여 명으로 이중 2000여 명은 곧 캘리포니아, 유타, 네브래스카 등 미(美) 본토로 옮겨갔다. 이른바 「사진결혼」은 이민중단초치이후 미·일간의 신사협정에 의해 실시된 것으로 1924년 「동양인 배척법」 제정으로 한인이민이 완전 중단될 때까지 950여 명의 여성이 사진만 1장 달랑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밖에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애니껭 농장노동자로도 다수 이민을 갔다.


자발적 의사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떠났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이민이 이루어진 시기다.


광복이후 중단됐던 외국으로의 이주는 6·25를 계기로 재개됐다. 미군과의 결혼·입양 등으로 56년 약500명이 미국으로 떠났다.


65년 미국의 신이민법이 발효될 때까지 이른바 「전쟁신부」 「전쟁고아」 이민 수는 1만5천 명에 달했다.


65년 이후에는 쿼터제로 2만 명의 이민이 허용되면서 미국행 행렬은 홍수를 이루었다. 이들은 현재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곳곳에서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남미 이민은 1920년대에 일본인 이민행렬에 섞여 이주한 소수의 사람들과 6·25반공포로 가운데 브라질행을 택한 50명이 시초다.


그러나 본격적 남미이민은 62년 12월 네덜란드 이민선 「치차렝가호」를 타고 부산항을 출발했던 브라질 이민 17세대부터 시작됐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된 브라질 이민은 대상자 선정 및 대상지 선정 잘못으로 처음부터 파행을 거듭했다.


당초 브라질 정부와 합의된 이민은 영농분야였으나 실제 이민자들은 영농경험이 없는 군인·의사·상인 출신으로 당초부터 농업에 뜻이 없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대부분 상파울로 등 대도시로 몰려갔다.


브라질 이민은 말썽 속에서 66년 5차 이민까지 계속됐으나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대신 개별적으로 초청장을 받아 이민하는 「초청이민」이 유행해 한동안 「딱지(초청장)장사」가 성업을 이루었다. 71년 참다못한 브라질 정부가 한국이민을 완전 중단시키자 이민 희망자들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우회로를 찾기 시작했다.


62년부터 77년 남미 이민을 전면 중단한 「5·4조치」때까지 우리나라의 공식 남미 이민 숫자는 브라질이 9990명, 아르헨티나 4076명, 파라과이 1만4천1백53명, 볼리비아 1573명 등으로 파라과이 등 인접국을 통한 불법이민이 얼마나 횡행했는지를 보여준다.


남미 이민 길이 막히자 새로운 이민지로 부상한 곳이 호주, 뉴질랜드다. 호주 이민은 74년 파월 기술자 500여 명이 관광비자로 대거 입국, 머무르면서 본격적인 이민 역사가 시작됐다.


70년대 말에는 남미이민자와 중동근로자들이 몰려들어 80년에 약6000명 수준에 육박하게 됐다.


90년대 들어 호주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자 이민행렬은 인근의 뉴질랜드로 발길을 돌렸다. 뉴질랜드는 91년 이민법을 개정해 한국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독일 등 유럽이민은 63~65년과 70~73년 광부로 취업, 독일 탄광 막장에서 땀을 흘린 4700여 명과 69~73년 역시 독일에 취업해간 7200여 명의 간호사들이 원조이다.


이들은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 북구 등으로 퍼져나가 오늘날 유럽교민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승철(李承哲) 기자>

경향신문ㅣ1996. 10. 08 기사(뉴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묘비.


다들 잘 알다시피 668년 당나라 신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뒤, 고구려인들은 왕족과 귀족들을 포함하여 자그마치 포로 20만여 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쓸쓸히 생을 마친 고구려인들의 묘비석들이 중국 대륙에서 여러 차례 발굴되었다.

금석문으로 쓰여진 묘비석에는 그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즉, 비문의 주인공들의 가치관, 뿌리관념, 정체성 등이 확인된다.


따라서 묘비에 새겨진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귀족들의 비문의 내용을 보면, '아 그 당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구나'라고 일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고현(高玄)의 묘비에는 자신이 '遼東 三韓人’이라 했고,
연남생(泉男生)은
‘遼東郡 平壤城人’,
고자(高慈)는
‘朝鮮人’,
연헌성(泉獻誠)은
‘其先高句驪國人’,
연남산(泉男産)은
‘遼東 朝鮮人’,
연비(泉毖)는
‘京兆 萬年人’,
고진(高震)은
‘渤海人’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비록 몇 개의 묘비석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묘비석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고구려 귀족들은 자신들의 뿌리 내지 정체성을 요동의 삼한사람, 평양성사람, 조선인, 발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디
발해란 명칭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때 비로소 생겨난 게 아니라 이미 고구려시대 때부터 오랫동안 쓰여 오던 지명이었다.

장수왕 때 북위로 망명한 고구려 귀족들이 자신들을 발해인이라 했는데, 이는 고구려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삼한이니 조선인이니 하는 것은 모두 다 같은 뿌리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참고로, 645년 주필산 전투 서막에서 당군에게 포로가 된 남부·북부욕살 고연수·고혜진을 '마한의 추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 백제의 부여융의 묘지석 서문(序文)에 “그의 기개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고 하면서, 명문(銘文)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河孫[하백(河伯)의 자손]’, ‘?水(淹?水)’, ‘桂婁’, ‘遼川(遼河)’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백제의 뿌리인 부여사람들이 만주벌판에서 한강 지역으로 이동해온 지가 600년이나 지난 시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과 고구려 및 신라·가야를 아우르는 삼한 의식이 고구려인이나 백제인들 사이에 퍼져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보건대, 백제나 신라·가야 사람들뿐만 아니라 고구려인까지 삼한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고 특히 자신들의 뿌리를 옛 조선에 두고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얼마 전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송했다시피, 가야·신라가 라마동 내지 만주 어느 지역에서 경상도지역으로 남하한 부여인 부족에서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두에 서라벌 6부가 고조선 유민이라는 기록에서 신라·가야 또한 고조선?부여 계통에서 갈라져 나간 세력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고조선에서 갈라진 갈래들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수 이남의 삼한 특히 신라와 뿌리가 다른 계통의 나라라든가 하는 주장을 펼치는 신라정통론에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다.

(고조선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갈라져 나간 부여계통 세력)


글쓴이 : 예맥, 13-05-2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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