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 제주 여성의 삶과 문화는 제주 발전의 원동력

제주도지사 우근민
우리 제주도는 물과 바람과 여성이 많다고 하여 삼다도(三多島)라고 부릅니다. 석다(多)와 풍다(風多)로 일컬어지는 풍토적 조건은 제주도민의 생업과 생활민속의 특이성을 만들어 놓았으며, 여다(女多)는 고단한 생활을 자립ㆍ불패의 정신으로 헤쳐 온 여성들의 힘과 위상이 그만큼 크고 뚜렷함을 증명합니다.
헌 치마로 흙을 날라다가 한라산과 오름들을 만들어 내고, 육지부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 이상 세계로 진출하려는 꿈을 꾸었던 <설문대할망>의 전설은, 제주 여성의 위대함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칠성판을 둥에 지고 저승길을 오락가락하면서 거친 파도를 다스려 온 <제주 해녀>들의 삶은 제주인들의 근면ㆍ개척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제주 여성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장 위대한 어머니 모습이요, 끈질긴 생활인들입니다.
제주의 민속에는 이러한 제주 여성들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민속은 한 집단 성원들이 주어진 여건에 맞게 살아 온 전통적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제주 민속은 제주 사람들이 제주도라는 지역적 환경 속에서 살아온 전통적 삶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의 평안과 마을의 화평을 기원하는 민간신앙, 갈옷이 대표되는 의생활과 향토 맛이 풍기는 식생활, 아늑한 정취 어린 주생활, 민간에게 해마다 계절에 따라 관습적으로 되풀이하여 행하는 세시풍속, 대이어 불러온 민요와 고을마다 읽힌 설화, 잡곡 재배의 밭농사와 연안 어로와 해녀작업 등의 생산기술 속에는 제주 여성들의 지혜가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도에서는 여성문화에 관한 생생한 자료들을 찾아내어 구슬처럼 꿰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를 후손들에게 진중한 정신유산으로 전승시켜 나가고자, 이번에 「제주여성문화」라는 제호의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자의 발간을 계기로, 제주 여성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재조명하고, 보다 깊이 탐구하여 올바른 제주여성상이 정립되어서, 미래 제주 발전의 원동력을 창출해 내는 기본 자료집으로 활용되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현장조사와 원고 집필에 온 정열을 쏟아주신 조사 집필위원들과, 이 책자가 발간되기까지 애쓰신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01년 11월 일
일러두기
1. 이 책은 <제주도지(濟州道誌)>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중인 제주문화자료총서 8번으로 제주도의 여성문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2. 제주도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제주 여성의 튼실한 삶의 양식(樣式)과 강인한 정신(精神)이 어디서 연유하는가를 탐색하였으며, 21세기가 지향하는 문화와 여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3. 제주 여성의 시각으로 제주 여성의 참모습을 찾아보려 하였으며, 문화창조 능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4. 알차고 소중한 내용을 바탕에 깔면서도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없도록 쉽게 표현하려고 했으며 사진자료를 풍부히 곁들였다.
가족과 결혼생활
김혜숙
제주의 결혼풍습이나 가족생활은 한국 전통가족의 모습과는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다른 점이 많다. 가부장제 사회이면서도 실제 생활내용에서는 여성의 목소리가 컸던 계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가. 가능하면 현대사회로의 변화 이전의 옛 흔적을 살피는데 초점을 두어 1900년대 초부터 1950년대 무렵까지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시기 전후의 변화에도 주목한다. 문헌 자료를 살피고, 또한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한 면접을 통하여 사례 조사에서 얻어진 결과들을 바탕으로 들여다보자.
1. 잔치중심의 혼례
신랑집에서 사주고남(四柱考賢)과 이바지
아들이 자라 16~17세 정도의 장가들 나이가 되면 부모들은 신부 감을 수소문하게 된다. 신부는 보통 신랑보다 2~3살 연상으로써 하인, 백정이나 무당과 같은 천한 집안은 피하고 '건강하여 일 잘하는' 처녀를 선호한다. 어촌에서는 물질(해녀작업)을 잘하는가 하는 것도 신부를 고르는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예쁘고 얌전하고 예의 바른지 등 소위 여성적인 조건보다 농사나 물질과 같은 일을 잘하는가 하는 것을 우선한 것은 여성의 노동경제력이 중요한 여성 경제체제 사회이기 때문이리라.
혼인연령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세 이하의 조혼 경향도 보이면서 1940년대 경까지는 20세 이하의 혼인에 거의 집중되어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20세에서 25세 사이에 분포되어 있으나 1980년대에 이르면 25세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다.
부부간 연령차이도 부인 연상형에서 1950년대 이후 서서히 남편 연상형으로 변화하였다. 초혼연령이 높아지면서 부인 연상형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 자유혼이 일반화되어가면서 통혼권의 확산을 유도하게 되어, 제주가족의 성격을 많이 변화시키게 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혼인은 거의 중매에 의해 이루어졌다. 육지에서는 여성 매파가 중매쟁이 노릇을 하지만 제주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나 보통 연령이 지긋하고 '동네유지이면서 복 많은 남성이 주로 한다. 중매쟁이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일인데, 신랑집의 위신과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성은 재수 없다'는 즉 남성 우월, 여성 비하의 사고가 깔려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여성의 활동력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대표권의 행사는 남성들이 하고 있어 가부장제 사회의 속성을 강하게 보인다.
신부감을 물색하여 청혼하는 과정까지는 중매인을 앞세운다. 그러나 신부 부모의 동의가 있고 난 후는 신부의 사주를 받는 절차부터 신랑 부친이 신부의 부친을 만나 직접 사돈끼리 모든 일을 의논해 나간다.

새서방은 백마를 타서 앞장서 가고 새각시는 가마를 타고 뒤따르는 전통혼례 행렬. <제주 100년>
신랑부친의 첫 방문시 신부집에서는 보통 술이나 음식 등의 접대는 하지 않는다. 혼사를 위한 최초 대면에 음식 대접을 하면 '새(잡귀)'가 붙어 혼사가 깨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는 신랑감의 첫 방문에도 적용되어 오늘날에도 이를 지키는 집안이 있다.
한국 전통혼례에서는 신랑 측의 사주단자를 신부집에서 받아서 택일하고, 혼인 일자와 납폐월일을 적은 연길단자를 신랑집으로 보낸다. 그러면 신랑집에서 혼서와 폐를 함(봉채함)에 넣어 혼인 전날 밤에 신부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그 순서가 이와는 반대로 진행된다. 사주를 신부의 집에서 신랑 쪽으로 보내고 신랑집에서 사주를 '고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궁합을 보는 것이다. 택일이 되어 혼인 일자가 결정되면 신부집으로 막편지를 가져간다. 막편지는 샤주가 맞아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알리는 문서로써, 택일(혼인일자)을 정식으로 통보하는 서식이다.
막편지 전달을 일종의 약혼식으로 하고자 할 때는 양 집안 모두 참석의 범위가 넓어진다. 약혼의례에 해당하는 성격을 갖는다면 신랑 쪽에서 돼지다리, 술 한 되, 쌀 한말과 신부의 옷감 한 벌 등을 마련한다. 신부집에서는 신랑 쪽에서 가져온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다. 막편지를 주고받은 후부터 양가는 정식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 여기며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사돈으로 부르게 된다.
잔치 날이 다가와 가면 혼인에 필요한 음식물을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데 이를 이바지라 한다. 이바지를 보내는 것은 딸을 데려오는 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예물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제주는 남성들이 어로 작업을 하거나 육지로 나가다가 바다에서 죽는 일이 많았다. 여성들이 밭농사나 물질 등으로 직접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으므로 여성들의 노동력과 생계유지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 따라서 신랑집에서는 정성을 다해 예물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바지는 많이 받을수록 신랑 쪽이 부자이며 권세 있는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이라 여겨 자랑스럽게 생각되었으나, 차츰 이바지를 받는 것이 신부 측의 가난함을 드러내거나 또는 딸을 파는 격이 맞은 집안으로 인식되기도 하여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차츰 신부 측에서 이바지를 사양하는 경우도 늘어나게 되면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혼례식. 혼인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라기보다 집안간의 결연이었다. <김용선 제공>
신랑 쪽에서 이바지로 보내는 물품은 집안 형편에 따라 그 종류와 수량에 차이가 있었다. 대개 돼지 1마리 삶은 것, 술 1허벅, 쌀 10~18말, 달걀 60~100개, 닭 2마리, 생선 10마리 내외 등이었다. 후에는 돈으로 보내는 사례도 있었으나 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바지를 보낼 때 물량이 많으면 마을 하인이 소에 실어 가져간다. 그 품목을 알리기 위해 품목별로 수량을 기입하여 보내며, 삼촌 등 근친이 동행하기도 한다. 이 관행은 1900년대 초기까지는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그 이후는 지역이나 집안에 따라 시행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다가, 1950년대 이후 서서히 사라진 듯하다.
근래에는 이바지가 없어지면서 혼인식 날 신부집으로 갈 때, 집안에 따라 쌀 1말, 술 1되, 돼지다리 1개 등을 가져가기도 하는데 이 풍속의 잔존으로 보이며 동서나 시누이 등이 가져간다.
혼수는 겨우 이불 한 채
잔치를 위해 신랑 측은 이바지, 독교(되끼, 돼깨, 가마), 예복, 신부가 입을 한복과 짚신(또는 가막창신)을 준비한다. 1900년대 초까지는 신부는 독교를 이용했다. 동교는 네 귀에 기둥을 세우고 무명에 짙은 청회색 물을 들인 천으로 사방을 포장한 것이다. 속에는 짚방석을 놓고 그 위에 혼수인 꼴레이불(누비이불)을 깔고 앉았다고 중산간촌의 한 노파는 증언하였다.
가마는 1940년 무렵부터 이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독교는 1950년 경 소멸되었다고 한다. 독교나 가마는 마을마다 접[契]을 구성해서 운영하였다. 접에 가입한 사람은 무료로 사용했고 일반인들에게는 삯을 받아 빌려준다.
신랑은 한복 위에 도포를 입고 겉에는 관복을 입는다. 사모관대도 하는데 그런 물품들은 가마접에 부수되어 있거나 관복계가 따로 있기도 하여 빌려 입는다.

1950~60년대는 신랑집 마당에서 혼인식을 하고 '펑'하는 기념사진 촬영. 신부의 예복과 '꽃뿌리' 아이들의 모습이 이채롭다(1950년대 가파도, 백순자 제공)
신부의 차림에도 시기별 변화가 심하다. 1950년대 이전에는 명주치마 저고리를 입고, 연지곤지 찍으며 족두리 쓰고 장옷을 입기도 했다. 조천읍 선흘리에서 1941년에 혼인한 신부는 친정할머니의 호상옷(수의)을 빌려 입었다고 한다. 죽어서 입는 한복을 신부의 혼례복으로 사용한 것인데, 그런 예는 살림이 넉넉하지 1950~60년대는 신랑집 마당에서 혼인식을 하고 '펑'하는 기념사진 촬영. 신부의 예복과 못했던 시절에 더러 행해진 듯 하다. 거기에다 족두리 쓰고 고무신을 신었다.
신부는 건지머리(머리를 별도로 땋아 만든 것으로, 머리에 둘러 옆이마에서 마무리 됨)에 파란색 장옷을 입게 된다. 그리고 뿔두정(옛날 아녀자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쓰던 모자 모앙이며 비녀와 같이 머리 뒤에서 쪽을 졌다)을 쓰고 건지로 머리를 두른다. 성산읍 수산리에서는 뿔두정만 쓰고 족두리는 없었다고도 한다.
1942년도에 결혼한 한 할머니의 사례를 예로 살펴보자. 자신의 시할머니는 장옷을 입고 독교나 가마 없이 직접 말을 타서 시집을 갔으며, 시어머니는 되깨를. 본인은 족두리 쓰고 장옷 입어 가마를 탔다. 그러나 자녀는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 써서 자가용으로 예식장에 가서 혼인식을 올렸다고 한다. 4대에 걸친 세대에 따른 차이와 변화상을 알려준다.
신부가 준비하는 혼수 품목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꼴레이불, 빗첩, 요강 정도만 마련하고 이불이나 요조차도 거의 준비하지 않았다.
1950년경 까지도 혼수라고 해야 겨우 이불 한 채 정도였다. 지역에 따라 요강 속에 쌀을 가득 채운 후 성냥 한 개비를 넣었고, 가림실을 준비해 갔다. 성냥은 불씨를 담아 간다는 상징적의미가 있다. 불이 활활 타듯 빨리 큰 부자가 되어 가문을 일으킬 것을 염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은 장수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신혼부부의 살림살이(가재도구) 준비에 있어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신랑 쪽에서 준비하고, 그 밖의 지역은 신부집에서 준비한다고 한다.
제주도는 1950년대 이선에는 신랑집에서 이바지를 준비하고, 신혼부부가 분가할 때는 시어머니가 솥이나 그릇 등을 준비해준다. 이렇게 본다면 신부가 준비하는 혼수는 거의 없다시피 하므로 신랑 측 부담이 많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혼부부의 분가를 위해 시어머니가 준비하는 것은 '솥걸어 주는 정도'에 그쳐 사실상 살림살이를 전부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닌 셈이다. 그보다는 본인들이 분가하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가재도구를 하나씩 마련했다.
신랑 측 이바지가 차즘 사라져 가면서 여성들의 혼수부담이 증가하는 반대현상이 생겨가기 시작한다. 1950년경부터 이바지가 없어지고 신부 측에서 세간살이를 마련하게 되면서 부담이 신부측으로 넘겨지게 되었는데 이는 결혼전 신부들의 경제력과도 상관성이 있어 보인다.
제주 처녀들은 시집가기 전에 물질을 하거나 고사리 꺾어서 팔거나, 김매기 등 품삯 받은 것 또는 육지 방직공장에 가서 노동으로 모아서 번 돈을 집안의 가계에 합치지 않는다. 처녀들의 벌이가 생겨나면서 혼수를 부모들이 마련하기도 하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자신이 벌어놓은 돈으로 직접 준비했던 것이다.
1950년 무렵 이전에는 사실 특별히 혼수라 할 것도 없었고, 1950년대부터 혼수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이불 2개, 요 1개, 빗첩 정도를 마련했지만 차츰 궤, 경대 등을 준비해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이불장, 옷장, 서랍장, 찬장 등의 가구류와 냉장고, TV, 전기밥솥, 다리미 등의 가전제품, 식기류 등등의 살림살이 준비가 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예단 준비는 간단하였다. 시부모에게는 한복 한 벌, 신랑의 형제자매들에게는 내복, 친척들에게는 버선 한 켤레 정도였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신랑집에서 신부의 반지, 예복, 혼인식 때의 화장비용 등의 명목으로 현금을 보내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나면서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시는 물론 농촌지역에서도 500만~1000만원 가량의 현금을 신부의 집으로 보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은 이 금액보다도 더 많은 경우도 있어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신부에 따라서는 시집에서 받은 금액으로 결혼반지 등 예물뿐만 아니라 혼인식에 필요한 준비도 하고, 시집식구들에게 보낼 예단까지 준비한다. 신부의 예단을 받은 시집친척들은 또다시 신부에게 예물을 준비하게 되므로 결국은 신랑집 돈으로 신부의 혼수와 신랑집의 예단까지 마련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신혼부부가 독립하여 살 립 까지 마련해야 하는 신랑집에서는 그로 인한 걱정이 상당히 큰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혼수라고 해야 겨우 이불 한 재 정도였고, 새살림이 시작된 후 본인들의 힘으로 살림을 하나하나 마련하던 시절에 비하면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늘어나면서 본인 스스로 자립하던 시절에서 최근에는 부모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제주가족의 큰 특징이었던 자립정신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잔치 먹으러 간다
제주사람들에게 있어 혼례란 신랑이 사모관대해서 말을 타고 하인들이 '호~옹' 소리를 내면서(신부집에 신랑일행이 도착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소리) 신부의 집으로 가 신부를 가마에 태워 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양가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지금도 혼인을 일컬을 때 잔치라는 용어를 보다 많이 사용한다. 혼인식당에 간다고 하기보다는 오늘날까지도 '잔치 먹으러간다'는 말이 보편화되어 있다.
제주 혼인의례의 과정을 잔치 전후로 나누어 볼 때 '잔치'라는 이름이 붙은 행사는 잔치전날 양가에서 각각 가문잔치, 잔치 당일 양 집안에서의 본 잔치, 잔치 후 양 집안이 서로 번갈아 가며 사돈잔치가 있게 된다. 양가에서 세 번씩 모두 여섯 번의 잔치가 있는 셈이다.
한국 전통혼례의 대례에 상응하는 절차가 생략되어 있으면서도 제주인들의 혼인에 대한 의식의 비중이 큼을 짐작할 수 있다. 의례절차 보다는 친지들과 동네 이웃이 어울려 흥겹게 서로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벌이고 새로 탄생하는 부부를 축하하는 의미가 강하게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혼인 당일 아침에 신랑일행이 신부집으로 가서 예장검열 절차를 거치고 양 집안의 사돈들끼리 사돈열맹을 치르면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온다. 신랑집에서도 똑같이 사돈열맹을 치르고 나면 별다른 의식절차는 따로 없다.
예장은 신랑 부친이 신부 부친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되어있다. 대례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제주에서는 이 편지 전달절차가 상당히 중요한 의식절차로 다루어졌다. 예장은 신부 부친이 보관하며, 이혼하게 되면 살림을 가른다는 의미로 처가에 보관중인 것을 신랑이 찾아가기도 한다.
함은 홍세함이라 하여 신랑집의 대표 우시(상객)가 잔치 당일에 들고 간다. 육지처럼 신랑의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엄정하게 처리된다. 홍세함을 상위에 올려놓고 집례자가 분향, 잡식한 후 함을 개봉하여 예장을 검토한다. 이렇게 예장 접수절차가 끝나야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 성혼선언의 기능과 유사하다.
신랑과 신랑 측 우시들이 상을 받고 식사를 마치면 다음에는 사돈열맹을 치르기 위해 대접받던 방에서 마루로 나온다. 신랑만 참석하고 신부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돈열맹이란 신랑 측 우시들과 신부 측 근친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고 서로 사돈을 맺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일종의 혼인을 통한 연맹관계를 확인하는 행사라 할 수 있다. 마루 중앙에 간소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신랑 측 우시들과 신부의 부모, 조부모를 비롯한 성펜궨당(친가)과 외펜궨당(외가)들이 서로를 소개하며, 간단히 술잔이 오간 다음 하직을 하게 된다.
신부 쪽도 신랑측에서 온 우시와 숫자나 구성을 비슷하게 하여 함께 신랑집으로 간다. 즉 신부의 부친을 포함한 성펜과 외펜에서 남녀 친척 4~5명 정도가 동행한다. 신부가 도착할 때 시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간 얼굴을 보이지 않기도 한다. 신부가 들어올 때 맞대면하면 '숭 벗이진다(정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신부가 상을 받게 되면 밥을 세 숟가락 정도만 먹고 물린다. 남긴 음식은 대반(신랑의 근친 중 나이 든 여자로, 신랑집에 처음 도착한 신부를 방으로 안내하고 동석하여 거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방문앞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 손에 밥 한 숟가락, 계란 한 개씩이라도 나누어준다.
제주는 밭농사 중심이므로 쌀이 귀해 쌀밥을 곤밥(보리밥에 비해 고운 밥이라는 뜻)이라 하였다. 아이들은 이 곤밥을 명절이나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먹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시기였기에 신부상의 쌀밥 한 숟가락이나 달걀 하나를 얻어먹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었다.
신랑집에서도 신부집에서와 똑같이 우시들의 식사가 끝나면 사돈열맹이 이루어진다. 사돈열맹이 끝나고 우시로 온 사돈들이 돌아가고 나면 양가에서 각각 동네사람들이나 친척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잔치가 이루어진다.
신랑집에서는 이날이 잔치의 대단원이 되지만, 신부집에서는 하루 전인 가문잔치날에 손님들이 보다 더 많이 모여들었다. 이는 신부가 시집으로 가기 전날 즉 주인공이 집에 있어야 잔치도 더욱 흥이 날 뿐만 아니라 본인한테 직접 축하해 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한국 전통혼례의 흔적을 부분적으로나마 찾아보기 위해 조사하는 과정에 올리친심이라고 하는 의식을 행한 몇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1943년에 신부집에서 행한 제주시의 한 혼인사례를 보면, 신랑이 도착해 예장을 접수한 후 올리친심을 거행하였다. 그 과정은 신랑이 신부집으로 나무로 깎아서 만든 오리 한 쌍을 가지고 간다.
신부집에서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상을 펴서 술잔 위에 청실 홍실을 걸친다. 나무오리를 올리고 닭1마리, 떡, 대추, 사과, 배 등의 과일과 술잔을 차린다. 신랑은 상의 동쪽에 서고, 신부는 서쪽에 선다. 신부가 네 번 절하고 신랑은 두 번 반 절한다. 신부에게는 부축하는 사람이 있고, 집사가 식을 주관한다.
이와 같이 신부집에서 올리친심을 행한 사례가 1921년부터 1949년 사이에 제주시(6사례), 남원읍 위미리와 구좌읍(각 1사례씩) 등에서 총8건 발견되었다. 신랑집에서 시행한 것은 5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신부집에서 행한 사례가 주목되긴 하나 몇 사례에 불과하여, 한국가족이 조선조 초기까지도 신랑이 신부집으로 장가(杖家)들어 처가에 일정기간 살았던 서류부가혼의 흔적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올리친심의 의식거행 절차도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집사 없이 나무오리와 간단한 상차림에 맞절만 한 경우들도 있다. 대개는 음식, 과일 등이 자려진 상위에 목각으로 된 오리를 올려놓고, 맞절하면서 술잔이 오가는데 비정형화된 형식이다.
기러기 대신 오리를 쓰고 있으나 서로 절하고 술잔이 오고 간다는 점에서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형식이 혼합되어 치러지고 있다. 다소 유복한 집에서 육지의 혼례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 나타난 일부의 현상으로 보인다. 일반인들에게는 육지 전통혼례의 중심인 대례가 거의 나타나지 않으므로 올리친심을 제주의 전통혼례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권세있거나 다소 부유한 집안에서는 '올리친심'을 거행하기도 했으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제주 100년>
많은 일반인들은 고령층일지라도 올리친심이란 용어 자체를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극히 일부의 몇 사례가 올리친심을 거행했다고 하여 마치 제주의 전통혼례인양 한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의 경우 박물관에 전시된 전통혼례의 모습이나, 요즘 전통혼례라 이름하여 육지의 대례를 보여주는 대학 등에서의 학생행사들에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가문잔치와 사돈잔치
제주 혼인의례의 특징 중 하나는 잔치 전날의 가문잔치와 혼인 당일의 본 잔치가 끝난 다음날 양 집안이 번갈아 가면서 사돈끼리 만나 치르는 사돈잔치일 것이다. 혼인 전날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 양가에서 동시에 가문잔치가 각각 열린다. 혼사 당일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친척들이 모여 서로 의논하는 자리이다. 혼인 준비에 걱정과 수고가 많은 친척이나 이웃의 고마움에 대한 사례의 뜻도 있다. 궨당(친척)들끼리 잔치 준비를 끝내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다음날 치를 혼사에 대해 의논한다.
이 때 참석하는 친척들은 성펜궨당은 물론 외펜궨당도 포함된다. 대개 나이 드신 집안의 어른들이 둘러앉아 우시, 대반, 중방 등을 정한다. 우시는 집안을 대표하여 혼인 날 사돈집에 신부를 데리러 갈 때 동행할 사람으로서 상객이라고도 한다. 성펜궨당 중에서 삼촌이나 당숙 등 근친 1명, 외펜궨당 1명(외삼촌이나 외사촌) 정도가 된다. 우시 중에서도 성펜궨당의 대표를 수우시라 하며 신부를 데려오는 행사의 모든 책임을 진다. 집안에 따라 성펜궨당 2~3명, 외펜궨당 1명 정도로 안배하기도 한다.
우시로 선정되는 사람은 학식이 있고 언변이 좋은 사람 중 친척 대표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으로 가려 뽑는다. 남성과 함께 여성도 참여하는데 여성 우시는 신랑 또는 신부의 비교적 젊은 숙모, 고모나 이모 또는 여자형제들이 된다.
집안의 대표로서 사돈집에 참석하는 우시에 남성과 똑같이 여성도 참여하고 있어 비교적 남녀 평등한 일면을 나타낸다. 특히 우시로 외삼촌을 비롯한 이모 등 외가 쪽에서 동행하는 것도 부계친과 외척사이에도 큰 차별 없이 대등한 자격임을 보여준다. 주요 결정권은 남성 또는 성가(친가)쪽 친족들이 가진다. 그러나 외가 친척들도 잔치 준비와 가문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외가집이 같은 마을이나 부근 마을에 거주하며 집안의 큰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어 외척의 비중이 육지보다 우세함을 나타내 준다.

신랑과 우시일행. 신랑의 형수, 고모, 이종사촌형이 참석하고 있어 제주가족의 특성을 한 눈에 살펴보게 한다. (1960년대 제주사)
가문잔치는 친족집단의 기능 강화와 동네 이웃 간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키는데 큰 몫을 차지한다. 돗(돼지)잡는 날이나 가문잔치에 모든 친족원들이 참여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가문잔치에는 뚜렷한 의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잔치를 위해 준비한 음식물 중에서도 새로 맞이하는 사돈이나 손님에게 접대하기에 좀 부실한 것을 내놓기도 한다. 특별한 의식 절차 없이 실질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제주만이 지닌 매우 독특한 과정임이 드러난다.
혼인 당일 본 잔치를 중심으로 잔치전날 집안끼리 모여서 하는 것이 가문잔치라면, 잔치를 치르고 난 후 사돈끼리 하는 사돈잔치가 있다. 잔치 날은 신랑신부를 중심으로 친척 중 대표로 뽑힌 우시들만 양가를 서로 찾아가 사돈열맹을 한다. 신랑이나 신부의 부친은 이때 보통 동행하지만 연령이 지긋할 경우는 불참하기도 한다. 특히 양가의 모친은 참석하는 예가 없기 때문에 잔치 주에 사돈잔치를 통해 사돈끼리 직접 대면하여 인사를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이때도 안사돈은 방문에서 제외되므로 안사돈끼리의 직접 인사기회는 매우 드물다.
잔치 다음날 먼저 신랑 쪽에서 신랑 신부와 신랑의 부친 혹은 신랑의 형제나 근친이 동행해서 돼지고기, 술 등 음식을 가지고 신부집으로 가서 사돈잔치를 한다. 그 다음날은 반대로 신부 부친과 그 근친들이 신랑집을 방문하여 신랑집에서 사돈잔치를 하는 것이다. 이 사돈잔치가 끝나서야 비로소 잔치의례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잔지준비를 하고 손님을 맞이했으며, 잔치전날 연세 드신 친척어른들께 돼지고기 석 점의 '고기반' 한 접시라도 돌리면서 가문잔치라는 용어가 존재했다.
그러나 예식장에서 혼례식을 치르고 식당에서 잔치를 하게 된 최근에는 가문잔치나 사돈잔치라는 용어조차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아직까지도 직접 돼지잡고 집에서 잔치를 하는 농어촌에서는 여전히 동네잔치의 측면이 농후하나 특히 제주시 지역일수록 식당에서 음식대접을 하는 집안이 늘면서 가문잔치는 생략될 수밖에 없다. 사돈잔치도 양가를 번갈아 가며 이틀에 걸쳐하던 절차가 하루로 줄어들고 이제는 더욱 간소화하여 사돈열맹으로 대치하고 마무리 짓는 풍속도가 생겨났다. 따라서 점점 혼인의 성격이 궨당이나 마을잔치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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