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3900 박류민
「조선후기 제주 지역의 재산상속과 봉사(奉祀) 관행」
- 분재기(分財記) 분석을 중심으로 -
저자명 : 문숙자
학술지명 : 사학연구(史學硏究)
권호사항 : Vol. - No.81[2006]
발행처 : 한국사학회
발행년도 : 2006
요약
이 논문은 조선후기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제주 지역의 재산상속 관행과 관련된 가족 시스템을 규명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우선 분재기 자료를 중심으로 18-19세기 제주 지역의 재산상속과 분재기의 관행을 살펴보고 그 특징을 분석하였다. 조선후기 제주 지역의 재산상속의 특징은 가장(家長)에 의한 생전 증여 방식의 보편화이다. 외형상 家長에 의한 상속이므로 가부장권의 강화로 해석할 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家長生時에 이재(異財)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가장권의 약화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어 그 성격이 양면적이다. 제사 봉행에 있어서는 죽은 부모 혹은 선조에 대한 사후봉양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또 윤회 봉사의 관행이 19세기까지 지속되는 등 봉사 방식이 유교적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제주 지역은 재산의 균분상속으로부터 딸에 대한 차등 상속으로까지 진전된 점, 제사 윤행(輪行)의 담당자들이 아들에 국한된 점 등으로 볼 때 유교적 가족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가 장기 지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제가 성행한 점, 사후혼(死後婚)을 통해, 봉사자(奉祀子)를 입양하는 전통 등은 유교적 체제의 강고한 지속을 보여준다. 즉, 유교적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으로 잔존하며 과도하게 유교적 경향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을 지닌 가족의 존재가 제주 지역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모습은 지역, 신분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따라서 한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유교적, 비유교적 운운하거나 특수성만을 강조하면 무리한 추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가족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기초적 공동체이므로 가족의 범주에는 각 사회 개별의 특수성보다는 모든 사회에 통용되는 보편적 서향이 더욱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사회의 보편적 범주 속에서 제주 지역의 가족구조와 생활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Ⅰ. 머리말
제주 지역 가족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먼저 사회학, 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행해졌다. 적극적인 현지 참여관찰을 통해 가족 내부의 생활상에 접근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에 호적중초가 발굴되면서 제주 지역 가족 연구는 호적중초의 잔존 시기인 18-19세기를 중심으로 가족 구조를 해명 할 수 있게 되었다. 호적중초 뿐 만 아니라 제주 지역에서 발굴되는 분재기나 賣買文記類등 이를 통해 제주의 가족구조는 직계가족화의 경향이 약하고 핵가족 혹은 부부가족 중심의 소규모 가족이 대세를 이룬다는 점이 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드러났다. 첫째, 각 분야의 연구 성과가 연구방법론의 차이, 자료의 종류, 시기적 다양성에 의해서 서로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제주 지역 가족 연구에는 육지 지역과의 차별성, 육지와 다른 특수성을 규명하겠다는 의도가 타 지역과 다른 제주 지역의 특징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분재기를 통해 제주 지역의 재산상속 관행과 관련된 가족 시스템을 규명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하되, 이를 제주 지역 가족 전체에 대한 다양한 연구 성과와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조선후기 이래 현대까지의 제주 지역 가족의 실체를 파악하는 시도의 첫걸음으로 삼고자 한다.
Ⅱ. 제주 지역의 分財記와 그 특징
1. 분재기의 유형과 분포
제주 지역은 일찍부터 분재기가 발굴, 정리되고 해제(解題)작업을 통해 공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모두 32건으로 화회문기1건, 허여문기 14권, 별급문기 17권이다. 하회문기가 거의 없고 허여문기와 별급문기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2. 분석대상
이 논문에서는 제주지역서북권의 북제주군 애월읍 장전리의 강태복 소장 자료와, 남제주 지역인 서귀포시 하원동 강성택의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이 두 가계의 분재기를 분석대상으로 한 이유는 6대 140년 이상 지속되는 장기적 추세를 보여주고 제주 지역의 경우 남제주와 북제주간의 생활관습, 의식의 차이가 종종 지적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그 연원이 조선시대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례 연구를 통한 일반화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해서다. 강태복의 분재기를 통해 상속자와 피상속자를 기준으로 파악해보면 재주(財主)로 등장하는 강두환(姜斗煥) → 집(集)→ 위도(渭道) → 대옹(大翁) → 원열(元悅) → 인영(仁永)은 모두 父子관계이다. 이들의 상속대상자에 대한 평균분급이 명기되어 있고, 이미 사전에 별급했던 재산까지 포함하여 이를 다시 평균분급하고 있다. 그 이하는 모두 子, 女에 대해 차등 분급되고 있으나, 분재기 서문(序文)에는 상등분이나 평균분급 여부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들과 딸에 대한 차등분급이 기정사실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산이 많고, 상속 대상자수가 많을 경우 재산의 영세화를 우려하여 출계자에 대한 차등 지급을 명기하였다.
강성복의 분재기 역시 7대 140여년에 걸쳐 부자상속 관행을 행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평균분급을 표방하고 있다. 이 가문 역시 19세기 들어서 아들, 딸에 대하여 차등분급이 시행되었으나, 차등분급의 경우에도 평균분급을 표방하고 있어 분재기 서문에 등장하는 것과 내용상의 불일치를 보이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Ⅲ. 재산상속
1.가부장(家父長)에 의한 생전증여 방식의 보편화
첫째, 상속자 각자의 몫만을 별도로 기록한 분재기를 각금문기(各衿文記) 혹은 금부문기(衿付文記)라 하는데 이에 반대되는 의미로 상속대상자 모두의 몫을 하나의 문서에 기록한 분재기를 뜻하는 도문기(都文記)의 의미이다. 둘째,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이전에 증여한 재산까지 합하여 모든 재산을 나눠준다는 의미, 그리고 그 때 작성한 분재기를 뜻한다. 제주 지역 분재기의 경우 이 두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각금문기보다는 전 재산의 상속 내역을 기재한 도허여문기(都許與文記)로 분재기가 내려오는 것은 어느 지역이나 일반적인 현상이다. 여기에 재산의 허여시(許與時)에 별급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문서명칭을 처음부터 ‘별급도허’라 하여 이미 별급한 재산을 다시 최종적인 상속 대상 재산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즉, 이미 자녀들에게 별급한 재산이 있으나 이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다시 평균분급한다고 밝히고, 상속분을 사별급(巳別給)과 가급(加給)으로 나누어 기재했다. 비슷한 예가 또 있듯이 별급의 의미가 상당부분 상쇄되고 있다.
재산상속 방식은 부모가 재주(財主)로서 직접 재산을 물려주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재산의 피상속인은 상속자의 아버지로 나타나 있다. 이는 제주 지역 분재기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타 지역의 허여문기를 분석해 보면 父, 母가 재주로 등장하는 비율은 母가 父의 1.5배 정도 된다. 그 이유는 허여의 경우 부모 중 한 편이 사망한 이후에 행해지며, 父의 사망 이후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교 사회에서 가부장의 생존시에 재산권을 자식에게 이양하는 일은 드물었으며, 다만 父가 사망하면 母는 남편의 의견을 따른다는 전제하에 부부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상속했다. 반대로 母가 먼저 사망한 경우 父가 생시에 재산을 나눠주는 일은 드물었다. 즉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양반 가문에서는 재산을 비롯한 가계의 경영권이 가부장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사망 후 재산을 비롯한 가부장의 권한들이 자식에게 이양되었다.
그러나 제주 지역의 경우 父가 자식들에게 직접 나눠주는 것이 재산상속의 주된방식이었다. 즉 재산상속 방식에 있어서는 유교적 가족 예제와 달리 부모 생존시의 異財와 父에 의한 재산권 이양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제주 지역 상속 관행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2. 別給慣行과 한계
별급은 정식 재산상속과 달리 수시로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得男이나 과거합격, 관직제수 등을 축하하는 의미로 종자, 종손에 대한 우대의 의미 등 다양한 의미를 담아 노비 1-2구, 전답 1-2마지기 정도의 적은 재산을 지급하는 형태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제주 지역의 별급은 일반적 재상상속의 일부로만 작용하였다.
3. 均分 아닌 均分相續
조선조 양반가의 재산상속 관행의 추이를 살펴보면 균분상속으로부터 딸에 대한 차별이 나타나는 시기는 대체로 17세기이며, 이후 장자 우대상속은 가문에 따라 나타나는 시기에 차이가 있다. 제주의 경우 1734년 분재기에서 子,女間 차등분급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분재기에서는 서문의 내용과 관계없이 자녀의 차등분급이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1734년 이례적으로 차등분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이후 1767년, 1795년에는 평균분급으로 재산이 상속되었다. 그러나 1882년 이후는 평균분급 관행이 사라지고 男,女의 차등분급만이 나타났다. 즉, 18세기에는 아들과 딸에 대한 차등분급이 나타나더라도 관행화하지는 못하였으나, 19세기에는 완전히 정착하였다.
Ⅳ. 제사의 奉行과 掃祭條
1. 소제조(掃祭條)의 설정과 의미
묘소관리를 비롯한 死者에 대한 死後奉養의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봉사조를 특정인의 상속분 밑에 기재하면 이는 종속형이고, 특정인의 상속분과 무관하게 기재한 경우 이를 독립형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봉사조를 종속형으로 기재한 것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즉, 제주에서는 ‘장자를 중심으로 한 가계계승화’로의 이행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가계계승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는 ‘승중’이라는 용어가 전혀 쓰이지 않는 현상과 함께 제주 지역의 제사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2. 奉祀 방식의 非定型性
19세기 제주 지역에서 4대가 함께하는 유교적 봉사의 관행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하지만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제주의 다른 가문에서는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부모에 대한 봉사만 행해졌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도 제주는 윤회봉사가 고착화되어 있었고, 4대 봉사 등 유교적 제사 관행이 완전히 보급되거나 정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상층 신분에서도 부모만 제사하거나 2대봉사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대봉사를 지내는 가문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제주의 봉사 관행은 상당부분 비정형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9세기 혹은 그 이후까지도 윤회봉사의 유습이 강고하게 남아있는 것과 함께 제주 지역 봉사 관행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Ⅴ. 조선후기 제주의 가족
조선후기 제주 지연의 재산상속의 특징은 家長에 의한 생전 증여 방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都許 방식에 의한 재산상속이 일반적이며, 별급조차도 대부분 家長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외형적으로 보면 가부장권의 강화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家長에 의한 상속의 내면적 의미는 家長生時에 理財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家長權의 약화로 볼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財主의 재량권 표출로서 별급이 희소하고, 家長의 권위로 볼 수 있는 분재기서문의 구속력이 약하다는 점은 가부장권이 결코 강한 것이 아님을 뒷받침한다.
제사 봉행에 있어서도 봉사조를 장남 혹은 다른 자녀의 상속분에 종속시키지 않고 19세기까지 독립적으로 관리한 데에서 윤회봉사의 관행이 19세기까지 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일부 가문에서는 4대봉사가 나타나지만, 또 다른 가문은 부모만 봉사하는 관행이 지속되는 등 봉사 방식에 있어서 유교적 정형성보다는 가문바다 서로 다른 방식이 눈에 띈다.
이와 같이 재산상속과 제사를 통해 본 조선후기 제주의 가족은 육지 양반가문과 비교해 볼 때 비유교적 전통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그러나 재산의 균분상속으로부터 딸에 대한 차등상속 으로까지 진전된 점, 제사 윤행(輪行)의 담당자들이 아들에 국한 된 점 등으로 볼 때 유교적 가족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가 장기 지속 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일면은 유교적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으로 잔존하고, 일면은 과도하게 유교적 경향으로 흘렀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양면성을 지닌 가족의 존재는 제주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재산상속과 제사 봉행 문제로 범위를 축소하여 제주와 육지지역을 비교하자면 17-19세기에 걸치는 조선후기 양반 가족의 모습과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제주의 가족을 해석할 때 유교문화의 전파 여부만으로 설명하거나 지리적 특수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가족의 변화 양상이 너무 다양하므로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주 지역 역시 제주만의 특수성이라고 바라보기 보다는 한국의 조선후기 사회의 보편적 범주 속에서 제주 지역의 가족구조와 생활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제주지역 논문 요약.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