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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이 서화첩의 편찬자는 김봉흠이 「경제학암종숙세전서화첩후」에서 자신의 종숙인 23세손 김중휴(金重休, 1797~1863)라고 밝히고 있다.1) 김간의 현손이며 김경조의 후손인 김중휴는 1837년(헌종 3) 소과에 입격하였지만 대과에 나가지 않고 제릉(齊陵) 참봉을 지냈다. 김중휴는 《풍산김씨세전서화첩》 외에도 선대 인물에 대한 사적과 유고를 모아 16권의 『석릉세고(石陵世稿)』를 편찬하였고, 출가하는 딸에게 주기 위해 1848년 순한글로 된 가첩(家牒)을 필사하는 등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2)
김중휴는 주인공 및 관련된 인물들의 문집·행장·연보뿐만 아니라 집안에 전승된 문적 등을 폭넓게 섭렵하고 각 그림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비록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한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를 각 그림 뒤에 필사하였다. 이 기록들은 1864년에 후서를 쓴 이재영이 말한 대로 ‘화외지화(畵外之畵)’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3) 이 내용 중에는 애초에 원본이 그려졌던 경우 그 제작 경위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는데 32점의 그림 중에 19점은 기록화나 기념화로서의 원본이 존재하였던 경우이다(표 3 참조).
순서 | 그림 제목 | 주인공 | 고사(故事)의 일시/장소 | 그림의 제재 | 원본(原本) 관련사항 | 그림과 관련된 화첩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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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대지도박도(大枝賭博圖)4) |
김휘손(金徽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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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년/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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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山圖)+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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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인(朴姓人)이 준 '산도(山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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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한 집안 내력 · 오미동(五美洞)의 지명 유래 |
2 |
동도문희연도(東都聞喜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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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金楊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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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 3월 문희연(聞喜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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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연(聞喜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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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연을 열게 된 배경과 참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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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완영민읍수도(完營民泣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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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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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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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湖南)의 사대부(士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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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 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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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해영연노도(海營燕老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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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년/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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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연(養老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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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영중(海營中)의 관감자(觀感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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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관찰사 재직시 양로연 베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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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잠암도(潛庵圖)6) |
김의정(金義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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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가을 이후/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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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도(幽居圖)+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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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애지인(相愛之人)’이 암자를 그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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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사화 이후 개호(改號)하고 은거하게 된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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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고원연회도(高原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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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농(金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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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 봄/함경도 고원(高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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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축하 친목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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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遊宴)의 모습을 그려 기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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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농이 관직에 나가게 된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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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반구정범주도(伴鷗亭泛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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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3월 26일/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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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내의 지구(知舊), 수재동기(守宰同期)들과의 선유(船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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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원이 화공(畵工)에게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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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원의 반구정에서 선유하게 된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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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낙고의회도(洛皐誼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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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년 3월/낙고연사(洛皐淵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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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진(生進) 동년 자제들의 세회(世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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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봉섭제격고세경진세회록(焉逢攝提格姑洗庚辰世會錄)』 「좌목(座目)」 및 이 모임 결성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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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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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金大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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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 2월/모화관(慕華館) 및 홍제원(弘濟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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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 형군문(刑軍門) 친림(親臨) 상마연(上馬宴, 전위연(餞慰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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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개의 주문으로 제작된 김수운(金守雲)의 ‘전별도(餞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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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9년 2월 훈련원에서 개최된 개선연(凱旋宴) 정경과 형개의 생사(生祠) 건립 경위 형개를 기리는 예조판서 심희수(沈喜壽)의 「동주문(銅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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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칠송정동회도(七松亭同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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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0월 19일/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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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회(同道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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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송정동도회제명록(七松亭同道會題名錄)」(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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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환아정양노회도(換鵝亭養老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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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봄/산음(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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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연(養老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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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음현 공화자(工畵者) 오삼도(吳三濤)의 ‘연로도(宴老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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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로연 설행 배경과 당시 양로연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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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조천전별도(朝天餞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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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金壽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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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5월 17일/의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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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사행(千秋使行) 전별(餞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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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부경(赴京)한 사실, 우수한 재능과 학문을 겸비한 자로서 엄정하게 선발되었음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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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그림 제목 | 주인공 | 고사(故事)의 일시/장소 | 그림의 제재 | 원본(原本) 관련사항 | 그림과 관련된 화첩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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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범주적벽도(泛舟赤壁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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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조(金奉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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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7월 16일/강성(江城, 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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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를 올린 동지들과의 선유(船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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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泛舟)한 모습을 화수(畵手)에게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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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봉조의 상소문(일소(一疏), 이소(二疏))과 비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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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단성연회도(丹城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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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3월 13일/산음(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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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연(養老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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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도(吳三濤)가 자청하여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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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성 부임과 양로연 설행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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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가도도(椵島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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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金榮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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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2월 3일/압록강 하구 가도(椵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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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가 명나라 도독(都督)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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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 일행 중 ‘공화자(工畵者)’(즉, 수행화원(隨行畵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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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3.12.17 서울 출발부터 1624.2.21 환도(還都)까지 대강의 왕복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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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항해조천전별도(航海朝天餞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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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 7월/선사포(旋槎浦,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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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使行) 전별(餞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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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송별록(朝天送別錄)」: 관료 및 친지 25명의 전별 증행시(贈行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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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제좌명적도(帝座冥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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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조(金昌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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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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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故事): 김창조의 인품을 예시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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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조의 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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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촉석루연회도(矗石樓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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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조(金慶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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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8월/진주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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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사 주관한 도내(道內) 사우(士友)들의 연회도(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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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畵師)에게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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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회 설행의 배경과 참석자 15명의 좌목(座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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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심천초려도(深川艸廬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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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이후/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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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도(幽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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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 민응협(閔應協, 1597~1663)의 김경조에 대한 인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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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회곡정사도(檜谷精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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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 이후/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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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도(精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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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성학도(聖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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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조(金延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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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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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내려준 여덟 글자 (도식(圖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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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헌(吳翼軒)이 작첩(作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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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이 내려준 여덟글자‘성학도(聖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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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학사정선회도(鶴沙亭仙會圖)11) |
김응조(金應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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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10월 상순/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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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도(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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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첩(作帖)하여 ‘학사선회록(鶴沙仙會錄)’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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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조의 「학사정사기(鶴沙精舍記)」부분: 학사정의 경관 묘사 |
순서 | 그림 제목 | 주인공 | 고사(故事)의 일시/장소 | 그림의 제재 | 원본(原本) 관련사항 | 그림과 관련된 화첩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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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과천창의도(果川倡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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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염조(金念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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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12월16일/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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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의 창의(倡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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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읍중대소민인문(檄邑中大小民人文)」(1636. 12. 16) |
24 |
분매도(盆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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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숭조(金崇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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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未詳)/김숭조의 집(안동 오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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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매(賞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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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매도(盆梅圖)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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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에 대한 인조의 사동명(賜洞名), 추증(追贈), 사제(賜祭) 등의 내용 |
25 |
명옥대도(鳴玉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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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金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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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년 6월 10일 이후/안동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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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도(精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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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용재(一慵齋)라 자호하게 된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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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감로사연회도(甘露寺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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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간(金 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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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9월 3일/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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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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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畵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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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로사연회 설행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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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죽암정칠노회도(竹巖亭七老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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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 봄/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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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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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로회(七老會)의 구성원과 설행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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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무신창의도(戊申倡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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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 3월 26~27/안동 향교 (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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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때의 창의(倡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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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府吏) 중의 공화자(工畵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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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간이 이인좌의 난에 창의하게 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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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치자래도(雉自來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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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운(金瑞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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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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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故事): 김서운의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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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朴文秀)가 보낸 ‘치자래도(雉子來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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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래도>(원작)의 제작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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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창송재도(蒼松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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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한(金瑞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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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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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도(幽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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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향하여 학고서당(學皐書堂)을 경영하던 일과 철거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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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한진읍전도(漢津泣餞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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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원(金有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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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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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故事): 김유원의 곧은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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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노유(八十老儒)가 감사표시로 준 ‘상별도(相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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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6년 및 1729년 복시에서 낙방하게 된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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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휴는 집안에 가장(家藏)된 상자들을 뒤져서 기록들을 찾아냈고 빠진 것이 있으면 문중이나 친지의 집안 등으로부터 널리 구하여 이를 이모하여 새로 만들었으며 그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자취를 추적하여 묘사하였다고 한다.15) 현재로서는 이 서화첩의 명확한 제작 시기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렵다. 문중에는 『석릉세고』와 함께 185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구전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다. 편찬자 김중휴가 사망한 1863년 2월 8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 사종제(四從弟) 김중범(18세손 김간의 아들 김서한의 고손자)이 발문을 썼고, 이재영의 후서가 이듬해 봄에 쓰였으며, 김중휴가 생전에 세전서화첩과 세고를 널리 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한 김봉흠의 글로 미루어 볼 때 이 서화첩은 김중휴가 죽기 얼마 전인 1860년대 초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김봉흠은 서화첩 속의 조상들을 명현(名賢) 혹은 경상(卿相)이거나 청백, 순량(循良), 문장, 도덕, 충절, 효의 등 귀감이 되는 행적을 남긴 문중의 인물들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편찬자 김중휴는 명예나 공적에 의해 인물을 선별한 것이 아니라 오미동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자신의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인물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표 1 참조). 김대현의 여덟 아들들은 각각 분파하여 번성한 일문을 이루었는데 넷째 아들 심곡 김경조는 심곡공파(深谷公派)의 파조이며 김간의 증조부임과 동시에 김중휴의 직계 조상이다.
즉, 김중휴는 자신의 집안 심곡공파가 풍산김씨를 빛낸 팔련오계의 후손이며 오미동의 터전을 일군 허백당의 문중임을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방계 조상인 김수현은 팔련오계의 한 사람인 김염조의 계부(繼父)라는 이유로 세전서화첩에 포함시켰던 것 같다. 다른 그림에 비해 서화첩에 수록된 김수현에 관한 기록이 지나치게 소략한 점도 김수현이 김중휴의 방계 조상으로서 본격적인 사적 수집의 범위 밖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김중휴는 심곡공파가 집성촌을 이룬 안동 오미동에 살았기 때문에 안동, 영주, 예천, 봉화 등지에 흩어져 있는 조상들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매우 용이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림의 지리적 배경은 안동을 위시하여 경주·산음·밀양·진주 등의 경상도가 가장 많으며 나머지는 서울·해주·고원·과천·전주 등지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 것이다(표 3 참조).
김중휴는 이와 같이 인물의 수록 범위를 먼저 정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나서 그들과 관련된 기록을 수집·정리하는 한편 그들의 행적을 보여줄 수 있는 화적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하였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애초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거나 범본이 될만한 그림이 남아 있던 사적이 우선적으로 채택되었던 것 같다(표 3 ‘원본(原本) 관련사항’ 참조). 따라서 그림의 내용만으로 보면 그 인물의 일생을 조망하는 데에 어떤 일관된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한 인물 당 수록된 그림의 수도 일정치 않다. 그런데 이 세전서화첩의 기록 중에는 편찬 당시 원본이나 범본(후대의 이모본 혹은 개모본)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현재 이 세전서화첩에 실린 그림이 범본에 의한 이모작인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개작인지, 혹은 아예 처음 창작된 것인지에 관한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