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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評]
그림자 털어내기
-박문구의 『강릉, 겨울 그림자』
김 익 하
글머리에 놓는 글
술집 낭인浪人 소설가 박문구의 자전적 장편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를 단숨에 읽었다. 페이지 터너page turner 못잖게 가독성이 있었다. 한도 끝도 없이 술집을 순례하며 혼술도 마다치 않고 마셔댄 막걸리의 숙성과정처럼 작가 박문구의 가슴 저 밑바닥에 침전되어 들썩이던 20대의 열정, 방황, 좌절, 절망, 연민과 죄책이 버물어진 그림자가 농익었다가 60대에 가위 잠에 눌린 듯 토해진 감각적이고 조밀한 문장 숲에서 나도 덩달아 습기를 많이 빨아들인 버섯갓처럼 마지막 장에서 무거워진 눈을 들어 올렸다.
내 눈앞에 주인공 남궁연의 발길이 스치는 강릉 안경아줌마집 문턱과 내곡동 하숙방의 누추한 냉기를 머금은 남루한 이불, 캠퍼스 주변의 낙엽이 누기를 머금고 쌓인 숲, 대관령에서 몸을 가눌 수 없도록 몰아닥치는 겨울바람, 또 장설 지는 황장목 숲에서 허리를 꺾는 설해목. 그리고 건빵 조각들을 꽝꽝 언 찬물에다 불려 먹으면서 하루하루 궁박하게 살지만 ‘개똥철학’(p48)으로 입에 거품을 무는 술꾼 대학생 남궁현과 '설악초처럼 청아'(p166)했는데 린치를 당한 수모를 견디지 못해 봉오리도 열지 못한 채 목숨을 던진 은수우 모습들이 꽉 차게 밀려들어 한참 먼 산을 바라봤다.
불길 같은 정념에 살다가 타자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박한서의 못 이룬 꿈도 그 문턱을 넘어 산목숨을 부지한 사람에게는 불편하기만 하다. 마음속의 깊은 그림자. 철 지나서 낡은 필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인영人影’(p226)과 맞닥뜨린 느낌이다. 그러나 거미줄이 끼고 수질마저 오염되었지만 누구나 함부로 침을 뱉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자기가 마시던 우물이다.
작가의 궁핍한 젊은 날의 자화상인 이 소설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죠?’ 그런 물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변동 격동기에 보수 분위기가 강한 강릉에서 또래로 서울 유학 간 운동권 고교 동창생들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며 인사이드가 아니라 아웃사이드에 서서 좌절하고 죽음의 부채로 절망했던 오늘날 작가 박문구의 마음속 그림자를 털어내기 작업은 완벽하게 이루어져 아픔이 치유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해원解寃굿 풀이는 일단 성공한 것 같다.
소설 행간을 따라가며
227쪽 결코 긴 장편이라 할 수 없는 이 소설의 얼개는 스토리텔링 전개 방식이 아니라 과거 회상을 서술하는 플롯 전개 방식인데 복합 구조다. 외형 형식상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의 시간’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늦은 오후에서 자정까지. 배경으로 배치된 겨울과 밤, 비바람은 이 작품 분위기의 명도明度를 함축하는 매체다. 소설에서 날씨는 지형과 같이 시간과 장소에 못잖게 배경의 디테일로 작동하는 바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장소는 삼척시 척주로 59번지. ‘주머니 사정과 맞아떨어지는’(p10) ‘스물다섯 명이 앉을 수 있는’(p9) ‘김씨네막걸리집’이다. ‘얼마 후면 육십을 버릴 나이’(p10)인 남궁현(이하 현)과 ‘이십 말엽이나 서른 초반인 듯, 몸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듯했지만 검고 낡은 겨울용 상의(생략)…군용 야전잠바를 검게 염색한 옷, 요즘은 보기 드문 옷이지만 몇 십 년 전에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즐겨 입던 방한복’(p13) 차림의 청년 사이에 오가는 대화로 과거 회상 독백체이면서도 3인칭 서술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문地文은 논쟁적이지만 곧잘 좌우 균형을 잃은 두 사람의 감정 쟁의에서 상황 묘사로 양념처럼 쓰일 뿐 본디 이야기의 줄기는 어미가 존칭어로 서술된 대화체다. 물론 이 소설에 응용한 시점視點viewpoint은 뒤미처 다른 장 <작가는 신인가?>에서 상세히 분석해 언급하겠지만, 화자話者로 시점인물을 굳이 등장시킨 까닭은 3인층 관점의 객관화와 리얼리티 확보를 위한 소설 플롯의 하나 장치다. 곧 청년은 현의 젊을 때의 화신化身manifestation인 아바타avatar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대 현과 60대 현이 거울 속에서 마주친 형국에서 청년은 비웃음을 던지며 힐난하고 뒤이은 논리적인 공박攻駁에, 현은 반발하고 변명하다 설득력을 잃으면 분을 참지 못해 욱하면서 욕지기를 내지르는 정황이 소설 끝까지 이어지며 갈등 요소로 작동한다. 그러다 종국에는 폭언과 폭력으로 맞대응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가 소설 시간대는 물론 서술 방식조차 다르게 전개되는 복층 구조다. 강릉을 무대로 한 과거와 김씨네막걸리집에서 입씨름하는 현재가 단원으로 배열 위치만 조금 다를 뿐 마지막까지 병행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앞뒤에 소설의 도입부 및 유년기를 서술한 프롤로그와 현의 몸에서 빠져나간 청년이 다시 현과 갈등하는 과정, 어질러진 이야기를 마무리한 에필로그를 제외한 일곱 장章 묶음을 과거 회상고백체로 써진 하이브리드hybrid 소설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소설『강릉, 겨울 그림자』의 스토리 대략은 이렇다.
현의 본적지는 삼척 원덕읍 호산 골짜기인 옥원리다. 3남 1여 가운데 둘째며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술만 마시며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아버지가 ‘아무 앞에서나 담배 연기를 뿜어대거나 술자리에 끼어드는 새엄마’(p22)를 맞아들임으로써 결국 생모와 이별하는 가정환경과 맞닥뜨린다. 더욱이 생활환경 탓으로 현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열두 번을’(p16) 전학하는 불안정한 소년기를 거친다. 중학생 때 처음 막걸리와 조우하고, 강릉 소재 공립 인문고에 합격함으로써 청소년기에 운명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음주와 숙명적으로 청년기를 보내는 무대인 강릉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는다. 성인이 되었어도 ‘모든 잡비의 삼분의 이는 술값’(p19)일 만큼 강릉과 술은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의 배경과 소재로 밀접한 토양을 이뤄 소설의 플롯에 벽돌 노릇을 단단히 한다. 동거하던 둘째 동생이 진학 관계로 누나가 있는 서울로 떠나가게 되자, 친모마저 상경한 강릉에 현은 홀로 그곳에 남게 된다. 이때부터 스며든 외로움은 보수 색채가 강한 타향 강릉 사회에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이중고와 20대에 감당해 내야 할 방황과 좌절이 현에게 음주 습관을 부추겨 결국 술은 격정을 토출吐出하는 촉진제 구실을 한다.
홀로 남은 현은 서울의 유수한 대학으로 갈 만큼 좋은 성적을 받고도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해 1차 기초 신체검사와 학과시험에 합격했으나 정밀 신체검사에서 폐결핵으로 불합격 처리되자 당황하고 좌절한다. 꿈이 꺾긴 현은 연이어 서울 명문 사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으로 다시 한번 낙담했으나 곧장 마음을 다잡아 현실을 받아들일 결심한다. ‘강릉에서 살자. 비록 어둡고 침침한 시간이 구석구석 살아 있는 곳이지만 낯선 곳보다 익숙한 곳에서 젊음을 정하자.’(p57) 소설 속의 강릉은 이때부터 현에게 ‘어둡고 침침한 시간이 구석구석 살아 있는 곳’(p58)으로 처음으로 서울과 대비 부정적인 인식이 박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며 산업사회로 이전하는 물결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는 서울로 유학을 떠난 또래들에게 지역 격차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느낀다. 그러나 나름 불굴의 의지로 강릉에 뿌리를 내리고자 맘 굳힌다. 현은 끝내 친모와 가족이 있는 서울 상경을 포기하고 강릉 생활을 택한다. 이때부터 보수 색채가 강한 강릉은 청년기를 보내는 현에게 일생 잊지 못할 애증 도시로 얽힌다.
강릉 소재 미션계 사립대학 국문과에 등록하고 석 달 뒤 자취생활하는데, 이때부터 궁핍한 생활에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는 이중고에 시달리면서도 학우들과 어울려 술집 순례에 나서는데, 모임 장소는 바로 ‘안경아줌마집’이다. ‘남녀 학생들이 단골로 드나들며 그들만의 개똥철학을 낯 붉히며 설파’(p74)하는 무리의 일원으로 편입한다. 인용문이 조금 길지만 아래 문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들의 모임 분위기와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개똥철학에서는 일가를 이룬 녀석들이었죠. 서울 명문 대학 입시에서 최소 두 번 이상씩은 미끄럼 타다가 자의반 타의 반으로 지방대에 흡수된 비주류의 괴짜들이었어요. 그에게 이 친구들은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고픈 술도 술이지만 이들과 어울려 될 소리 안 될 소리 떠들거나 논제 하나를 놓고 밤새도록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토론 속에 말려들면 그래도 핏줄이 돌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동급생들, 고딩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잡것들’의 설익은 논리와 말끝마다 지성이 어쩌고 떠드는 꼴에 배알이 꼴릴 대로 꼴린 판이라 아예 그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지내는 음지의 패거리였어요. 술자리에 불려 나온 논제는 끝이 없었습니다. 세상 모든 어젠다가 다 동원되었지만 특히 사랑과 문학, 철학은 단골 메뉴로 항상 끝을 장식했습니다. 단 정치적 발언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죽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촉수가 세상 구석구석에 핏줄처럼 스며든 당시의 사회에서 큰소리로 떠들면 당장 내일부터 얼굴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p83)
때는 70년대. 서울에서 민주화 운동이 지상파 전파를 타면서 현은 가슴이 끓어오르는 울분을 느끼며 다시 강릉 사회에다 부정적인 시선을 던진다. ‘보도블록을 깨서 집어던지는 학생들과 해산시키려는 경찰, 해골처럼 생긴 흰 투구와 방패, 스크럼을 짜고 전진하는 학생들, 최루탄 연기와 도망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메웠습니다. ⓐ그러나 강릉은 평온했습니다.'(p64) 마지막 문장 밑줄 그은 부분은 직설적이 아니라 거북 등껍질처럼 완고한 보수적인 강릉 사회에 던지는 허탈한 냉소다.
한편 현의 생활은 등록금을 걱정하고 ‘곡기를 가까이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친구들이 항상 죽치고 있는 안경아줌마집에서 밥 대신 술과 닭내장탕 국물로 속을’(p77) 채울 만큼 내곡동에서 극빈의 궁핍 생활을 한다. 그해 가을 계엄과 유신이 선포되자 현은 다시 ‘조용한 강릉 사회’에 불만과 부정적인 시선을 던진다. ⓑ‘강릉이란 곳은 태백산맥 동쪽에 치우쳐 예로부터 인구 이동이 별로 없었고 태생적으로 한 곳 풀뿌리만 먹고 자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라서 지극히 보수적인 곳이었습니다. 그가 적을 두고 있는 작은 대학도 말만 대학이지 그저 학과 동아리가 모여 ⓒ병아리처럼 사육사가 주는 모이와 물을 쪼아 먹는 그룹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개인의 민주적 기본 권리와 체제 수호와의 상호 반동세력이 충돌하는 저쪽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p68) 이때부터 강릉뿐 아니라 말로 대학뿐인 제 모교에도 냉소적인 자세로 대응한다. 그러면서 서울로 유학한 또래들이 하향해서 현 시국에 대응하는 시사용어를 들을 때마다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의 처지와 비교한다. 그 바탕에는 시위에 앞장서는 서울 소재 명문 대학에 대비, 지방 대학생의 상대적인 콤플렉스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릉 매서운 추위에 떨며 ‘라면 두우 개와 거언빵 한 봉지…’(p87)라고 외치는 소리가 최대 포만의 기쁨을 느낄 만큼 궁핍함을 겪으면서도 또 다르게 ⓔ부정한 시선을 보낸 강릉 사회에다 다시 자신의 처지를 기탁하는 이중적 선택을 한다. 마치 우리 안에 갇혀 있으면서 탈출하려고 짬만 나면 제 몸을 철망에 내부딪치며 자학自虐하는 야생동물처럼.
이런 상황에서 세 개의 사건이 발생하며 작품에 박진감을 증폭시킨다. 하나의 사건은 <두 번째 이야기>에 배치된 학보사에서 주체한 문예작품 공모에서 최종심에서 낙방한 일이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문학청년들이 한 번씩은 겪는 좌절과 재생 의지를 현도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성큼 그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비록 떨어졌지만 이 작업은 훗날 그에게 많은 의미로 남을 수 있을 일로 매김’(p70)으로 정리한다. 이 사건 때문에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동기부여로 심중을 굳히고 웃풍이 심한 냉방에서 16절지로 습작에 매달리는, 의기가 창창한 ‘문청文靑’의 길로 들어선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 밤늦도록 낙방 ‘섭섭주’(p70)를 마신 현은 집에서 잠자다 깨여난 오밤중에 ‘수십 길의 소나무가 빽빽이'(p70) 자란 학교 인근 야산 숲속을 헤매다가 지쳐 잠이 든다. 잠결이 아니라 거의 남은 취기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새벽녘 산책길에 나선 학장이 사육하는 사나운 개에게 먼저 발각되어 무서운 대접을 받고, 뒤미처 나타난 학장에게 혹독한 훈시를 듣는다. 이 장면의 묘사는 철없는 술꾼 소설가 지망 문학청년에겐 매우 낭만적인 정경인데, 철없는 방종放縱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감각적인 서술에 힘입어 상징적이면서도 슬프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자신이 누웠던 자리가 마치 한 자나 내린 눈 속에서 하늘을 보고 누웠다가 곱게 일어선 그런 형태로 자신의 자취가 세밀하게 남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텁게 쌓인 낙엽 속에서 머리와 목 선, 두 팔과 허리와 다리의 흔적이 그렇게도 세밀한 형태로 눌려 있는 모양,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나가떨어진 몸 위로 밤새도록 낙엽이 계속 쌓였고 체온에 녹은 낙엽은 몸의 굴곡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였습니다. 11월 중순의 추위가 몸 위에 쌓인 낙엽 때문에 상쇄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한참이나 밤의 자취를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교정의 하룻밤 흔적, 잠자리에 묻힌 자취지만 거의 일 년을 퍼부은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습니다.(p73)
이 장면에서 술은 입으로 마시고 소설 습작은 말로만 하며, 선배 문인의 주사酒肆부터 먼저 배워 안하무인격으로 시건방 떨다가 뒤통수를 맞은 문장이 생각났다.『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s의 충고다. 납작 동의했기에 여기에 옮겨 놓는다.
“나는 글쓰기를 일종의 자기희생으로 보거나, 경제적, 정서적, 신체적으로 피폐할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반대한다. 작가는 감정적, 신체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다섯 번째 이야기>에 배치된 야음을 틈타 학교 간판을 도로 아래 하수구에다 처박는 사건이다. ‘대학 표지판! (중략) 글씨가 아기 주먹처럼 작게 붙었지만 오랜 비바람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누런 녹이 흘러내렸다. 학사주점 앞 지하 하수도를 덮은 길에서 교문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 소나무 숲에 그냥 처박히듯 세워져서 오가는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더욱 낡아가는 학교 알림 표지판이었다.’(p158) 정황과 위치의 묘사만 있을 뿐 재물손괴 의도를 해명할 아무런 서술이 없다. 그에 앞서 친구 두 명과 술 마시다가 ‘학교에 대한 불만과 경제적 궁핍, 젊음을 던질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보푸라기 하나 잡을 수 없는 불만과 슬픔과 비애가 현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대로 탁자에 엎드려 크게 울음을 놓아버렸다.’(p157) 그런 심사를 복선처럼 깔아놓았을 뿐 선행 행위 제시마저 없다. 다만 ‘그걸 볼 때마다 마음에 검붉은 녹물이 흘러내렸다. 언제나 저걸…….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엇이 있었다.’(p158)로 만 간략히 암시해 놓았을 뿐이다. 언뜻 행위 크기에 비하여 동기부여가 미흡해 보인다. 그런데 그 미흡함을 총학생회 부회장 정준교와 후배들의 다음과 같은 반응에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오늘의 의거’, ‘쾌거는 쾌거’(p160), ‘선배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지금 당장 없애러 나가겠습니다.’(p161)로 삼자 반응으로 객관화한다. 소속 학교 학생으로서 학교 재물 손괴 행위가 객관적으로 지극히 마땅한 일(?)로 공인되는 순간이다. 그 일을 두고 훗날 화자인 청년이 현 앞에서 웃으며 말하자 이에 응하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
“…진한 에피소드지만 선생님의 한 부분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후훗.”
“누군가 꽤나 지사적인 사고를 가진 녀석이군.”(p161)
본인과 다를 바 없는 주인공이 제 과오를 ‘지사적인 사고’라 객관화한다. 위의 사건과 아래의 짤막한 대화에서 작가는 주인공 현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과오를 저지른 내 안의 위선자, 그에 합당한 인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점점 강릉 보수적인 사회와 침체된 캠퍼스 문화에 냉소를 던지고 정치 사회에 불만과 저항의식을 입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술 취해 감정에 치받치면 오기로 거친 행동도 불사할 성향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세상 것을 누린 자에 대한 못 누린 자의 치기 어린 항거일 테다.
현은 서울로 유학 간 또래 학생들과 어울리지만 그때마다 소외감과 갈등을 느낀다. 이는 서울 명문대 대신 가정 형편으로 공군사관학교로 진학하려다가 폐결핵으로 좌절을 겪고 난 다음 작은 지방대에 다니는 열등감에서 오는 반발 행위인데 현은. 이를 인정하면서 변명한다.
…넷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지나간 이 년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서울과 강릉의 생활의 두 그래프가 서로 만나는 접점은 너무 엇갈렸다. 고교 졸업 후 생활근거지가 다르던 서로의 그래프는 당연히 어긋나게 될 일. 만나는 부분이 있을 수 없었다.(p143)
<네 번째 이야기>에서 박한서 등장으로 이 작품은 플롯의 전환점plot point을 맞는다. 플롯 용어로 ‘비일상적 사건inciting incident’, 또는 소위 ‘문지방 넘어서기’ 인 변곡점이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의 플롯과 구조를 집필한 제임스 스콧 벨 James Scott Bell은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구성론構成論을 인용해 3막 구조론을 피력했는데, 플롯의 전환점을 1,2,3막 가운데 1/5이나 3/4 지점에다 둘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 이론에 대입하면 『강릉, 겨울 그림자』의 문지방 넘어서기는 227쪽 중 118쪽에서 이루어지니 딱히 계산하자면 1/2지점인 셈이다. 이런 분석적 검토는 전반에다 주요 ‘동기 유발력incentive skills'의 전진기지를 일찍 설정하면 서술의 흐름에서 텐션 유지와 클라이맥스를 향하는 점층법漸層法에 상당한 부담을 안는다는 의미를 언급하고자 함이다.
이 박한서(이하 한서)의 등장은 소설의 파국적인 갈등 요소로 현과 수우의 삶이 왜곡되어 질곡桎梏에 빠지는 전조로 작동한다. 간성 출신인 한서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 강릉에 와 고등학교 동창인 현의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된다. 현이 부러워하는 서울로 진출한 대학생 가운데 똑똑한 또래 가운데 한 명이다. 건빵과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현이 식당에서 한서가 사는 백반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의 일부다.
“만날 라면만 먹다가 그래도 백반을 먹는 반열까지 올랐으니 신분 상승이 확실하지?”
“야, 기층 민중들의 라면 사랑을 그렇게 밑으로 깔고 보지 마. 라면도 때로는 과분할 때가 있으니까.”
“기층 민중? 그 말이 왜 여기서 튀어나와?”
“잘 알 텐데 그래. 쉽게 말하자. 우리나라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도 힘없고 돈 없는 기층민에겐 때로는 라면도 과하지. 라면 한 개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수두룩해.”
낮게 말하면서 승연이(한서)는 좌우로 눈을 돌렸다. 그는 승연의 입에서, 평소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잘 쓰지 않은 어휘가 튀어나오자 잠시 의아스러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 승연이는 밥을 먹는 척했다. 그는 ⓕ서울서 온 녀석들의 언어 쓰임이 이곳 강릉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대화에서 동원되는 어휘와 다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구름 한 점 휙 지남을 느꼈다.(p125.p126)
강릉에 잠시 머물고자 왔다는 한서는 가명을 승연이라 쓴다면서 숙소를 같이 쓰자고 접근하자 현은 찝찝하지만 마지못해 생활비 반부담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밤낮 시간이 어긋나 깊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채 보름이나 같이 지낸다. 그러다 주문진 출신 서울 유학생 조원길과 조우하면서 서울에서 운동권으로 활동한 한서의 행적을 비로소 전해 듣는다.
원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서울대 운동권 선두주자지. 작년 초겨울에 거 왜 페퍼포그라고, 가스차 말이야. 장갑차처럼 생긴 괴물 앞에 최루탄을 지랄처럼 쏘아대는, 텔레비에서 봤을 거야. 그 위에 올라가서 화염병을 최루가스 나오는 주둥이에 던져 불을 질렀는데 그 사건 후 한서는 레전드가 됐어. 일급 지명수배자, 그리곤 사라졌지. 경찰이 쥐 잡듯 뒤졌지만 못 찾았다는데 네가 강릉에서 봤다니 묘하네.”
(중략)
그(현)의 머릿속은 필름처럼 돌아갔다.(p145)
한서의 정체를 파악한 현은 평소 소신과 달리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한창 배신과 허탈감이 팽배할 때 십여 일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한서가 불쑥 나타나 자기의 결심만 밝힌 뒤 두세 달 방세에 맞먹는 돈을 건네곤 떠남을 알린다.
“국민 생존권을 위협하는 참혹한 현실을 좌시하고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버리고 살라고? 그럴 순 없지. 이젠 무언의 저항을 넘어선 행동이 필요할 때야. 비겁하게 불의의 권력에 목숨을 구걸하는 패배주의 투쟁주의 무사안일주의와 모든 굴종의 자기 기만을 과감하게 걷어치우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행동만이 지금의 나아가야 할 길이지.”
(생략)
한서의 고개가 점차 기울어졌다.
“넌 나 같은 애들을 보면 꽤나 답답하겠구나, 그런가?”
그는 이상하게도 속이 슬며시 달아올랐다. 무언가 새끼손가락만 한 거부감이 치밀어 오름을 알았다. 입을 닫았다.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넌 너대로 강릉의 친구들은 또 그들대로 현실을 잘 헤쳐 나가고 있을 테니까.(생략)”
(지문 생략)
“…흐흐. 이거 내가 너무 나갔구나. 이런 말, 미안하다. 피곤도 하고 좀 누워야겠다. 내일 일찍 갈게.”
“집으로 갈 놈 같지는 않고, 어디로 갈 건데?”
“응? 아, 거 뭐, 그렇지. 내가 원하고 나를 찾는 곳.”(p154.p155)
시간이 지나 원길에게서 사라진 한서의 근황을 듣는다. 부산 앞바다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허리에 묶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죽음의 소식이다. 불길처럼 타오르던 젊음이 익명의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목숨을 잃었다. 된서리에 생명이 들풀처럼 졌다.
그러기에 앞서 원길에게 한서의 정체와 수배된 정황을 인지한 현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심적으로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껴오던 차다. 시대 상황으로 봐선 유신시대라 수배자 은닉죄로 연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다. 한편 첫 대면에서 ‘설악초처럼 청아한’ 영문과 여학생과 사귀면서 방황하는 강릉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하던 그녀에게 화가 미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나날을 보낸다.
서서히 조여 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휴학을 하고 거처까지 옮기지만 불안감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저녁이면 술에 빠진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친구를 만나고 그와 동행한 간호대학생 임미숙의 소개로 만화방으로 옮겨 어려운 숙식까지 해결하기도 한다.
4월 중순 어느 날 밤 현은 경포대에서 귀가하다 공안요원에게 납치된다. 고문 끝에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서울서 내려온 박한서와 접선, 활동자금을 받고 강릉 총책으로 지역 젊은이들을 포섭, 반국가활동을 해온 점에 서명하고 시인한’(p211) 뒤 재판에 넘겨져 6개월 징역형을 확정받고 강릉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다.
한서가 수감 생활하는 동안 수우도 현과 조직에 관계했다면서 공안요원에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출소한 뒤 심한 우울증과 고문 과정에서 받은 수모 때문에 목을 매어 삶을 마감한다.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는 여기서 강릉 무대로 배경한 소설 부분을 마감한다. 더 이상 전진 철길이 놓이지 않은 종착역이다. 하긴 더 이상 달려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삼척 김씨네막걸리집의 두 사내 이야기가 여태 남아 있다.
현실로 돌아온 현이 김씨네막걸리집에서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거리를 나선다. 어둠 속 정면, 신호등이 꺼진 사거리에서 트럭에 검은 그림자가 허공으로 튕겨져 가로수에 부딪힌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영人影. …드디어 소설책 『강릉, 겨울 그림자』를 덮을 때가 왔다.
한 아름이나 되는 벚나무 가로수를 허리를 감아 완전히 꺾인 검은 인영 밑으로 빗물과 다른 검은 액체가 멈춰 선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p226)
비로소 사십 년 동안 마음속에 옹이처럼 박혔던 ‘그림자 털어내기’에 성공한 순간이다. 현실에서 미래로 지향하는 인간에게 과거의 죄책에 따른 채무의 변제는 가능할까, 그런 물음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작가는 신神인가?
『소설쓰기의 모든 것』의 인물, 감정, 시점 파트를 저술한 낸시 크레스 Nancy Kress가 던진 물음이다. 이제 위의 <행간을 따라가며>의 항에서 미루어 두었던 시점에 관해서 분석해 볼 차례다. 나름 경험에 따르면 독자 처지에서 이 문제가 독서에 별스럽게 거슬리거나 방해가 되지 않는 듯하다. 외국어 소설이 아니라 구어체로 써진 한글 소설에는 주어 생략이 많아 피부로 덜 느끼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굳이 시점을 언급하는 까닭은 뭘까. ‘본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생각, 계획, 꿈, 감정 따위들은 타인의 머릿속에서 가져올 수 없다’는 한계성 때문이다. 1인칭 소설에서 자기감정은 말할 수 있어도 자기 뒤통수는 물론 제 표정도 볼 수 없다. 반면 3인칭 경우는 어떤가? 상대방 뒤통수와 행동 짓거리까지 볼 수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소설에서 둘 모두 만족시켜 ‘명료한 산문체transparent prose style'를 구사하고자 고안해낸 수단이 소위 말하는 전지적 시점이니 제한적 시점, 다중 시점 따위들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전지적 다중 시점을 쓸 수 있는 작가를 에둘러 신이라 부른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스토리텔링 부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13쪽 둘째 줄부터 귀신 놀음에 빠져 혼동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읽어나가다 보면 청년은 현의 젊을 때의 화신化身인 아바타라는 걸 눈치챈 다음에야 몰입감에 빠져든다. 이 소설이 동일인으로 주인공(현)과 시점인물(청년)이 분리된 복합시점으로 서술되었기에 그런 현상이 발생한다. 이 복합적인 서술 구조의 단점은 긴박감이 없다고 흔히들 평가한다. 그러나 이 방법이 꾸준히 소설 기법으로 동원되는 건 실보다 득이 많기에 다중 인물을 수용하는 장편소설에서 작가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이유에서다.
∙시점인물은 주인공이 죽은 뒤에도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시점인물이 아닌 경우에 좀 더 신비로운 인물로 그려질 수 있다.
∙시점인물은 주인공에게 백만 년 동안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극명하게 묘사해야 할 현대소설에서 작가들은 위의 조건보다 큰 장점을 소위 ‘타자 내면 들여다보기’가 수월하다는 이유로 보고 있다. 또한 이 기법은 시차를 극복하고 변화의 폭을 조율하며 양단의 결과를 독자에게 적나라하게 노출해 소설 속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기막히게 좋은 소설을 쓰는 방법Ⅱ How to Write a Damn Good NovelⅡ』에서 제임스 N 프레이는 내적 갈등이란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두 개의 목소리, 곧 이성과 열정, 또는 두 가지 열정이 싸우는 것이라 정의했다. 주인공의 다른 쪽의 목소리, 즉 의무감과 명예, 원칙 등을 듣고 망설임을 극복하고 행동할 때 해결된다고 피력했다.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는 이 원리를 적격하게 잘 운용한 셈이다. 현과 청년은 마지막까지 이성과 열정, 다른 쪽의 목소리, 의무감과 원칙 그리고 명예를 두고 서로 힐난하고 반발하며 치고받고 치열하게 싸우다 끝내는 폭언과 폭력으로 종지부를 찍지 않았던가.
‘현은 청년의 모습에서 무언가 떠오를 듯한 막연한 ⓖ기시감에 잠겨들었지만 확연하지 않았다.’(p14)
처음 청년을 대면하는 장면의 서술이다. 초대면인데도 현은 당면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암시로 ‘ⓖ기시감’이란 어휘를 가져왔다. 기시감旣視感의 사전적 의미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나 처음 본 인물, 광경 등이 이전 언젠가 경험했거나 보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이다. 이 어휘는 작가가 지극히 의도적으로 골라낸 단어로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올리는 갈고리 역할을 한다. 사냥꾼의 선창先槍, 즉 선인지先認知 후확인後確認 격이다.
ⓗ“난 자네를 전혀 모르겠어. 또 자네를 이 자리에 부른 적도 없고.”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수없이 불렀어요. 오늘도 아침부터 지금까지, 저 빗속 거리 귀퉁이에서, 이 자리에서도 나를 찾지 않았나요?(생략)…” (p14)
ⓙ"나갈 때가 되면, 달리 말해서 당신의 마음이 결정하면 나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저를 쫓아낼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자네는 마침 내 마음속에 들앉아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끄집어낼 수 없어…”(p17)
ⓛ"…쫓아내지 않겠어. 나도 때로는 이렇게 둘이 마시는 술을 바랄 때도 있었으니까…(p20)
ⓜ“…강제로 호출 당한 지금 저는 긴 이야기로 당신의 드러내기 싫은 과거를, 다시 되뇔수록 상처만 깊어지는 과거를 굳이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당신의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튼 당신의 분신이 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불러내어 정면으로 맞닥뜨려 나를 죽이든 살리든 한 번은 꼭 있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 당신은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p56)
시점인물은 비웃음을 던지며 힐난하고 다시 논리적으로 찔러대고, 주인공은 반발하고 변명하다 설득력을 잃으면 분을 참지 못해 욕지기를 내지르는 공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과연 주인공 현과 시점인물인 청년의 다툼의 어떻게 결말이 나던가.
ⓝ“…젊음 속에 숨긴 그 양심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그런 당신이 나보고 꺼지라고? 그게 당신이 말하는 평온한 생활 속 소시민의 본모습인가? 과거의 남궁현은 다 밟아버리고 몇 푼의 돈과 직장 틈바구니에서 갈리고 파멸된 당신의 모습은 보기도 역겨워. 눈알이 삐어서 안 보여? 그 잡스런 꼬라지가?”
“먼 개소리야 이 쌔끼가, 난 실성했어. 그것뿐이야. 세상 속 죽음을 나와 연결시켜? 요 어린 개쌔끼놈아. 가죽이 짧아 뚫어진 게 주둥아린 줄 알아? 이런 개쌔끼는 죽여 씨를 말려야.”
“죽여? 나를 죽인다고? 그래, 은수우의 죽음도 모자라 나까지 죽인다고? 평생 무선국 벚나무 잎을 쓸어 담아도 모자랄 인간이 뭐야? 이 더러운 시키야. 그래도 양심 한 쪼가리는 남아 있을 줄 믿었는데 결국 넌 더러운 잡놈이었어. 수우는 너 같은 잡놈 때문에 깨끗한 몸만 억울하게 망친 거야. 이 개새꺄, 억울한 죽음에 양심쪼가리 하나도 없는 개썅노므새꺄.”
현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식칼을 집어 들고 자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눈에서 새파란 빛이 청년에게 날아갔다. 청년은 피하지 않았다. 서 있는 자세에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현은 눈을 감으며 청년의 가슴 한복판에 망설임 없이, 식칼을 찔러 넣었다.(p222.p223)
주인공과 화자인 시점인물을 차용한 복합시점 기법은 800년 앞선 우리나라 고전에서도 소설을 집필하면서 마주친 적이 있다. 바로 고려 문신 이승휴李承休의 자전적인 병과시病課詩다. 병든 어머니 때문에 낙향하여 두타산 아래서 조정의 부름을 고대했으나 개경에서 아무런 기별이 없어 울분을 곱씹던 때다. 여기서 주인공은 이승휴고 시점인물은 마을 장로長老다. 상징적인 몇 구절만 옮겨 본다.
서로 시냇물을 희롱하고,
오래 앉아 있으니 푸른 이끼도 따뜻하고,
때때로 마을 장로 찾아와,
나를 논평하며 웃으며 말하네.
相輿弄溪水 坐久蒼苔溫 時有村叟至 謂我笑且言
이 구절이 현과 청년이 삼척 김씨네막걸리집에서 조우하는 ⓗ, ⓘ에 상응하겠다. 다시 말해 이승휴 마음에서 이승휴를 불러낸 셈이다.
그대의 거취를 보고,
나는 매우 성의를 바치고 싶소,
그대는 소년 때부터,
운몽택을 삼키려 했소.
觀君所去就 愚蒙甚獻芹 君自少年日 雲夢胸中呑
나는 시골 늙은이로,
젊어서부터 밭 갈며 김매기를 일삼으니
검술로는 무예를 배우지 못했고,
유술로는 글을 배우지 못했소.
儂是田園叟 少年事耕耘 釖術不學虎 儒術不學文
위 두 구절이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예문으로 제시한 ⓙ, ⓚ, ⓛ, ⓜ에 해당되겠다. 인간이란 그렇다. 속에 애도, 중년도, 애늙은이도 들어 있어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렇게 내가 나를 모르니 내가 내 속을 뒤집고, 내가 내 마음을 흔들며, 내가 내 심장을 쥐어뜯을 수밖에. 그 일을 후회하고 또다시 못다 한 감정 찌꺼기를 내지르는 게 인간의 본모습이다.
떠나시오. 저 마을 장로여!
그대가 간여할 바가 아니오, 하니
마을 장로는 선 채로 불안해하다가
망연자실하여 놀라 도망쳤다.
去矣彼村叟 非自所云云 村叟立不定 自失而驚犇
위 구절은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예문에 제시한 ⓝ과 장면이 대동소이하다. 이쪽 사정도 엇비슷하긴 마찬가지다. 시점인물은 비웃음을 던지며 힐난하고 다시 논리적으로 공박하고, 주인공은 반발하고 변명하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지만 정황을 유추해 보면 설득력을 잃고 분을 참지 못해 욕지기를 내지르며 마을 장로를 쫓아내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유사하다.
소설『강릉, 겨울 그림자』에서는 단원마다 후반 중간이나 말미에 배치했는데 그 부분만 모아서 분석해 보면 감정이 섞인 직설적인 표현이라 그런지 다소 중첩되어 산만함이 있고 어느 부분은 소설 큰 흐름을 끊기도 하며 때로는 작가의 노골적인 과잉 개입으로 작의가 생경하게 드러날 소지도 엿보인다. 그 부분 따로 모아 논리의 진행까지 순차적으로 정리하여 나눠 삽입하는 작업도 매끄러운 방법의 하나일 테다.
또한 일견으로는 마치 소설작법 텍스트처럼 문제를 서술한 뒤 말미에 양시론兩是論을 제시해 독자에게 O.X를 받고 작가의 책무를 회피한다는 오해의 여지가 충분히 있고, 톤이 강해 흐름에서 솟아날 땐 작의作意가 왜곡될 취약점도 있어 강도 조절이 요구되는 기법이기도 하다.
애증의 땅, 강릉이 탄생시킨 작품
작가의 궁핍한 젊은 날의 자화상으로 읽히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강릉이란 무대와 배경 없이 이 소설이 가능했을까. 그만큼 강릉의 겨울 풍광은 소설의 분위기를 촘촘히 그대로 밀착시켜 현의 궁박한 처지를 더욱 궁지窮地로 몰아넣는다. 배경과 묘사는 소설의 핵심 요인으로 가옥에다 비견하면 벽체에 해당한다. 작가 박문구는 사계절을 강릉에서 몇 번 보내면서도 화사하고 화창하며 낭만적인 봄·여름·가을을 스쳐 궁핍함에 시달리면서도 굳이 못 가진 자가 고달픈 한풍과 폭설이 난무하는 강릉의 겨울을 무대 배경으로 끌어들였을까.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긴 있다.
『속초에서의 겨울 Hiver à Sokcho.2016刊』을 집필한 엘리자 수아 뒤사팽Elisa Shua Dusapin[1992~].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2016년 프랑스 로베르트 발저 상을 받은 처녀작인 이 작품에서 도시와 겨울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서술한다.
그는 결코 나처럼 속초를 알지 못할 것이다. 속초에서 태어나지 않고는, 그곳에서 겨울을 나보지 않고는, 그 냄새와 문어를 모르고는 그곳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고는. (『속초에서의 겨울』 p25)
그렇다. 겨울은 도시의 가장 까칠한 본색을 안고 있다. 관광 계절에 미화된 도시의 이미지가 겨울이면 가면을 벗고 마치 화장을 지운 여인네처럼 습기 찬 나무 침대로 찾아든다. 거친 몸에서 여지없이 원초적인 바람 냄새가 풍긴다. 풍성한 숲이 낙엽을 지우고 가난함을 드러낼 때 비로소 골짜기 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듯 입은 옷 두께나 굴뚝에 나는 연기나 겨울 마당 낟가리를 보면 빈부를 가름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의 속살이 드러나는 겨울, 빈자貧者도 체면을 감출 수 없게 치부까지 드러내기를 강요하는 계절이므로 인간의 가장 취약 곳에 작가의 눈이 잠입할 수 있다. 작가에겐 입질 좋은 낚시터다.
그러면 평상시 외지인에 투영된 강릉 도시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역사가 덧입힌 강릉과 관광으로 윤택潤澤된 강릉. 신사임당과 성리학의 태두 율곡 이이李珥의 문향의 도시. 영동 남부 선비들의 도시. 지정학적으로 보수 색채가 강한 지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도시다. 또한 관광객들은 대나무 잎이 푸르게 빛나는 오죽헌을 둘러보고 경포 호수를 거쳐 강릉 앞바다 모래밭을 걷다 탁 뜨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맑게 별이 뜬 하늘을 보면서 하룻밤의 추억을 쌓는다. 겨울이 아닌 그 계절의 연인을 동반한 관광객들이 대관령을 넘어온 강릉 겨울바람, 그 매운맛을 어찌 알겠으며, 또한 황장목 숲에서 설해목 지는 폭설의 폭력성 비명을 들은바 있겠는가.
작가의 박문구(현)가 인식한 강릉 이미지는 어떠한가.
지금까지 서술해온 <행간을 따라가며>에 표기한 ⓐ에서부터 ⓕ까지가 강릉에 관한 화자의 시선이다. 겨울 강릉의 정서에 회의를 품으면서도 방학이나 휴학 때라도 가족이 있는 서울로 가지 않고 라면 한 봉지, 건빵 한 봉지, 막걸리나 소주 한 잔을 마셔도 강릉에서 마시고 야숙野宿을 하더라도 강릉 산천에서 눈비를 맞으며 잔다. 그러고도 ‘미련곰탱이’처럼 강릉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앙버틴다. ‘강릉에서 살자. 비록 어둡고 침침한 시간이 구석구석 살아 있는 곳이지만 낯선 곳보다 익숙한 곳에서 젊음을 정하자’(p57). 궁핍한 젊은 날 희망이 꺾인 채 좌절하고 방황하며 암울한 시대에 휩싸여 만신창 난 처지로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은, 그 그림자 짙은 겨울 강릉이 현에게는 인식과 공감과 대립이 교차하는 애증의 땅임이 분명하다.
“이보게. 자넨 강릉에서 지낸 적이 있나? 겨울 강릉은 대관령 바람과 폭설에 그냥 무방비로 노출되는 도시라는 사실을 알고나 말인가? 흐흐, 강릉에선 발목까지 쌓이는 눈은 취급도 안 해. 무릎을 넘어야 이제 눈 좀 오는 모양이다아. 그러니 설해목 꺾이는 소리는 아기들이 엄마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야. 그런 소리가 들리든 말든 모두 폭설 속에서도 잠을 푹 자는 사람들이 강릉 사람들이야,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설해목 지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네. 뭐? 밤에 허리를 매만져? 흐흐흐, 실없는 소리 말게.”(p91.p92)
강릉 겨울의 속살과 강릉 사람의 특질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문장이다.
“…당시 강릉 지역의식의 한계랄까,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의 충실한 신민들이었어. 학생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고. 그러니 서울의 학생운동이나 재야인사들의 언행에는 지극히 부정적이었지. (생략)”(p163)
“…삶 속에서 부대끼며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긴 세월의 더께가 강릉 사람들 가슴에 깊게 자리 잡고 있어.…강릉 특유의 정체된 정서에 평생 묻고 담그면서 살아온 사람들.…정부를 하늘처럼 믿고 지내는 착한 사람들이지.…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전체 혹은 이성적 판단의 뿌리를 만들어준 곳이 강릉이야.…”(p164)
이러한 정서와 관련 공교롭게도 현과 조우하는 또래들의 면면을 보면 다수가 강릉 토박이가 아니라 강릉이라도 변두리거나 외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다. 정유석(대구), 도상훈(경북), 김지형(경북), 조기춘(구미), 안수철(정선), 박한서(간성), 조원길(주문진), 이순호(주문진)……. 모두 출생지를 떠나 배움터를 찾아왔을 테지만 삼척 출신인 현과 같이 강릉 정서가 몸에 배지 않은 ‘더부살이들’이다. 토박이 눈에는 이들은 편협하고 괴팍한 외지인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더부살이들은 동병상련으로 쉽게 어울릴 수도 있겠으나 작가가 인물을 등장시킬 때마다 하나하나 출생지를 밝히는 건 치밀한 계산에 따른 장치가 아닐까. 보수 정서가 강한 도시 강릉으로 흘러들어온 새 물이란 약호略號가 아니겠는가. 이들 몇몇은 실제 변혁 시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진취적인 언동을 취해 충돌 지점에 서는 인물들로 현과 이리저리 얽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애증이 얽힌 겨울 강릉은 이 소설의 최적 무대다. 만약 스토리만 고스란히 이웃 삼척으로 무대로 옮겨 재구성을 시도한다면 성공 확률은 제로 프로일 거다.
더 서럽게 곡소리를 듣자면
소설『강릉, 겨울 그림자』에서 독자는 세 사람의 죽음 현장과 마주친다. 많은 소설에서 숱한 죽음을 읽어낸 독자들은 죽음 현장은 관념에 젖을 만큼 익숙해서 작가가 제시하는 현장이 눈앞에 빤히 그려진다. 액션과 호러 영화에 푹 빠진 관람자처럼 어디가 옥에 티쯤 어렵지 않게 찾아낸다. 독자 눈에 읽힌 이 소설의 죽음 현장 묘사는 어떤 방식일까. 첫 번째 맞닥뜨린 장소는 주인공 현의 아버지 임종이다.
부친 위독 급히 오라
…그 짤막한 전보 내용의 이면을 알아차린 친구는 도상훈이었습니다. 그가 담담하게 내뱉은 말은 그의 경험에서 나온 한탄 섞인 말이었습니다. 상훈의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지요.
현이 아버지, 돌아가셨어. 전보는 그렇게 순서대로 오는 법인데…. 첨에 위독이었다가 곧 사망으로! 거참.
그가 집으로 떠난 직후 다시 온 전보에는 ‘부친 사망’이었지요.(p61)
구질구질한 묘사는 물론 사연이나 곡소리조차 없다. 싸리비로 쓸어낸 마당 뒷자리 같다. 삼자三者의 슬픔은 보이나 맏상제인 현은 통곡은커녕 눈물조차 없다. 성분成墳을 끝낸 떼 입힌 자리처럼 말끔하다. 아버지는 진짜 임종했는데도 그렇다.
두 번째로 만나는 죽음은 독재체제에 저항하다가 불길처럼 소멸한 박한서 죽음이다. 한서의 서울 생활 정황을 알린 원길의 입을 통해서다.
취한 원길이도 소리를 낮게 깔면서 말했다.
“쌔끼들, 뭘 그리 긴장하긴 흐흐. 간단히 사라졌지.”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가슴속에 거대한 돌이 쿠앙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한순간에 한서와의 짧았던 순간이 긴 필름처럼 스쳐 갔다.(p187)
터뜨리는 울음 보다 참아내는 울음의 깊이가 깊다고 했다. 마치 ktx 창가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가는 산천을 보는 느낌이다. 세금이 붙지 않는 문자 소비도 절약이 절실하다고 시위를 한 듯하다.
세 번째 죽음의 현장으로 가보자. 첫 대면의 인상이 설악초처럼 청아해서 단박에 마음을 주었던 현의 ‘여자애’ 은수우의 한 맺힌 죽음의 현장이다. 강릉교도소에서 출감한 현에게 원길이 그녀의 소식을 처음 전하는 자리에서다.
원길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대학 친구들도 다 끌려갔다가 이삼일 조사받고 나왔다더라. 아마 너의 행동을 파악하려는 것이었겠지. 그리고 너와 가깝던 그 여학생….”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학생은… 휴우우-. 이런 말 하려니 속이 막히네. 그 학생, 죽었어. 집 뒷산 무선국에서 목을 맸어. 끌려가서 보름이 넘도록 고생했다더군. 풀려나고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는데, 가끔 이상한 헛소리도 하면서. 이건 그 여학생과 친한 여고 동창이 나도 잘 아는 애라서 들은 거야. 그들이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했다고 친구에게 말했어.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차마 못 하겠어. 몇 마디 들었지만 너한테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 아, 이만하자.”
현은 얼굴을 깊게 숙이고 두 손으로 술잔만 꼭 잡고 있었다. 원길이에게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얘기, 미안하네.”
그는 듣기만 했다.(p215)
설악초처럼 청아하게 만나 아껴 품었던 ‘여자애’ 은수우의 죽음은 밟힌 들꽃처럼 에둘러졌다. 현의 마음속에다 그림자를 남기며. 탄식도 한숨도 없는데 가슴에서 뭔가 사락사락 바스러지며 심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게 바로 소설쓰기 기법에서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식 정보 전달 방법이다. 이때 이미 보여준 것에 재언再言하면 군더더기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걸 피한 까닭으로 슬픔 자체가 투명하게 깨끗하다.
문체style를 잠시 살펴본다. 소설 문장은 시보다 은근해야 한다.
문장이 길어서 인용을 생략하지만 강릉 바람을 서술한 78쪽과 강릉 폭설을 묘사한 81쪽은 디테일이 풍성하고 감각적으로 차근차근 직조한 글맛이 좋아 거듭 읽었다. 작품 전체는 대체로 호흡이 긴 장문 복합체고 어휘 사이의 밀도가 촘촘하며 시점에 따라 구분된 다양한 어미변화로 문장이 다채롭다. 마치 장문이 단문보다 중후한 감동을 준다는 걸 예시한 듯하다. 문장에서 변주變奏는 좋고 반복은 나쁘다는 말은 이미 격언이다.
그런데 네 번째 이야기부터 강릉 이야기가 어미변화를 보인 건 끝내 궁금증으로 남는다. 작품 안에서 독자의 시야는 작가보다 좁고 일회적이다. 작품에 가는 애정 또한 집필자에 미치지 못한다. 왕왕 소설의 상징과 주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교사들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의미를 도외시하거나 간과하는 독자도 있다. 첨언해서 비거스렁이, 회다지꾼, 윤슬, 뱃구레, 냉갈내 등 사멸해 가는 우리말을 되살려 나라 문자를 보전하는, 작가로서 덕목을 수행한 일도 가산점을 받을 만하다.
나가면서
소설문학은 IT에 플롯을 의탁할 만큼 빠른 속도로 거듭 변화하면서 진행 중이다. 그러나 문명 진보에 비하면 소설문학의 변천은 시침과 분침 차이가 아니라 시침과 초침의 차이다. 세상 온갖 정보가 들어 있는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세상에 드론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식당에서 IT의 서빙을 받으며 밥을 먹는 세태 변화는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결과다. 화가 앙리 루소는 못 가본 정글을 그려 상상을 뛰어넘었다는데, 목하 작가들은 현실에 앞선 미래를 내다보기는커녕 당면한 현안도 따라잡기에 전전긍긍 힘겨워하는 판세다. 액체가 용기에 담기는 형상처럼 소설도 세상 모든 원리를 그렇게 샅샅 스며들도록 담아내야 하는데 그릇이 구닥다리에 쳇구멍조차 망가지다 보니 담아내는 물건이 소루하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보면 소설문학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튀어 달아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소재, 주제뿐 아니라 기법과 문체는 물론 소설문학의 근본 개념까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긴 현대소설 문학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우리나라 소설문학의 전성기를 이뤘던 팔십 년대 소설이 개화기의 고전소설 춘향전이나 류충렬전과 같은 느낌으로 읽히는 느낌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소설이 자기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공감대에 설 때 흥미가 배가되는데, 다층 다변화 시대에 그런 적확한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우려스러운 현상은 소설문학이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아니 우리가 지금 집필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급변하는 의식변화로 낡아 헐거워진 소설기법과 고루한 상상력으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팔십 연대 그렇게 많이 등장했던 소설가들이 절필하는 원인에도 그런 빠른 소설 변천사가 한몫했다고 본다. 그리고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도 관심을 끄는 일도 갈라파고스의 땅거북처럼 주위 소설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 결과라 단정한다.
21세기로 향하는 물결은 기존 진리라고 믿었던 개념을 속속 무너뜨릴 만큼 거세다. 정보 팽창과 내가 나를 모를 만큼 변한 인간 본성, 공동체의 도덕성 몰락과 지성인의 타락, 기후 환경 변화로 의학으로도 해독이 불가한 병해들, 그리고 MZ 세대의 우렁잇속 같은 배금주의에 종속된 자기애自己愛, 젠더 또는 세대 간 갈등, 노령 사회로 진입, 무능한 정치인의 패거리 저질 정치로 국가 발전의 장애, 얄팍한 어용학자 범람, 탐욕스러운 사회운동가, 고소·고발 만능주의 등 온갖 혼란스러운 물결이 요동치고 있다.
이런 판국에서 현대소설은 복합적인 복선들이 거미줄같이 작품 바닥에 깔려 있으므로 이야기로만 만족하는 독자보다 소설 바탕을 들여다보는 평자에게는 소설은 늘 커다란 코끼리를 눈앞에 둔 듯 분석평가하기가 버거운 대상이다.
이 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는 다른 채굴자(평자든, 독자든)의 눈으로 숨겨진 다른 면도 새롭게 채굴되어 작품에 의미를 더할 거라 믿는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고 좋은 글을 써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딱히 덧붙일 말이 있긴 하다. 흰 종이를 검은색으로 물들여라. 모파상 말인데 물론 신빙성이 있다는 걸 작가도 알 거다.[끝]
첫댓글 김익하 선생님.
제 소설을 이렇게 자세히 해부하고 결합하는 선생님의 시선을 보면서 제 소설인데도 많이 배웠습니다.
소설의 시작과 끝인 김씨네막걸리집에서 감자부침을 안주로 막걸리 한잔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식도락가 입맛이 어찌 농부나 어부의 수고에 가당키나 하겠는가. 읽는 내내 즐거웠다네.
금주 하다시피 줄어든 주량이라도 삼척 가면 소설 무대인 김씨네막걸리집에 한 번 들리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다음 작품을 기다리네..
술은 굳이 마시지 않아도 탁배기 한잔이 앞에 있으면 취할 마음이 탁자를 덮을 겁니다.
즐거운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려오시면 연락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