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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솔바람동요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정순
<동화> 꿈꾸는 꽃망울 이정순
바람이 쌩쌩 부는 어느 봄날이었어요. 바깥일을 보고 돌아오던 민이 엄마는 아파트 뜰에서 발걸음을 뚝 멈추었어요. 덩그렇게 버려진 화분 하나를 본 것이지요. 화초가 가여웠던 민이 엄마는 흩어진 흙들을 모아 화분에 꼭꼭 눌러 담고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서둘지 않으면 얼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잘 살 수 있어야 할 텐데.’ 민이 엄마는 흙이 묻은 화분을 물걸레질한 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으며 중얼거렸어요. 이제 민이네 집에는 화분 하나가 늘어난 셈이에요.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민이네 집으로 온 국화는 졸였던 마음을 그제야 놓으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했어요. 낯선 집이었지만 왠지 마음이 푸근했어요. 국화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눈이 커졌어요. 아주 옛날 꽃집에서 본 듯한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걸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요. ‘안녕?’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려다가 국화는 멈칫하고 말았어요. 산세베리아, 난, 선인장, 알로에, 모두 꼬박꼬박 졸고 있었던 거예요. ‘낮잠을 자고 있구나. 모두 잠에서 깨어나면 그때 인사를 해야지.’ 이렇게 다짐하는데 그때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어요. ‘에 취. 에 취.’ “누 누구 얏! 내 잠을 깨우는 녀석이.” 크게 눈을 뜨고 기지개를 펴던 선인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야단을 쳤어요. 국화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어요. “죄, 죄송해요.” 그런데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코가 간질간질해지더니 재채기가 또 나왔어요. “에취, 에취, 에취.” 콧물이 입술까지 흘러내리는지 짭짤하기까지 했어요. “아이참, 시끄러워 못살겠네. 볼품없는 녀석이 어디서 온 거냐? 응? 첫날부터 너무 한 거 아냐? 첫인사가 재치기야? 응?” 이번에는 길쭉한 산세베리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거렸어요. “뭐라고요? 제가 볼품이 없다고요?” 국화는 얼굴이 몹시 화끈 달아올랐어요. 아픈 것도 서러운데 자꾸만 안 좋은 소리를 들으니 주눅도 들고 기분이 상했어요. 산세베리아는 입을 삐죽이더니 늘씬한 몸매를 뽐내었어요. 사실 푸릇푸릇한 모양에 힘이 넘쳐 보이는 산세베리아에 비해 국화는 너무나 가냘픈 모습이었어요. “사람들은 우리 식물들이 강하고 예쁜 꽃을 피워야 좋아한다는 걸 넌 모르니?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바로 내다 버리는 게 사람들이니 너 조심해.” “그래, 그래. 산세베리아의 말이 맞아.” “나도 병에 걸렸을 때 옛 주인이 버린 거야.” 선인장, 난, 알로에 모두 서로 얼굴을 번갈아보며 한마디씩 했어요. 그 순간 국화는 아까보다 더 가슴이 아팠어요. ‘으앙. 그러면 나도 옛 주인이 쓸모가 없어서 버린 거야?’ 국화는 그 추운 날 바깥에 자기만 휑하니 남겨두고 쏙 집으로 들어가던 옛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는데 친구들의 말을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어요. 국화는 속이 상해서 눈물이 글썽글썽 거렸어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며 또 버림을 받을까봐 겁에 질려 눈물을 훔칠 때였어요. “얘들아, 우리 모두 아픔이 있는데 국화에게 너무 그러지 마.” 누군가 다정하게 국화를 달래주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누구시죠?” 국화는 고개를 두리번거렸어요. “난 오가피나무라고 해. 네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렴.” 국화는 소리 나는 쪽으로 까치발을 딛고 두리번거리다가 오가피나무와 눈이 딱 마주쳤어요. “안녕하세요?” “그래, 만나서 반가워. 이래 뵈도 난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단다. 허허.” “어머 그러세요?” “응. 난 원래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좁은 화분 속에 있다 보니 키가 잘 자라지 않아 여기 있는 식물들이 날 어린애로 봐.” 오가피나무는 굵직한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어요. “오가피나무님 땅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어허, 그렇기야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넌 어디서 살다 왔니?” “저 저는......” 국화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어요. 옛 주인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어 우물쭈물 거리다 말꼬리를 돌렸어요. “말씀 드리기가 좀 어려워요. 그런데 오가피나무님은 어디서 오셨나요?” “허허,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사실 난 강원도 치악산 밑에서 살다가 민이 엄마아빠가 남쪽으로 이사를 오면서 날 데리고 왔어.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날 보며 위안을 받고 싶다면서. 난 한동안 민이 엄마아빠를 무척 미워했어. 난 내가 살던 고향땅이 좋았거든. 그러나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어. 살아보니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려 있더라. 휴, 뜻하지 않게 생기는 어려움은 좌절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법이지. 어쨌든 항상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힘을 내. 알았지?” 오가피나무는 쉬엄쉬엄 국화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국화는 점점 오가피나무에게 마음이 쏠렸어요. “오가피나무님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희망을 꿈꾸어야 하나요?” “음, 희망이란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슴속에 품어야할 씨앗이지. 그 씨앗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키워봐. 넌 할 수 있어.” 오가피나무는 손을 내밀어 국화의 어깨를 감싸 주면서 미소를 지었어요. “오가피나무야, 국화에게 너무 잘해주면 약해져서 자꾸 기댈 생각만 하게 돼.” 잠자코 듣기만 하던 알로에가 따끔하게 한 마디 하자 산세베리아, 선인장, 난도 맞장구를 쳤어요. 하지만 오가피나무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지요. “허허허.” 하루하루 창가를 비추던 해가 어느새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어요. 하루는 산세베리아가 몹시 얼굴을 찡그렸어요. “아이쿠, 무슨 날씨가 이리도 덥지? 이런 더위는 태어나서 처음이야.” 산세베리아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짜증스럽게 말하자 더위를 잘 견딘다는 선인장도 침을 꼴깍 삼키며 헉헉 댔어요. “에고, 올 여름은 유난히도 덥구나. 아 목 말라.” 더위에 지치긴 오가피나무와 국화도 마찬가지였어요. 햇볕에 달궈진 흙덩이에 몸이 너무나 뜨거웠어요. 낮이나 밤이나 더위는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계속되는 더위에 바빠진 건 바로 민이였어요. 민이는 쪼르륵 물을 뿌려주느라 쩔쩔 맸어요. “어휴, 힘들어. 근데 얘들은 물을 주는데도 왜 시들시들한 거지?” “민이야, 그만 해. 앗, 뜨거워.” 산세베리아, 선인장, 난, 알로에, 국화, 오가피나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어요. 얼굴이 빨갛게 익기도 했어요. ‘민이야. 햇볕이 있을 때는 우리에게 물을 주지 마. 뜨거울 때 물을 주면 우리 식물들은 시름시름 앓게 돼. 햇볕이 식은 뒤에 물을 주었으면 좋겠어. 제발......“ 국화는 두 손을 모은 채 웅얼거렸어요.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어요. 오가피나무가 심하게 앓았어요. “으으으.” “오 오가피나무님 왜 그러세요?” 화들짝 놀란 국화는 오가피나무를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어요. “어어 이젠 더 이상 난 못 견디겠어. 자꾸만 내 고향 치악산도 그리워지고 엄마 아빠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 오가피나무는 몹시도 괴로운지 지그시 눈을 감았어요. “오가피나무님 힘을 내세요.” 국화는 오가피나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울먹였어요. “국화야. 난 끝까지 견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꿈꾸었는데 이젠 안 되겠어. 다리가 너무나 아파. 사실 난 너를 만났을 무렵부터 아팠었거든. 그런데 내가 아프다하면 네가 힘들어 할까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어. 오랫동안 네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넌 오래오래 잘 살아 돼.” 국화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어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오가피나무님. 오가피나무님.” 국화가 몇 번이나 큰소리로 불렀지만 오가피나무는 끝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국화는 너무나 슬퍼 눈물이 계속해서 쏟아졌어요. 지금까지 자신을 따뜻하게 챙겨준 오가피나무와 영영 이별을 한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흑흑, 오가피나무가 너무 힘들었나 보구나. 쯧 쯧 안됐어. 의리가 많은 친구였는데.” 산세베리아, 선인장, 난, 알로에도 섭섭한지 찔끔 눈물을 훔쳤어요. 국화는 오가피나무와 헤어진 슬픔으로 여러 날을 앓았어요. 어깨가 쳐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아 얼굴이 핼쑥했어요. 항상 희망을 품고 살라던 오가피나무의 말도 까맣게 잊은 듯 했어요. “얘, 국화야. 어쩔 수 없는 일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돼. 너 여기서 꽃을 피우지 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다는 걸 잊었니? 제발 정신 차려. 이제 가을도 서서히 다가오는데 진짜 너의 모습을 보여줘야 해.” “그러게.” “맞아 맞아.” 산세베리아와 친구들은 팔짱을 낀 채 약을 올리고 이번에도 국화의 마음을 건드렸어요. 국화는 가슴이 뜨끔하고 무서웠어요. 만약에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민이네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한순간일 것 같았어요. 국화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어요. 그러다가 차츰차츰 기운을 차렸지요. ‘그래, 또 버림받으면 정말 안 돼. 나도 이제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 줄 거야. 난 할 수 있어.’ 친구들의 말을 곱씹어 보면 서운해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자 국화는 영양제와 물도 흠뻑 마시고 씩씩하게 기운을 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국화는 몸살이 사르르 돌고 어지러웠어요. “햐, 민이야, 어서 나와 봐. 참 신기한 일이 있어. 어쩜 요렇게 작은 꽃대에서 탐스런 꽃망울들이 맺혔을까? 기특하기도 해라. 어서 구경해보렴.” 민이 엄마가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국화는 눈을 반짝 떴어요. “어머. 내가 꽃망울을 맺다니. 정말이야?” 국화는 믿기지 않아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쓰다듬어 보았어요. 민이 엄마의 말은 모두 참말이었어요. 가지마다 노란 꽃망울이 조롱조롱 매달렸어요. 국화는 너무나 기뻐 소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와! 국화야, 축하해. 이제야 비로소 너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구나. 그동안 우리 때문에 섭섭했다면 미안해. 우린 네가 꿋꿋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던 것 뿐 이니 이해해줘.” 산세베리아, 선인장, 난, 알로에 모두는 생긋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어요. 국화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뿌듯했어요. 그동안 속상하고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처럼 홀가분해졌어요. ‘역시 우리 국화는 대단하고 멋져. 난 꼭 해낼 줄 알았어.’ 살살 불어오는 바람결에 어디선가 오가피나무가 환하게 웃으며 응원해주는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어요.* ......... .2003년《아동문예》아동문예문학상 동화 당선 .동화집 「복주머니 안녕」 .강원아동문학회 좋은 작품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강원아동문학상 등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아동문학인협회, 강원문학회, 강원아동문학회, 솔바람동요문학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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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꽃들이 꽃망울을 맺기 위해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아름답고 교육적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우리의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인 그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선생님. 재미나게 읽었어요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고맙습니다. 고운 가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