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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들과 강연들 (Essais et conferences(Vorträg und Aufsätze) 1954
켈켈(1927-2015), in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 3330-3332(P.4616)
- 켈켈(Arion Lothar Kelkel, 1927-2015) 프랑스 철학자, 하이데거 전문가.
벩송이 1903년 「형이상학 입문」을 철학 전문지에 발표했고, 1934년에 사유와 운동자 속에 「형이상학 입문」을 약간의 글자 수정하여 재발표 했다. 하이데거는 이를 읽었을 것이다. 다음해(1935년) 그는 형이상학 입문을 대학에서 강의하고, 1953년에 출판했다. 벩송은 철학이 네오스콜라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비판하여 썼다고 하면, 하이데거는 네오스콜라주의가 존재의 본질에 근거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시 말하면 벩송은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새로운 형이상학을 창안하였다고 한다면, 하이데거는 실증과학을 버리고(후설이 심리학주의를 배격하듯이) 언어와 사변 속에서 존재론이 성립함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55OMA)
덧붙여 벩송의 첫 작품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DI)은 영문판 번역의 제목으로 “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이며, 이를 벩송이 승인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은 벩송의 이 작품을 의식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작품 속에는 벩송이 서른일곱 번 언급된다고들 한다. 벩송은 출판된 전 작품 속에는 후설도 하이데거도 언급이 없다. 더불어 이상하게도 헤겔과 맑스도 언급이 없다. 벩송은 유대인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 고전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이점에서 하이데거는 벩송의 그리스 고전읽기 보다 깊이 얇다는 것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시간’ 뿐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하이데거는 벩송을 잘 들여다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벩송의 ‘현존(existence)’는 철학사적 전통에서 스콜라철학과 네오스콜라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네오스콜라주의를 주지주의라고 보는 윌리엄 제임스는 벩송의 창조적 진화(1907)을 읽고 그해 바로 편지를 쓰면서, 제임스는 벩송을 주지주의를 넘어서는 장군이며, 자신은 졸병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들뢰즈는 마지막까지 파이안(이교도) 그리스를 다시 보아야 한다고 글을 썼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벩송을 잘 이해했다. 야릇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서로 학문적 교류가 없음에도 박홍규는 벩송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척점에 있다고 명백하게 표현했다. 프랑스 철학사에서는 르네상스 이래로 각 개별과학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극복이라고 한다. (55O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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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들과 시론들(Vorträge und Aufsätze, Essais et conférences 1954)(1936-1953 소품들)(trad. André Préau, préf. Jean Beaufret), Paris, Gallimard, coll. « Tel » (no 52) (1re éd. 1958) - 전집 7권에 포함되어 있다.
I. (4편) [근대성과 형이상학]
「기술에 관한 질문(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3), La question de la technique」
「지식과 숙고(Wissenschaft und Besinnung (1953), Science et méditation」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1936-1946), Dépassement de la métaphysique」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1953), Qui est le Zarathoustra de Nietzsche?」
II. (4편)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 Was heißt Denken? (1952) Que veut dire penser ? (1952)」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다 Bauen Wohnen Denken (1951) Bâtir, habiter, penser (1951)」
「사물(Das Ding (1950) La chose (1950)」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 (1951) L'homme habite en poète… (1951)」
III. (3편)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50의 로고스(Logos (Heraklit, Fragment 50, (1951) Logos (1951)」
「파르메니데스 단편 8의 모이라(Moira (Parmenides, Fragment VIII, 34-41) (1952) Moira (1951-52)」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13의 진리/탈은폐(Aletheia (Heraklit, Fragment 16) (1954) Alèthéia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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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들과 강연들(1954) 중에서 제1부의 4편에 관하여 켈켈의 해제를 우선 번역해 놓는다. 켈켈의 설명대로 현대성 또는 근대성의 본질에 대한 하이데거의 문제제기이다. 근대성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삶에 편리와 유용성을 가져온 시기이며, 게다가 이런 기술이 인성의 상실(또는 부재)의 경향을 띠게 되는 시기이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이 제1부 네 편이 연관성이 깊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성의 상실과 고독 그리고 방황에서 철학자는 무엇을 성찰했을까? 그 대안으로 허무주의의 극복으로 보이는 니체를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로부터 형이상학이 해결해 주지 못했던 점을, 또한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을 새로이 극복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기술과 편리를 넘어서는 점에서 인성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길은, 내가 보기에, 근원적인 것 같지 않다. 아마도 벩송이 말하듯이 형이상학의 기원과 원인에 대해, 자연에 대해 재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 재인식은 기억과 더불어서 이루어지며, 현상에서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과 같은 기억을 깊이 있게 탐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5OLG)
***제1부, 4편에 대한 해제들 ****
# 시론들과 강연들(Essais et conferences, Vorträg und Aufsätze) 1954
이 잡문집에는 시론과 강연이 11편 실려 있다. 여기 개념작업은 1943에서 1953 사이의 10여 년간에 걸쳐 간격을 두고 배열되어 있다. 이 잡문집은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은데, 겉보기에 매우 불규칙적 것들로서 어떤 것은 현실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것들 반시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은 주요한 세 부분들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현대성의 본질에 관하여 또 우리 시대의 심층 진리에 관하여, 연속적인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 4편.]
* 「기술에 관한 질문(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3), La question de la technique」:
이 논문은 기술에 관하여 그리고 기술의 감춰진 본질에 관하여 질문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놀이의 입구(입문)를 가르쳐 주는데, 그 입구가 기술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도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유산인 기술(τέχνη, technē)이라는 초기 단어는, 우리의 안락함을 위하여 발명된 도구들에 향하여 - 이 단어가 그 기술의 진리로서 기술(la Technique)이라는 것을 발명했던 도구들을 향하여 - 던져진 순진하게 찬양하는 시선을, 우리에게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인간의 기계화도 아니고 인간의 행복에 유용한 생산물의 정교한 제작도 아닌, 이 기술은 존재와 존재자의 폭로(dévoilement [노출]) 라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 속에 남아있다. 만일 (온)기술(la Technique)이 생산이라면, 이 기술은 기원적 의미에서 생산이다. 기원적 의미에서 생산(“pro-duction” [앞으로 이끌다], Her-stellen, 쪽으로 세우다)은 선동(pro-vocation, 촉발), 즉 독촉(mise en demeure)을 의미하며, 독촉(sommation, 명령)과 성취(consommation, 완수), 즉 존재자에 관한 지배(mainmise, 독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이 (온)기술의 본질이다. 거대한 “설득 장치(dispositif d’arraisonnement)”라고 한다(독일어로 Ge-stell이며, 하이데거는 프랑스어로 모방할 수 없는 이 독일 단어의 의미를 별난 방식으로 개발하여 게-슈텔[동사 gestellen]이라 한다)인데, 이것은 인간에게 온자연을 마치 착취할 수 있는 에너지들의 거대한 저장고처럼 다룰 것을 명령한다. 우리들 시대의 단순한 치명성(fatalité, [die Fatalität])이 아닐지라도, 기술은 이제부터 인간의 전지구적 운명을 봉인한다(sceller). 이것은 하이데거가 발언한 기술의 단죄자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기술이, “땅(지구)의 주인이자 영주”라고 으스대는 인간에게, 최고의 위험과 죽음의 위협으로 나타난다면, 기술의 본질은 기술과 인간 자신의 연관에서 단지 인간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고, 기술은 자기 절정에 이른 존재자에 의해서 존재의 위협이다.왜냐하면 그 본질은 다른 모든 폭로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른 폭로란 진실한 창안(ποίησις, poiēsis)일 것이고, 그 창안/제작은 존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인데, 그 존재의 현전에서 모든 광채(l’éclat)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녕(le salut, [구원])은 행동 속에 있지 않으며, 왜냐하면 기술이 기적적으로 변형될 것이기 때문에 기술이 구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냐하면 기술을 통하여 그 자체로서 혼란이기에 알지 못하는 가장 극단적인 혼란(le désarroi, 동요) 속에 있기에, 인간은 존재에 속하는 자기 귀속(son appartenance)의 단순한 장소를, - 그리고 기술이 숨기면서도 동시에 완수하는 [인간과 기술 사이의] 상호 전유(leur “appropriement”)를, - 새로이 흘낏 보게 되기 때문이다. - [저자는 기술(τέχνη, technē)과 창안/제작(ποίησις, poiēsis)를 구별한다. 내가 알기로 하이데거가 기술의 발전에 대한 기대가 컷다고 하는데, 아마도 창안 쪽일 것이다. 그런데 그 창안은 존재자의 새로운 발견, 발명, 창안, 창조의 것이지, 편리를 위한 기술의 발달 또는 문명의 발달이 아닐 것이다. - 1953년 강의라면 전쟁이 끝난 지 거의 10년이고, 디지털의 발명과 DNA가 발견의 시기인데, 하이데거는 새로운 창안(ποίησις)를 생각했을까? (55OKH)]
* 「지식(과학)과 숙고(Wissenschaft und Besinnung (1953), Science et méditation」
이 시론은 앎(savoir)의 단순한 의지에 응답하지 않는 지식(과학)은 기술과 더불어 오늘날 인류성의 운명을 봉인하는 전지구적 역량(puissance)이다.하이데거는, “이론(théorie)”과 “실재(le réel)”라는 단어들이 기원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 초기 사상가들의 사상과 그들의 말투를 경청하기를 한 번 더 우리를 초대한다. 이 단어들이 과학을 정의했고, 근대성은 이것들을 양면으로 환원하는데, 하나는 실재적인 것(le réel)을 생산된 대-상(ob-jet, Gegen-stand)의 지위로 환원하고, 다른 하나는 초기에는 “진리의 관점과 저장”의 의미인 이론(θεωρία, theōría)을 흔적을 따라가 궁지에 몰아넣어“실재적인 것을 정교”하게 하는 순수 절차로 환원한다. 하이데거는 과학[지식]에 대하여, 보다 참을성 있게 – 미래의 약속에 대해 풍부하기보다 더 빈약하고 덜 효과적인 - 숙고하는(méditante, Besinnung) 사유를 대립시킨다. 오늘난 인류가 위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저자가 결론짓기로, 숙고(méditation)로 부터이다.
- [지성이 대상을 유용하게 또는 편리하게 다루는 것이 과학이기도 하지만, 지혜를 통하여 총체적인 자료들에 대해 시간을 두고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은 철학에서 소크라테스 이래로 ‘이뭣꼬’를 다루는 방식이다. 학문의 이중화의 방향은 철학사의 기본적인 틀이다. 지식과 도덕에서 도덕위에 지식이지(행지)이지 지식위에 도덕(지행)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55OKH)]
*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1936-1946), fr. Dépassement de la métaphysique」
[이 글이 쓰여진 정확한 연대를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2차 대전 중에 쓰여진 것이라면, 그 당대를 “방황의 시대(l’epoque de l’errance)”라는 하이데거의 진단은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그가 10여년을 반성과 성찰을 했다고 할 때, 전쟁이 끝난 시점에 그는 쉰여섯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1차 대전이 끝나고 “초자아”를 생각하였듯이, 2대 대전의 전쟁 속에서 인간의 외톨이(고독)를 깨닫고, 인식(과학과 기술)의 방향과 다른 방향, 즉 삶의 행위의 방향에 대한 고민에서, 암묵적으로 아제인간(Übermensch)를 느끼고, 니체의 “권능의 의지(volonté de puissance)”를 길어 올렸을까. (55OLA)]
이 제목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이 시론은 같은 문제틀을 이어가는 것이다.만일 오늘날 모든 것이 형이상학의 몰락, 즉 종말을 우리에게 예감하게 한다할지라도,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우리 시대의 진리이고자 한다. 우리시대는 존재의 망각의 시대이며 “의지의 의지”의 망각의 시대이며, 그런데 ‘의지의 의지’가 이제부터는 “노동의 짐승”이 된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여겼으며, 주체(sujet)이며 동시에 표상의 첫 대상도 지배한다고 여겼다.서구의 치명성(fatalité, [die Fatalität])과 서구의 전지배적인 조건을 피할 수 없는, 형이상학 또는 철학, 이것은 하나의 전체(tout un)이다.이것(형이상학, 철학)은 “역능의 의지”의 형이상학과 더불어 완성된다.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우리들 자신의 질서인 것과 마찬가지로 온세계(le Monde)의 질서 자체를 이제부터 구성하기 때문이다. 몰락하는 형이상학에 의해 발족하는(시작을 알리는) 허무주의(le nihilisme)는 역능의 봉사로 참여된 전지구적 투쟁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역능의 투쟁은 존재의 근본적인 포기의 상태에서 전근본적 상태(Seinsverlassenheit, 존재의 고독)에서, 그리고 그것처럼 알지 못 한 채 있기 때문에 최고의 비탄(la détresse, 고립감의 비참)의 상태에서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방황의 시대(l’époque de l’errance)이며, 이 시대에서는 모든 것은 무차별적이고 비어있는 획일성에 환원되어 있고, 또한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 인간을 포함해서 – 계산가능하고 또한 착취[이용]가능한 기초 물질[근원적인 휠레]로 실추되어 있다(ravalé). 행동 그 자체가 지구를 황폐화로부터 구출한가는 것에는 무능하다. 그 지구에게 행동이 온자연의 일반화된 계획화와 경작화[개발 착취]에 약속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기술의 전지구적 통치(le règne planétaire)는 철학의 종말을 봉인해봐야 소용없다. 철학은 다른 시작에 불려나왔던 사유의 종말이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55OLA)
*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1953), Qui est le Zarathoustra de Nietzsche?」
[하이데거도 위버멘쉬를 도래인으로 즉 아제인간으로 생각했다. 그 아제인은 전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인간으로 여긴 것 같다. 그런 아제인간은 규소의 시대(1953년)이래로 진정으로 확장되어 50여년이 지난 21세기에 WWW,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술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그만 행위에도 상부상조와 연대, 계약과 조화를 찾는 행선(行善)이 아제인간일 것이다. 아제인간은 기술인이 아니라 행선인(실천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5OLA)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1953)」의 강연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다루었던 「생각하다는 무엇을 말하는가?(Was heißt Denken? 1952)」에 관하여 1952/1953 겨울학기의 반성들을 다시 다루면서, 학기 과정을 끝맺는다. 이 강연은, 인류가 전지구적 지배에 접근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는 순간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근대 인류의 “대변인(le porte-parole)”로서 소개한다. 왜냐하면 권능의 의지(volonté de puissance)는 이제부터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래(la venue)로서 약속한 초인(Surhomme, Übermensch 아제인간), 그 인간은 이런 전세계의 시대에 해당하는 인간에 주어진 이름이 아니면 무엇인가? (55OLA)
[철학자는 시대의 아들이다. 그 시대를 고민하고 성찰하여 올바른 문제제기가 먼저이고, 그리고 해소하는 행동에서, 기존의 각질에 저항하며, 항거하고, 항쟁하며 혁명으로 가는 길을 찾는 노마드(전쟁기계)가 필요할 것이다. 1960년 프랑스 철학자들이 니체를 다시 읽은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이 실행하는 지배력과 더불어 포획과 포섭의 범위가 넓고 촘촘해져서(미시세계까지), 인민의 수레를 끌기, 저항과 항쟁의 길은 멀다. 청년, 장년, 노년의 삼중적 중첩에서 노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행지합일의 길에 걸림돌 하나라도 치우는 것이리라.] (55O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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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그는 말년에 중요 저작 세 편을 프랑스어로 썼다. 변신론(Théodicée, 원제Essais de Théodicée sur la bonté de Dieu, la liberté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1710-14)(프랑스어로), 이유에 근거한 자연과 은총에 관한 원리들(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1714) 단자론(Principes de la philosophie ou Monadologie, 1714),(독번역 1720, 프랑스 원판 출판 1840)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형이상학 입문(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35.)(1935 프라이부르크 대학 강의 원문, 1953출판) 박휘근(1946-), 문예출판사, 1994, P.330.
1927 켈켈(Arion Lothar Kelkel, 1927-2015) 프랑스 철학자, 하이데거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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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이기상(李基相, 1947-), 외대 교수,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존재와 시간”. 현상학을 통해 학문적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 독일: Hochschule fuer Philosophie, 1985, Gerd Haeffner.>
1956 오희천(吳凞天, 1956-) 서울 신학대학 교수 <M. Heidegger: Ontologische Differenz und der Anfang des Wissens, 2001, Univ. zu Koeln, Lothar Eley.>『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존재이해(Heideggers Seinsverständnis in seiner Abhandlung der Spruch des Anaximander)
1956 이수정(李洙正, 1956-) 건국대학사, 동경대학 석사박사, 창원대 교수, <ハイデガーにおける「存在」と「時間」, 1990 東京大學, 渡邊二郞.>. “하이데거의 ‘발현’(Ereignis)론: 『철학에의 기여』를 중심으로, 2009”
1958 최상욱(1958-) 강남대 교수, <비공개> 「Ereignis의 존재사적 의미, 2011」(Der seinsgeschichtliche Sinn des Wortes “Ereignis” )
1960 박찬국(朴贊國, 1960-) 서울대 교수. <Die seinsgeschichtliche Ubersindung des Nihilismus im Denken Heideggers, 1993, Bayerische - Julius - Maximilian Univ. Wuerzburg Heinrich Rombach
1960 신상희(申尙憙, 1960-) 건국대 학사, 독일 박사. 하이데거 전공 <Wahrheitsfrage und Kehre bei M. Heidegger(하이데거의 진리물음과 전회) 1992, Albert-Ludwigs Univ. Freiburg, 프리드리히 폰 헤르만.>
1960 황경선(1960-) 한국외국어대 강사, 하이데거 존재론 전공 <비공개> 「존재 맞이: 기억과 감사」(2013, Das Denken des Seins Von Heidegger -Gedächtnis und Dank-)
1966 이서규(1966-) 제주대 교수, <Existenz und Ereignis. Eine Untersuchung zur Entwicklung der Philosophie Heideggers(하이데거의 실존과 생기사상), 1999, Bayerische - Julius - Maximilian Univ. Wuerzburg, K.-H. Lembeck.>
1966 홍순희(洪順姬, 1966-) 계명대 교수, <김수영 시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시적 진리`에 관한 연구, 2015, 서울대, 임홍배.> “하이데거의 횔덜린 시 분석에 나타난 시적 진리로서의 ‘신’-존재(Das ‘Gott’-Sein als dichterische Wahrheit in der Auslegung der Hölderlins Gedichte von Heidegger), 2015”
1979 한충수(韓忠洙, 1979-) 이화여대 교수 <Erfahrung und Atmung bei Heidegger, 2015, Albert-Ludwigs Univ. Freiburg, Hans-Helmuth Gander.> 하이데거의 모방미학(Heidegger's Aesthetics of Mimesis), 2016
* 강연과 논문(Vorträg und Aufsätze)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이기상,박찬국(옮긴이), 이학사 2008-01-28. 508쪽
- 기술에 대한 물음 / 학문과 숙고 / 형이상학의 극복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 사물 /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단편 제50) / 모이라(파르메니데스 단편 VIII, 34~41) / 알레테이아(헤라클레이토스 단편 제16)
(6:38, 55OLG) (7:03, 55OMA) (7:20, 55OMF)
# 참조 ***
* 존재의 고독(Seinsverlassenheit) [- Verlassenheit, 고독, 황량, 고립무원.]
현존자의 고독에 관한한 싯달다가 가장 중요한 명제들 중의 하나를 제시했을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원문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고, 삼계가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라 한다. 이 말씀을 마야 부인에게서 옆구리로 태어 사방을 걸고 난 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했다고 한다. 여기에 흥미있는 천상과 지상의 중간자의 역할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 말씀을 말년에 했을 것인데, 후세가 탄생설화에 붙였다고 생각한다. 홀로 존중받는 것이라기보다 자아가 온자아속에 홀로 있음을 자각한 것이라 여긴다. 이기적 표현 같지만 온자아 속에서 자아의 고립으로서는 자치와 자유가 잘 될 수 없기에, 함께 겪는 고통(고독)을 평안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안녕(구원)에 이르는 노력의 결실이 보살이며, 후대는 부타 또는 세존으로 높여 존경의 뜻을 표현했으리라. (55OMA)
독일 철학에서 칸트가 기존의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논하고 난 뒤에 도덕론으로 형이상학을 구축한다고 한다. 판단론(심판론)은 도덕론 이상의 것으로 주어진 것이 있을 것인데, 선(善)에서와 달리 감성론에서 미(美)에 대한 숭고와 장엄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형이상학이 요청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헤겔은 논리적 귀결로서 절대지의 실재성과 완전성을 주장할 것이고, 후설은 본질 직관을 내세울 것이다. 그러면 하이데거는 저세상을 믿지 않은 것 같이 말하지만, 선배들의 철학적 사유과정을 이어받아 형이상학이 성립하기에 현존재(다자인)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게 되면, 그 성립의 이유(la raison)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 실재성이며 완전성인 존재에서 찾으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존재는 그가 처한 환경에서 카톨릭의 신에 유사한 것 같지만, 아마도 독일의 역사 속에서 길어 올렸다면, 루터의 신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독일 철학의 이성이라는 인식적 기능 위에 선전제로서 존재를 다시 데려온 것이 아닌가 한다. 존재의 선전제와 통합적 인식의 이성이 엮어내어, 존재와 떨어지지 않으면서 자기 자체적인 현존재는 구성해 내려고 했을 때, 인간의 현존이 대상과의 관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상을 다루는 기술(τέχνη, technē)이 그들의 이성으로 완전하게 다룰 수 없다는 것은 이성의 한계에 있지 않다고 믿게 되면, 그 이성으로 다른 창조와 창안(ποίησις, poiēsis)의 능력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언어일 것이다.
‘존재’의 절대성에서 벗어나 창조와 창안은 인간(현존재)의 것이리라. 그 창발이 신의 현존 밖에 있을 때, 인간의 고독(die Verlassenheit)이 있을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존재로서 인간의 난제로서 두 가지, 고통과 고독이다. 이를 벗어나는 것을 니힐리즘의 극복으로 여긴다면, 생명체의 기원적 이유(la raison)의 위험과 위협에 대한 문제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이성(la Raison)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지의 의지” 즉 강한 신념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 둘 것인가? 또는 시적 작업(ποίησις, poiēsis)과 그 결과물이 인간에게 선과 미, 그리고 즐거움과 안락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그런 감성이 인간에 내재하고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신을 믿듯이 존재를 믿고 인간 현존재는 이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1936-1946)」은 2차 대전의 기운이 돌고 그리고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인데, 그는 무슨 생각으로 형이상학을 넘어설 것으로 생각했을까? 이성과 기술(+시적 창조)가 국가와 신의 ‘존재’를 넘어서는 역능을 바랐을지 모른다. 그 역능이 사유에 있을 것이라고. 벩송에 비추어보면, 두 가지를 버려야 했다. 속좁은 이성이 인간에게 먼저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상징과 기호일 뿐인 존재, 신, 절대자, 완전을 인간 이성이 알았다고 여기는 사고, 이 두 가지 선전제에 대한 오류가 철학적 사고의 오류라는 것이다. (55O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