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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94권
83. 필정품을 풀이함②
【經】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떠한 깨끗한 법[白淨法]에 머무르기에 이와 같은 방편의 힘을 쓰면서도 오염(汚染)되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로써 이와 같은 방편의 힘을 쓰며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에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면서도 또한 이 몸에 탐착(貪著)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집착하는 이와 집착하는 법과 집착하는 곳, 이 세 가지 법은 모두가 얻을 수 없어서 제 성품[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니,
공은 공을 탐착하지 않고 공에서는 탐착하는 이도 없고 탐착할 곳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공한 가운데서는 공한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이름하여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 하며 보살은 이 공한 가운데에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보살은 다만 반야바라밀에만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그 밖의 법 가운데에는 머무르지 않는 것인지요?”
“수보리야, 무릇 반야바라밀에 들지 않는 어떠한 법이 있더냐?”
“세존이시여, 만일 반야바라밀이 제 성품이 공하다면 어떻게 온갖 법이 모두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지요?
세존이시여, 공한 가운데에는 들어간다거나 들어가지 않는다는 어떤 법도 없습니다.”
“수보리야, 온갖 법과 온갖 법의 모양은 공한 것이더냐?”
“세존이시여, 공합니다.”
“수보리야, 만일 온갖 법과 온갖 법의 모양이 공하다면, 어찌하여 온갖 법이 공한 가운데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이 공한 가운데에 머물러서 신통바라밀(神通波羅密)을 일으키며,
이 신통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에 이르러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선근을 심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들이 모두가 공하고, 이 국토에 계신 모든 부처님도 또한 성품이 공하여서,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이므로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타내면서 붙이는 이름도 또한 공하다고 관찰하느니라.
만일 시방의 국토와 모든 부처님의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그 공에는 치우침이 있지만, 공은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법과 온갖 법의 모양은 공하느니라.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써 신통바라밀을 내어 이 신통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와 여의족(如意足)과 지타심지(知他心智)와 숙명지(宿命智)를 일으켜 중생의 나고 죽는 일을 아느니라.
만일 보살이 신통바라밀을 멀리 여의면 중생을 이롭게 할 수도 없고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을 수 없나니, 이 보살마하살의 신통바라밀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도(道)이니라.
왜냐 하면, 이 천안으로써 자기 자신이 모든 착한 법을 보고 또한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모든 착한 법을 얻게 하며, 착한 법에 대하여도 또한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모든 착한 법은 제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공한 데서 탐착할 것이 없고 만일 탐착한다면 맛[味]을 느끼게 되겠지만, 이 공한 가운데에는 맛이 없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은 천안을 내고, 이러한 천안으로써 온갖 법이 공한 것을 관찰하며,
이 법이 공한 것을 보면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업(業)을 짓지도 않으며,
또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법을 설하면서도 또한 중생의 모양을 얻지 않고 중생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얻을 것이 없는[無所得] 법에 의하기 때문에 신통바라밀을 일으키나니, 이 신통바라밀로써 신통으로 해야 할 것을 능히 하느니라.
이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으로써 사람의 눈을 뛰어넘어 시방의 국토들을 보며,
본 뒤에는 시방으로 날아가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되 혹은 보시(報施)로써 혹은 지계(持戒)로써 혹은 인욕(忍辱)으로써 혹은 정진(精進)으로써 혹은 선정(禪定)으로써 혹은 지혜(智慧)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혹은 37조도법(助道法)으로써 혹은 모든 선정ㆍ해탈ㆍ삼매로써 혹은 성문의 법으로써 혹은 벽지불의 법으로써 혹은 보살의 법으로써 혹은 부처님의 법으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느니라.
또 간탐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법을 설하되,
‘중생들이여,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하나니, 빈궁(貧窮)이란 바로 고뇌의 법이다.
빈궁한 사람은 자신도 이롭게 할 수 없거늘 어떻게 남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들은 부지런히 보시하여 자기 자신도 즐거움을 얻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즐거움을 얻게 해야 하나니, 빈궁 때문에 서로가 헐뜯고 할퀴지 말라. 그러면 3악도를 여의지 못하리라’고 한다.
또 파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법을 설하되,
‘여러 중생들이여, 계법(戒法)을 깨뜨리면 큰 고뇌가 있게 된다.
파계한 사람은 자신도 이롭게 할 수 없거늘 어떻게 다른 이를 이롭게 하겠는가?
계법을 깨뜨리면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되어 지옥에 들어가고 아귀나 축생에 나게 되나니,
그대들이 3악도에 떨어지게 되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제해 주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들은 파계하는 마음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죽을 때에 뉘우침이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
만일 서로가 성을 내면서 다투는 이가 있으면 그들에게 법을 설하되,
‘여러 중생들이여, 서로 성을 내지 말라. 성을 내어 마음이 산란한 사람은 착한 법을 따를 수가 없다.
그대들이 지금 서로가 성을 내어 마음이 산란하면 혹은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아귀에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축생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한 생각이라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겠거늘 하물며 많은 생각을 내는 것이겠는가?’라고 한다.
또 게으른 중생들을 위해서는 법을 설하여 정진을 얻게 하고 산란한 중생들에게는 선정을 얻게 하며 어리석은 중생들에게는 지혜를 얻게 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라.
음욕을 행하는 이에게는 부정(不淨)을 닦게 하고, 성을 내는 이에게는 자심(慈心)을 닦게 하며,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12인연(因緣)을 닦게 하느니라.
그릇된 도[非道]를 행하는 중생에게는 바른 도[定道] 즉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부처님의 도에 들게 하나니,
이런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설하되,
‘그대들이 탐착하고 있는 이 법은 성품이 공하다.
성품이 공한 가운데서는 탐착을 얻을 수 없으니, 탐착하지 않는 모양이 바로 공한 모양이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신통바라밀 가운데에 머물러서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을 짓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신통을 멀리 여의면 중생들의 뜻을 따라 법을 잘 설할 수 없나니,
이 때문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땅히 신통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새가 날개가 없으면 높이 날을 수 없는 것처럼,
보살에게 신통이 없으면 마음대로 중생들을 교화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땅히 모든 신통을 일으켜야 하나니, 모든 신통을 일으킨 뒤에는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면 뜻대로 이롭게 할 수 있느니라.
이 보살은 천안으로써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를 보며 그리고 이 국토 안에 있는 중생들을 보나니,
본 뒤에는 신통의 힘으로 그곳에 가서 중생들의 마음을 알아 그 응하는 바에 따라 그들에게 법을 설하되,
혹은 보시를 설하기도 하고 혹은 지계를 설하기도 하고 혹은 선정을 설하기도 하며 나아가 열반의 법을 설하기도 하느니라.
이 보살은 천이[天耳]로써 두 가지의 음성 즉 사람의 음성과 사람 아닌 이[非人]의 음성을 들으며,
천이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듣고 모두 잘 받아 지니어 들은 법 그대로를 중생들에게 설하는 것이니,
혹은 보시를 설하기도 하고 나아가 열반의 법을 설하기도 하느니라.
이 보살은 타심지(他心智)를 깨끗하게 하며 타심지로써 중생들의 마음을 알아 그 응하는 바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니, 혹은 보시를 설하기도 하고 나아가 열반까지도 설하느니라.
이 보살은 숙명지(宿命智)로써 갖가지의 본래 태어났었던 곳을 기억하며, 자기 자신의 일을 기억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일도 기억하여,
이 숙명지로서 과거 세상에 났을 때마다 그곳에 계셨던 모든 부처님의 명호와 그 제자들을 기억하나니,
어떤 중생이 전생의 일[宿命]을 믿고 좋아하면 그들을 위하여 전생의 일을 들어내 보이며 법을 설하되, 혹은 보시를 설해 주기도 하고 나아가 열반을 설해 주기도 하느니라.
여의신통(如意神通)의 힘으로써는 갖가지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부처님을 따라 선근을 심은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 보살은 누진신통지(漏盡神通智)를 증득하며,
이 누진신통지를 증득하기 때문에 중생들을 위하여 그에게 맞춰 법을 설하나니, 혹은 보시를 설해 주기도 하고 나아가 열반을 설해 주기도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땅히 이와 같은 신통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보살은 이런 신통을 닦은 까닭에 뜻대로 몸을 받으면서도 괴로움과 즐거움에 물들지 않느니라.
마치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이 온갖 일을 하면서도 괴로움과 즐거움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도 마땅히 이와 같이 신통에 유희(遊戱)하면서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켜야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지 않고 중생을 성취시키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인연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인연(因緣)이기에 그것을 완전히 갖춘 뒤에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착한 법[善法]이 곧 보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인연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착한 법이기에 이 착한 법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처음 뜻을 낸 이후로는 단(檀)바라밀 바로 착한 법의 인연이니라. 이 가운데에는
‘이는 베푸는 자이고, 이는 받는 자이다.’라고 분별함이 없나니,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이 단바라밀로써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면서 생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느니라.
이 모든 착한 법은 모두가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인연이며 이 도(道)를 행하여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보살마하살이 생사를 건너니, 이미 건넜고 지금 건너며 장차 건너게 되느니라.
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과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18공(空)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과 다라니문(陀羅尼門)과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 등 이와 같은 공덕도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도(道)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이름하여 착한 법이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이 착한 법을 완전히 갖춘 뒤에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어야 하고,
일체종지를 얻을 뒤에는 법륜(法輪)을 굴려야 하며,
법륜을 굴린 뒤에는 중생을 제도해야 하느니라.”
【論】 해석하겠다. 그때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떠한 선근에 머무르는 까닭에 이런 몸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은 온갖 착한 법을 완전히 갖추느니라”라고 하셨다.
나아가 수보리는 크게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여쭈기를,
“보살마하살의 큰 방편을 성취하는 힘은 어떠한 거룩한 무루법[聖無漏法]에 머무르기에 이런 몸을 받으면서도 축생의 몸에 더럽히지 않는 것이 마치 환술사와도 같고 또한 변화로 된 몸과도 같으며,
어떠한 깨끗한 법[自淨法]에 머무르기에 이러한 방편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방편을 성취하여 갖가지의 몸이 될 수 있으며,
시방의 국토에 사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면서도 또한 이런 몸에 탐착하지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 보살은 세 가지 법을 얻을 수 없으니,
첫째는 이 보살의 몸이요,
둘째는 짓는 바의 사슴이나 말이며,
셋째는 의거하는[用] 법이니라.
왜냐 하면, 이런 법은 모두가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 공도 또한 공한 데에 탐착하지 않고 공한 가운데에도 또한 탐착도 없으니, 법이 없기 때문에 중생도 없고 중생이 없기 때문에 법도 또한 없다.”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은 그 인연을 말씀하시며,
“공한 가운데서는 공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으니,
얻을 수 없는데 보살이 어떻게 이 지혜에 탐착하겠는가? 그리고
“이것을 이름하여 얻을 수 없는 공한[無所得空] 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이 가운데에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라고 하셨으니,
장애가 없기 때문에 쉽게 얻는 것이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보살은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에 머무르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다만 얻을 것이 없는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만 머무르면서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대답하기를,
“어떠한 법인들 반야 속에 들어가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곧 온갖 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 속에 들어가니, 만일 반야바라밀에 머무른다면 곧 온갖 법에 머무르는 것이다.
또 여쭈기를,
“만일 반야바라밀의 성품이 공하다면 어떻게 하여 온갖 법은 모두가 그 가운데에 들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가운데서 수보리는 스스로가 그 인연을 말하면서,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는 나오는 어떤 법도 없고 들어가는 어떤 법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온갖 법과 온갖 법의 모양은 공하느냐?”라고 하시자,
“세존이시여, 공합니다.”라고 하였고,
“수보리야, 만일 온갖 법과 그 법의 모양이 공하다면 온갖 법은 마땅히 공한 가운데에 들어가야 되거늘 너는 어찌하여 공한 가운데서는 나오거나 들어가는 어떤 법도 없다고 하느냐?”라고 하셨다.
그때에 수보리는 마음으로 깊이 수긍하면서 그 해설을 수용하면서도,
이 보살은 몸을 변화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곧 묻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하여 온갖 법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신통바라밀을 일으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을 들으며 매우 깊은 선근을 심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선근(善根)’이라 함은, 모든 다라니문과 삼매문과 무애해탈(無礙解脫)의 근본이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은 성품이 공하거늘 어찌하여 보살은 성품이 공한 바라밀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면서 이런 신통으로써 존재하는 법[有法]을 행할 수 있을까?’라고 여긴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기를,
“공하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들이 모두 공하고 이 국토 안에 계신 모든 부처님도 또한 공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다.
【문】 만일 국토가 공하다면 부처님도 마땅히 공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특별히 말씀하셨는가?
【답】 부처님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진실한 공덕으로 이런 몸을 얻으셨으니, 하나의 발가락으로도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국토를 움직일 수 있으시다.
또 보살은 세상마다 오면서 부처님을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던 터라 신속히 관(觀)하면서 공하게 하지는 못하나니, 이 때문에 국토와 함께 합쳐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만일 시방의 국토와 모든 부처님이 공하지 않다면 공에는 치우침이 있게 된다.
‘치우침이 있다’고 함은 공하거나 공하지 않은 곳이 있음을 말하는데, 이제 실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법과 그 법의 모양은 공하다.”라고 하셨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은 장애가 없지만 육안(肉眼)으로 물질을 보면 환히 통하지 못한다.
위를 볼 때에는 아래를 보지 못하고, 앞을 볼 때에는 뒤를 보지 못하며, 환히 통하면 보게 되지만 막히면 보지 못하며, 낮에는 보고 밤에는 보지 못하는 등의 이렇게 육안의 힘은 적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방편으로 다시 천안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방편의 힘이라 함은, 다른 세계의 4대(大)가 몸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 천안을 사용하는 데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천이(天耳)ㆍ여의족(如意足)ㆍ타심지(他心智)ㆍ숙명지(宿命智)를 내어 중생이 나고 죽고 하면서 나아가는 곳 등을 안다.
보살이 만일 신통이 없다면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만일 신통이 없다면 어떻게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보살이 신통이 있어도 오히려 중생들을 모두 발심하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없는 것이겠는가?
이 때문에 신통바라밀은 바로 보살이 행할 바의 도이다.
보살은 자기 자신이 착한 법을 보고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법을 볼 수 있게 하며, 또한 이 착한 법에도 집착하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법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기 때문이다.
【문】 천안은 물질을 보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착한 법을 보며, 또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을 본다.”라고 말씀하는가?
【답】 원인[因] 가운데서 결과[果]를 말하는 것이다.
천안으로 보되 자기 자신도 보고 그리고 시방의 중생들도 본다.
그런 후에는 타심지(他心智)와 숙명지(宿命智)로써 이 세상과 뒷세상에서의 선근을 추구하면 이 선근과 과보는 오래되어 모두가 닳아 없어지며, 닳아 없어지므로 공인 것을 알게 된다.
이 선근은 모두가 유위(有爲)의 법이어서 제 성품이 없으며,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집착할 수 없다.
또한 맛을 느낄 수도 없고 맛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파리는 어느 곳이건 달라붙지 않는 데가 없으면서도 오직 불꽃에만은 달라붙지 않는 것처럼,
중생이 애착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법에 모두 애착하고 나아가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에 이르기까지도 애착하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오직 반야바라밀의 성품이 공한[性空] 불에만은 애착할 수 없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공하기 때문이다. 만일 반야바라밀이 공하지 않다면 곧 그것이 맛[味]이요 그것이 애착할 수 있는 곳이 된다.
보살은 이 지혜에 머무르면서 유루(有漏)의 업(業)을 일으키지 않고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며,
또한 중생이란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이 얻을 것이 없는[無所得]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면서 신통에 관한 일을 두루 갖춘다.
만일 보살이 이 장애 없는 반야를 얻지 못하면 곧 장애 없는 신통을 얻지 못하지만,
보살이 이 장애 없는 공한 신통을 얻었기에 시방의 국토에 날아가서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으니, 혹은 보시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지계 등으로써 하기도 한다.
간탐하는 이에게는 보시 등의 6바라밀을 설해 주나니,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친히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마치 새에 날개가 없으면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신통바라밀이 없으면 중생을 교화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보살은 천안(天眼)으로는 시방의 국토에 계신 모든 부처님과 그 안의 온갖 중생들을 보고 천이(天耳)의 힘으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는다.
여의신통(如意神通)의 힘으로는 큰 광명을 놓고 혹은 물과 불을 나타내며 갖가지의 변화를 부리는 등 신비하고 특이한 일들을 보이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희유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타심지(他心智)의 힘으로는 다른 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에서
‘애착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 제도할 수 있는 것과 제도할 수 없는 것, 그는 영리한 이인가 둔한 이인가, 그의 선근은 성취되었는가 아직 성취되지 못했는가?’를 알게 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다른 중생들의 마음을 알아 선근이 성취된 이로서 제도될 수 있는 이를 거두어 주게 된다.
숙명지(宿命智)ㆍ생사지(生死智)로는 그의 본말(本末)을 관찰하되,
‘어디서부터 왔는가, 어떤 선근을 심었는가, 어떤 행을 좋아하는가, 여기서 죽으면 어느 곳에 태어날 것인가, 언제 해탈하게 될 것인가?’ 등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제도해야 할 이의 과거 세상의 업의 인연과 미래 세상의 과보를 안다.
또 신통의 힘으로써 이 사람은 두려움을 주어서 제도해야 할 이면 지옥을 보이면서,
“너는 이 가운데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고,
기쁨을 주면서 제도해야 할 이면 그에게는 천당(天堂)을 보이어 그의 눈으로 직접 이런 일을 보고 놀람과 두려움과 기쁨을 품으면서 세간을 싫어하게 한다.
이때에 누진신통(漏盡神通)으로써 번뇌가 다한[漏盡] 법을 설하면 중생은 이 법을 듣고 그 애착하는 마음을 깨뜨리면서 3승으로써 열반을 얻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백로(白鷺)가 고기를 잡으려 할 적에는 헤아려 나아가고 멈추고 하면서 기회를 잃지 않다가
‘바로 이때다.’라고 여기면 덥석 취하여 끝내 헛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신통의 힘으로써 중생의 본말(本末)과 제도해야 할 인연과 국토와 시절 등을 살펴보다가,
그의 신근(信根) 등의 모든 근(根)이 한층 예리해지고 모든 인연이 두루 갖추어졌음을 알면 그에게 법을 설하여 헛되지 않게 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보살이 신통을 여의면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새에 날개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
그 밖의 신통의 힘에 관해서는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길,
“천안으로는 시방 중생들의 나고 죽는 것을 보며 또한 중생들의 마음을 알아 뜻에 따라 법을 설하고, 나아가 신통의 힘을 잘 닦아서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받으면서도 괴로움과 즐거움에 물들지 않느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보살은 중생들 가운데서 혹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혹은 아들이 되기도 하며,
혹은 스승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제자가 되기도 하며,
혹은 상전이 되기도 혹은 종이 되기도 하며,
혹은 코끼리나 말이 되기도 하고 혹은 코끼리나 말을 타는 이가 되기도 하며,
혹은 부귀를 누리면서 세력이 있는 이가 되기도 하고 혹은 빈궁하면서 하천한 이가 되기도 하나,
이 모든 일에 있어서도 물들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이 온갖 일을 다 하면서도 괴로움과 즐거움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온갖 일’이라 함은 앞에서 “갖가지의 아승기 몸으로 변화되어 중생을 제도한다.”라고 한 것을 말하며,
‘괴로움과 즐거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함은 즐거운 가운데서도 애착을 내지 않고 괴로운 가운데서도 성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사에 왕래하는 중생이 그 처소에 따라 번뇌를 일으키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신통에 유희(遊戱)하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문】 보살의 신통력에는 짓는 바가 있거늘 무엇 때문에 유희를 말하는가?
【답】 ‘희(戱)’는 마치 환술사가 온갖 것을 변화로 나타냄과 같은 것을 말하니, 보살이 신통으로 갖가지 일을 변화로 나타내므로 ‘희’라 한 것이다.
또 불법 가운데서는 3삼매(三昧)의 공(空)을 상행[上行]이라 한다. 왜냐 하면 열반의 집착함도 없고 얻음도 없는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행의 법은 모두 하등[下]으로 여기나니, 하등이란 마치 어린 아이와 같다.
이 때문에 신통의 힘을 말하여 유희라 하니,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것 가운데서는 가장 긴요한 작용이다.
‘중생을 성취시킨다’고 함은, 마치 이 가운데서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면서 함께 선근을 닦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어째서 반드시 중생을 성취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가?
【답】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지 못하면 위없는 도[無上道]를 얻을 수 없나니, 왜냐하면 인연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인연[因緣]이란 온갖 착한 법을 말한다.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단(檀)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을 행하며,
이렇게 행하는 법 가운데서
‘이 사람은 보시하는 이다, 이것은 재물이다, 이 사람은 받는 이다’ 하는 등을 생각하거나 분별함이 없나니,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이 한다.
만일 보살이 탐착하지도 않고 마음으로 분별함도 없어서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을 행하면 이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인연이니, 이 도(道)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또한 자기 자신을 제도하고 또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
【문】 보살이 만일 탐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어떠한 허물이 있기에 완전히 갖춘다고 하지 않는가?
탐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받는 이의 은혜가 무거워서인가?
【답】 비록 조그마한 이익은 있으나, 큰 허물이 있게 된다.
마치 맛있는 음식에 독을 섞어 놓으면 그 음식이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하여도 스스로 생명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문】 어떤 것이 그런 허물인가?
【답】 만일 탐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서 그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곧 성을 내고,
또 받는 이가 그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거나 하면 곧 원망을 하며,
또 탐착하는 마음으로 착한 사람에게 보시를 하다가 그에게 조그마한 흉이라도 있으면 곧 혐오하는 것이다.
보시 할 때에는 보시하는 것에 대해 후회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하나니,
만일 보시하면서 마음으로 후회하면 그 받는 과보가 깨끗하지 않게 된다.
또 탐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이는 마음 깊이 재물에 탐착하고 있으므로, 만일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일이 생기게 되면,
곧 그에게 해를 가하며 생각하기를,
‘나는 복덕과 좋은 일을 위하여 재물을 쌓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빼앗는 것이냐’고 한다.
먼저 재물을 탐낸 것은 이번 세상의 일을 위한 것이요, 보시를 한 것은 뒷세상의 일을 위한 것이니, 이에 애착하고 아깝게 여기는 마음이 한층 더 깊어지게 된다.
물들어 집착하기 때문에 만일 빼앗기게 되면 중한 죄를 짓게 되며, 이 중한 죄의 인연 때문에 3악도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탐착하는 인연 때문에 성을 내고, 성을 내는 인연 때문에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며,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게 되면 모든 고뇌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사람이 어리석은 업(業)을 일으키면 안온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뒤에는 반드시 큰 환란이 닥쳐오는 것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말씀하시며 모든 법의 모양이 없는 모양을 진실로 여기신다.
만일 사람이 이런 재물의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는 모양을 취하면 그런 뒤에는 마음으로 탐착하게 되며, 마음으로 탐착하기 때문에 큰 과보를 바라면서 베풀어 주나니,
마치 사람이 수확을 많이 얻기 위하여 많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탐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과보도 적고 깨끗하지도 못하며, 끝내 다한 데로 돌아가 모든 근심과 고뇌를 받는 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나니, 모두가 그 모양을 취한 까닭에 이러한 허물이 있게 된다.
만일 여실한 모양[如實相]으로 보시를 행하면, 이와 같은 허물도 없으며, 한량없는 아승기의 나고 죽고 하는 동안에 모든 복락(福樂)을 받으면서도 또한 다하지 않으며,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에 이른다.
또 만일 사람이 탐착하는 마음으로 착한 법을 행하다가 이 사람이 혹
‘모든 법은 필경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행하던 법을 버리고 이 공한 법에 집착하여 모양을 취하며, 이것을 진실이라 여기면서 앞에 하던 행을 거짓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은 곧 두 가지 법을 잃는 것이니, 앞에서 하던 착한 법을 잃고 삿된 견해에 떨어지게 된다.
탐착하는 마음을 지닌 이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나니,
마치 중병이 든 사람이 비록 여러 가지 약이 있어 치료하면 손해는 없다 하더라도 그 약은 다시 다른 병을 만드는 것과 같다.
탐착하는 마음으로 모든 공덕을 행하면 이와 같은 등의 허물이 있다.
보살은 탐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공한 모양도 취하지 않는 것이 마치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와 같이 하나니,
보시 등의 법에서도 이와 같이 보면서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
또 보살은 보시할 때에 생각하기를,
‘마치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끝내 깨끗한 지혜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아시고 또한 이 보시의 모양을 아시는 것처럼 나도 또한 이 성품으로써 회향하리라’고 한다.
또 이 보살은 일체의 5정(情)과 마음이나 마음에 속한 법[心心數法] 가운데서 작용하지도 않고 행하지 않으니,
모든 법의 모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이 법은 모두가 이 인(因)과 연(緣)에서 생긴 것으로 거짓되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고자 하나니, 이 거짓된 것들을 회향하여 실상 가운데에 들어가면 모두가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모든 법의 깨끗하고도 진실한 지혜를 얻지 못했으므로
〈이것은 거짓이다,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분별함이 있지만,
맑은 지혜로써 알고 나면 모두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될 것이며,
제일의제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청정해져 다름이 없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시 등을 회향하면서 곧장 부처님 도에 이르게 되나니, 이 때문에
“분별함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을 이름하여 진실한 보살의 도라 한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