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에서 원자폭탄, 스파이 파리까지
군사기술에 대한 집착은 놀라울 정도로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군사 분야의 혁명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조직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물론 서로 모르던 문명들이 처음 접할 때 기술적 격차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격차를 일부러 만들고 확대할 생각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제국이 부상한 것은 기술 분야의 마법적 재능 덕분이 아니었으며,
그 지배자들도 기술 개선에 많은 시녕을 쓰지 않았다.
아랍인들이 사산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우월한 활이나 칼 덕분이 아니었고,
셀주크 사람들이 비잔틴 사람들에게 기술적 우위를 지니진 않았으며,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것도 뭔가 독창적인 신무기의 도움을 받은 덕분은 아니었다.
사실 이 모든 경우에서 군사 기술과 민간기술이 우월한 것은 오히려 패배자 쪽이었다.
로마군이 특히 좋은 예다.
로마군은 당시 최강의 군대였지만 기술적올는 카르타고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나을 게 없었다.
로마군의 강점은 효율적인 조직, 강철 같은 규율, 막대한 예비 인력에 있었다.
로마군은 연구개발 부서를 만든 일이 없었으며, 이들의 무기는 몇 세기 동안 거의 똑같았다.
만일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를 초토화시키고 누만시아인들을 패퇴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우누스 장군의 군대가
5밴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갑자기 출현했다면
스키피오는 대제를 상대로도 숭리를 거둘 가능성이 컷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으로부터 몇 세기 전의 장군,
가령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현대의 무장한 여단과 맞선다고 상상해보자
나폴레온은 탁월한 전략가였고 그의 부하들은 정예의 전문가들이었지만,
현대의 무기 앞에서 그들의 기술을 쓸모 없었을 것이다.
그대 중국도 로마와 마찬가지였다.
장군과 철학자 대부분은 신무기 개발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발명은 화약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화약은 생명의 영약을 찾는 도교 연금술사에 의해 우연히 발명된 것이었다.
화약의 이후 경력은 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도교 연금술사 덕분에 중국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중국인들은 새로 만들어진 화합물을 주로 폭죽에 썼다.
송 제국이 몽골의 침입에 무너질 때도,
중세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조직함으로써 엄청난 무기를 발명해 제국을 구하겠다고 생각한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아프로아시아의 전쟁터에서 대포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화약이 발명된 지 약 6백 년이 지난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물질의 치명적인 잠재력이 군사 목적에 이용될 때까지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무엇이엇을까?
왕이나 학자, 상인 들이
새 군사기술이 자신들을 구하거나 부유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15~16세기에 이르러 상황이 번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통치자가 신무기의 연구개발에 자금을 대는 데 흥미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2백 년이 더 흐른 뒤었다.
그때까지는 기술보다 병참이나 전략이 전쟁의 승패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계속되엇다.
체코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유럽 연합군을 무지른 (1805년) 나폴레온은 펍병이었음에도 신무기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이 비행기계, 잠수함, 로켓을 개발할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그를 설득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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