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앨버트의 장남
재위 1901~1910
상당히 인기있고 온화한 성품의 군주로서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앨버트 사이의 2번째 자식이자 큰아들로, 태어난 지 1개월 만에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작위를 받았고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녔다.
아일랜드의 군부대에서 근무할 때(1861.6~9) 한 여배우와 연애한 적이 있는데, 이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이 아버지 앨버트 공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앨버트 공은 장티푸스로 죽기(1861.12.14) 전에 그의 연애사건으로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후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계승권자인 아들 에드워드에게 국정에 전혀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는 5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각의 회의록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1863년 3월 10일 그는 훗날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가 된 크리스티안 공의 큰딸 알렉산드라와 결혼했다.
성장할 때까지 살아 남은 아이는 5명이었는데, 훗날 조지 5세로 왕위에 오른 요크 공작 조지는 그의 둘째아들이었다.
알렉산드라는 가정에 전념했으나 에드워드는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폭넓은 교제활동을 했으며 스포츠계의 명사가 되었다.
특히 경마와 요트, 그리고 새 사냥에 몰두했으며 사교활동으로 몇 차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이 죽자 에드워드 7세로 왕위를 계승했고 1902년 8월 9일 대관식을 올렸다.
그의 통치는 빅토리아 여왕의 오랜 미망인 생활로 다소 가라앉았던 왕실의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02년 다시금 유럽 여행을 떠난 그는 1903년 프랑스 공식 방문중에 온화한 태도와 솜씨 있는 프랑스어 연설로 각계각층의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를 얻어 1904년 양국간 화친협상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의 관계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장시간의 정신적 노력이 필요한 일에는 별 수완이 없었던 그였으나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서는 운이 따랐다.
육군 장관 리처드 버든 홀데인(후에 홀데인 자작)의 대대적인 군사개혁과 해군 장관 존 피셔 경의 해군개혁을 지원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이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