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兵馬都元帥 姜以式 將軍 事蹟 碑銘 및 序文 (鳳山祠 境內)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 사적비명 및 서 문
진주(晉州)는 삼한(三韓) 이래(以來)의 옛 고을이요. 오랜 역사(歷史) 전통(傳統)을 가진 영남(嶺南)의 명승지(名勝地)인데 고을의 진산(鎭山)인 비봉산남(飛鳳山南)쪽 기슭 만인(萬人)이 우러러보는 곳에 높이 지은 이 사당(祠堂)은 고구려(高句麗) 시대에 수병(隨兵)을 무찔렀던 민족(民族)의 영웅(英雄)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을 모신 봉산사(鳳山祠)다.
대대(代代)로 전한 옛터에 사당(祠堂)을 처음 세운 것은 선조(宣祖) 삼년(三年) 서기1570년이요, 임진(壬辰) 왜란(倭亂) 때 진주성(晉州城)이 무너졌던 계사년(癸巳年) 서기1593년에 불타버렸다가 百餘年 後 숙종(肅宗) 사십년(四十年) 서기1714년에 중건(重建)했으나 순조(純祖)때 또 타버리고 뒤에 다시 개축(改築) 이건(移建)을 거듭한 나머지 이 같이 장려(壯麗)한 새집을 이루어 놓았다.
사당(祠堂)에 올라 옷깃을 여미고 참배(叅拜)한 다음 물러나 옛 역사(歷史)를 멀리 상고하건대 우리 민족(民族)은 일찍이 백두산(白頭山) 흑룡강(黑龍江) 일만리(一萬里) 평야(平野)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悠久)한 세월(歲月)을 거처 오면서 민족(民族)으로서의 집단생명(集團生命)을 보전(保全)하기 위해서는 대륙(大陸)의 침략세력(侵略勢力)에 대항(對抗)하여 피로써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 본적이 없었다. 한무제(漢武帝)가 수륙(水陸)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 침공(侵攻)했을 때 희생(犧生)된 이가 얼마였던지 강토(疆土)의 일부(一部)일망정 저들에게 빼앗겨 소위(所謂) 한사군(漢四郡)의 설치(設置)를 보았던 것이나 사백년(四百年) 동안 끈질긴 항전(抗戰)끝에 고구려(高句麗) 사람의 손으로 수복(收復)하고야 말았었다.
대륙(大陸)의 세력(世力)이 바뀔 적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野望)에 대항(對抗)할 수밖에 없었기에 일찍 공손씨(公孫氏) 또 혹 위구(魏寇)와도 싸우면서 장열(壯烈)한 유혈(流血)을 아끼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수(隨), 당(唐) 양조(兩朝) 오제(五帝) 칠십년(七十年) 동안 연인원칠백만대군(延人員七百萬大軍)의 침략(侵略)을 겪으면서 매양 그들을 물리친 민족(民族)의 의기(義氣)는 우리들의 혈관(血管)속에 전(傳)해 내려 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高句麗)는 압록강(鴨綠江) 지류(支流)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을 무대(舞臺)로 하고 일어선 뒤 만주(滿洲)와 연해(沿海)와 서쪽으로 요하유역(遼河流域)에 까지 세력(勢力)을 펴갔던 일대강국(一大强國)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는 수(隨)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일어나 남북조(南北朝)를 통일(統一)시킨 다음 그의 세력(勢力)을 멀리 몽고(蒙古)와 서역(西城)에 까지 뻗어나갔던 막강(莫强) 제국(帝國)이였으므로 서로의 충돌(衝突)을 피(避)할 수 없어 드디어 민족(民族) 항쟁(抗爭)이 벌어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평원왕(平原王) 마지막 해 삼십이년(三十二年) 서기590년(年)에 수(隨) 문제(文帝)가 남조(南朝) 진(陳)을 평정(平定)하자 일찍부터 진(陳)과 친선관계(親善關係)를 맺어왔던 고구려(高句麗)로서는 놀라지 아니 할 수 없어 평원왕(平原王) 다음 영양왕(嬰陽王)이 즉위 하여 두 나라 사이의 충돌(衝突)을 미리 내다본 나머지 성곽(城郭)을 수축(修築)하고 군비(軍備)를 확충(擴充)하며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기에 모든 힘을 다하던 중 수문제(隨文帝)로부터 고구려(高句麗)를 협박(脅迫)하는 내용(內容)의 무례(無禮)한 국서(國書)를 보내왔던 것이니 그 국서(國書)의 내용(內容)은 진작 삼국사기(三國史記), 평원왕(平原王) 마지막 해 본기(本紀)에 실려 있음을 본다.
영양왕 (嬰陽王)은 모욕적(侮辱的)인 국서(國書)를 받고 군신(群臣)을 불러 모아 회답(回答)할 말을 의논(議論)했을 때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이 글로서 대답 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대답하자고 주장(主張)하므로 영양왕(嬰陽王)도 거기에 찬동(贊同) 하여 왕 구년(王 九年) 수문제(隨文帝) 개황(開皇) 십팔년(十八年)서기五九八년에 장군(將軍)으로써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精兵) 오만(五萬)을 이끌고 임유관(臨愈關)으로 향(向)하게하고 먼저 말갈(靺鞨) 병(兵) 一萬名으로로써 지금 만리장성(萬里長城) 서쪽 영평부지방(永平府地方) 인 요서(遼西)로 나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冲)의 군사와 접전(接戰)하여 임유관(臨臨愈關) 곧 산해관(山海關)으로 수병((隨兵)을 유인(誘因)했다.
수문제(隨文帝)는 한왕(漢王) 양양(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行軍)원수(元帥)로 주나후(周羅睺)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하고 수륙군(隨陸軍) 아울러 삼십만명(三十萬名)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정벌(征伐)하고자 요동(遼東)을 향(向) 했으나 수(隨)의 육군(陸軍)은 요서(遼西)의 유성(柳城)까지 나왔다가 장마를 만나고 군량(軍糧)도 떨어졌으며 주나후(周羅睺)의 수군(水軍)은 산동성(山東省) 동래(東萊)에서 출병(出兵)하여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을 향(向)하다가 해상(海上)에서 폭풍(暴風)을 만나 혹은 파선(破船) 혹은 표류(漂流)로 요수(遼水)를 건널 수도 없었거니와 실상은 강장군(姜將軍)이 피루(避壘)를 지켜 항전(抗戰)하고 수군(水軍)을 풀어 거의 전군(全軍)을 격침(擊沈)시켜 수병(隨兵)은 삼십만명(三十萬名)중 十의 八, 九를 잃어버리고 구월(九月)에 헛되이 돌아가니 이것이 수(隨)와의 제일차(第一次) 전쟁(戰爭)이였던 임유관(臨逾關) 전투(戰鬪)요. 강 장군(姜 將軍)의 큰 공적(功績)이였다.
그러나 전쟁기록(戰爭記錄)은 사서(史書)에 적혀 있으면서도 강장군(姜將軍)의 성명(姓名)은 적히지 않아 우리 모든 국민(國民)들은 일천수백년(一千數百年)이 지나도록 그의 사적(史蹟)을 아는 이가 없더니 국사학계(國史學界)의 태두(泰斗)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처음 밝혀냄으로써 민족적 영웅(民族的英雄)의 이름과 업적(業蹟)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흔쾌(欣快)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재(丹齋)는 그의 저서(著書)속에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同雲海) 등 두 가지 문헌(文獻)을 인용(引用)했는데 잡록(雜錄)에는 임유관(臨逾關) 전투(戰鬪)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운해(韻海)에는 살수대전(薩水大戰)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각각 달리 적혀 있는 중에서 단재(丹齋)는 서곽잡록(西郭雜錄)의 기사(記事)를 쫒는다고 말하면서 임유관(臨逾關) 전투(戰鬪)로부터 十三年뒤 수양제(隋煬帝)때에 일어난 제이차(第二次) 살수대전(薩水大戰)때에는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해군(海軍)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군(陸軍)을 맡아 있었기 때문이라 했었다.
물론(勿論) 그같이 희귀(稀貴)한 문헌(文獻)을 발굴(發掘)해낸 단재(丹齋)의 견해(見解)를 따라야만 하겠지마는 다시 생각해보면 제일차(第一次) 임유관(臨逾關) 전투(戰鬪)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지휘(指揮) 했던 강 장군(姜 將軍)이라 제이차(第二次) 살수대전(薩水大戰)때에는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지휘(指揮) 한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태여 장군(將軍)의 지위를 따져야할 필요(必要)를 느끼기보다 그날에 그 같은 민족적(民族的) 대영웅(大英雄)이 계셨던 것을 확인(確認)하는 것으로 족(足) 한 것이다.
그리고 수(隨)나라 문제(文帝) 뒤 양제(煬帝) 양광(楊廣)이 대업(大業) 팔년(八年) 영양왕(嬰陽王) 이십삼년(二十三年) 서기 육일이년(六一二年)에 이백만(二百萬) 대군(大軍)을 동원(動員)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첬다가 참패(叅敗)한 제이차(第二次) 살수대전(薩水大戰) 역사(歷史)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고 기(史記)에 자세히 적힌 바라 재록(再錄)하지 않거니와 강씨 세보(姜氏 世譜)에 의(依)하면 본시 장군(將軍)의 묘소(墓所)가 고구려(高句麗)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다 했고 지금도 만주(滿洲) 봉길현 奉吉縣) 원수림(元帥林) 역전(驛前)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馬元帥 姜公之塚)] 이라는 큰 비(碑)가 있어 數 十年前까지도 여러 후손(後孫)들이 참배(叅拜)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고 젹혀있다.
세상에 역사(歷史)란 오래 지나면 희미(稀微)해지기도 쉽고 잃어버리기도 쉬운 것이다.
장군(將軍)으로써 강씨(姜氏)의 시조(始祖)를 삼아 왔으면서도 자세한 사적(事蹟)을 전하지 못하고 뒷날 신라(新羅) 말엽(末葉)에 태중대부(太中大夫)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지낸 휘(諱) 진(縉)은 시호(諡號)가 정순공(正順公)이요.
진양후(晉陽侯)를 봉(封)한 어른이라 그로부터 진주(晉州)에서 강씨(姜氏)의 본관(本貫)을 삼게 되었거니와 장군(將軍)으로부터 一千三百여년(餘年)을 지나오는 동안에 여러 지파(支派)로 나뉘었으니 각파(各派) 역사(歷史)를 통(通)하여 문무장상(文武將相)으로 무수(無數)한 인물(人物)들이 배출(輩出)되었던 것이므로 여기에 세운 봉산사(鳳山祠)는 다만 강씨(姜氏) 일문(一門)의 영광(榮光)이 아니오. 민족(民族) 전체(全體)의 자랑이라, 우리 모두 민족(民族)의 영웅(英雄)앞에 예배(禮拜)하고 의기(義氣)의 전통(傳統)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해같이 영롱(玲瓏)한 민족(民族)의 영웅(英雄)이여 역사(歷史)의 구름 뒤에 그 모습 가렸다 나타나 환하시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臨渝關)싸움터에 요하(遼河)의 파도 속에 수병(水兵) 삼십만(三十萬)을 쓸듯이 무찌르고 우리 님 개선(凱旋)하실 제 그 영광(榮光) 어떠하던고 일천삼백년(一千三百年)이 바람같이 지나갔어도 장(壯)하신 그 이름 겨레 가슴에 새기옵고 피 끓는 의기(義氣)의 전통(傳統)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이어 가리라.
임유관(臨渝關) 전투후(戰鬪後) 일천삼백칠십구(1379)주년(周年) 되는 단기(檀紀)사천삼백일십년(4311년) 서기(西紀)일천구백칠십칠년(1977년) 삼월 일일(3월1일)
●후학문학박사(後學文學博士)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짓고
●영가(永嘉) 김충현(金忠顯) 쓰다 ●(봉산사(鳳山祠) 사적비(事績碑)에서)
단어(單語) 풀이
1. 장려(壯麗) : 장엄(莊嚴 )(규모(規模)가 크고 엄숙(嚴肅)하고 화려(華麗)함.
2. 유구(悠久) : 년대가 길고 오래됨. 유원(悠遠).
3. 강토(疆土) : 나라의 국경 안에 있는 땅.
4. 항쟁(抗爭) : 항전(抗戰).(적에 대항하여 싸움)
5. 모욕(侮辱) : 깔보고 욕(辱)되게 함.
6. 표류(漂流) : 물에 떠서 흘러 감. 아무 정처 없이 돌아다님.
7. 격침(擊沈) : 적(敵)의 배를 쳐서 침몰(沈沒)시킴.
8. 총(塚) : 무덤.
9. 개선(凱旋) : 싸움에 이기고 돌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