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소나무와 금강소나무의 문화적 관계
글·사진 / 이정호 (고려대학교 환경생태연구소)
소나무의 문화생태적 맥락
한반도의 중부 및 남부의 고대 사회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목조건축물의 나무의 수종을 분석해본 흥미로운 데이터가 올해 8월 23~27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23차 IUFRO 세계총회(세계산림과학대회)에서 발표된 적이 있다. 8월 25일 ‘목재 및 산림문화 세션(Session H-10: Wood and Forest Culture)’에서 발표된 것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목조건물에 가장 흔히 쓰인 목재는 단연코 소나무(Pinus densiflora)가 으뜸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이터였다. 소나무 다음으로 참나무, 느티나무, 그리고 전나무가 쓰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시대와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기원 이전 고대 사회의 건축물 목편을 분석한 결과는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밤나무, 굴피나무, 가래나무, 느티나무의 활엽수가 대체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데이터의 지리적 제한성은 있지만 이 결과는 화분분석과 같은 환경고고학적 데이터와 함께 첫째로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했던 인간과 숲생태계의 상호작용을 건축목재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해주고 있었고, 둘째로 고대 사회에서 고려 이전의 사회에 이르기까지는 참나무를 위시한 활엽수가 한반도를 덮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는 산림사(forest history)의 사실을 지지해주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는 낙엽활엽수 극상림으로 뒤덮인 한반도에 이주 정착한 신석기인들로부터 청동기 및 철기시대의 고려 이전 사회의 사람들이 낙엽활엽수를 벌채하면서 문명을 일구어 나간 사실을 지지하는 데이터이다. 만주와 한반도로 철기의 유입 시기가 중원의 전국시대인 기원전 5세기경이며 주로 전국시대의 한 나라인 연(燕)나라로부터 전파되었을 것으로 이야기한다. 만주와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이때부터 더욱 심화되고 광범위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기원후 10세기에 고려왕조가 시작되니까 기원전 5세기 무렵의 철기 유입 이후 약 1,500년 동안 인간의 거주지 주변의 활엽수림이 건축물이나 선박재 및 난방 및 취사 연료로 채취된 사실을 지지해주는 것이다.
소나무가 만주와 한반도의 거주인들의 삶과 문화에 크게 기여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2,500년 전에서 1,000년 전, 곧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10세기에 이르는 소나무숲의 상대적 면적이 얼마나 되었을지에 대한 추정은 쉽지 않다. 그런데 고려시대부터 소나무가 건축목재로 활용되는 비율이 증가되는 것으로 보아서 고려 초기 이전의 통일신라 및 발해 혹은 그 이전 수백 년 혹은 1,000년 전부터 소나무숲의 비율이 증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기의 유입과 농경의 발달로 인해서 인구밀집지역에서 활엽수가 벌채되어 척박해진 토양에 소나무 종자들이 날아 들어와서 소나무숲을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충북대 연구팀의 데이터 발표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화재 건축물의 약 80%가 소나무로 되어 있는데, 고려시대는 그 비율이 약간 낮다(약 60%). 고려시대에는 소나무 다음으로 느티나무의 비율(약 30%)이 활엽수 중에서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큰 기둥감으로 느티나무를 이용하는 문화는 한반도 남동부에 왕경(王京)을 가지고 있던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 제2권 가옥편에 보면 신라 사회에서 신분이 진골이거나 6두품인 경우는 집을 지을 때 산유목(山楡木)을 쓸 수 있지만, 5두품, 4두품 및 일반 백성은 산유목으로 표기된 활엽수를 쓰지 못하게 금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이 보통으로 번역된 느릅나무(Ulmus spp.)였으면 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목(楡木)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느릅나무는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 그의 고향에서 사(社)나무로 여긴 중요한 나무였다. 산유목(山楡木)으로 쓴 것은 고려시대의 목재의 용도로 보나 이후에 한국의 마을 나무에 느티나무(Zelkova serrata)가 많은 사실에 비추어 느티나무인 것으로 보인다. 느티나무와 팽나무(Celtis spp.)와 느릅나무는 같은 느릅나무과(Ulmaceae)에 속하고 충북대 연구팀의 데이터에서도 고대 사회에서 건축재로 사용된 것 데이터에 나타난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목이 바로 소나무라는 사실과 목재의 이용성이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은 그 문화생태적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던져준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문화생태적 질문은 이렇다. 실제로 소나무숲이 많아지고 그 목재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해서 왕조의 시조들이 문화적 의미를 가져오게 된 것일까? 아니면 6세기 고구려 소나무-현무 고분벽화의 사례와 같이 만주-한반도에 자생한 문화적 상징성이나 서해 건너 중원의 문화에서 유입된 소나무의 문화적 상징성이 소나무를 더욱 많이 이용하게 만든 것일까?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문화생태학(cultural ecology)의 시각으로 인간의 생태적 적응으로서의 문화를 더욱 강조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고, 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문화에서 인간의 의식과 의지를 더욱 강조하는 해석이 된다.
황장목과 대경재 생산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재는 다양한 용도로 소비되었다. 특히 조선 조정은 소나무의 장양(長養)을 위해서 국초부터 소나무숲을 금산(禁山)으로 지정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이후에 봉산(封山)을 지정하여 소나무를 보호하고 벌채를 금했다. 소비량의 측면에서 건축재와 선박재가 가장 많이 소비되었다. 조선 후기 소빙기가 와서 기후가 추워지고 온돌이 남부지방의 일반 백성의 가옥구조에도 도입되면서 연료재의 소비도 엄청나게 급증했다.
조선시대의 대경재 소나무, 곧 줄기의 지름이 아주 큰 소나무숲을 조성하고 장양하는 목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로 왕실의 관을 짜는 최고급 목재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17~19세기의 봉산체계 중에서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봉산은 거의 모두 황장목을 공급하기 위해서 장양하는 황장봉산이었다(그림 1). 둘째로 소나무 대경재는 궁궐이나 다른 큰 건물의 들보와 기둥에 들어갈 목재였으며, 셋째로 수군의 병선과 조운선을 만드는 재료였다.
최고의 대경재 개체목은 황장목(黃腸木)이었다. 1746년 나온 조선 후기의 법령집 『속대전』이나 『수교집록』에 의하면 황장목은 형질에 있어서 줄기 단면의 중간이 누런색을 띠어야 했고, 관곽재의 성격상 폭이 2자 4치에서 2자 8치 정도까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벌채한 후 조제한 목재로 환산해보면 수피를 제거하여 거의 70~85cm의 직경을 가진 통나무가 나올 만한 소나무여야 한다. 그리고 일부의 예외적인 시기가 있었지만 왕실이나 사대부의 관곽은 대경재 소나무에서 나온 광판(廣板)을 아래 위판으로 해서 짜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판이 나올 만한 대경재는 필수 요소였고 따라서 이러한 대경재는 수백 년의 장양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조선의 지도층은 알고 있었다.
건축재 중에서 가장 직경이 큰 목재는 대들보(大樑)나 높은 기둥감(高柱)인데 문헌에 의하면 주로 2자 2치에서 2자 4치 정도까지 되어 거의 60~70cm에 육박한다. 건축 대경재는 또한 관곽재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게 7자 1치(210cm)에서 8자 6치(250cm)의 길이를 가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37자(11m)에서 48자(15m) 정도까지 긴 목재를 필요로 했다. 황장목은 대부분 그 직경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지만 대들보나 높은 기둥감은 또한 최대 3자(90cm)까지의 직경을 가지는 장대통직한 목재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과학기술로 측정하고 추산한 소나무 개체목과 숲(임분)의 성장곡선이나 수확표 데이타를 들여다보면, 조선시대와 같이 최대 3자(90cm) 정도의 대경재 소나무를 키워내려면 적어도 200년은 키워야 한다는 추산이 나온다. 황장목 개체목을 하나 지속적으로 보전하여 키우려면 적어도 2세기 정도의 기다림과 절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또한 대들보가 가끔은 큰 기둥보다도 더 굵은 목재를 요구하는데 그래도 2자 5치 정도가 되게 키우려면 적어도 150년은 길러야 한다. 1865~1868년에 이루어진 경복궁의 중건에 필요한 소나무재가 없었다는 것은 적어도 1710년대에 한반도의 소나무숲에서 발아하여 150여 년 후에 인간이 베어 쓸 수 있는 지역에 자라나기 시작한 치송(稚松)이 아송(兒松)의 단계를 거쳐서 소송, 중송, 대송으로까지 자라나는 데에 여러 가지 환경적, 인위적 변수들이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방해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150년의 반이면 충분하니까 그냥 베어쓰고 말아버렸고, 그렇게 지나가니 또 다음 세대의 소나무들도 그런 운명을 껴안게 된 것이다.
조선 조정은 황장목이라는 문화적 소나무 브랜드를 필두로 해서 해안과 도서 지방의 대경재를 수백 년 동안 장양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4세기 말 조선이 새로운 왕조로 개창되면서 소나무를 왕실의 관곽을 짜는 나무로 지정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수백 년 된 대경재 소나무를 벌채하여 궁궐 안의 장생전(長生殿)에 보관하면서부터 붙여진 문화적 브랜드가 바로 황장목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현대 한국의 문화사회적 임업에도 적지 않은 함의들을 가져다준다. 황장목의 벌채를 위해서 조정에서 황장목 경차관을 파견하였고 황장목 벌채 지역으로 결정된 지역의 관아와 백성들이 황장목 벌채와 운반의 역(役)에 동원되었다. 예조 관할하의 궁궐 안 장생전에 보관되는 황장목 광판의 수급에 따라서 이러한 경차관 파견과 벌채가 이루어졌다. 17~19세기에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에서 벌채한 황장목 목재는 속재궁감으로 쓰고 전라도 해도의 세 황장봉산(순천 거마도, 흥양 절금도, 강진 완도)에서 벌채한 목재는 겉재궁감으로 썼다(그림 1). 재궁(梓宮)이란 관곽재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것은 조선 말기의 법전인 『대전통편』 (1865년)에도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적고 있다.
현대과학과 다이어몬드 브랜드 문화
현재 한국의 산림청과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려고 하는 금강송(金剛松)이라는 소나무의 지역 형태 이름은 1930년대의 일본 산림과학자의 소나무 구분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우에기 호미키 박사가 지역 분포, 수관(crown), 수간(stem), 침엽의 특성에 기초하여 38가지 품종으로 구분하였는데 현재는 엄밀한 의미의 품종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1930년대 이후로 소나무의 지역적 형태로 동북형, 금강형, 안강형, 중남부 고지형, 중남부 평지형, 위봉형 등으로 구분되었다(그림 2). 그 중에 금강산을 지역의 대표명으로 하여 붙인 소나무의 지역 형태가 금강형이고 보통 금강송이라고 한다.
금강송의 분포지역을 황장봉산의 분포지역과 같이 들여다보면 이것이 거의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1와 그림 2). 우리는 문화적 목적인 왕실 관곽재로 최고의 대경재를 쓰기 위한 소나무 보호지역이 바로 1930년대의 서구적 과학의 방법론을 이용한 구분의 시도와 거의 같다는 사실에 놀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숲의 개체들이 나타내는 ‘집단적 혈통’을 살펴보는 첨단 생명과학적 연구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더욱 강력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2007년에 산림유전학 전문 학술지 『실베 제네티카(Silvae Genetica)』에 게재된 국립산림과학원 연구팀의 엽록체 DNA 유전표지를 이용한 연구에서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의 소나무 개체목들의 집단적 혈통이 가장 유사해서 다른 지역의 것들과는 구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림 4). 엽록체는 보통 모계유전이라서 엽록체 DNA 표지들을 이용하면 현재 숲에 존재하는 소나무 개체들끼리 유전적으로 가깝고 먼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 마치 범죄현장에서 혈흔이나 정액의 DNA를 통해서 범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이나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에서 유전자 지문으로 DNA 표지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실험방법과 비슷한 데이터 해석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최근의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한 집단적 혈통으로도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의 소나무들은 같은 무리로 보게 되고 그 이외의 남한지역의 소나무들과 구분된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과 함께 문화적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현대에 발견된 황장금표 및 황장봉표는 모두 이러한 황장 소나무숲을 보전하던 곳에 조선 조정이 세운 암석의 각석들이다. 봉표는 목재로도 세웠지만 현존하는 것은 영월 사자산 황장금표처럼 아주 인적이 드문 곳에 암석에 새긴 것들이 대부분이다.
DNA를 이용한 연구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현존하는 태안지방의 소나무들(집단 4)의 집단적 혈통으로 가장 가까운 현존 소나무 집단이 경상북도 울진(집단 3)과 봉화(집단 12)의 소나무들이라는 사실이다(그림 3). 태안은 안면도와도 가까운 곳이고 안면도는 고려시대부터 병선과 궁궐재를 조달하던 대경재 소나무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안면도의 휴양림의 소나무는 높이 자라면서 곧은 특성을 보여서 금강송과 비슷한 형질을 보인다. 더욱 정밀한 과학적 데이터가 있어야 하겠지만 안면도나 태안의 소나무들이 경상북도 울진과 봉화의 소나무와 공통조상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안면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들이 실제로 그 유전적 맥락에서는 태백산맥 지역의 소나무, 곧 우리가 금강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들과 조상이 같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금강석이 바로 영어로 다이어몬드이다. 금강송은 다이어몬드 브랜드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금강송의 지역에서 채취한 소나무씨나 치송들을 조선시대의 사람들이나 혹은 그 이전에 태안이나 안면도로 인위적으로 옮겨져 육성되었을 가능성도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 능원림의 나무들이 다른 새로운 능원의 조성 시에 옮겨 심겨진 역사적 사료들이 현재 발굴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동쪽 산지에서 서쪽 해도(海島)로 옮겨지는 대단위 식수 사례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천년을 이어온 소나무문화의 문화생태학을 현대에도 보전하면서 소나무문화 이전의 느티나무와 참나무를 필두로 한 활엽수 문화를 같이 아우르려 하는 것은 좀 지나친 욕심일까? 하지만 한반도와 만주의 산림문화적 정체성에는 이러한 다층적인 구조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고구려인들이 고분벽화에 그린 단군조선의 신단수도 활엽수로 그려지고 있다. 1970년대 조림 10대 수종이라는 선택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의 산림문화 수종을 10개 정도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림 1.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에 분포된 황장봉산(■황장봉산; ●봉산). 임진왜란 이후 숙종대에 와서 주로 형성된 봉산(封山)체계에서 왕실의 관곽재를 만드는 목재를 공급하는 대경재를 생산하는 지역으로 설정된 황장봉산은 주로 강원에 분포하고 있다(빨간색 타원 표시 지역). 일부는 전라도의 남해안 지역의 세군데(초록색 타원 표지 지역)이다.
그림 2. 1930년대 소나무의 분포지역별 형태. 1930년대에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산림과학자가 현대 산림과학의 입장에서 소나무의 품종의 구분을 시도하였다. 그 중에 강원도 와 경상북도 북부에 분포하는 유형은 금강형으로 구분하였다. 당시에 일본 사람들에게도 금강산 여행에 대한 광고가 유행할 정도로 유명했었던 사실에 비추어 금강산의 장대통직(長大通直) 소나무를 중심으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3. 현대 엽록체 DNA를 통한 소나무 집단의 구분. 최근에 산림유전학(Forest Genetics) 전문학술지인 『Silvae Genetica』 (독일연방 산림과학연구소 간행)에 실린 국립산림과학원 연구팀의 데이터에 의하면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표본뜨기한 소나무들이 가장 가까운 유연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면송은 경북의 울진과 봉화의 소나무와 유연관계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