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6일 화요일 <불교와 기독교의 왜곡, 능동적 니힐리즘과 책임윤리>
[김용호] [오전 6:29] 굿모닝입니다~^^ 오늘도 휴일^^
어린이날 수업 못한 아이들을 보충 수업 하느라 오는 길에 석가탄신일 행진 준비를 하고 있는 사찰을 보았습니다. 불교의 변질과 기독교의 변질의 유사성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한 번 더 요약하자면~
불교는 탐진치(탐욕과 분냄과 어리석음)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무명의 존재가 깨달음의 빛으로 나와야 함을 강조하던 교리에서 만유불성, 개유불성(모든 존재 안에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이라는 사람들 귀를 간지럽히는 교리로 왜곡되었고,
기독교는 목숨을 건 회개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 가르침에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괴이한 교리로 왜곡하더니 진보기독교에 이르러서는 믿는 안 믿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image of God)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왜곡까지 이르렀습니다.
어찌 그리 하는 짓이 똑같은지요.^^
제가 출가를 결심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는 동안 설악산에 갔다가 대청봉 밑 봉정암에서 보름 동안 함께 지냈던 중년의 스님이 저에게 간곡히 했던 말이 기억나는군요.
“출가보다는 재가신도의 길을 가라고 권하고 싶네.”
아마도 자신이 출가한 것이 무척이나 후회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마음이 불교를 왜곡시키고 기독교를 왜곡시킨 것이겠지요.
불교는 금욕적 수행이 교주인 부처의 명령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기독교는 성경에서 금하는 금욕주의가 엉뚱하게도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니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복된 삶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감격과 감사 속에서 회개에 매진하였을 것이고 불교와 같은 꼼수를 동원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서구 기독교의 헛발질의 원인으로 다음 몇 가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1. 금욕주의의 유혹
2. 인간 긍정의 유혹
3. 로마 제국주의의 유혹
이 세 가지 유혹이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서구 기독교의 잘못된 조직신학을 만든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군요. 특히 인간론과 구원론과 교회론에서 말이지요.
금욕주의는 성경의 약속과 명령을 부담스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성경을 별 부담스럽지 않은 내용으로 해석하는 왜곡을 불러왔고,
헬라 철학의 인간 긍정의 시각은 성경의 인간론과 구원론을 왜곡시킴으로써 회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고,
로마 제국주의는 기독교인들도 생존과 변영을 추구하고 로마 시민의 도덕과 법률을 따르는 것으로 성경의 약속과 명령을 해석하게 한 것입니다
통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용호] [오후 1:05] 스카이라운지에 왔더니 이번엔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저를 반기는군요^^
[임지웅] [오후 1:10] 우리가 흔히 '아카시아'라 부르는 나무는 '아까시'입니다. 학명의 혼동으로 '아카시아'라고 불렸는데, 둘은 다른 속의 식물입니다. 참고를 위해서 ^^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김용호] [오후 1:11] 오~~ 처음 알았어. 감사^^
[임지웅] [오후 1:12] 저는 전도사님 덕분에 매일 매일이 처음입니다.^^
[김용호] [오후 1:12] ^^ 화이팅~!!
[김용호] [오후 3:14] 아까시 꽃을 뒝벌과 싸우며 따서 우리 사장님 자리에 담아 드렸더니 사장님 하시는 말씀~
“옴마~ 감동이예요~”
ㅋㅋㅋ 실내에 아까시 꽃향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정진호] [오후 3:18] 사장님의 마음까지 챙기는 전천후 매니저시네요.^^
[김용호] [오후 3:19] 심기 경호~!! 장세동이 전두환에게 했다는 전설의 경호~!!
[정진호] [오후 3:20] 경호의 정석을 보여주시는군요.
[김용호] [오후 3:2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함께 싸우는 동지에게 바치는 충성입니다~!!!
[정진호] [오후 3:21] 좋습니다.
[김용호] [오후 3:21] 화이팅~^^사장님이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수업에 들어가셨다는~ ㅎㅎ 뒝벌과 사투를 벌인 보람이 있군요. 곰처럼 크다 해서 한자로 웅봉~ 시커멓고 무시무시하게 큰 놈입니다.
[정진호] [오후 3:34] 벌에 한번 쏘여봐서 그 위력을 잘 알지요.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 벌에 쏘이는 순간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 정도입니다.
[김용호] [오후 3:41] 으윽~ 제가 겁이 없었군요.^^ 식은땀이!!! ^^
[정진호] [오후 3:49] 그 꽃의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사장님이 아셔야 하는데.ㅋㅋ 이 수다 보시면 알겠지요.^^
[김용호] [오후 3:50] 그렇습니다.^^ 보시라고 할 겁니다. ㅋㅋ
[김용호] [오후 10:07] 세월호 사건에 손봉호 교수가 입을 열었군요. 이번 일이 사회 전반적으로 돈이 우상이 되면서 일어난 일이고 사회 지도층의 책임, 특히 종교계의 책임도 크다고 했는데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발언을 했습니다.
1. 현대 윤리는 동기 윤리가 아니고 책임 윤리다.
2.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심을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시민 사회의 분노에 기반한 감시 시스템이 중요하다.
가이사의 세계에서 석학이라고 불릴 만한 안목을 가진 분이군요. 어제 말씀드렸던 enlightened selfishness보다도 탁월한 냉철한 과학적 사고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신학을 먼저 공부했던 윤리학자지요. 신학에서 윤리학으로 전향하시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동기 윤리에서 책임 윤리로의 변화....
책임 윤리는 지난번 말씀드렸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의 동생인 리차드 니버가 처음으로 주장했던 이론인데 현대 윤리가 책임 윤리로 바뀌었다는 것까지는 제가 몰랐습니다. 흐음.... 사람들이 점점 더 냉철해지고 더 과학적으로 진화되어가고 있군요. 어제 말씀드렸던 청와대에서 헛소리를 한 종교인들보다 손봉호 교수 같은 세상 사람들이 훨씬 탁월하군요.
(손봉호 교수를 기독교계에서 어른 대접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데 ~ 손교수 본인도 그런 처신을 많이 하더군요 ~ 저는 항상 손교수를 모범적인 세상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비극이지요. 손 교수가 기독교를 떠난 슈바이처만큼 냉철하지는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종교도, 그리고 철학 등의 모든 학문도 결국 인간의 비극적인 실존과 상황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존과 번영의 문제지요. 이에 대한 접근 방식을 크게 나누면 도전, 포기, 초월의 세 방식이 있습니다. 포기의 방식은 허무주의 등인데 동서양에 모두 있지요. 복잡한 것은 도전의 방식과 초월의 방식인데 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실존과 상황의 비극에 대한 대처 방식> 또는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에 대한 인간의 대처 방식>
서구 철학적 대처 방식은 도전으로 일관되어 오다가 19세기에 포기를 겪습니다.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이라고 부르지요. 이 니힐리즘이 다시 도전과 결합하면서 능동적 니힐리즘을 낳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 후에 자포자기식으로 발버둥을 치게 된 것이지요. 극단적인 예가 무한 경쟁을 기반으로 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입니다. 책임 윤리도 그에 대한 대응이라 할 수 있겠군요. 상호 감시를 선택했으니까요.
기왕의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모두 유치한 낭만적인 접근으로 보는 것이 책임 윤리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들의 주장이 어찌되었든 간에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똑똑한 좀비들~~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고 자포자기하게 된 인간들에게 남은 것은 발악과 통제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설득은 피차 무의미한 일이 된 것이지요. (앞으로 사회학과 심리학이 철학을 대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진리는 개뿔~~ 돈이 최고지!"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게 된 인류에게 자신들의 공멸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과 심리학일 것입니다. "어차피 죽고 끝날 인생"이 현 인류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철학을 기반으로 한 윤리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윤리학으로~
(이러한 인류에 대한 분석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을 물에서 건져낼 책임이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좀비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드디어 자신들이 좀비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이겠습니다. (스스로 좀비임을 자각한 자들이 장악한 기독교가 오늘날의 실용주의 기독교라 하겠습니다.)
윤리 도덕 세뇌에서 자발적인 상호 감시와 통제 시스템으로의 전환.... 탁월한 선택이군요. 오늘날 스승이 사라진 중고교 교육 현장의 실태가 바로 그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룩과 경건을 외치던 기독교가 은사와 기복을 외치는 기독교로 급속히 바뀐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막장 인생들이 교회에 모이게 되었으니까요. 그 기반에는 현 인류의 니힐적인 통찰이 있었던 것이지요..
발악하는 막장 인생들의 능동적 니힐리즘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과 서구 기독교를 향해 우리가 취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전략은?
전략은 더 단순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자 간의 비교가 더 명확해졌으니까요.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는 좀비들이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더 골치 아픈 상대지요.
처음에는 구시대 인류의 도전 방식과 초월 방식부터 분석해보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별 의미가 없겠네요. 이미 현 인류가 스스로를 좀비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손봉호 교수님께 감사~^^
막장 인생이 아닌 우리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전략상 부족함이 없겠다는 결론을 끝으로 오늘 밤 수다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즐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