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4. 무너지는 불교와 중국(송 원 명 청의 불교)
57) 관료제 사회의 만개와 제도화되는 선종
오대십국의 변화와 송나라 등장
당나라는 안사의 난 이후로 쇠퇴의 길을 걸음. 907년 주전충의 후량에 의해서 당이 멸망.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재통일을 이루는 979년 동안 72년간 오대십국이 시작됨.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의 세종에 의해 또 한번 폐불(955-958)이 단행됨으로써 중국불교는 재기의 가능성을 상실함.
송나라의 문치주의와 대장경 간행
송나라때는 기존의 불교관련 기록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리하는 총서편찬 즉 대장경의 간행이 이루어짐. 개보칙판 대장경은 1,076부 5,048권으로 이루어짐. 고려에스는 초조대장경이 1011년-1029년에 제작되며 이후 해인사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제조대장경이 만들어짐.
58) 남송시대와 한족의 불교에 대한 비판
문약한 송나라와 남송의 성립
성리학의 완성과 육왕확 성립
변화를 거부한 불교, 굳어버린 불교
성리학이 완성되고 육왕학이 확립되는 등 남송시대 신유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함. 불교는 변화를 하지 못하고 몰락함.
참고)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1]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 지식과 실천의 일치)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
59) 세계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과 티베트 불교
티베트 불교의 중국점령과 외형적 성장
티베트불교는 인도의 밀교와 티베트의 전통적인 무속신앙인 본교가 습합된 주술적인 종교임. 1239년 몽골족의 티베트 점령과정에서 티베트 불교는 몽골족에게 강한 인상을 남김. 그래서 티베트는 몽골족에게 항복했지만 자치권을 인정받고 몽골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임.
1309년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 보호는 정점에 다다름.
라마를 때리는 자는 손을 자르고 욕하는 자는 혀를 자른다는 칙령을 반포할 정도
티베트 라마들은 원나라의 비호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한족의 재산과 여성을 착취함. 원나라 시대 중국과 동아시아 불교는 티베트 불교에 의해서 외형적으로는 성장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몰락의 길을 걸음.
60) 거대제국 속 또 다른 세계인의 등장 - 지공
인도에서 시작해 21개국을 유력한 지공
지공(1300-1361)은 스리랑카를 포함하는 인도를 유력하고 이후 티베트와 중국 서남쪽의 운남 대리국을 거쳐 강남을 경유,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지금의 북경)에 다다름. 총 21개국을 거친 것임. 지공의 유력기록은 자료가 극히 미비한 인도불교와 티베트 불교에 대한 내용을 알게 해줌.
인도불교의 마지막과 고려의 금강산
티베트불교에 의해서 무너지는 중국불교
대도(북경)로 돌아간 지공은 10년동안 일종의 금고상태에서 먹지도 먹하는 등의 핍박을 받음. 이유는 지공이 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던 티베트 불교세력과 충돌했기 때문임. 이 과정에서 중국불교는 다시한번 몰락하는 과정을 겪음.
61) 중국의 일부가 된 불교
홍건적의 난과 승려출신의 주원장
.. 명태조가 되는 주원장은 안휘성 출신으로 1345년 17세의 나이로 일찍이 황각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됨.
주원장의 불교옹호
주원장은 승려출신으로 '스스로 반야경, 능가경' 등을 강의하며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임. 그러나 주원장이 죽고난 후 과도한 출가자 수는 국가문제로 대두되면서 출가자에 대한 제한조치가 취해짐.
유불도 삼교의 합일
명나라 불교의 중요한 인물(4대 고승) '운서 주굉, 자백 진가, 감산 덕청, 우익 자옥'이 있음.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유불도 삼교의 합일을 추구했다는 점임.
명말 4대 고승의 업적
운서 주굉 : 31세에 출가. 1571년 항주의 운서산으로 들어감. 정토신앙을 중심으로 선종을 결합하여 선정일치를 주장했으며 도교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교화하기도 함. '왕생집 3권, 선관책진 1권'
자백 진가 : 17세 출가. 감산 덕청과 함께 대장경을 간행. 진가는 모든 종파의 주장을 상호보완적인 관점에서 통합하려고 하였으며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도가 등을 아우름. '자백존자전집 30권'
감산 덕청 : 11세에 출가에 뜻을 세우고 19세에 정식으로 출가. 덕청은 선의 가르침과 정토가 다르지 않다고 주장. 화엄과 선사상의 일치를 역설함. '화엄경강요 80권, 관능업경기 8권, 대승기신론직해 2권, 원각경직해 2권'
우익 지욱 : 유교를 공부하여 불교를 비판하는 '벽불론'을 저술한 인물. 그러다가 주굉의 제자인 설영에게 출가함. 이후 정토를 중심으로 모든 종파를 아우르는 원융한 견해를 제시함. '능엄경문구 10권, 비니사의집요 10권, 열장지진 48권'
62) 유교의 옷을 입은 불교
왕수인의 마음주의와 양명학
왕수인 36세 '용장오도' - 나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 부가된 것은 헛될 뿐.
'지행합일'
중국불교가 성리학에 미친 영향
양명학의 옷을 입은 선종
63) 출가하는 황제, 무너지는 중국
이자성의 난으로 천하를 얻은 청나라
유교의 한계와 새로운 불교의 부재
순치제의 출가
태평천국의 난과 중국의 몰락
청나라는 순치제의 아들인 4대 강희제(재위 1661-1722),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재위 1735-1795) 3대에 걸쳐 최고의 전성기
건륭제 당시 1792년 영국 무역대표단 메카트니가 건륭제를 만나 무역을 제안 '중국에서 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교역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할정도로 풍요로움.
1840년 아편전쟁
기독교도의 태평천국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