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초심상 원문보기 글쓴이: 방진영
시의 고향을 찾아서20
- 질마재 신화 ... 서정주 편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더위도 10월로 접어들면서 물러나고 아침저녁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바야흐로 국화의 계절, 온 사방에 국화향기가 퍼진다. 취재팀이 달려가는 질마재 산모퉁이 산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진한 향기로 반긴다.
서정주(1915년~2000년) 시인, 그는 1915년 5월 18(음)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서 아버지 서광한과 어머니 김정현 사이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선운리 질마재는 마을의 주산인 소요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한쪽으론 서해바다가 펼쳐져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시인은 1924년, 줄포보통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유년 시절을 이곳 질마재에서 보낸다. 보통학교 입학 전에 그는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7살 때엔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취재팀이 찾아간 질마재는 한때 15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여느 농촌마을과 다름없이 한적하기 그지없다. 먼저 (미당)문학관에 들러 둘러보고 생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초가집 두 채가 나란히 있다.
< 서정태(미당의 동생) 시인과의 대담 >
좌편(정면에서)의 집(미당생가)에선 인기척이 없고 옆집에서 노인 한 분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미당의 친동생 서정태 시인이다.
서정태 시인은 형님 집(미당생가) 옆에 울타리를 같이하여 초가 3칸을 짓고 유유자적 노후를 혼자 보내고 있다. 생전에 시인(미당)은 동료들이 동생(정태, 한때 같이 활동한 적 있음)의 안부를 물으면 “으응, 그 사람(정태)은 버~얼써 신선이 돼서 자연에 묻혀 잘 살고 있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형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서정태)시인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의 삶이 마치 신선인 양 그려진다.
미당 서정주, 60여년의 창작활동을 한 그의 문학은 방대하여 한정된 지면에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다. 하여 취재팀은 원래 르포의 취지대로 ‘시의 고향’ 즉 시의 모태가 되어준 배경을 찾아 집중 조명하기로 한다.
미당 시의 모태는 그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객지를 떠돌면서도 불쑥불쑥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달려가곤 했던 고향 질마재다. 서정태 시인께 여쭈었다. 질마재란 원래 고개를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냐고. 시인은 깔고 앉은 방석을 당겨 앉으며 “그래, 맞지! 원래는 저 고개(마을 오른편 고갯마루를 가리키며) 이름이었지. 그런데 옛날 무장현과 고부현, 흥덕현 사람들이 읍성(고창)과 서울을 가려면 저 고개를 넘어야 했어. 그래서 읍성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을 가리켜 ‘질마재를 넘어온 사람들’ 하다가 나중엔 말을 줄여서 그냥 ‘질마재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 그만 이곳 지명이 되어버렸지.” 라고 한다. 예전의 질마재는 이처럼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육염(소금)을 굽는 벌막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고찰 선운사가 인접해 있다.
질마재는 이처럼 교통의 요충지로, 소금장수들이 모여드는 삶의 터전으로 뭇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었다. 따라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꺼리도 많았으리라. 그런가 하면 미당의 외할머니는 젊어 과부가 되었다. 선원으로 고기잡이를 나가서 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한이 많은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하진 않았으나 국문을 깨친 분으로 국문으로 된 이야기책을 많이 읽었고, 그 이야기들을 손자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한국문학의, 한국 시의 진화과정에서 신화처럼 대두되는 미당의 ‘질마재 신화’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질마재 사람들 중에 글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마는, 사람이 무얼로 어떻게 神이 되는가를 요량해 볼 줄 아는 사람은 퍽으나 많읍니다.
李朝 英祖 때 남몰래 붓글씨만 쓰며 살다 간 全州 사람 李三晩이도 질마재에선 시방도 꾸준히 神 노릇을 잘하고 있었는데, 그건 묘하게도 여름에 징그러운 뱀을 쫒아내는 所任으로 섭니다.
陰 正月 처음에 뱀 날이 되면, 질마재 사람들은 먹글씨 쓸 줄 아는 이를 찾아가서 李三晩 석 字를 많이많이 받아가다 집 안 기둥들의 밑둥마다 다닥다닥 붙여 두는데, 그러면 뱀들이 기어올라 서다가도 그 이상 더 넘어선 못 올라온다는 信念 때문입니다. 李三晩이가 아무리 죽었기로서니 그 붓 기운을 뱀아 넌들 행여 잊었겠느냐는 것이지요.
글도 글씨도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지만, 이 요량은 시방도 여전합니다.
-<李三晩이라는 神> 전문
<질마재 전경>
<<질마재 신화>>는 미당의 6번째 시집으로 1975년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총 45편의 질마재 이야기(신화)를 담고 있는 산문시집으로, 이 시집에 등장하는 소재는 대부분 이 지역에 존재하던 실제의 인물들이거나 사물들이다. 위의 시 <李三晩이라는 神>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海溢>의 외할머니 이야기, 논갈이를 잘 하는 진영이 아제, 계피떡장수 알묏댁, 이빨 한 개 없는 눈들영감의 마른 명태이야기 등. 질마재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을 대상으로 씌어졌다고 한다. ‘질마재의 신화’는 이처럼 마을에 실제로 있었던, 혹은 전해져 내려오는 질마재 사람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이야기를 시화(신화)하여 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옛 우리네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질마재의 노래> 전문
위의 시 <질마재의 노래>는 <<질마재 신화>> 출간 8년 후인, 1983년 <<현대문학>>5월호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미당에게 있어서 질마재는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의 탯자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의 모태며 시의 고향인 것이다.
질마재를 찾아가기 전 전주에서 최승범(전 전북대학 교수)시인과 함께 만난 유화수(호원대교수)님은 취재팀에게 서정태 시인을 만나면 ‘질마재 신화’의 실존 물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으나 시인을 뵙고는 노구의 시인에게 안내를 부탁하는 것까지는 엄두도 낼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겨야 했다.
<미당 생가>
질마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미당은 1924년 이른 봄 줄포로 나온다. 아버지가 농감으로 있던 동복 영감(仁村김성수의 아버지)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자 그 빈집을 얻어 이사한 것이다. 미당은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여기서 후에 시인부락 동인이 된 이성범과 사귀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에 벌써 시인의 기질(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줄포에 살았을 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갈밭의 선선한 사운거림이 여름의 내게 좋은 다락과 같았다면, ‘대포’호수는 그 다락의 영창과 같았다.” 라고. 당시의 줄포의 주변 경관을 말함이다. 그는 여기서 또 하나의 평생 잊지 못할 사연을 지니게 된다. 일본인 요시무라 여선생에 대한 추억이다.
내 永遠은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뿐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내 永遠은.
-<내 永遠은 > 전문
그는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요시무라 여선생을 ‘물 빛 라일락의 빛과 향기’로 느낀다. 그는 일부러 굴헝(구렁)에 들어가 호젓이 앉아 요시무라 선생을 그린다. 하지만 요시무라 선생은 만남 1년 만에 일본으로 떠난다. 이때 소년 서정주는 처음으로 헤어짐의 아픔을 경험한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5년 만에 조기 졸업한 미당은 서울의 중앙고보(현 중앙 중.고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입학 1년도 못되어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연행되었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곧 풀려난다. 그런 그는 이듬해엔 사회주의 병에 걸려 아현동의 빈민촌으로 하숙을 옮기고 하층민의 생활을 체험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휴학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를 받았으나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길 만큼 심하게 앓는다. 병을 회복한 그는 서울로 올라와 복교하나 그것도 잠시, ‘광주학생 사건’ 2차 년도에 다시 학생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학교에서도 퇴학당한다.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한 그는 고창고보로 학적을 옮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비밀회합과 백지동맹을 주동하다가 곧바로 교장의 권고로 자퇴한다. 그의 유랑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의 궤에서 돈 300원을 훔쳐 만주로 도망치려하다 친구의 권유로 경성부립도서관을 다니면서 독서(사회주의 소설)에 열중한다. 그리곤 이듬해 여름엔 책을 구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노초산방에 머물며 이듬해 초가을까지 세계 문호들의 작품을 탐독한다. 미당의 본격적인 수업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미당 문학관>
다시 서울로 올라온 미당은 톨스토이즘에 빠져 그를 모방하여 넝마주의가 된다. 19세 때의 일이다. 그는 도화동 빈민촌의 굴다리 밑에서 지내며 넝마주의를 했는데 동생 서정태 시인의 말에 의하면 “실크셔츠에 벨벳재킷을 입은 서울의 꼴불견 넝마주의”는 3일 만에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을 계기로 그는 대종사 석전 박한영 스님을 만나게 되고 훗날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됨도 이런 인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는 석전의 부름을 받고 안암동 개운사의 대원암에 있는 조선불교 중앙강원에 들어간다. 그는 학승도 머리를 깎아야 한다기에 삭발을 했다. 석전스님이 직접 깎아주었다. 석전은 그를 아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진달래꽃에 취해 툇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 그만 석전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때의 회상을 미당은 석전스님이 “정주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마치 할머니가 마루에서 떨어지는 손자를 발견하고 부르짖는 것과 같은, 안타까움의 소리였노라고 한다. 그는 강원에서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가끔 친구들과 만나 술집을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스님은 알고 있었다. 1934년 그는 참선행(參禪行)을 빙자하여 금강산엘 다녀오겠다며 허락을 받으려 한다. 스님은 “참선도 불교를 무얼 좀 알아야 하지.” 하고 거절한다. 하지만 그의 고집에 스님은 허락하게 되는데 허락을 받고 너무 좋았던 그는 하루를 걸어 단숨에 철원까지 갔다고 한다. 내금강산 영원암에서 송만공 스님을 만난 그는 스님을 모시고 선을 해보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스님은 중이 되려면 대단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며 하룻밤을 쉬면서 잘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는 이튿날 아침 스님을 뵙고 후회할 것 같아 그냥 가겠다고 한다. 스님은 기왕에 왔으니 금강산 구경이나 하고 가라며 10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비로봉. 구룡연. 해금강을 관광하고 서울로 온다.
미당의 시단 데뷔는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이다. 그는 이보다 앞서 동아일보 독자란에 시와 산문을 투고하여 발표하곤 했었다. 등단작이 된<벽>도 원래는 독자란에 투고한 것이었는데 이리저리 책상을 굴러다니다 신춘문예 응모작들과 섞여 공교롭게도 신춘문예당선작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 그는 불교전문학교를 휴학하고 김동리. 오장환. 김상원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을 결성하여 11월, 동인지<<시인부락>>을 간행한다. 시인부락은 오래 출간되지 못하고 2회로 끝나고 만다.
1937년 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여름동안 머물러 있다 돌아온다. 그리고 첫 시집인 <<화사집>>에 권두시로 수록된 <자화상>을 고창 노초산방에서 쓴다. 이듬해 1938년에 방옥숙과 결혼하고, 1940년 장남 승해를 낳는다. 1941년 2월, 첫 시집 <<화사집>>이 오장환 시인이 경영하던 ‘남만서고’에서 출간된다. 4월엔 동대문여학교에서 몇 달간 근무하다 그만두고 용두동의 동광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6학년 담임을 맡았으나 거기도 몇 개월 만에 그만둔다. 그는 1960년 동국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이렇듯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수많은 직장을 옮겨 다닌다.
1942년 여름 그는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간다. 그의 아버지는 고질의 장출혈로 사망한다. 그 병은 대를 이어 미당도 장출혈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오는 길에 선운사 동구의 주막집에 들러 주막집 주모와 술을 마시고 주모가 부르는 육자배기의 애잔한 가락에 취한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선운사 동구> 전문
이 시에서 그는 육자배기를 부르던 주막집 주모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녀는 6.25동란 때 남편이 빨치산에게 학살당하고 주막집도 불타버리고 없는 허전한 마음을 이렇게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시는 그의 대표 시 중 한 편으로 선운사 입구의 시비에 수록되었다.
1948년 4월, <<화사집>>에 이어 그의 두 번째 시집 <<귀촉도>>가 출간됨으로써 그의 시사적 위상은 확고해진다. 그는 1949년에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 위원장에 선임된다.
1950년 6.25동란은 우리 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상처를 남긴다. 미당도 피란민 행렬에 끼었다. 그는 조지훈. 이한직 등과 한강을 건넌다. 그들은 안양을 거쳐 수원에 이르렀고, 거기서 화물열차에 실려 대전으로 간다. 미당은 이때부터 어떤 환각증상, 테리파시 같은 것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대전에서 국방부 정훈국장을 만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결성한다. 단장은 김광섭이나 실무책임은 미당이 지고, 조지훈과 이한직 외에도 구상. 서정태 등은 합숙소 멤버들로 <<대한일보>>의 편집을 맡아 발행하고 시민을 위한 선무의 스피커방송과 벽보를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황은 불리해지고 대구까지 밀려온 그들은 죽음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독약까지 확보해 놓는다. 이 무렵 미당은 실어증과 환각증세로 신음하다 부산으로 송치되어 청마 유치환의 집에서 요양한다.
1953년 7월 휴전협정과 함께 서울로 온 미당은 공덕동 살구나무집으로 이사를 하고 ‘청서당’이라 이름 붙인다. 그의 유랑은 이제 안정을 찾아간다. 1954년 4월, 대한민국예술원이 창립되고 그는 문학분과위원장이 된다. 이듬해엔 제3회 자유문학상을 김동리. 박목월. 염상섭과 함께 수상한다.
1957년, 17년 만에 둘째 아들 윤이 태어나고,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미당의 생활은 더욱 안정된다. 제3시집 <<서정주시선>>에 이어 제4시집<<신라초>> 제5시집 <<동천>>, 시론서<<한국의 현대시>>와 <<시문학원론>>이 출간되기도 한다. 1970년 그는 관악산 아래 남현동에 ‘봉산산방’을 지어 이사한다. 그는 여기서 松賴소리와 싸그락거리는 시누대나무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방옥숙 여사와 함께 말년까지 보낸다.
<지금은 폐허가 된 봉산산방>
‘살아있는 한국시사’ 또는 ‘시선(詩仙)으로 불리기도 했던 미당은 새천년 12월 24일, 성탄전야에 85세의 생을 마감한다. 그는 첫 시집 <<화사집>>으로부터 <<80소년 떠돌이의 詩>>까지 15권의 시집과 산문집, 시론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한국시단에 커다란 발자취를 신화처럼 남기고 떠났다. 그는 질마재 사람들의 이야기를 “질마재의 신화”로 시화하여 우리 시사의 한 획을 그었지만, 질마재에서 태어난 미당 그 자신도 오늘날 신화의 한 인물이 되어 질마재로 돌아와 선영에 고이 잠들어 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연꽃을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그는 고향 질마재로 돌아간 것이다.
전주에서 만난 최승범 시인은 스승 미당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했다.
<최승범 교수와의 대담>
“모처럼 서울에 갔었지요. 그래서 마음먹고 선생님(미당)께 식사대접을 하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내가 어떻게 서울에서 시골선비 밥을 얻어먹겠나!’라고 하시며 먼저 나가 계산을 하시지 않겠어요.” 라고 하며 그분의 제자 사랑(배려)은 대단했다고 전한다. 제자들에 대한 배려는 그뿐만이 아니다. 잔술을 따르다보면 선. 후배가 고르게 받지 못한다며 찾아온 제자들에게 캔 맥주를 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취재에 도움을 주신 서정태 시인님, 최승범 시인님, 유화수님께 감사드린다.
취재팀
기획: 박인식
사진: 정동희
글: 유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