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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목관(木棺)
문효치
그렇지, 님을 실어 저승으로 저어가던 한 척의 배가 세월의 골 깊은 앙금에 익어 지금 여기에 머무르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혈육의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해 쉬임없이 들려오는 창생(蒼生)의 울음소리, 짭짜름한 저승의 바람 냄새가 잡혀 와, 그렇지, 우리가 또 빈손으로 타고서 아스름한 바다를 가르며 저어가야 될 한 척의 배가 여기에 왔지.
무령왕의 나무 두침(頭枕)
나는 이제 천년의 무게로
땅 속에 가 호젓이 눕는다.
살며시 눈감은 하도 긴 잠 속,
육신은 허물어져 내리다가
먼지가 되어 포올포올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한 덩이의 푸르른 허공이 되어
섬세한 서기(瑞氣)로 남느니.
너는 이때에 한 채의 현금(玄琴)이 되어
빛깔 고운 한 가닥 선율이 되어
안개처럼 멍멍히 젖어 들어오는
그리운 노래로나 서리어다오.
싸움
―백제 시편 11
싸움은 이미 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백의 오천 병사는 죽기 위해 싸웠다. 그것이 그들의 죽는 방법이었다. 무덤의 앞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면서 그들은 각각 한 덩이의 단단한 빛이 되어 달려 들어갔다. 빛은 이 땅에 선 것들을 밝히고 그 후예의 눈을 밝혔다. 죽음의 고통은 순간이었고 그 순간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무덤의 뒷문이 열렸다. 그리고 뒷문을 통해 무한의 자유에로 나갔다. 그들의 죽는 방법은 이렇게 당당하고 지혜로웠다.
나방
―백제 시편 18
내가 빚어지고 있다. 이렇게 몸을 움츠리고 아무도 몰래몰래 고치 속에 깊은 굴을 파고 숨어드는 것은 다시 빚어지기 위함이다. 어두움 속에 깊이깊이 침몰되어 가다가 어느 날 어깻죽지에서 돋아나는 날개를 저어 승천하면 땅만 향해 기어 다니는 징그러움으로부터 벗어난다. 나를 다시 빚기 위해 몸을 헌다. 몸을 헐어 굴을 만든다. 이 굴의 완벽한 구속. 숨막히는 구속 속에서 몸을 헐다가 그 아픔에 못 견뎌 한동안 까무러치고 그리고, 이 까무러침으로부터 깨어날 때 나의 화사한 변신은 온다.
백제 여인의 옷
치자물이 곱게 든
넓은 보자기.
달빛이면
물에 씻겨 맑은 달빛을,
별빛이면
불처럼 빛나는 별빛을
감싸는 보자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엊저녁 고란사 종소리가
꽃잎 되어 떨어지는데
노을 번지는 백마강
나루터에 세워놓은
고운 깃발.
계백의 칼
그가 벤 것은
적의 목이 아니다
햇빛 속에도 피가 있어
해 속의 피를 잘라내어
하늘과 땅 사이
황산벌 위에 물들이고
스러져가는
하루의 목숨을
꽃수 놓듯 그려 놓았으니
일몰하였으되
그 하늘 언제나
꽃수의 꽃물로 가득하여 밝은데
이를 어찌 칼이라 하랴
백제시
―왕인 묘역의 풀
그 풀에
그대의 옷, 옷의 자주 물감 들여
그 풀에
그대의 옷, 옷 속의 살내음 들여
꽃 피우네
그대 언덕 위로
땀 개어 오를 때
눈길[視線]에 걸어 둔 엊저녁 노을
그 풀에 달아 불을 켜네
그 풀 심네
내 안에 파여
어둡고 습한 동굴 속
그 풀로 밝히네
어둠 속의 치밀한 적막을 뚫어
길을 닦네
백제시
―구다라고도(百濟琴)*
현 위에 새 한 마리 앉아
떨고 있다
떨림 위에 황혼이 얹히고
몸부림이 올 때마다 섬광이 보였다
섬광 사이로 백제 여인의 치맛자락이
잠시 펄럭였다
울안에 서 있는 감나무에
붉은 감도 익고 있었다
장광의 장항아리
메주가 삭아 구린내를 풍기고
저녁연기도 잠시 보였다
음계의 허름한 계단으로
현해탄의 물결이 올라왔다
후딱 지나가는
섬광 사이로
* 일본에 전해진 백제의 현악기 공후의 일본이름.
백제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
그래, 바람 하나
고개를 숙이고 문 앞에 서성인다
피안으로 가는 길목
바람의 옷깃이 연꽃 되어
어둠 밝힌다
집에 매단 종
소리 잡아당겨 침묵을 흔들고
서성이던
그래, 바람 하나
종 속으로 든다
비명으로 간 사내,
죽음의 길, 길가에 걸어두고
그 어두운 속 닦아줄
여인의 옷자락이 펄럭인다
* 일본 성덕 태자가 비명에 죽자 천수국에 가서 왕생하기를 빌기 위해 그 태자비가 백제계 여인 동한말현(東漢末賢)과 한노가기리(漢奴加己利), 고구려계 여인 고려가서일(高麗加西溢)에게 자수를 시켜 만든 수장.
백제시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어허, 페놀로사**야
내 잠과 함께 꿈이 깨었구나
90m 옛 비단의 결
또는 저 서방으로 이어지는 길에
새겨서 새겨서 감아두었던 꿈이
어허, 페놀로사야
내 꿈의 파편들이 창공에 부딪친다
흰 비단의 결에서 빠져나와
가벼운 방황으로 부서져 내려
이제는 눈도 어지럽구나
너는 내 꿈을 벗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
아픔의 높디높은 가파름을
벗겨 물결치게 했구나
어허 페놀로사야
* 백제인 지리불사가 만듦. 일본 법륭사 몽전(夢殿)에 있다.
**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천삼백 년 동안 비단에 감겨 전해 오던 구세관음상을 1884년 처음으로 개봉 공개했다.
문효치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무령왕의 나무새』, 『왕인의 수염』 등.
문효치 연보
1943년 전북 군산시 옥산면 남내리에서 남평문씨 영수님(부)과 울산김씨 옥수님(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고 어머니는 종부로 시골집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살림을 맡아하셨음.
1948년 아버지가 시골에 내려와 우리 형제(동생 진묵)를 서울로 데리고 오셨음.
1949년 아버지로부터 애국가를 배움.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벽 아래로 굴러 떨어뜨리고 제 힘으로 기어 올라오는 놈만 키운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음. 이후에 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무서워서 주눅 들어 살았음. 아버지의 몇 토막 추억 중에 뺨을 맞고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음.
1950년 서울 북성초등학교에 입학. 동요 두세 곡 정도 배우고 6·25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점령됨. 아버지 사형제는 방구들의 지하에 피신했으나 공산군에게 발각되어 가족이 몰살당할까 두려워하며 고민하던 아버지는 인민군에 자원입대했음. 이후 현재까지 소식을 모름. 나머지 가족들은 3개월간 공산치하에서 지냈음.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됨. 서울 탈환의 전쟁 와중에 대포알 2발이 우리집 마당과 지붕에 떨어졌으나 불발탄이어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음.
1951년 1·4후퇴, 영등포에서 기차 지붕에 올라 피난길에 들어섬. 익산(당시 이리)에서부터는 걸어서 군산 고향집까지 당도했으나 너무 무리하여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맴. 간신히 병을 수습하고 김제군 만경강 어구 토정리의 한 농가를 구해 피신하고 그곳 장흥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함.
1952년 다시 고향으로 와서 옥산초등하교 3학년에 편입함. 본디 허약한 체질이어서 다시 늑막염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됨.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항생제를 간신히 구해 치료했으나, 매년 병치레로 한두 달씩 장기결석을 함.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 성격에다 몰락한 지주의 후손, 그리고 월북자의 아들인 나를 또래 아이들이 멀리하여 늘 슬프고 쓸쓸하게 초등학교 생활을 했음. 이무렵 대학생인 삼촌들이 방학 때 가지고 온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읽게 됨. 이 책은 내가 읽은 생애 최초의 시집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촌들의 권유로 서울의 중학교로 유학함. 1차, 2차 시험에 모두 낙방하여 3차로 균명중학교(현 환일중)에 입학함.
1956년~1963년 중고시절 주로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지 등에 습작시를 발표함. 이 무렵 하이네, 바이런, 괴테 등의 외국 시집과 소월, 미당, 청록파 등의 시집을 접하게 됨. 균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함. 여기에서 미당 서정주 선생을 만나 마음의 우상으로 삼으며 본격적으로 습작을 하게 됨. 강희근, 홍기삼, 조정래, 박제천, 홍신선, 신상성, 김초혜 등과 문교를 나눔. ROTC 입단. 2년간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음. 동대문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활동함.
1966년 서울신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문단에 데뷔함과 동시에 대학을 졸업함. <신년대> 동인회에 가입하여 이우석, 김종해, 이수화, 박진환 등과 문교를 나눔. 아버지 월북이 문제가 되어 ROTC장교 임관에서 탈락되고 하사로 군에 입대, 동기생 소대장들이 있는 전방부대에서 굴욕적인 분대장으로 복무함. 이후 제대할 때까지 군수사기관의 감시를 받음.
1970년 서울 배재중학교로 직장을 옮김. 제대 후에도 경찰과 군수사기관의 조사, 감시를 계속 받으며 억압심리가 누적되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짐. 소화불량, 불면증, 부정맥 등으로 시달리며 체중이 34킬로그램까지 내려감. 이후 십수 년간 이 체중이 지속되면서 몸이 쇠약해져 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떨치지 못하고 지냄.
1971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서울에 그 유물전시가 열려 관람함. 1500년 전에 죽은 자들의 손길과 숨결이 느껴지는 유골들을 보면서 충격적인 감동을 받고 이를 제재로 죽음과 삶의 문제를 결부한 시를 쓰기 시작함. 이후 지금까지도 백제관련 시를 쓰고 있음.
1973년 결혼함. 부인은 청주한씨 춘희.
1974년 아들 준식 태어남.
1976년 첫 시집 『연기속에 서서』 출간. 딸 미연 태어남.
1980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졸업논문 「김현승 시 연구」. 이 무렵 정의홍, 박진환, 김규화, 임보, 강희근, 박경석, 임영희 등과 <진단시> 동인회를 결성하고 주재하면서 서동, 동동, 춘향, 말뚝이 장승, 상여, 도깨비 등 한국적 정서나 의식을 구현하는 테마시 쓰기를 함.
1983년 제2시집 『무령왕의 나무새』 출간.
1988년 제3시집 『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 출간.
1991년 제4시집 『백제 가는 길』 출간. 제16회 시문학상 수상.
1993년 제5시집 『바다의 문』 출간 제7회 동국문학상 수상.
1997년 제6시집 『선유도를 바라보며』 출간.
1998년 배재중학교 근무 27년 만에 명예퇴직함. 이후 서울문예원 시창작 교실을 필두로 MBC문화센터, 시예술아카데미, 고대평생교육원 등의 시창작교실에서 강의함.
1999년 동국대를 필두로 동문화예술대학원, 대전대, 동덕여대, 추계예술대, 장안대에 출강함. 주성대 겸임교수로 임용됨. 기행에세이집 『시가 있는 길』 출간. 동국문학인회 회장을 맡아 일함.
2001년 이길원의 도움으로 한국문협 시분과 회장에 출마하여 당선됨.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심의위원장에 선임됨. 제7시집 『남내리 엽서』 출간. 제6회 평화문학상 수상. 제17회 펜문학상 수상. 제3회 시예술상을 수상함.
2002년 기행에세이집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집』 출간.
2003년 계간 『문학과창작』 주간, 계간 『불교문예』 편집자문위원을 맡음.
2004년 시선집 『동백꽃 속으로 보이네』와 시선집 『백제시집』 출간. 제1회 대한문학상 수상.
2005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장에 출마해서 당선됨. 이후 세계 여러 곳의 펜클럽 행사에 참가하고 외국문인들을 만남. 중국 천진사범대학, 중국 종산대학 객좌교수로 임명됨. 이후 수차례 중국을 방문하고 특강을 함.
2006년 <포럼 우리시 우리음악>의 공동대표를 맡게 되어 작곡가와 성악가들을 알게 됨(공동대표는 이안삼, 박세원). 이후 몇 편의 시가 가곡으로 작곡됨. 금강산에서 열린 세계평화시인대회에 초청되어 참가함. 그곳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월레 소잉카 등을 만남.
2007년 이탄 시인이 발행해 오던 계간 『미네르바』를 인수하여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일함. 제2회 군산문학상 수상. 종로구 운니동 월드오피스텔에 <시예술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시창작 지도를 함.
2008년 제8시집 『계백의 칼』 출간. 제6회 천상병 시문학상 수상. 『미네르바』에 작품상을 창설하고 운영함.
2009년 문화의 날에 옥관문화훈장 수훈.
2010년 제9시집 『왕인의 수염』 출간. 김삿갓문학상 수상. 『미네르바』에 질마재문학상을 창설하고 운영함.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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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꽃물 가득한 계백의 칼..백제의 후예..그 강하고 아름다운 힘이 느껴지더군요..
섬광 사이로 백제여인의 치맛자락이, 빚어지고 있었다
문효치 선생님 연보 중에서 1970년대 부분... 그때 선생님의 국어수업을 들었던 제자가 있었네요. 선생님이 교내 신문에 발표했던 시를 읽고 감동을 받기도 했던 제자가...
그리고, 또 이런 제자도 있었지요. 선생님의 시가 좋아 그의 문하생이 된...종섶 샘~ 그 시절 모습을 그려 봅니다.
백제 왕국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편들, 깊이 음미해봅니다.
시의 격과 발산하는 힘이 대단하여 떨렸습니다.
백제를 다시 이해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선생님의 시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문효치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바람의 옷깃"에 실려 백제인의 꿈속에 들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