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구월사 표지판을 보고 산길로 접어든다. 일곱 명이 정원인 차에 낮고 작은 의자를 끼워 넣어 여덟 명이 타고 간다. 6남매에 사위가 둘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언니네 부부가 오면서 이번 기회에 일곱 형제가 만나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조카들까지 모두 내 딸아이 결혼식에 참석시켜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잔치 기분을 북돋워 주신 언니들과 오빠께 감사의 표시로 우리가 여행을 주선하였다. 주문진에서 점심으로 푸짐한 해물탕을 먹고 양양에서는 바다를 마주하고 싱싱한 자연회를 대접할 것이다. 하룻밤 자고 내일은 춘천에 들러 큰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옹심이를 먹을 생각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가면서 계속 올라가는 길이다. 차 없는 사람은 어느 세월에 구월사에 당도할까 싶을 만큼 끝없이 구불구불 올라간다. 여름이라면 울창한 숲길에 옆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로 정겨울 터인데 겨울이라서인지 더없이 쓸쓸하고 황량하다. 구월사에 법정 스님. 칠 남매 중 세째다. 사십 대 후반까지는 가정을 꾸리셨는데 불교를 공부하면서 그 후로 스님이 되셨다.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만나러 간다. 아직도 절에는 들어갈 수 없단다. 스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주문진항에 해물탕집을 예약했으나 스님은 바빠서 나오지 못하셨다. 절 입구에서 얼굴을 보는 것으로 칠 남매의 만남은 이루어질 것이다. 마치 드라마 한 장면을 찍는 듯한 풍경이 상상된다.
우리 칠남매는 동탄면 석우리 옥골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산과 수원과 병점과 용인 사이에 끼어 거센 변화의 바람에도 늘 변함이 없었던 산골 마을. 내가 육학년 때 전기가 들어오고 수원행 버스가 다녔다. 막내인 내가 오십이 넘어서야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동탄이라는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는 널리 알려졌지만 내 볼품없고 어수룩한 고향은 사라졌다. 다행하게도 아버지가 심었다던 느티나무가 남아 그 아랫녘이 우리집이며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한다. 평생 농군으로 새벽이면 삽을 들고 대문간을 나서시던 부지런한 아버지와 양반 안씨 가문답게 꼿꼿하고 깐깐하고 바르셨던 어머니의 성품을 칠남매가 골고루 이어받았다. 그래서다. 어려운 일은 지혜롭게 이겨내고 힘든 일들은 뚝심있게 풀어가면서 칠남매 모두 이만하면 열심히 건강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저만치 공터가 보인다. 공터 오른쪽으로 급경사진 도로가 보인다. 그쪽으로 올라가면 절이다.스님은 공터에서 도로 아래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성이고 계신다. 스님이다 가 아니고 오빠 저기 계시네 라고 나와 두 언니가 입을 맞춰 소리를 질렀다.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계신 스님이 반갑게 다가오신다. 한 사람씩 차에서 내리면서 스님을 끌어안고 뜨거운 인사를 나눴다. 스님다운 스님의 모습이시다. 속세로 나올까 스님으로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스님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숨어있었다. 보기에 좋을 리가 없었다. 갈등이 없는 인간사가 있을까. 갈등을 뛰어넘었음을 스님의 얼굴은 말해주고 있다. 그래선가보다. 그날 찍은 칠 남매 사진에서 법정 스님의 얼굴이 제일 편안하고 환하다. 스님을 뵙고 돌아 나오는 우리 모두 행복하였다. 사람은 제 자리에서 제 일에 최선을 다할 때가 가장 밝게 빛난다.
작년에 남편과 둘이서 들러 맛있게 먹었던 수산항에 있는 흥미 횟집에 갔다. 자연산 활어회는 쫄깃하면서 혀에 감겼다. 정성 들여 차려진 반찬들은 맛깔스러웠다. 매운탕은 구수했다.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다소 비싸기는 했지만 만족할만한 저녁이었다. 이만큼 싱싱한 회를 어디에서 먹어요? 셋째언니의 칭찬이다.
다리가 아프신 큰언니와 둘째언니와 작은오빠는 먼저 숙소로 들어가셨다. 셋째언니와 넷째언니 부부와 우리 부부는 호텔을 구경하였다. LA에서 보았던 건물 천장에 푸른 하늘이 이곳 호텔 천장에도 만들어져 있었다. 근사했다. 더구나 그 푸른 하늘을 비추는 볼록거울이 아래쪽에 있었는데 그곳에 우리 다섯은 얼굴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었다. 양손을 턱에 괴고 고개를 갸우뚱해서 제법 귀여운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막내가 육십 육 세인 다섯 명의 노인들이 귀엽게? 웃느라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밖으로 나오니 나무에 꼬마전등을 촘촘하게 달아 크리스마스 기분이 났다.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나이를 까마득하게 잊었다.
셋째 언니가 케이크를 샀다. 딸아이 결혼식으로 제부인 내 남편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하였으니 이제라도 축하하시겠단다. 숙소로 돌아와 케익을 올려놓고 초에 불을 붙이려는데 아뿔싸 성냥 넣는 것을 제과점 아가씨가 잊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고 가스불도 없고 도대체 초에 불을 붙일 방법이 없다. 인덕션에 휴지를 올려놓고 불을 붙이려 노력하시는 넷째 형부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내가. 막내동생처럼 귀엽게 주장하며 열심이셨지만 연기만 날 뿐 불은 붙지 않았다. 어쩐다. 어쩔 수 없지. 촛불이 있다 치자구.촛불이 없는 생일축하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기가 막혀서 웃고 재미있어서 웃고 이런 일이 어디 있겠냐고 또 웃었다.
한바탕 고스톱도 치고 빙 둘러앉아 소리를 지르며 가나와의 축구경기도 보았다. 차를 타고 있는 중에는 둘째언니의 사철가를 비롯한 시조를 들었다. 여든두 살에 그 긴 가사를 다 외웠다는 것도 기적인데 머지않아 시조의 명인이 될 게 분명할 만큼 목청이 트이셨다. 전문가에게서 느낄 수 없는 수수하면서도 애절한 꺾임과 울림이 좋았다. 우리 가락이 좋은 것이여! 맞다. 다들 얼쑤! 추임새를 곁들이며 흥겨워했다. 넷째 형부는 사랑하는 날까지 등 여러 곡의 노래를 부르셨다. 한 음 한 음에 정성을 들여 간절하게 부르셨다. 가수가 울고 갈 노래 실력이다. 내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대단하다. 그의 목소리는 높은 산에 올라 야호 소리를 지르듯 목구멍을 열어 시원하게 내뿜는 소리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고래 사냥을 부를 때 그는 내 마음까지 활짝 열어준다.
아침에 세 남자와 큰언니가 고스톱을 치는 동안 언니들과 바다를 거닐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어릴 적 계집아이처럼 깡총거렸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가슴을 트이게 해준다. 동심으로 데려간다. 돌아오는 길에 춘천에서 먹은 옹심이와 옹심이 칼국수는 구수했다. 곁들여서 먹는 열무김치와 무채가 압권이었다. 여행 이틀 동안 비가 온다던 날씨는 개었고 영상의 날씨였다. 다음날부터 영하로 뚝 떨어질 것이란다. 축복받은 여행이었다. 완벽 그 자체였건만은.
어찌할꺼나. 어찌할꺼나. 여든 고개를 넘어선 큰언니와 둘째언니의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오래 걷기에는 무리란다. 언제나 앞장서서 다니시던 큰언니가 나 못 가 나 안 가 이런 말씀을 자꾸 하신다. 서럽다. 서글프다. 세월아 세월아 가지를 말어라. 둘째언니가 불렀던 사철가 시조의 한 구절이 집에 오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사철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 날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때가 있나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 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寒露朔風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않는 黃菊丹楓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落木寒天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으으은세계 되고 보면은
월백 설백 천지백 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네 한 말 들어보소 인생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산 인생 아차 한 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滿盤珍羞만반진수는
不如生前一杯酒불여생전일만주만도 못하느니라
세월아 세월아 가지말어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세월 어쩔꺼나 늘어진 계수나무
끝끝트리다가 대랑 메달아 놓고 國穀偸食국곡투식허는 놈과
부모불효 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허는 놈 차례로 잡어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 앉어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허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