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군 월운저수지. 피의능선 전적지비 앞에 순례자들이 모였다. 김장채소를 비롯해 양구 특산물인 시레기수확 등 여러 가지로 바쁜 일상인데도, 정창수 전 군의원을 비롯해 관음선원 석암스님, 수필가 박옥경 님 등 여러 분들이 오셔서 기쁘고 감사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윗쪽에 있는 <피의능선 전적지비>로 올라갔다.
'피의 능선'은 양구 북상에 있는 3개의 고지(983고지, 940고지, 773고지)와 연결된 산맥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 고지들을 점령하기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다.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에 대비하여 중요한 요충지들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캔사스선 북방 10~20km 지역에 위치한 수리봉 일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수리봉에 올라가서 보면 북한땅도 보이고, 춘천까지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고지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강원도 일대의 운명이 갈릴 수 있는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고지탈환과 실패가 거듭되었다. 한미양군은 1개 연대 규모인 2,700명(1개연대규모), 북한군, 중공군은 1만 5,000명(1개사단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워낙 많은 사상자로 인해 능선이 피로 넘쳐 흘러 넘쳐 종군기자들이 '피의 능선 전투'라고 썼다.
이때 동해안에 있는 항공모함 미주리호에서 포를 쏘았는데, 30만발이나 되는 포사격으로 정상의 4m가 날아갔고, 그래서 987고지가 983고지가 되었다고 한다.
피의능선 전투,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산화해간 영령들을 생각하며 묵념을 올렸다.
아직까지도 유해발굴이 진행중이라니 저 산 어딘가에도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스러져간 그들이 누워있다는 것이다. 젖먹던 힘까지 쏟아 싸웠을 전투.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 그들이 바라본 8월의 하늘은 어땠을까. 죽어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상자 1만 8천여명은 그냥 숫자가 아니다. 심장 펄펄 뛰던 꽃같은 청춘들. 누군가의 아들이요, 누군가의 지아비였을 사람들이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을 새기며.
아, 꽃같던 그대들이여! 생명평화의 땅에 생명평화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묵념을 마치고 모두들 아래로 내려가는데, 이학근, 박소산 순례자는 차마 바로 돌아서지 못하고 다시 엎드려 절을 했다.
양구군청에서 협력해주신 버스를 타고 비득안내소로 갔다.
'여기부터는 민간인통제구역'이라는 말이 앞을 가로막는다.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이 1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도 된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은 한국전쟁 이후 50여년간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2004년 개방되어 허가를 받으면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두타연 평화누리길 비득안내소. 양구군청에 미리 협조를 구해놓았기 때문에 간단한 확인절차만 필요했다.
강릉 목영주 선생님께서 양구터미널에서 오고 계시다 하여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는 중이다.(사진 좌로부터 도법스님, 이학근 선생님, 양구주민 박옥경 선생님)
뒷쪽으로 <라이트 꺼. 시동 꺼. 운전자하차>라는 안내문에서는 군대에서 행해지는 '경고'의 느낌이 난다.
광주에서 온 김경석 친구가 출입증을 보며 신기해한다. 이곳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인식표다. GPS가 내장되어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즉각 비상이 걸린단다.
드디어 비득고개를 향해 걸어간다. 마음이 묘하다. 뭉클하기도 하고 쿵쾅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차분해지기도 한다. 이 길이 뭐라고. 그냥 이렇게 걸으면 되는 길인데, 이렇게 오가면 되는 길인데... 인간들의 꽉 막힌 마음길이 막아놓은 길을 걷는다. 이어지는 철책들. 머지 않아 이 철조망을 '과거에는 글쎄 인간들이 이랬단다'라고 증언할 수 있는 유물로만 볼 수 있기를.
해발 529m의 비득고개 정상에 도착. 정창수 전 군의원님이 길과 비득고개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길을 걷는 중간에 잠깐씩 그곳에 얽힌 사연을 말씀해주시는 정창수 전 군의원님.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 어린 시절의 추억 등을 곁들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분이 갖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도 함께 느꼈다.
다시 걷는데, 금강산 가는 길목이 코앞이라는 말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드디어 금강산 가는 길 표지판까지 왔다.
그 표지판 아래로 지뢰지대 경고표시판이 보인다. 조금 전까지 걸어오는 내내 길가 철책선에 걸려있는 표시판.
비무장지대 지역의 지뢰 제거 역시 이후에는 큰 과제가 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고보니, 오늘 서울에서는 지뢰제거관련 국제회의가 열린다고 했다. 도법스님도 그곳에 오셨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양구순례 때문에 사양했는데, 이곳에서 살아있는 공부를 한 셈이다.
이곳에서 금강산까지 겨우 32km. 열심히 걸으면 하루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이 골짜기로 흐르는 수입천의 발원지는 DMZ내 청송령이다. 이곳은 과거에는 양구 수입면에 속했던 곳, 그래서 이 천의 이름도 수입천이다.
얘긴즉슨, 강원도에 휴전선이 생기면서 분단이 되고 나서 양구의 수입면이 대거 북한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입면은 면적으로 양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인구는 양구의 수입면 이외지역을 다 합해도 수입면이 2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형석광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번화한 곳이었다고.
마침, 양구군 수입면민회 조정헌 회장님(명예 수입면장님)께서도 순례에 함께 하셨는데, 고향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바로 옆에 고향을 두고도 못가는 아픔, 그 깊은 속을 우리가 어찌 다 느낄까마는 그분의 평생이 그 아픔속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 아픔의 깊이가 아득하기만 하다.
한편, 남북으로 행정구역이 분할된 지역은 고성군, 양구군, 철원군, 옹진군인데, 고성군, 철원군, 옹진군은 북한에서도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어 북고성, 북철원, 북옹진이라고도 하는데, 양구군만은 북양구가 없다. 북한은 1952년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수입면을 창도군과 금강군에 분할하여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실향민들뿐 아니라 양구군민들 전체가 큰 상실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소산 선생은 금방이라도 학이 되어 철책선 저 편으로 날아갈 듯.
금강산 가는 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공터. 청송령에서 흘러오는 수입천과 비득천이 만나는 하야교삼거리다. 박소산 선생의 평화의 날개짓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정창수님이 농사지은 단호박, 고구마, 삶은 달걀. 따뜻하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함께 먹는다.
하야교 옆에 세워진 정두섭 작가의 작품. 제목은 <금강산 가는 길>이 눈길을 끈다.
양구의 자랑이기도 한 백자로 꽃을 피워올렸다. 금강산에 가는 꿈을 담아.
두타연에서 전화가 빗발. 출입허가시간, 안내소 마감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다.
어쩔 수 없이 트럭에 올라타고 이동해야 했다.
어떤 어르신이 그러신다. "6.25 때 같으면 이 정도면 한 50명은 탔어."
두타연의 아름다운 풍광. 이 옥빛의 물은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다. 내금강에서 흘러내린 수입천이 바위를 만나 굽이굽이 휘감아 돌다가 10m의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는 곳. 그리고 이곳 주변에는 조각공원을 비롯하여 볼 거리 느낄 거리들이 많다. 오랫동안 금단의 땅이었던 만큼 생태적인 부분에서도 그렇다.
아쉽다. 아마도 또 오라는 뜻인 거지.
교통편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순례에 협조해주신 양군군청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