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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긍정(肯定) 의 아름다운 삶》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항상 '매우 밝음'이었습니다. 그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요.
그러나 이 여인이 10살 때...고아가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끼 식사를 위해...혹독한 노동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소녀는 돈을... '땀과 눈물의 종잇조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소녀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자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낙관적 인생관으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비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되어...여섯 자녀 중 한 아이가 숨을 거뒀을 때도..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걸"이라고 말했습니다.
한창 정치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남편이 39세 때에 갑자기 소아마비로 인해 걸음걸이가 곤란해져... 다리를 쇠붙이에 고정시키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남편이...방에서만 지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아내는,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어느날, 남편의 휠체어를 밀며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이렇게 맑은 날이 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뜻하지 않은 병으로... 다리는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아내의 말에...남편이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불구자요! 그래도 나를 사랑 하겠소?”
“아니 여보!...그럼 내가 지금까지...당신의 두 다리만을 사랑했나요?”
아내의 이 재치있는 말에 남편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아내의 사랑과 격려는...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어 경제 대공황으로 절망에 빠진 미국을 구출해냈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미국의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로...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다음은 <엘리너 루스벨트>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삶은 선물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당신의 삶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들만이...당신의 마음속에...선물을
남깁니다.
스스로를 조절하려면... 당신의 머리를 사용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조절하려면...당신의 마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노여움(anger) 이란... 위험(danger)에서 단 한 글자가 빠진 것입니다.
누군가가...당신을 처음 배신했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지만...그가 또다시 당신을 배신했다면... 그땐 당신의 어리석음입니다.
큰 사람은 아이디어를 논하고... 보통 사람은 사건에 관해 토론하며... 작은 사람은 사람들에 대해 얘기합니다.
돈을 잃은 자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며 친구를 잃는 자는 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며 신의를 잃은 자는...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의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입니다.
@[만물상]
🤤자유인 김동길🤤
2022.10.06.
선우정 기자
김동길 교수는 서양문화사 강의 를 연세대 강의실이 아니라 강당 에서 했다.
2000명이 넘는 수강생을 수용할 강의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석부가 77쪽에 달했다. 출석 체크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결석자는 적었다. 청강생이 더 많이 들어와 강당 정원을 초과할 때가 많았다. 그의 강의는 힘이 있었고 유머가 넘쳤다.
김 교수를 흉내 낸 최병서의 개그보다 그의 강의가 더 웃겼다. 엄청난 인기였다.
▶글과 말에서 동시에 달인은 드물다. 김 교수는 드문 사람이었다.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매일 아침 6시 미국 한인 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다. 방송국 사정 때문에 갑자기 결방 소식을 들은 날에도 카메라 앞에서 그냥 강연했다고 한다. 글도 200자 원고지 석 장씩 매일 썼다. 김 교수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했다. 실제로 병석에 들기 직전인 지난 설날까지 글을 올렸다.
▶그는 강골이었다. 대학 때 도봉산으로 단체 친목회를 갔다가 깡패들을 만났다.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협박당했다. 김 교수 혼자 다 때려눕혔다. 당시 유일한 여학생이던 고(故) 심치선 교수의 생전 증언이다. 그런 분이 하루 한 끼만 드셨다. 자택에서 식사를 함께 해보고 의문이 풀렸다. 그릇 크기가 대단했고 양도 상당했다. 비상한 기억력도 유명했다. 시 300수를 외웠다고 한다. 몇 편 암송을 부탁한 적이 있다. 시마자키 도손, 윤선도,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3편을 순식간에 암송했다. 김 교수는 “키를 눌렀는데 시가 안 나온다? 그때가 인생 끝나는 때”라고 했다.
▶손윗누이인 고 김옥길 선생처럼 그도 사람을 좋아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종종 자택에서 냉면 모임을 했다. 많은 식객이 신세를 졌다. 그 가운데 부하까지 몰고 와 냉면을 가장 많이 먹고 간 사람은 5공 때 김 교수를 핍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50여 명이 100그릇 넘게 먹고 빈대떡까지 싸갔다고 한다. 노년엔 여든 넘은 지인들과 함께 100세 클럽을 만들었다. 멤버였던 백선엽 장군과 김병기 화백이 백 살을 넘기고 세상을 떴다. 김형석 교수와 김창묵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다.
▶11년 전 생일, 김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의과 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며 도장까지 찍었다. 그는 일생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면서 살았다. 가는 길도 자유인이었다.
선우정 논설위원
su@chosun.com
https://naver.me/FPeMietu
金東吉 박사님, 空手來 空手去를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박사님 말씀대로 눈 한번 깜빡했더니 그새 白髮이 되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난 인생, 못난 인생, 있는 者, 없는 者,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민주화 보상금을 거부하신 박사님, 진정 이 민족 이 국가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민주화"로 사골 우려먹듯 평생을 자랑질하며 사는 인간들도 있는데 "민주화 운동했으면됐지 보상은 무슨보상.......?"
그래서 박사님은 진정 '큰그릇' 입니다.
이제 하늘의 별이 되신 박사님.......대한민국은 또 한 분 "어른"을 잃었습니다.
어제는 거짓말 오늘은 패악질 내일도 분탕질만 일삼는 무리들이 들끓는 나라에 우리는 국가의 진정한 어른을 보냈습니다.
우주의 한 티끌에 생명을 담아 地球라는 點에서 반짝거리다가 가는 삶,
무엇이 그리 대단하길래 권력을 쥐고 惡行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토마스 칼라일은 외쳤습니다.
"하나의 삶은 두 永劫 사이에 끼인 덧없는 閃光이다........."
자신이 섬광인 줄 모르는 인간들은 오늘도 영원히 살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삼가 박사님의 冥福을 빕니다. -竹齋-
@위트컴(Whitcomb) 묘역(墓域)의 일곱 송이 장미☆
전쟁으로 폐허된 이 땅에서 구호와 재건을 이끈 美軍장성의 휴머니즘을 기립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은 1,023일간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됩니다.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폭탄은 피했지만 난리통까지는 벗어나진
못했었습니다.
전쟁발발 이틀 뒤인1950년 6월 27일 저녁 장교 한 명이 부산시청을 찾아와 군인가족을 위한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
했습니다.
6.25발발이후 거의 매일같이 새벽 5시만 되면 부산역은 열차편으로 도착하는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부산은 해방 직후 해외동포들과 피난민이 밀려들면서 인구 폭발을 경험합니다. 한껏 해야 28만 명 정도였는데 전쟁 막바지에 부산은 인구 100만 명의 도시가 됩니다.
이 어지럽던 시기 미군 수사령관으로 부산에 온 미국 장성이 있었습니다.리처드 위트컴 (1894~1982 Richard S. Whitcomb)!.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육군보병 장교로 참전했고, 2차 대전 때엔 노르망디 상륙작전 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전투에 투입됐었는데 미국이 환갑이 다 된 그를 한국전쟁에 소환한 것은 장기전에 지친 유엔군에게 군수물자를 원활히 보급해 전투력을 보강하고,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불산이라는 부산에서 대화재로 인한 참사를 목격합니다.
1953년 11월 27일 저녁 부산 영주동 판자촌에서 발생한 불이 시속 11.8㎞의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주택 3,132채 소실.
이재민만 3만 명에 달했습니다.
현장을 둘러본 위트컴은 사령관 직권으로 군수물자를 풉니다.
추위에 갈 곳 없는 시민들을 위해 천막을 치고 침구류와 옷과 식량을 나눠주었습니다.상부의 허가를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알았습니다.
법적으론 군수물자 무단 전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미 하원 청문회에 서게 된 위트컴, 여기서 대반전이 이뤄집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의 진정한 승리는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입니다
(War is not done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
이 말에 워싱턴 의사당에서 기립박수가 터졌습니다. 그 후 그는 더 많은 구호품을 안고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도를 시찰하던 중 보리밭에서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 산모를 보고 병원 건립을 추진합니다.
부대원 봉급의 1%와 각종 모금활동으로 그렇게 탄생한 게 ''메리놀병원.''입니다
윤인구 초대 부산대총장이 서구 충무동 단과대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종(鐘) 모양의 캠퍼스 배치도를 들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겠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위트컴은
"당신의 꿈을 내가 사겠다."며 이승만 대통령과 경남지사를 설득해 장전동에 50만평 용지를 확보해줬습니다.
공사는 한국민사원조처(KCAC)프로그램을 통해 원조. 미국공병대를 동원해 도로 개설. 그래서 생긴 캠퍼스가 부산대학교 장전동캠퍼스입니다.
''밴 플리트''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면 ''위트컴''은 전후 재건(再建)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전역 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 한구석에 돌덩이 같은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장진호에서 전사한 미 해병 1사단 병사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작업을 같이할 33세 연하의 파트너를 만나게 되는데.
그분이 '한묘숙 (1927~2017).
한묘숙씨가 천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보육시설법인 익선원(益善園)을 운영하고 있을 때 장군님을 만나 고아원등 사회사업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자주 오셨고 그러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한묘숙 여사의 언니는 여류소설가 한무숙 씨며,
동생 역시 소설가 한말숙으로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아내입니다.
여러 차례 중국과 북한을 넘나든 탓에 박철언이 '정체불명의 여인'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분이십니다.
위트컴은 사재와 연금을 모두 털어넣었고. 한남동 13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부인이 베이징에서 북한 측 인사를 비밀리에 만나 유골송환 작업을 진행하던 1982년 7월 12일 위트컴 장군은 용산 미8군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하십니다.
그리곤 유언에 따라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금년 7월이 운명하신지 40주기 되는 날입니다.
향나무로 단장된 13만4000㎡의 유엔기념공원엔 한국전쟁의 희생자 총 2,315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습니다.
위트컴은 여기에 묻힌 유일(唯一)한 장군(將軍)이십니다.
남들과 똑같은 크기의 묘석(墓石)!
금년 40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찾은 그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옆에 철 지나 시들어 버린 장미꽃 일곱 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쩌다 은혜도 헌신도 잊어가는 국민이 되지는 않았을까.
되돌아볼 일입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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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 to Mrs. Hahn:
깊은 감동입니다.
인간에 대한 진실하고 깊은 사랑이 그를 그토록 큰 폭의 인물로 승화시킨 것 같아요. 그는 진정한 군인(軍人)이었고 소설에 등장할 만한 박애주의(博愛主義)자입니다.
6.25에 연관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미국인들의 숨겨진 미담(美談)들을 접하면서 미국인들의 그런 사랑은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몸에 밴 기독교(基督敎) 정신일 것 같아요.
옮긴글 [ 상 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