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74〉“산이 흙을 주었으니 어찌 편히 지내리오”
산의 주인장은 산색(山色)을 닮는다
부처님과 조사들도 진흙을 밟으셨는데
어찌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겠는가
몇 년 전 신라말 고려초에 개산(開山)한 선종 사찰(구산선문)을 홀로 탐방했는데, 가장 마음에 든 도량은 충남 보령에 위치한 성주사이다. 현재는 사지(寺址)로 남아 있지만, 이 도량은 산골에 위치하면서도 산세가 험악하지 않은 온화한 풍광이다. 산문 앞에는 큰 도랑이 흐르고, 병풍 같은 푸른 나무들이 아담하게 둘러쳐져 있다. 게다가 이 사찰은 굴곡이나 계단이 없는 평지로, 그 옛날에 수많은 출가자들을 품었을 산색이다.
이 성주사를 개산(開山)한 선사는 낭혜무염(朗慧無染, 800~857)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성주사의 산색이나 풍광이 무염 선사의 이미지와 닮았다. 무염은 태종무열왕 8세손인 진골 출신으로 13세에 설악산에 출가해 <능가경>과 <화엄경>을 공부하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에서 당시 유명한 선사인 불광여만(佛光如滿, 마조의 제자)을 만났고, 마곡보철(麻谷寶徹, 마조의 제자) 문하에 머물러 그로부터 법을 얻었다. 보철이 입적하자, 무염은 천하를 유행하였다. 스님은 행각하면서 병든 사람을 만나면 치료해주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보시행을 하여 그곳 사람들로부터 ‘동방의 대보살’이라 칭송받았다.
무염은 24년 만에 신라에 귀국해 충남 보령에 성주산문을 개산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무염은 제자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도가 어찌 너희에게서 멀리 있겠느냐. 저 사람이 마신 물이 나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저 사람이 먹은 음식이 나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법이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힘을 다해 스스로 먹고 마시려 하지 않는가?”
한번쯤 이 시대 사문에게 귀감이 될 내용이라고 본다. 나말여초에 산문이 우후죽순처럼 지방을 배경으로 개산되었는데, 사학자들은 ‘지방 호족들의 정치 근거지’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성주산문의 무염이나 가지산문의 도의, 사굴산문의 범일 등을 볼 때 이들의 수행정진력이 투철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공부를 한 햇수만 해도 20~30여년이다. 나말여초 선사들을 정치권력과 연결시켜 그들의 수행력을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염에 관한 기록에는 한결같이 온화한 이미지로 선사를 묘사하고 있다. 무염은 늘 얼굴에 화기가 넘쳤으며, 젊은이든 노년이든 귀천과 빈부를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함으로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또 대중공양이 들어오면, 대중과 똑같이 식사를 하였고, 방장이라고 비단 가사를 수하지 않았으며, 승복도 똑같은 것을 입었다.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빈하기로 알려져 있다. 로마 교황청의 신부님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프란치스코가 교황된 이후로 일감이 많이 줄었는데, 교황부터 헌옷을 입는지라 보좌하는 신부들조차 새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불교계를 대표하는 어느 스님이 모시 장삼을 입고 방송에 등장하니, 재가인들이 ‘잠자리 옷’이라며 비판한 적이 있었다. 법랍이 조금만 높으면 고가의 승복을 입으려고 하는데, 한번쯤 청빈함을 되새겨봐야 할 일이다.
또한 무염은 당우를 새로 짓거나 보수를 할 때도 대중과 똑같이 울력을 하셨다. 대중들이 선사에게 ‘자신들이 일을 할 터이니 방에서 쉴 것’을 권하면, 선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과 조사들께서도 맨발로 진흙을 밟으셨는데, 내가 어찌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겠는가?” 무염은 이렇게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까지 몸소 나서서 친히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산이 나를 위해 흙을 주었으니 내가 어찌 편히 지내리오.”
선사는 당신의 삿된 욕심을 채우려거나 명예를 위한 안위가 없었다. 당신보다는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산문의 방장이었다. 무염의 대중을 위한 배려심과 안위가 먼저였기에 무염 문하에 머물렀던 대중이 2000여 명이었으니, 선사의 지혜와 덕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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