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24. 대장경의 간행
'불변의 진리'를 영원히 받들어 수록하다
사진설명 : <개보장> 대반야바라밀다경 권제206의 권말
① 대장경이란 ?
대장경이란 말은 인도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불교의 전적을 가리켜 〈삼장(三藏)〉이라고 했는데 경장, 율장, 논장을 말한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동한 시기부터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 사람들은 삼장에 대해 중경(衆經), 일체경(一切經)이라고 불렀다.
남북조 시기, 중국에서는 〈장경〉이란 말이 생겼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처음으로 대장경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수나라 관정(灌頂)이 쓴 〈수천태지자대사별전(隋天台智者大師別傳)〉에서였다.
‘대(大)’는 불교 전적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불교의 모든 경전을 빠짐없이 수록한다는 뜻이다.
‘장(藏)’은 산스크리트어의 광주리를 한문으로 번역한 말로 고대 인도의 승인들은 패엽경을 광주리에 넣어 보관했다. 중국의 승려들은 보관한다는 뜻을 빌어 불교 전적의 일체를 담는 것을 가리켰다.
‘경(經)’은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말이다. 원래는 실로 꽃잎을 꿰맨다는 뜻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영원히 받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말로 번역된 ‘경’은 ‘불변의 진리’라는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다. 요컨대 〈대장경〉은 불교 전적의 일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宋태조 칙명으로 ‘본장’ 나온 뒤 ‘속간’ 10여차례
남방 평정후 시작…민심 회유 위한 점령정책 일환
② 북송 〈개보장〉의 간행
육조(六朝)의 말기 양진시대(梁陳時代)부터 대장경이 통행하게 된 이래, 수당(隋唐)을 거쳐 오대(五代) 말에 이르기까지는 오로지 사본(寫本)으로 세상에 유통되었지만 송나라 이후는 전장(全藏)이 간본(刊本)으로 유통하게 되었다. 최초의 개판(開版)은 송 태조에 의해 기획되었던 〈개보장(開寶藏)〉이다.
이후 10여 차례 계속적으로 대장경이 간행되었는데 그 최초의 것은 복주동선등각원(福州東禪等覺院)의 대장경인데 신종 원풍 3년(1080)에 시작되어 휘종 정화 2년(1112)에 완성되었고, 숭녕 2년(1103)에 칙명으로 〈숭녕만수대장(崇寧萬壽大藏)〉으로 칭하게 되었다.
〈개보장〉은 중국에서 개보 4년(971)에 조조(雕造)되기 시작하여 태평흥국 8년(971)에 완성된 13만여 판의 5040여 권 480질에 해당되는 본장(本藏)과 이후 지속적으로 간행된 속간(續刊)을 포함한 북송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개보 4년(971)에 칙명으로 조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개보장(開寶藏)〉 등으로 불리며, 또한 옛 촉(蜀) 지역이었던 익주(益州, 지금 사천의 성도)에서 조조되었기 때문에 〈촉본대장경(蜀本大藏經)〉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개보장〉의 저본은 〈개원석교록.입장록(開元釋敎錄.入藏錄)〉에 의거하여 편찬된 관본(官本)〈개원록장(開元錄藏)〉을 바탕으로 하고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익주(益州)의 어느 필사(筆寫) 대장경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조역대통재.석씨계고략(佛祖歷代通載.釋氏稽古略)〉에 의하면 개보 원년 9월27일에 성도부(成都府)에 조서에 따라 금은자불경(金銀字佛經) 각 일장(一藏)을 사성(寫成)하게 하고, 병부시랑 유희고(劉熙古)에 칙명으로 이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더욱이 개보4년 6월11일 성도부에 조서를 내려 또 다시 금은자불경을 만들게 했다.
사진설명 : <개보장> 불설아유월치차경 권상의 권말
즉 성도에서는 먼저 사본 대장경이 만들어지고 그 후에 간본 대장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송 태조가 몇 번이나 대장경을 만들게 한 것은 〈석씨계고략〉에 “군사를 동원하여 열국(列國)을 평정했다”고 기록된 것과 같이 남방제국(南方諸國)을 평정한 이후에 시작한 사업이며 원래 송조(宋朝)가 인심회유를 목표로 행한 점령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즉 사천(四川)에 근거하고 있는 후촉(後蜀)을 정복한 것은 건덕 3년(965) 4월이고, 금은자불경을 만든 것은 2년 전의 일이었다.
대장경의 형태, 즉 판식(版式)에 대해서 말하자면, 최초의 관판인 〈개보장〉은 1지(紙) 23행(行) 14자(字)의 형태인 권자본(卷子本)으로 장정(裝幀)되었다. 복주(福州)의 〈숭녕만수대장〉에 이르러서는 1지(紙) 30행(行) 17자(字)의 형태인 절첩장(切疊裝)으로 바뀌었는데 이후의 대장경은 모두 이 체제를 답습하고 있다.
간본 대장경의 효시인 〈개보장〉은 천 여 년이 지난 지금에는 거의 모두 인멸되었고 현존하고 있는 것은 묘법연화경 권제7, 대반야바라밀다경 권제581, 대반야바라밀다경 권제206, 대운경청우품 권제64, 불설아유월치차경 권상, 중론 권제2, 잡아함경 권제30, 잡아함경 권제39, 불본행집경 권제19, 대방등대집경 권제43, 불본행집경 권제19, 십송니율 권제46, 대방광불화엄경 권제1, 용수보살권계왕송 1권, 소실지공양법 1권, 어제비장전 권제13 등 10 여 종에 불과한 상황이다.
궁극적으로 〈개보장〉은 고려와 거란에 전래되었고, 이후 고려와 거란에서 각각의 간본 대장경을 조성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하겠다.
본장 480질-속간 1000여 권
③ 〈개보장〉의 구성
주지하듯이 〈개보장〉은 5040여 권 480질에 해당되는 본장(本藏)과 이후 지속적으로 간행된 속간(續刊)으로 구성된다. 먼저 본장(本藏)은 천(天) 질(帙)부터 영(英) 질(帙)까지 480질인데, 경(經), 율(律), 론(論), 성현전기록(聖賢傳記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으로 속간(續刊)은 일차적으로 함평(咸平) 원년(998) 운승(雲勝)의 요청으로 함평 초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에는 1000여 권의 불전이 속간되었는데, 〈개원록〉에 수록되지 않은 정원록장(貞元錄藏)의 경전 및 송대(宋代) 4명의 삼장(三藏)이 한역한 송신역경(宋新譯經) 그리고 어제(御製)와 삼장의 집전(集傳) 등이다. 이후 대중상부(大中祥符)∼정화(政和) 연간에도 당시에 한역된 신역경 및 불전들이 지속적으로 속간되어 〈개보장〉에 편입되었다.
‘재조대장경’ 해인사 현존
본문 정확성 세계서 공인
④ 고려와 거란의 대장경
고려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대장경이 조조되었는데 이른바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이다. 초조는 일반적으로 고려 현종 2년(1011)부터 선종 4년(1087)까지 조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재조는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조조되어 그 경판이 현재까지 해인사에 남아 있다.
〈거란대장경〉은 요 흥종의 중희 연간(1032∼1054)에 그 간행이 시작되어, 도종의 청녕 5년(1059) 이전에 이미 5048권에 이르는 대장의 조조가 완료되었고, 이후 계속 증수되어 도종의 함옹 연간(1065∼1074)에 이르러서 579질의 경판이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거란대장경〉은 고려 〈초조대장경〉의 간행시기(1011∼1087)보다 24년 앞선 해인 문종 17년(1063) 처음으로 고려에 전래된 이후 문종 26년(1072), 숙종 4년(1099), 예종 2년(1107) 등 여러 차례 도입되었다.
하지만 북송과 거란의 대장경은 겨우 10여 권만이 각각 남아 있고,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100여 권 정도가 잔존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완전하게 전존되고 있는 것은 고려의 〈재조대장경〉뿐이고, 또한 이 〈재조대장경〉 본문의 정확성은 후대의 어느 대장경보다 우수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명치 연간에 〈축쇄장경〉을 간행할 때, 그리고 대정 연간에 〈대정신수대장경〉을 편찬할 때 모두 우리의 〈재조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류부현/ 대진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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