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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모리아산에 세워진 성전/대하 3:1-2
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2. 솔로몬이 왕위에 나아간지 사년 이월 초이일에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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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안효관목사
고린도전서 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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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사모하듯이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은 그들의 안식처요, 상한 심령이 치료받는 곳이요, 꿈을 꾸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행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이고, 기뻐서 감격어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올라갈 때 마치 천국에 올라가는 것처럼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고백시 가운데서 성전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기만 해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렇게 사모하던 성전에 올라가자고 하자 너무너무 기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문지기로 단 하루를 살아도 그게 다른 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건 비단 한 시인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그렇게 사모했고, 그래서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야 하는 율법의 의무를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흔히 성전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 교회는 성전이 아닙니다. 교회당(예배당)과 성전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전인 것처럼 생각함으로 생겨난 엄청난 신앙적인 오류들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교회당 건축에서 발생합니다.
교회를 성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당을 지을 때에 솔로몬의 성전처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에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최고급 자재를 지었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이 이미 준비한 건축자금이 있었고, 거기에다가 레바논 백향목을 가져다가 성전을 짓고 온갖 금은보석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들이 예배당 건물이 마치 구약의 성전이나 되는 것처럼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가면서 화려한 예배당을 짓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라고 하면 예배당을 아름답게 짓고 싶은 마음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세의 역사를 교훈 삼아야 합니다.
중세기의 교회들이 사람에는 관심이 없고 화려한 건물 짓는 데만 온 정열을 다 쏟았습니다. 그 결과 유럽 곳곳에는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화려한 예배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웅장한 자태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탄성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베드로 성당은 가로 길이가 115m이고, 세로 길이가 199m나 됩니다.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큽니다. 돔의 높이가 119m나 되고, 건물 내부가 7,000평이나 됩니다. 내부는 얼마나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지 저는 실제의 모습을 보진 않았지만, 보고 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입이 딱 벌어져 닫혀지지 않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예배당을 위하여 수많은 노예들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엄청난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아야 했습니다. 역사상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중세의 화려한 예배당 건물들은 교회가 부패해지는 온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크게 지은 유럽의 예배당들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고로 쓰이거나 그 예배당을 헐고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중장비들에 의해 높이 세운 십자가가 무참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아 있는 것들은 노인들 2-30명만이 그 커다란 건물의 한쪽 구석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뿐, 관광객을 맞는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배당을 지으면서 성전인 것처럼 생각하고 짓기 때문에 화려하고 크게 지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지어놓은 그곳에서 오직 일주일에 두세 번 예배드리는 것 외에는 늘 문을 닫아 놓습니다. 성전이라고 지어 놓고 예루살렘 성전처럼 너무 거룩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에서 경로대학을 하고 경로대학을 하면서 세상의 노래도 부르는 것은 우리 교인들이 많이 깨어 있는 분들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세상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새로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를 성전으로 짓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만 지으면 되고,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사회에 개방을 해서 언제든지 예배당 건물이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예배당이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 예배드릴 장소가 필요해서 예배당을 짓는다면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장소가 우리 교인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좁다면 몰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가 예배드리기에 비좁아 예배를 드리지 못할 처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여러 가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하겠기에 예배당을 짓고 싶어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런 좀더 큰 비전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여름 미국 세미나에 갖다 오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몇 개 교회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본 것 가운데 두 개의 교회는 굉장히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대부분 몇 천 명씩 모이는 대형 교회였기에 건물은 컸지만, 두 개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건물의 화려함보다는 실용적으로 지어졌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세미나에 참석해서 오랫 동안 머물렀던 ‘윌로 크릭 커뮤니티 처치’라는 교회는 예배당 계단이 철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큰 교회들치고 계단을 철판으로 만든 교회를 보셨습니까?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깔아 놓습니다. 큰 예배당일수록 고급스럽게 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당을 화려하게 지을 때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실용적인 모습으로 짓고 있는 게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크고 화려하게 지어놓고 세상을 향하여 개방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그 큰 교회당을 보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나라가 경제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교회만은 세상의 아픔을 외면한 채 대궐 같은 집을 지어놓고 자기들만의 잔치를 한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너희들만의 종교’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역사적인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구요. 저는 종종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 이몽룡이 사또 앞에서 지어부른 뼈아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사또인 변학도 앞에서 어사 이몽룡은 이런 시를 지어 부릅니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金樽美酒千人血 玉般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우리가 지을 성전은 따로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이 거룩함이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아성을 쌓았던 예루살렘 성전이 헐려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성전 말고 당신의 계획에 맞는 새로운 성전을 짓지를 원하셨습니다. 그 성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2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는 말씀의 첫 부분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은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그 장소가 우리에게 주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기를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전을 짓되 우리도 우리 영혼의 모리아산에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모리아산이 어떤 곳입니까? 모리아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던 곳입니다.
첫 번째 사건이 창세기 22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이삭에게 번제에 쓰일 장작을 지게 하고는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모리아산 올라간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고는 칼을 뽑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제지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받으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기를 원하셨을 뿐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귀엽고 사랑했겠습니까? 우리말 속담에도 있는 것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나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네 행동으로 보이라’고 모리아산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함으로써 아들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런 사랑과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칼을 뽑아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멈추게 하시고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여러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신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건축해야 할 성전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자리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을 보여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지배하는 수전노의 자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브라함처럼 자식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말씀들)을 지키고 계십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주일성수를 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소득의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 3:17)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인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고, 그 사랑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자리,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으로 드러나는 자리, 바로 그곳이 우리의 몸으로 짓는 거룩한 성전이 지어가는 자리입니다.
두 번째로 모리아산은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자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이 말씀의 사건이 역대상 21장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궁을 차지하고 있어서 7년 반 동안이나 헤브론에서 반쪽짜리 왕으로 있어야 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모든 힘든 과정을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어 지켜주신다는 믿음 하나로 지탱해 왔습니다.
그런 모든 어려움과 역경의 세월이 끝나고 드디어 다윗의 통치에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통일되고 왕권이 안정을 찾게 되자 다윗의 마음에 교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수를 계수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구를 조사한다는 것은 지금 내 나라가 얼마나 군사적으로 막강한지를 점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라를 다스려야 할텐데 자신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의지하려는 그의 교만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일은 하나님께 죄가 되었고, 다윗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다윗의 그 범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온 땅에 3일 동안 온역이 전국을 휩쓸게 되었습니다. ‘온역’이라면 유행성 열병을 말합니다. 그 온역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회개했고, 회개한 다윗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던 사자를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멈추어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 오르난에게서 그 타작마당을 사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바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모리아산이었습니다. 예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모리아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던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자리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곳입니다.
여러분, 죄인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게 된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던 인생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만든 곳이 바로 골고다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진노를 받아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거룩한 성전이 지어져가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십자가를 붙들어야 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한 주님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온전하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해줍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으로 우리 안에 거룩한 성전을 지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심으로 진노의 자리가 변하여 거룩한 성전의 터전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지어져가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하나 중요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가야 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함으로 거룩해져가야 하는데, 반대로 죄로 인해서 더럽혀지면 아무리 거룩한 성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겠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어놓은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서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곁에 두고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만들자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을 빌어 그 성전을 헐어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헤롯 성전도 마찬가지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외면하더니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또 한번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던 모리아산에는 지금 회교사원이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이 세워진 거룩한 장소였던 바로 그 자리에 이슬람교에서 자기들의 사원을 건축한 것입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 했던 사람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다가 ‘바위 사원’(Dome of the rock)이라고 불리우는 거창한 사원을 세워놓고, 공개적으로 유대교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현실입니까?
가장 성스러워야 할 곳에 가장 치욕적인 회교사원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죽인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날 가장 거룩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예배당입니까?
아닙니다.
예배당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된다면 우리가 있는 그 곳이 거룩한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 건물도 교회 밖의 다른 어떤 건물과 다를 바가 없는 허름한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깊이 사랑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간다면,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마음,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좋은 계절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심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거하실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축복된 생애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